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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 테라와 제니 (1) (151/449)


151. 테라와 제니 (1)
2022.0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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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

말 그대로 싸늘한 침묵이 외야석 주변을 휘감았다. 여드름쟁이는 침을 꿀꺽 삼켰다.

내가 실수한 건가?

기세 좋게 말을 내뱉었을 때와 달리 여드름쟁이의 등에서는 후회와 긴장의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뭐? 이건 뭐야?”

덩치가 눈을 부라리며 노려보자 위축된 여드름쟁이는 자기도 모르게 한 걸음을 물러났다. 그러고는 곧바로 현실감각을 되찾았다.

지금까지 이들의 이야기에 너무 몰두해 있어서 잠시 잊고 있었지만, 자신은 이 덩치와 같은 멤버가 아니다. 지금껏 말을 섞어본 적도 없는 사이다. 열 명의 시선이 일제히 여드름쟁이에게 집중되었다.

“이 씨발, 뭐냐고? 뭐하는 새끼인데 갑자기 친한 척 끼어들어?”

덩치는 여드름쟁이의 멱살을 움켜쥐며 다그쳤다.

켁, 켁…… 숨이 콱 막힌 여드름쟁이는 풀어보려 용을 쓰지만, 애초에 완력의 수준이 많이 다르다.

“야, 너희들 중에 이 새끼 아는 놈 있어?”

“몰라, 생판 처음 보는 새끼야. 야, 근데 이 씨발, 생각해 보니까 이 새끼가 우리 하는 소리를 다 엿들은 거잖아. 뭐, 이런 개새끼가 다 있지?”

“어, 그러네? 가뜩이나 기분도 엿 같은데, 이 간첩 같은 새끼가 누구한테 뭘 꼰지르려고.”

열 명이 사방을 에워싸고 수군대기 시작하자 여드름쟁이의 등에서는 땀이 솟는다.

공연히 끼어들었다는 후회가 들지만, 이미 늦었다. 덩치의 주먹이 옆구리를 내지르는 것을 신호로 따귀가 사방에서 날아온다. 정강이도 계속 차였다.

“허걱~! 으으윽!”

고통과 두려움에 신음하면서 변명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는 그를 위기에서 구해준 것은 쥐였다.

“야, 잠깐! 잠깐! 좀 있어봐, 이 등신 같은 새끼들아!”

쥐는 덩치와 다른 놈들에게서 여드름쟁이를 떼어내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들의 주위에 있던 입영 대상자들은 이미 멀찍이 떨어진 곳으로 옮겨가 있다.

가뜩이나 가까이하고 싶지 않은 놈들인 데다가 흥분해서 린치까지 시작되려는 참이었으니, 당연한 일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뭔데? 왜 말리고 지랄이야?”

덩치의 질문에 한숨을 푹 내쉰 쥐는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이 멍청아, 무조건 줘 패는 일에만 집중하지 말고 생각을 좀 해.”

일행들의 흥분이 가라앉은 것을 확인한 쥐는 여드름쟁이를 향해 고개를 돌려 물었다.

“야, 너 조금 전에 뭐라고 했어?”

“그…… 나는 그…… 테라가 어디 있는지 알 것 같다고…….”

여드름쟁이는 얼얼해진 뺨을 비비면서 더듬거렸다. 쥐는 의기양양한 목소리로 주변을 돌아보았다.

“들었지? 이 새끼가 어디 있는지 안다잖아. 이제 얘를 앞세워 가서 따먹기만 하면 돼. 씨발, 얘는 우리를 생각해서 그런 걸 알려주려고 하는데, 너희는 왜 다짜고짜 주먹부터 날리냐, 이 등신들아.”

쥐는 여드름쟁이의 뒷목을 움켜쥐고 의기양양하게 지껄였다. 덩치는 그래도 미심쩍은지 재차 확인을 했다.

“정말이야? 씨발, 괜히 엉뚱한 데로 끌고 다니기만 해봐, 그때는 아주 뒈져.”

여드름쟁이가 침울한 표정으로 눈을 흘기자 쥐가 얼른 나서서 두둔해 주었다.

“씨발, 그렇게 해 가지고 얘가 퍽이나 입을 열겠다. 괜찮아, 걱정하지 마. 헛걸음한 거면 그때는 다른 년 따먹으면 되는 거지. 그년 어디 있어? 응?”

쥐의 교활한 얼굴을 보면서 여드름쟁이는 생각했다. 이런 상황에서 장소를 불어버리면 어차피 이놈들만 재미를 보고 자신은 여기에 버려지게 될 것이다.

그것도 어디 다른 곳에 신고할 수 없도록 흠씬 두들겨 맞은 다음에 버려지게 될 게 분명했다. 그래서 머리를 굴렸다.

“마, 마…… 말해줄 수는 없어. 내가 앞장서서 데리고 갈게. 단, 나도 하게 해주는 조건으로.”

“어? 이 새끼 봐라? 카하하하하! 이거, 골 때리는 새끼인데? 그래, 씨발. 인심 썼다. 네가 3번으로 해. 마음 바뀌기 전에 빨리 앞장이나 서봐.”

낄낄거리던 쥐는 여드름쟁이의 어깨를 감싸 안은 채 볼을 쥐고 흔들어 댄다. 그러고는 덩치와 다른 놈들을 돌아보며 눈을 한 번 찡긋했다.

긴장과 두려움, 아주 작은 양심의 가책 같은 것들 때문에 여드름쟁이의 주황색 트레이닝복은 어느새 땀으로 흥건히 젖었다. 그의 망설임을 눈치챈 쥐는 주머니에서 담배 한 개비를 꺼내 입에 물리고는 불까지 붙여주었다.

“쿨럭, 쿨럭.”

여드름쟁이는 격하게 기침을 했다. 오랜만에 얻어 피우는 담배는 달콤하면서도 구토가 일 만큼 머리를 핑 돌게 만들었다.

“새끼, 어지간히 좋은가 보네. 야, 인마. 이런 상황에서는 서로 믿어야 돼. 그러니까 나를 믿고 안내해. 너한테도 나쁘게는 안 할 테니까.”

“으응.”

여드름쟁이는 쥐에게 홀려 비틀거리며 걸음을 뗐다. 너무 간만에 들어온 담배 연기 때문에 욕지기가 일었지만, 귀하다는 걸 잘 알기에 그걸 차마 손에서 놓을 수가 없었다.

타타타타타다― 그롸아아아―

콰콰쾅― 으아아악―

투투투두―

바깥쪽에서는 여전히 숨 막히는 총성과 비명이 한데 얽혀 울리며 귀를 찌르지만, 그런 것은 별로 신경 쓰이지 않았다. 군인들이 알아서 잘 막을 테지, 하는 막연한 믿음이 있던 것이다.

“이쪽이야.”

다시 건물 안으로 들어간 여드름쟁이는 샤워실이 있는 홈베이스 뒤쪽을 향해 방향을 틀었다. 쥐는 여전히 그의 어깨를 꽉 안은 채였고, 다른 놈들은 서너 걸음 뒤처져 따라왔다.

아까 망을 보고 온 녀석의 말처럼 건물 내에는 정말로 군인들이 싹 사라져 있었다. 늘 두세 명씩 짝을 지어 순찰을 다니던 것에 익숙해진 이들에게는 낯설기까지 한 광경이었다.

여드름쟁이와 열 명의 악당은 아무런 제지도 받지 않고 야구장의 3분의 1가량을 통과했다.

주황색 트레이닝복을 단체로 갖춰 입은 놈들 여남은 명이 담배까지 물고 떼를 지어 다닌다는 것 때문에 한 번씩 눈길을 주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 관심은 이내 사라져 버렸다.

외부의 사소한 자극에 일일이 반응하기에 그들은 너무 무력해져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외부의 소음을 들으며 되살아난 좀비에의 악몽에 비하면 그깟 어린애들 따위는 중요한 문제도 아니었다.

사람들은 외부가 보이는 곳이라면 어디든, 아주 작은 틈사이에라도 달라붙어 좀비와 군인들의 생사를 건 싸움을 지켜봤다.

그럴 용기가 없는 사람들은 며칠 동안 친해진 이들과 부둥켜안고 눈물을 삼키거나 신경질적인 비명을 질러 댔다.

“야! 너희 뭐야? 돌아가, 이 새끼들아!”

샤워실에 닿기 직전, 한 무리의 병사들이 철모를 고쳐 쓰며 뛰어나오다가 주황색 트레이닝복을 발견하고 소리를 질렀다. 움찔한 쥐는 얼른 여드름쟁이의 뒤로 몸을 숨기며 대답했다.

“아, 알았어요! 얘가 토할 것 같다고 해서 의무실에 약 받으러 가는 거예요. 총소리가 나니까 무서워서 그러잖아요.”

“이 정신 나간 새끼들! 지금 상황이 어떤 줄도 모르고! 의무실에 가봐야…….”

병사 하나가 멈춰서 방향을 바꾸려 할 때, 인솔자가 그를 잡아끌었다.

“최 상병! 내버려 두고 가자! 너희들도 빨리 돌아가!”

주춤했던 병사들은 다시 출구를 향해 뛰기 시작했다. 수용자들의 보급품 박스와 돗자리를 걷어차며 달리는 모습만 봐도 지금 그들이 얼마나 다급한지 짐작할 수 있을 정도였다.

군인들이 멀어진 것을 확인한 쥐는 뒤로 숨기고 있던 담배를 다시 물고 연기를 내뱉으며 킬킬거렸다.

“야, 들었지? 의무실에도 아무도 없대. 큭큭큭, 이거, 진짜 완전 우리 세상이잖아.”

테라가 샤워실 앞에 도착해서 줄을 서 있던 것은 두 시 이십 분 전의 일이었다. 두 시에 샤워기 가동을 위한 펌프가 가동되기는 하지만, 그전부터 이미 손에 다 꼽지 못할 정도의 사람들이 줄을 선다.

맨 앞에 선 사람은 5분 전에 탈의실로 입장한다. 옷을 벗고 샤워기 꼭지를 돌리면 그때쯤 딱 맞춰 펌프가 가동되기 때문이다.

푹푹 찌는 날씨 탓에 오늘은 평소보다 조금 더 많은 사람들이 와 있었다. 샤워실을 지키는 보초병들에게 눈인사를 건네면서 그렇게 10분 정도 더 기다리고 있을 때, 사이렌이 울렸다.

에에에에엥~

사이렌 소리를 듣는 것이 그리 낯선 경험은 아니었다. 이틀 걸러 한 번 정도는 여러 가지 이유로 외부에 설치된 스피커를 울리며 사이렌이 울어 대곤 했다.

그리고 그중 상당한 경우는 합선과 같은 기계적 오작동이 원인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뭔가 조금 달랐다.

타타탕―

첫 총성이 울리고, 곧이어 더 많은 총들이 총알을 발사하는 소리가 하늘을 가득 메웠다. 게다가 가까이서 들리는 폭발음. 그것은 좋지 않은 징조였다. 테라는 두근대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놀란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뭐, 뭐야…… 왜 이래?”

샤워실이 열리기만 기다리며 줄지어 있던 사람들은 당황해하며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테라는 일행인 아이 엄마들의 곁으로 돌아가기 위해 줄에서 벗어나 걸었다. 아무래도 한가하게 샤워나 할 때가 아닌 것 같았다.

“비켜요! 비키세요!”

연락을 받은 군인들이 떼를 지어 달려 나가며 통로를 막고 있던 사람들을 한쪽으로 밀친다. 테라도 벽에 붙어 서서 군인들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철모 아래 비치는 긴장된 눈빛, 상기된 표정, 웃음기가 사라진 입술. 모든 게 평소와 달랐다.

타타타타다―

밖에서 들려오는 쉼 없는 총성. 수용자들의 발걸음도 덩달아 빨라진다. 쉘터 내부에서 질서와 양보가 걷혀가는 게 눈에 보일 지경이 되었다.

“악!”

모두가 혼란스럽게 얽히는 와중에 누군가에게 발을 밟힌 테라는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발가락이 훤히 드러나는 핑크색 샌들은 예쁘고 여성적이지만, 보호 측면에서는 지독하게 무능했다. 아프다. 발가락이 끊어져 나가는 것 같다. 테라는 고개를 숙여 밟힌 곳을 살폈다.

자신의 손으로 잘라 버린, 십여 일이 지나서 이제는 겨우 다 아물었나 싶던 새끼발가락의 상처가 다시 터졌다. 잘려 나간 뼈의 단면이 욱신거리고 피가 흐른다.

테라는 이를 악물고 절룩이며 걸었다. 벽에 손을 짚어가며 천천히 걸어가자니, 야구장이라는 곳이 이렇게나 넓었나 싶어진다.

평소였다면 언제라도 다가와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을 군인들이 단 한 사람도 눈에 띄지 않는다. 불안하다. 그때, 낯선 목소리가 소리치는 게 들렸다.

“엇! 저기 있다! 진짜잖아!”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자, 똑같은 주황색 옷을 입은 남자들이 우르르 달려왔다.

비록 짧은 순간 동안 보았을 뿐이지만, 테라는 그들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분명한 악의를 느낄 수 있었다. 본능이 그녀에게 외쳤다.

도망쳐!

그녀는 방향을 돌려 왔던 길을 다시 거슬러 뛰었다. 남자들, 그게 누구든 간에 남자들이 잔뜩 모여 있는 곳으로 가야 한다. 저 주황색 옷들의 흥분을 막을 수 있는 힘과 수가 있는 곳으로…….

탁탁탁탁―

주변의 모든 소음들을 뚫고 울리는 주황색 옷들의 발소리가 가까워질수록 테라의 심장은 벅차게 뛰었다. 발가락뼈가 으깨지는 듯한 고통을 참아가며 그녀 딴에는 최고로 노력을 했지만, 좀처럼 속도는 오르지 않았다.

이번에도 또 핑크색 샌들이 발목을 잡는다. 그녀가 조금만 더 침착했더라면 애초에 그렇게 높고 가느다란 굽의 신발을 벗어 던지고 뛰었겠지만, 그런 것들을 계산에 넣을 수 없을 만큼 모든 일들이 너무 갑작스러웠다.

“하하하! 잡았다!”

허리에 실리는 묵직한 체중!

중심을 잃은 테라는 앞으로 고꾸라졌다. 하지만 그녀는 필사적으로 팔꿈치를 휘둘러 뒤에서 끌어안은 남자의 얼굴을 후려치며 다시 일어나 보려 애를 썼다.

“이런 개 같은 년이! 어디서!”

눈 주변을 얻어맞은 남자는 곧바로 욕설을 내뱉으며 테라의 옆구리를 찍었다.

흐윽, 강펀치에 숨이 콱 막힌 테라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다시 주저앉았다.

“끄으…… 도와주…… 읍!”

주변을 향해 외치려는 그녀의 입을 두툼한 손바닥이 틀어막았다.

그리고 담배 냄새와 불쾌한 땀 냄새가 풀풀 풍기는 커다란 주황색 트레이닝복이 머리 위에서부터 허리까지 뒤집어씌워졌다. 그 주변을 나머지 놈들이 둥글게 에워싸 시선을 가렸다.

“씨발 년아, 또 소리 지르기만 해. 그냥 푹 쑤셔 버릴 거야.”

날카로운 쇠붙이가 목의 핏줄에 닿는 게 느껴진다. 남자의 손바닥을 깨물어보려고 이를 댔던 테라는 천천히 입을 다물었다. 심한 악취를 풍기며 남자는 그녀의 귀에 바짝 입술을 댄 채 말을 계속 이었다.

“쑤신 다음 우리는 그냥 가버리면 그만이야. 알아? 사람들 지금 정신없는 거 알지? 주황색 포대 덮어쓰고 죽은 게 누구인지 신경이나 쓸 것 같아? 피 질질 흘리다가 뒈지고 싶어? 응? 또 소리 지를 거야?”

테라는 아주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이 상황에서 이 남자를 자극해 봐야 얻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테라에게 더 저항할 의지가 없다는 걸 확인한 남자는 만족한 듯 낄낄거리며, 입을 막았던 손을 아래로 내려 그녀의 가슴을 꽉 움켜쥐었다.

윽, 고통과 수치심에 비명을 터뜨리려 할 때, 남자가 귀에 바람을 불었다.

“쉿! 조용히 하라니까. 흐흐흐흐하하~ 야이, 씨발. 졸라 좋아. 별로 크지는 않은데, 탄력이…… 오호호호!”

소름이 끼친다. 테라는 온몸을 사시나무 떨듯 떨며 입술을 꽉 깨물었다.

“야이, 미친 새끼야! 여기서 쪼물딱거릴 때냐? 빨리 방을 잡자!”

“그래, 이 씨발 놈아. 너 혼자서 꽉 끌어안고 뭐하자는 거야!”

“알았어, 이 개새끼들아. 어디로 갈 거야? 너희들이 앞장을 서!”

다른 놈들이 욕설을 퍼붓자 남자는 테라를 끌어안고 천천히 일어났다.

몇 명이나 되는 걸까…….

어떤 일을 겪게 될 것인지 빤히 예측할 수 있기 때문에 저절로 눈물이 흘러나온다.

테라가 두려움에 떨면서 주저앉으려 하면 뒤에서 끌어안은 남자는 거칠게 목을 잡고 그녀를 당겼다. 머리 위에 덮어씌워진 주황색 트레이닝복 때문에 앞이 잘 보이지 않는다.

끼이익― 문을 여는 소리, 그리고 자박거리는 바닥의 타일 소리.

화장실이다.

쾅쾅쾅!

으아아악~

또다시 들려오는 비명 소리.

“야이 씨발 놈아! 꺼져! 나가!”

“어, 어…….”

“뭐가 어어야, 이 개새끼야! 안 꺼져?”

팍, 엉덩이를 걷어차는 소리.

화장실에 들어 있던 두어 명의 남자들이 쫓겨 나가는 소리가 들린다. 이제 이 더럽고 역겨운 여정이 슬슬 종착역으로 도착하는 것 같다.

테라는 두려움으로 혼탁해진 머리를 최대한 가동해서 고민했다. 어쩌면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르는 이 순간, 저 쫓겨나는 남자들을 향해 도움을 요청해 볼까…….

아니, 그건 안 될 것 같다. 고작 두어 명이 이 많은 남자들과 싸워줄 리도 없고, 혹시 그런 용기를 냈다고 해도 이길 가능성이 없다. 공연히 다치는 사람만 늘어날 뿐이다. 그러면 이제 선택은 두 개로 줄어든다.

이대로 순순히 당할 것인가, 아니면 저항을 하다가 죽을 것인가.

저벅, 저벅, 저벅, 저벅.

그녀의 뒤를 따라 화장실 안으로 들어오는 발소리들, 웅성대는 제각각의 목소리들. 적어도 여덟 명, 어쩌면 그 이상일지도 모른다. 극한의 공포와 수치는 자연스럽게 테라를 잊고 싶던 그날의 기억으로 이끌었다.

영원히 떠올리고 싶지 않은 그날, 겨우 열일곱이었던 그녀와 제니는 손을 꽉 붙잡고 훌쩍이며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 절대로 잊히지 않을 것 같던, 씻기지 않을 것 같던 마음의 상처는 옷을 흠뻑 적시는 수십 번의 악몽과 눈물을 거치면서 아주 천천히 엷어져 갔다.

그렇다면 이 일도 참아낼 수 있지 않을까? 제니였다면 나에게 뭐라고 했을까?

‘후우우~’

테라는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살아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생명이 붙어 있다면 죽는 건 나중에라도 또 선택할 수 있다고 스스로를 설득했다.

콰당탕!

좌변기의 뚜껑이 내려지고 테라는 그 위에 주저앉혀졌다. 그리고 놈들은 포대처럼 덮어두었던 주황색 트레이닝복을 확 들쳐 냈다. 테라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와, 씨발. 이거 봐. 가까이에서 보니까 진짜 장난 아니다. 예쁘긴 존나게 예쁘네. 아, 씨발. 벌써 쌀 것 같아.”

땀 때문에 얼굴에 들러붙은 그녀의 긴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면서 한 놈이 중얼거렸다.

“근데 이건 왜 이렇게 눈을 꽉 감고 있어? 야, 눈 좀 떠봐. 얼굴 좀 제대로 보자.”

다른 목소리가 뺨을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테라는 여전히 눈을 감은 채 고개를 저었다.

“저…… 아무것도 안 볼게요. 그러니까 제발…….”

“어! 오호호하하! 야, 이 씨발. 요거 말하는 것 좀 봐! 얼굴 안 볼 테니까 죽이지 말아달라고? 이런 거 많이 당해봤나 봐! 캬캬캬캬!”

주변의 놈들이 킥킥거리며 따라 웃었다. 처음 그녀를 넘어뜨렸던 굵은 목소리의 남자가 손가락으로 눈꺼풀을 당겨 억지로 그녀의 눈을 뜨게 하고는 위압적으로 속삭였다.

“눈뜨라고! 눈깔을 보면서 하고 싶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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