소설리스트

156. 안전지대는 없다 (1) (156/449)


156. 안전지대는 없다 (1)
2022.0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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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드드드득―

흙먼지와 함께 떨어진 돌 조각이 바닥을 때린다.

헉, 진우는 숨을 삼키며 급하게 개머리판을 어깨에 댔다. 시선은 자연스럽게 돌 조각이 떨어져 내린 방향으로 향한다.

나무 사이에서 모습을 드러낸 좀비 두 마리가 10여 미터의 낭떠러지 아래로 망설임 없이 몸을 날렸다. 아니,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팔다리를 휘저으며 추락했다.

그롸아악―!

요란한 포효와 함께 땅바닥에 처박힌 좀비들의 뼈 부러지는 소리가 끔찍한 메아리를 만들어냈다.

진우의 고개는 재빠르게 위아래를 번갈아 훑었다.

두 놈이 단가? 혹시 더 있나?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좀비들은 꺾이고 부러진 팔다리로 꾸역꾸역 잘도 일어난다.

그러고는 택배 아저씨를 반기는 듯한 기세로 진우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롸아아―

놈들의 아가리가 쫙 벌어지며 더러운 타액이 사방으로 튀었다.

탕― 탕―

진우는 망설임 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잇달아 발사된 두 발의 총알에 좀비들은 크롸악―! 하는 짧은 단말마와 함께 고개가 뒤로 꺾이며 나가떨어졌다.

타아아아아앙―

총성의 메아리가 고요하던 산길 전체를 쩌렁쩌렁 울리며 길게 여운을 남긴다. 놀란 산새들이 여기저기서 푸드덕대며 날아오르자 숲 전체가 흔들리는 것 같다.

“하아~ 하아~”

그 엄청난 압박에 진우의 심장도 덩달아 뛰는 속도를 올린다. 숨이 차오른다. 중심을 뒤로 둔 채 사방을 훑던 진우는 한참이 지난 후에야 겨우 악물었던 어금니에서 힘을 뺄 수 있었다.

더 이상 뛰어내리는 좀비는 없다. 두 마리가 전부였나 보다.

푸우우~ 진우는 거친 숨을 몰아쉬고 고꾸라진 채 움직이지 않는 좀비들의 시체에 다가갔다.

세련된 정장에 스타킹. 하이힐은 어딘가에서 잃어버린 모양이다. 또 한 마리가 입고 있는 티셔츠 가슴팍에는 카지노 마크가 찍혀 있다. 복장으로 보자면 이 근처 주민이 변한 건 아니었다.

“다들 왜 이렇게 몰려오는 거야……. 여기 뭐 먹을 게 있다고……. 어, 이거 뭐지?”

흰 눈을 홉뜬 채 움직이지 않는 좀비들의 얼굴을 살피며 혼잣말을 하던 진우가 주춤한다.

구멍이 난 자리가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분명 그는 눈과 눈 사이를 겨누고 쐈다. 그런데 정작 총알이 관통한 곳은 그보다 꽤 오른쪽으로 치우친 자리다.

이런 경험은 처음이었다. 목표했던 곳에 총알이 박히지 않았다.

그것도 멈춰 선 채 자세를 갖추고 쏘았는데……. 그건 어지간히 당황스러운 경험이었다. 진우는 솟아난 진땀을 닦고, 아직 화약 냄새가 가시지 않은 K―2의 총구를 걱정스럽게 내려다봤다.

“너, 왜 이래…….”

***

같은 시각, 보안관 일행은 택배 트럭에서 가져온 물건들을 선로 위로 끌어 올리는 중이었다.

“으아! 곰팡이 냄새! 씨발, 이런 거는 잘 좀 털고 가지고 올 것이지! 콜록!”

박스를 옮기다가 파랗게 핀 곰팡이 가루를 들이마신 신입이 기겁을 하며 쿨럭댔다.

그의 말이 완전한 엄살이라고 할 수 없을 만큼, 택배 트럭 안에는 꽤 많은 것들이 썩어 있었다. 복숭아, 오렌지 같은 과일부터 인터넷으로 판매된 반찬과 고기, 소시지 따위까지.

아무리 냉장 팩을 넣고 튼튼히 포장을 했어도 이 더운 여름날에 12일이 넘도록 방치된 박스에서는 심한 악취가 스멀스멀 흘러나왔다.

스티로폼 밀봉 박스는 좀 나은데, 썩은 물이 뚝뚝 떨어지는 종이 박스를 치우는 일도 보통 고역이 아니다.

부패하다 못해 파랗게 곰팡이가 피어오른 박스를 트럭 밖으로 내던져 버리고 나면 몇 번씩이나 헛구역질과 기침을 한 이후에야 다시 숨을 쉴 수 있을 지경이니까.

하지만 그 정도의 사소한 훼방쯤은 전혀 신경이 쓰이지 않을 만큼 보물 탐험의 즐거움은 컸다.

문명의 시대에는 요긴했을 테지만 지금은 별로 쓸모없게 된 것들 사이에서 라면, 과자, 음료수 박스가 발견될 때마다 보안관과 제니는 환호성을 지르며 손바닥을 마주쳤다.

그리고 그것들을 자동차에 나눠 담아 이곳 선로에까지 끌어왔다.

“하아~ 이렇게 한참 일을 했는데도 멀었어? 조그만 트럭에 뭐가 그렇게 많아? 어지간히도 실었네, 젠장.”

빨랫줄로 묶어 박스를 끌어 올리던 신입이 허리를 펴지도 못하며 투덜거렸다. 그의 티셔츠와 두 팔은 먼지와 땀으로 범벅이 된 채다.

선로 위의 지글거리는 더위도 그들을 지치게 하는 것에 크게 한몫을 했다. 곁에서 돕던 제니가 시커멓게 때 묻은 장갑으로 코끝에 떨어지는 땀을 훔치며 대답했다.

“다 끝나가네요. 에이, 마지막에 엄살떨지 않았으면 더 멋있어 보였을 텐데.”

멋있다는 말에 신입은 억지로라도 몸을 곧게 세워보려 하지만, 반복되는 노동에 지친 몸은 여기저기가 쑤셔서 견딜 수가 없다.

아야야, 앓는 소리를 내뱉어가며 그는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하소연을 한다.

“어휴, 몇 번을 말해야 돼. 난 얘들처럼 노가다 뛰던 사람이 아니라고. 난 공부만 하던 학생이었어.”

“시끄러, 인마. 옛날에 뭐였든 간에 이제는 다 부지런히 몸을 움직여야 살아남는 꿈이라도 꿔볼 수 있어. 그러니까 그런 핑계 대지 말고 이거나 받아.”

마지막 박스 두 개를 건네며 보안관이 말했다. 신입은 한숨을 푹푹 내쉬며 박스를 옆으로 옮겼다.

젠장, 일을 시키려면 담배라도 좀 피우게 해주든가.

“이불 나왔어?”

아래에서 막 기어 올라온 유빈이 물었다. 보안관은 길쭉한 박스를 가리켰다.

“이불은 없었고, 커튼은 봤어. 저거. 아, 그리고 모기장이 있더라.”

“하나가 다야? 으, 더 있었으면 좋았을걸…….”

유빈은 서둘러 박스를 뜯었다. 차곡차곡 접힌 얇은 홑겹 흰색 커튼이 세 개로 분리된 커튼 봉에 둘둘 말려 있었다. 커튼 봉의 길이로 미루어 볼 때, 중대형 이상급 아파트 거실용으로 만들어진, 꽤나 긴 모델이었다.

하지만 그래봐야 하나 가지고는 여전히 턱없이 부족했다. 그리고 워낙에 얇아서 햇볕을 제대로 가려줄 수 있는지도 의문이었다.

“그걸 뭘 주무르고 앉아 있냐? 이런 상황에서 커튼이 대체 다 무슨 소용이야?”

커튼을 만지고 있는 유빈에게 신입이 물었다.

“그거야 뭐, 당연히 햇볕을 가리려는 거지. 이렇게…….”

유빈은 아직 펴지 않은 커튼을 들어 머리 위에 드리우는 시늉을 했다. 암만 안전이 제일 중요하다고는 하지만, 하루 종일 직사광선이 내리쬐는 선로에서는 도저히 버티지 못한다.

오늘 해가 지기 전에 적어도 몇 평 정도는 그늘을 만들어둬야 내일 이른 시간부터 닥쳐올 더위를 그나마 물리칠 수 있을 것이다.

완전히 지쳐 버린 신입은 바닥에 주저앉아 물을 벌컥거리며 건성으로 투덜댔다.

“그게 고정이나 되겠냐? 바람 한 번만 세게 불면 다 날아가 버릴 텐데…….”

“꿰매면 되지.”

“꿰맨다고? 바늘이랑 실 같은 것도 없어.”

“아, 표현은 그렇게 했지만, 사실은 철사 같은 걸로 대충 꿰서 연결만 하는 거야. 어차피 단단히 고정시키기만 하면 되니까, 차라리 그게 더 편해. 시간도 적게 걸릴 테고.”

“철사는 또 어디서 나는데?”

“그거야 사방에 널렸지. 철책에서 뜯어내도 되잖아.”

유빈은 보안관과 함께 차례차례 박스를 열며 대답했다. 성질 급한 보안관이 힘으로 박스를 아예 찢어발기려 들자 유빈이 다급하게 말린다.

“아니, 아니! 박스도 필요해! 그러니까 웬만하면 테이프만 뜯어줘. 박스라도 겹쳐서 깔아야 잘 수 있어. 온통 자갈밭이라.”

유빈은 한술 더 떠서 박스 안에서 나오는 뽁뽁이 비닐 같은 것도 모두 챙기려 들었다. 물을 마시고 있던 제니가 곁에 앉은 삼식이에게 귀엣말을 했다.

“하하, 완전히 잔소리꾼 시엄마가 따로 없네요, 저 오빠는.”

삼식이도 히죽거리며 맞장구를 쳤다.

“그냥 시엄마가 아니고, 막장 드라마에나 나오는 악질 시엄마급이지. 그나저나 정말 택배라는 게 저렇게 많은 물건들을 실어 나르는 거였구나. 저러니까 동네 가게마다 전부 장사가 안 돼서 결국은 문을 닫는 거야.”

“네?”

갑자기 정색을 하고 진지한 소리를 뱉어내는 삼식이에게 제니가 고개를 돌렸다.

아니, 아니, 삼식이는 손사래를 치며 신경 쓰지 말라는 시늉을 했다. 장사가 되든 안 되든 이제는 다 지나간 이야기일 뿐, 지금 그들에게 중요한 건 앞으로 가능한 한 많은 택배 트럭을 이 길 위에서 만나 털어오는 일이다.

“이것 봐! 이런 거면 충분히 깔고 잘 수 있다니까? 어때? 그렇지? 바닥에 튀어나온 거 잘 못 느끼겠지? 이건 가벼워서 선로 위로 올릴 때 힘도 안 들어.”

유빈은 종이 박스 사이에 뽁뽁이 채운 것을 보안관에게 깔고 앉아보게 하면서 그 유용함을 열심히 역설하고 있었다.
그런가? 조금 불편한 것 같기도 한데…….

보안관은 자세를 바꿔가며 고개를 갸웃거린다. 앞으로 몇 시간 내에 극적인 변화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저것이 오늘 밤 그들의 공식 침대가 되어줄 모양이다.

곁눈질로 유빈과 보안관이 하는 짓을 힐끔거리던 삼식이가 씁쓸하게 웃었다.

“복지 센터에서 스티로폼 깔고 자는 것도 구리다고 생각했는데, 이건 몇 단계 더 아래네……. 궁상이 줄줄 흐른다, 정말. 그나저나 커튼만 만들어 걸면 오늘 일은 끝이야?”

“대충 잠자리 만들었고 먹을 것 챙겼으니까, 이젠 더 멀리까지 나가봐야지. 주변에 뭐가 있는지 대충은 알아놓지 않으면 뒤통수가 서늘해서 영 잠도 안 올 것 같거든.”

유빈의 말을 들은 신입이 억울하다는 듯 물었다.

“뭐? 왜 뒤통수가 서늘해? 여기는 안전하다며? 그래서 기를 쓰고 기어 올라온 거잖아?”

“그거야…… 비교적 안전하다는 거지. 지금 세상에 백 퍼센트 안전한 곳이 어디 있겠어? 물 마시고 준비해.”

유빈은 과자 한 봉지를 박스에서 꺼내 우물거리며 아무렇지도 않게 대꾸했다.

끄응차~

보안관은 다시 해머를 잡았고, 삼식이는 머리에 쓰는 라이트부터 챙겼다. 제니도 기지개를 쭉 켜며 준비가 되었음을 알렸다.
어쩔까…….

신입은 빠르게 계산을 했다.

피곤하다. 귀찮다. 게다가 무섭기도 하다. 마음 같아서는 너희들끼리 다녀오라고 한 다음, 여기 이 박스 쪼가리 위에나마 누워서 과자를 우물거리고 음료수를 마시며 쉬고 싶다.

그러나 여기는 복지 센터가 아니다. 단단한 콘크리트 건물이 지켜주는, 2층의 독립된 요새가 아니라는 의미다. 뻥 뚫린 길 양쪽 중 한 군데에서 언제 좀비가 쑥 모습을 드러낸다고 해도 하나도 이상할 게 없다.

“에이, 진짜!”

신입은 애꿎은 물병을 화풀이 삼아 멀리 집어 던지고는 배낭을 잡아 들었다.

“어느 쪽으로 먼저 갈 거야? 이쪽으로 가면 남서쪽, 이리로 가면 북동쪽이야. 으음, 바람은 편서풍인가?”

삼식이가 아웃도어 매장에서 챙겨 가지고 온 조그만 나침반을 힐끔거리며 전문가 흉내를 냈다.

“남쪽. 무조건 남쪽이지.”

유빈이 대답했다. 그야 사실 물어볼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이 선로가 어느 방향으로 뻗은 것인지는 모르지만, 그들이 가고 싶은 목표는 한강 너머 잠실이니까.

갈 수 있는 한 남쪽 방향으로 더 멀리 가야 한다. 다들 그런 걸 알고 있는 터라 별 이견 없이 남서쪽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혹시라도 이걸 따라 쭉 걸어서 강을 건널 수만 있다면 그런 행운이 없을 것이다. 물론 그렇게 일이 쉽게 풀리지는 않을 거라는 걸 유빈도, 친구들도 잘 알고 있었지만.

***

“오, 오 박사님! 여, 여긴 어쩐 일로!”

갑작스레 사무실로 찾아온 오 박사의 얼굴을 본 순간, 신 차장은 심장이 떨어지는 듯했다.

자기도 모르게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정자세를 취하고 선 신 차장은 식은땀을 쏟아내며 동그래진 눈으로 오 박사의 얼굴을 살폈다.

어제 그가 책임자로 있던 시간에 작은 회장의 식사로 제공했다가 죽여 버린 A708756이 항체 보유 남성이었음을 뒤늦게 알게 된 후, 신 차장은 살아 있으면서도 산 것 같지가 않았다.

불안하다. 혹시 어제의 CCTV를 돌려보다가 뭔가 꼬투리라도 찾아낸 것일까?

“뭐겠어? 응? 당신 엉덩이 만지러 왔겠나? 좀 어때? 항체가 생긴 놈들이 있었어?”

책상 위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은 오 박사는 파일을 들고 뒤적였다.

휴우~ 사형선고를 내리러 온 것은 아닌 모양이군. 신 차장은 속으로 한숨을 쉬며 얼굴의 땀을 훔쳤다.

그 짧은 틈을 기다리지 못하고 오 박사는 짜증스런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

“안 들려? 실험체들 어떻게 됐냐고?”

“처치를 한 지 이, 이제 겨우 하루입니다. 아직 여덟 시간도 지나지 않았습니다.”

“흥, 존나게 여유만만이구만. 그렇게 속 터지는 성격인데도 용케 대태양 그룹에서 차장까지 달았군그래. 매뉴얼대로 움직여서 그런가?”

오 박사는 비아냥거리면서도 파일들을 끝까지 모두 살펴봤다.

그가 지시했던 대로 열여섯 명의 실험체에게 A708756으로부터 추출한 체세포와 혈액, 골수, 심지어 신체의 일부를 이식하는 작업은 모두 마무리되어 있다.

한꺼번에 그만한 인원을 모두 처리했으려면 다들 아침부터 땀깨나 뺐을 성싶다. 이제 이식한 부위들이 안정화되는 대로 항체를 가졌는지 여부만 확인해 보면 되었다.

물론 확인해 보는 방법은 아주 간단하고 원시적이다.

놈들을 차례대로 좀비에게 물리도록 하고 다시 응급처치를 한 뒤, 일정한 시간 동안 내버려 둔다. 그렇게 하고 나서도 변하지 않는 실험체가 나온다면, 그때 비로소 제대로 된 항체를 확보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미 죽어서 빳빳하게 굳어버린 A708756의 혈액 샘플과 타액 샘플은 아무리 살펴봐도 특별한 단서를 보여주지 않았다.

좀비의 세균은 죽은 사람의 신체 내에서 전혀 활동하지 않으니, 다시 놈의 몸에 세균을 투여해 본다고 해도 어떤 작용을 거쳐 항체가 만들어지고, 왜 좀비로 변하지 않을 수 있었는지를 알아내는 건 이제 불가능했다.

“젠장!”

A708756이 죽어버렸다는 것에 다시 생각이 미친 오 박사는 자신도 모르게 욕설을 내뱉으며 신 차장을 노려보았다.

이 멍청한 개새끼가 조금만 빨리 낌새를 알아채고 놈을 살려놓았다면, 숨이 붙어 있기만 했다면, 그 미지의 영역에 단번에 닿을 수 있었는데…… 그랬다면 항체를 대량생산하는 것도 꿈이 아니었는데…….

오 박사는 이를 부득 갈며 콧김을 내뿜었다. 그의 표정이 일그러질 때마다 신 차장은 바짝 얼어붙어 미동조차 하지 못하고 그저 덜덜 떨기만 했다.

“이 중에 제일 가능성이 있는 건 누구라고 생각해?”

오 박사는 겨우 감정을 추스르고 신 차장을 향해 물었다. 신 차장은 더욱 움츠러들어 대답했다.

“그게…… 어떤 의견을 제시하기에는 주어진 데이터 값이 너무 적어서…….”

“지랄하고 앉아 있네. 무슨 컨퍼런스에 발표하러 온 줄 아나. 최소한 이 방법은 효과가 있을 거라 기대하고 있는 놈이 하나 정도는 있을 거 아니야. 그런 것도 아니면서 아까운 항체 보유 샘플을 토막 냈어? A708756은 인류의 소중한 자산이나 다름없다고! 그걸 네가 낭비하는 거란 말이야!”

오 박사의 언성이 높아지자 신 차장은 울고 싶어졌다.

어쩌다가 이런 미치광이 밑에서 일을 하게 된 건지…….

애초에 A708756의 손가락이나 발가락을 잘라 하나씩 실험체에 이식해 보라는 아이디어는 너한테서 나온 거잖아!

덕분에 오늘 아침, 열 명의 실험체를 끌어내서 마취시킨 다음 멀쩡한 오른손 손가락과 왼발 발가락을 하나씩 잘라내고 시체의 것을 붙여주었다.

신 차장은 오 박사의 뻔뻔하면서도 냉혹한 얼굴을 향해 마음속으로 욕설과 저주를 퍼부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여전히 자신의 입가에서 비굴한 웃음을 거두어들이지 않은 채, 혀는 아부의 언어를 만들어냈다.

“아, 아무래도 역시 오 박사님 견해를 좇아 신체 이식을 한 쪽이 가장 가능성이 크지 않을까 싶습니다. 안정화가 되고 나면…….”

“내일 아침부터 하나씩 투입해 봐.”

“네, 넷!”

“건성으로 대답하지 말고 똑바로 하는 게 좋을 거야. 무슨 말인지 알아? 정신 바짝 차리라고! 이번 프로젝트에 투입된 실험체만 열여섯이야. 전부 다 아까운 작은 회장의 식사감이자 실험 대상이었단 말이야. 거기에 A708756까지 계산에 넣으면 총 17개체가 소모된 거야. 그렇게 많은 자원을 쓰고서도 아무런 결과물을 산출해 내지 못하면…….”

거기까지 말하고 오 박사는 파일 모서리로 신 차장의 배를 쿡, 쑤셨다.

“……그때는 더 이상 책임이 있네, 없네 하면서 발뺌을 하려고 해도 봐주지 않아. 프로토콜이 보호해 주지 않는다고! 그러니까 목숨이 걸린 일이라 생각하고 진행하라는 말이야!”

“컥, 그, 그렇지만…….”

변명을 하는 것보다 빠르게 오 박사가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커피 잔을 집어 들었다가 탕! 소리가 나도록 내려놓는 바람에 신 차장은 입을 다물었다. 커피가 튀어 근처에 있던 샌드위치 조각을 적셨다.

“이 염천에 시원한 에어컨 바람 쐬면서 콜롬비아산 커피 뜨겁게 마시고, 말랑말랑한 호밀 빵에 햄 조각 끼워 처먹으면서도 못 느끼고 있었나 본데, 내가 직접 일러주지. 요 며칠 태양 그룹이 얼마나 땡기고 있는 줄 알아? 싸구려 찐쌀이랑 허접한 반찬 몇 가지 집어넣고서 방수포장만 한 음식을 소위 위기 대응 식량이라고 해서 한 끼분에 8천 원씩을 받고 국방부에 납품하고 있어. 폴리에스테르 싸구려 운동복은 한 벌에 10만 원씩을 받고 말이지. 우리 회사 발전기가 돌 때마다 평시의 세 배로 요금을 청구해. 남부 지방의 지사에서 지금 하루 3교대로 일하는 사람들은 그러니까 살려둘 가치가 있는 거라고. 그런데 신 차장, 당신은 대체 뭐야? 세상이 발칵 뒤집혔는데 뭣 때문에 당신은 이런 호사를 누리면서 계속 살아가고 있는 거냐고? 그 가치를 증명해야 할 것 아니야? 내 말이 틀려?”

소리를 지르지는 않았지만, 오 박사의 말 한마디, 한마디는 살갗을 뚫고 들어와 박히는 것같이 차갑고 날카로웠다. 신 차장은 굴욕감과 두려움이 뒤섞인, 복잡한 심정이 되어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가 괴로워하는 모습을 찬찬히 훑어보던 오 박사는 사무실에서 나가기 전에 한마디를 더 내뱉었다.

“당신 목숨이라 생각하고 그 샘플들을 쓰란 말이야. 알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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