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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9. 악마는 어디에나 있다 (5) (149/449)


149. 악마는 어디에나 있다 (5)
2022.0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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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위는 민구라는 이 사내가 남자답고 기특해서 도와주고 싶기도 했다. 사실 군의 시선에서 보자면 이까짓 보병 하나는 아무 가치도 없다.

그가 얼마나 대단한 싸움꾼인지는 모르지만, 입대하게 되면 남들과 똑같은 소총을 지급받고, 다른 병사들과 나란히 서서 경계 근무나 서게 될 것이다. 목숨을 건 가치와 무가치. 너무나 선명한 대비가 아닌가.

“에이, 진짜. 이러면 안 되는데!”

한동안을 더 고민하던 중위는 주머니에서 볼펜을 꺼내 민구의 이름 옆에 찍힌 붉은색 스탬프 옆에 두 줄을 쫙쫙 그었다. 그러고는 건대 쉘터라고 적고 나서 자신의 이름을 기입했다.

탁, 소리 나게 서류철을 덮은 중위는 민구에게 말했다.

“남자다워서 한 번 봐드린 겁니다. 며칠 뒤라고 확답은 못 드리지만, 하여튼 곧 출발할 거니까 방송 나올 때까지 맘 편하게 쉬세요. 그래 봐야 건대 도착하면 또 일주일도 안 돼서 징집이 시작될 거라는 건 염두에 두시고요.”

“……고맙소.”

민구는 무감정하게 대답하고 다시 흡연 구역으로 걸어갔다. 연신 허리를 90도로 굽히고 뛰어서 다가온 초희가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아우, 난 오빠 끌려가는 줄 알고 깜짝 놀랐었네. 근데 오빠, 사람이 사정 봐줬으면 좀 더 고마운 척이라도 해라. 고맙소, 무뚝뚝하게 이게 뭐야? 저 사람 아니었으면 큰일 날 뻔했잖아.”

민구의 생각은 달랐다. 만약 저 중위가 허락하지 않았다면 그는 오늘 밤 어떻게 해서든 여기에서 탈출할 생각이었다.

온통 밖으로만 신경이 곤두서 있는 곳이라서 나가려는 사람을 막아서는 보초병이 있을 것 같지는 않지만, 혹시 있더라도 조용히 처리해 버리면 그만이다.

그런 속을 모르는 초희는 옆에서 계속 귀가 따갑도록 잔소리를 해 대다가 민구가 흘겨보고 나서야 입을 다물었다.

“노을 지네……. 아, 나 저 색깔 보면 이상하게 센치해지더라. 꼭…… 씨발 오래 못 살 것 같아지기도 하고, 어릴 때 생각도 나고……. 오빠, 오늘 기분도 영 그런데 우리 연애 한번 할까? 응? 그러고 보니까 오빠는 나랑 한 번도 섞은 적이 없었다. 그치?”

민구가 담배 한 대를 천천히 태우고 있는 동안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 붉게 물든 하늘을 보고 있던 초희가 중얼거린다.

쿵― 쿵―

야구장 바깥에서는 마지막 햇살 속에서 작업에 박차를 가하는 중장비들이 시끄럽게 움직이고 있다. 민구가 아무 반응이 없자, 그녀는 그의 탄탄한 허벅지를 살살 쓸면서 가슴을 더 바짝 밀착시켰다.

***

“오늘따라 하늘 엄청나게 예쁘네요. 봐요, 오빠. 완전 장밋빛이에요.”

나무토막을 잡아끌다가 잠시 허리를 펴며 숨을 돌리던 제니가 꿈꾸는 듯한 목소리로 말한다. 그녀의 말을 듣고 모두 고개를 들었다. 주황과 분홍의 매력적인 부분만 절묘하게 섞어놓은 것 같은 하늘빛이다.

“저까짓 게 뭐가 그렇게 예뻐. 네가 훨씬 예쁘…… 크읍, 크흡.”

느끼한 대사를 읊다 말고 보안관은 코를 들이마셨다.

“여기요, 삼키지 말고 뱉어요.”

제니가 다급하게 뛰어와 티슈를 내민다. 보안관이 너무 자주 코를 들이마시는 탓에, 제니는 아예 각 티슈를 자동차 보닛 위에 꺼내놓았다. 보안관은 뻔뻔한 표정으로 거짓말을 했다.

“아니, 나 가래 안 나왔어. 뱉을 거 없어.”

“뭐가 안 나와요, 조금 전에 목젖이 꿀꺽하는 걸 다 봤구만. 에이, 삼키지 말고 계속 뱉으라니까. 그러다가 맹장염 걸린다고요.”

제니는 보안관의 넓은 어깨를 때리며 타박을 한다.

“헐, 맹장염? 나는 튼튼해서 그런 거 안 걸리…… 크윽, 크윽.”

“자! 자요! 여기!”

이번엔 바로 코앞에서 보고 있던 제니가 휴지를 가져다 대는 바람에 마지못한 보안관은 부끄러워하며 톱밥이 잔뜩 섞인 가래를 뱉었다.

몇 시간 동안 전기톱으로 작업을 했더니 풀어버려도, 풀어버려도 콧속에서 계속 톱밥이 나온다.

손바닥은 얼얼하고 신발 속, 속옷 안에까지 미세한 나무 가루들이 잔뜩 들어가 있어서 무척 간지럽다. 그래도 전기톱을 찾은 덕에 해가 지기 전에 길을 막고 누운 나무들을 모두 잘라 끌어낼 수 있었다.

“야, 너희 둘 다 진짜 바보인 거 알아? 뭘 휴지를 가져다 대고, 또 삼키고 그래? 그냥 나오는 족족 바닥에 뱉어. 그러면 되잖아. 크윽~ 퉤! 이렇게 말이야.”

마지막 나무토막을 발로 차서 개천으로 밀어버리던 삼식이가 참견을 하며 직접 가래를 뱉는 시범까지 보여준다.

“하지 마, 이 더러운 새끼야. 누가 네 침 뱉는 거 보고 싶대? 역겨워!”

“하하하, 언제부터 우리 남광훈 씨가 그렇게 깔끔을 떠셨지? 하하.”

“에이, 삼식이 오빠, 진짜 막 익숙해지려는 참인데 방해하지 마요. 이렇게 휴지에다 뱉는 게 익숙해져야 나랑 차 안에 있을 때도 몰래 삼키질 않는단 말이에요. 맹장염 걸리면 수술도 못 하는데.”

“제니야, 맹장염 이야기는 왜 자꾸 해? 설마…… 내가 걸렸으면 좋겠어?”

정신없이 잘도 떠들어 대는 보안관과 삼식이, 제니를 보면서 유빈은 맥없이 웃었다.

하하, 기운 좋은 것들…….

힘들다. 노가다를 뛰면서 살았었지만, 요즘처럼 열흘이 넘도록 아프든 말든 매일 죽어라 일을 해본 경험은 없지 싶다.

필사적인 도끼질을 계속한 덕에 팔과 손바닥이 떨어져 나가는 것 같고, 전기톱 엔진 소리 때문에 아직도 귀가 윙윙 울린다.

그리고 그렇게 열심히 일을 하는 동안에도 자꾸 뒤가 켕겨서 제풀에 흠칫흠칫 놀라곤 했다. 불안함은 사람을 지치게 하고 소모시킨다.

물을 벌컥벌컥 들이켠 유빈은 뙤약볕 아래에서 익어 따끔거리는 뒷목에도 부었다. 덥고, 갈증이 나고, 온몸이 찐득하고…….

힘들다. 하아~

그래도 이제 나무를 다 끌어냈으니 가볍게 달리기만 하면 된다.

“일어나. 정신 차려. 물 좀 마시고.”

유빈은 코롤라 뒷좌석에 누워 머리에 물 적신 수건을 덮은 채 뻗어 있던 신입을 흔들어 깨웠다. 두어 시간 열심히 심부름이라도 좀 하는가 싶더니, 결국 더위를 먹고 저렇게 널브러졌다.

하긴 정말 더럽게 푹푹 찌는 하루였고, 육체노동에 서툰 녀석이 그래도 제 딴에는 요 며칠 바짝 용을 써 댔으니 이해 못 할 일도 아니다.

“으으~ 머리야. 아우, 씨발. 대가리 쪼개지는 것 같다.”

신입은 인상을 쓰며 일어나 물을 얼굴과 입에 들이붓고 나서 옆에 놓여 있던 진통제를 꺼내 씹어 삼켰다. 열 정짜리 케이스가 벌써 반은 비워져 있다.

“이제 약 그만 먹어. 그거 하루에 몇 개까지만 먹으라는 말은 없었어?”

“몰라. 설명서 같은 게 있기는 했는데, 안 읽어봤어. 근데 어떡하냐, 계속 두통이 내려가지를 않는데. 아으, 씨발. 내 머리.”

신입은 양손으로 머리를 감싸고 꾹꾹 눌러 댄다. 그러는 녀석을 보고 있자니 자신까지도 속이 울렁거리는 것 같아 유빈은 시선을 먼 곳으로 돌리고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하여간 이제 다 끝났어. 나무 다 잘랐고, 다 끌어냈으니까 가기만 하면 돼. 힘내봐. 뭐 좀 먹을래? 초코바라도 줄까?”

트렁크에서 먹을 것들을 꺼내 온 유빈이 신입에게 권했다. 신입은 아주 느리게 도리질을 한다.

“못 먹겠어. 아까도 뭐 좀 먹어보려다가 다 올렸어.”

“그래, 알았어. 그럼 조금 더 쉬어, 우리는 간단하게라도 저녁을 먹어야 하니까. 어이, 그만 장난치고, 이제 이거 먹자!”

유빈은 세 명에게 다가가 물과 에너지 바를 나눠 줬다. 후식은 과일 통조림이다. 나무토막을 하나씩 차지하고 둘러앉은 네 사람은 소진된 에너지를 채우기 위해 열심히 씹고 마셨다.

“그…… 수용소라는 데 가면 이거보다 잘 먹게 될까? 혹시 매일 희멀건 우거짓국에 쉰 밥 반 덩어리 말아 주면서 일 시키고 그러면 어떻게 하지?”

1회용 수저로 후르츠 칵테일 통조림을 떠먹고 있던 삼식이가 갑자기 이상한 걱정을 시작했다. 보안관은 가당찮다는 반응이다.

“멍충아, 그럴 리가 있냐? 무슨 2차 대전 때 전쟁 포로도 아니고. 잘은 모르지만, 생존자가 얼마 안 될 거라서 먹을 건 남아돌걸? 크윽.”

“여기요, 휴지.”

“……미안해, 지저분하게 굴어서…… 밥맛 떨어졌겠다.”

“어휴, 그런 게 어디 있어요. 신경 쓰지 말고 나오는 대로 계속 뱉어요.”

일부러 더 밝게 웃으며 에너지 바를 베어 문 제니가 한마디를 보탠다.

“뭐, 그래도 내가 해주는 요리같이 맛있지는 않겠죠? 그쵸, 오빠?”

“응? 으응, 그렇겠지.”

예상 밖의 공격에 당황한 보안관이 1초 정도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랑에 눈이 멀었을지언정 혀는 정직하다.

수용소가 구체적으로 어떤 곳일까 하는 질문이 새삼 떠오르자, 덩달아 마음이 복잡해진 유빈이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삼식이가 걱정하는 만큼 이상한 대우를 받을 리는 없겠지만, 지금처럼 자유롭지는 않을 것이다.

남녀가 강제로 분산 수용될 가능성도 있다. 만난 지 2주도 되지 않은 사이라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을 만큼 제니와 가까워진 지금, 그런 건 싫다. 뭔가 소중한 보석을 손에 넣었다가 잃어버린 기분이리라.

하지만…… 그래도 친구들이나 그녀가 좀비들에게 물려 죽어가는 걸 보는 것보다는 안전한 수용소가 훨씬 나을 테지.

“무슨 생각 하느라 그렇게 멍해져 있어요? 한숨까지 쉬고. 왜요? 너무 힘들어서?”

수용소에 대한 걱정을 골똘히 하고 있는 유빈에게 제니가 묻는다.

응?

유빈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도리질을 했다.

“자, 이제 배도 대충 채웠겠다, 슬슬 출발해 볼까?”

남은 생수로 얼굴에 달라붙은 톱밥과 먼지를 한 번 더 씻어낸 보안관이 기지개를 켠다. 출발! 제니도 분위기를 맞춰 주며 발랄하게 팔을 쫙쫙 편다.

그녀의 오뚝한 코끝은 햇볕에 타서 허물이 조금 벗겨졌다. 처음 출발할 때처럼 보안관과 제니는 코롤라에, 나머지 셋은 오피러스에 타고 시동을 걸었다.

“담배 피운다?”

유빈이 차를 돌리는 동안 삼식이가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며 물었다. 유빈은 고개를 끄덕이며 창문을 열었다.

한나절 이상을 꾹 참으며 일만 했으니 그 정도야 당연히 누릴 수 있다. 그리고 이제부터 달릴 테니 혹시 그 연기를 맡고 좀비가 몰려온다고 해도 이미 그들은 그 자리에 없을 것이다.

“나도 하나 줘봐.”

뒷좌석에 누운 신입이 손을 뻗친다. 하지만 두어 모금 빨다가 머리가 아파서 안 되겠는지, 곧장 음료수 병에 꽁초를 집어넣어 버렸다.

후우우~ 창문 밖으로 연기를 내뿜는 삼식이의 얼굴 가득 황홀한 표정이 떠올랐다. 두 대의 자동차는 마지막 햇살과 함께 천천히 달렸다.

좁은 강변 산책로 전체가 태풍의 영향으로 인해 흙과 바위로 범벅이 된 터라 시속 25킬로미터 이상을 내기는 어려웠지만, 그 정도만이라도 충분했다. 어쨌든 8킬로미터만 가면 한강이니까.

“수용소에서도 담배 피우게 해주겠지?”

두 번째 담배에 불을 붙인 삼식이가 묻는다.

“그렇겠지. 근데 가지고 온 담배 다 피우면 그때는 어떻게 할래?”

“음, 열 보루 정도 남은 것 같은데, 그거 떨어지기 전에는 이 상황이 대충 마무리되지 않을까? 하루에 한 갑씩으로 잡아도 석 달이 넘어. 그때쯤이면 좀비들 다 죽고, 사람들도 일상으로 돌아가고, 담배도 다시 사서 피울 수 있겠지.”

“그러면 좋겠지만…….”

삼식이의 낙관적인 전망을 들으며 유빈은 말끝을 흐렸다. 정말 좀비들이 다 죽어주기는 할까?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

아무것도 처먹지 않고 100일을 산다는 건 생각하기 어려우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세상이 예전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지난 일주일 동안 수천에 가까운 좀비들을 구경했지만, 그들 외에 살아 있는 사람을 본 것이라곤 머리 위로 야속하게 지나가 버린 헬기 두 대가 전부다. 그야말로 압도적인 비율이다.

“뭐, 어차피 그래봐야 우린 또 노가다 뛰겠지…….”

삼식이의 말에 유빈은 헛웃음을 지었다. 노가다를 뛰든, 허름한 선술집에서 우리가 한때 제니랑 같이 살았노라고 떠들어 대며 술 취한 또라이 취급을 받든 간에, 그렇게 일상이라는 게 있는 시절로 돌아갈 수만 있으면 좋겠다.

그러려면 일단 수용소로 가서 이 힘든 시기를 넘겨야 한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유빈은 뭔가 이상하다는 걸 느꼈다. 저 멀리 앞쪽 길 전체가 반짝반짝거린다.

아니…… 길의 너비보다 반짝거리는 면적이 훨씬 더 넓은 것 같다. 유빈은 조금이라도 잘 보려고 눈을 가늘게 떴다.

“뭐지, 저거?”

개천 건너편의 아파트 단지들을 보고 있다가 시선을 전방으로 돌린 삼식이도 고개를 갸웃거렸다. 앞서 달리던 보안관의 차가 점차 속도를 줄인다. 그리고 거리가 줄어들면서 반짝거리는 것의 정체가 밝혀졌다.

물이다. 아주 넓고, 넓은 물이 찰랑거리며 햇살을 금빛으로 반사하고 있었다. 거의 동시에 멈춘 두 대의 차 문이 열렸다.

“아, 뭐야…… 이런 염병.”

보안관이 바닥에 침을 뱉으며 원망스러운 눈으로 그들의 앞을 가로막은 물을 바라보았다.

사이드에 설치된 수문 펌프가 가동되지 않아 낮은 지대에 고여 버린 개천은 동부간선도로를 절반 이상 잠기도록 만들고 있었다. 게다가 중랑천 상부로부터 아직도 계속해서 엄청난 양의 물이 이곳으로 흘러드는 중이다.

“완전히 호수네.”

삼식이가 중얼거린다. 이 길은 막혔다. 한강까지 11킬로미터니, 밟기 시작하면 20분도 안 걸린다느니 따위의 자신이 했던 말들이 떠오른 유빈은 얼굴을 감싸고 킬킬거리기 시작했다.

누군가 자신을 손바닥 위에 놓고서 못된 장난을 치며 가지고 노는 것 같다.

“크크크큭, 아나, 진짜 어이가 없어서……. 큭큭, 아니, 이게 뭐야……. 그 나무를 다 잘라서 기껏 뺑이를 쳤더니, 바로 이 앞에 이렇게 이 물난리가 났다고? 큭큭큭, 장난하는 거야, 뭐야? 하아~”

조금 전, 시동을 걸어 실제로 달려온 거리는 3킬로미터가 조금 넘을 뿐이다.

아까 나무에 가로막혔을 때 걸어서 전방을 살펴보았더라면, 그래서 비로 코앞에 이렇게 물난리가 나 있다는 걸 확인만 했더라면 오늘 오후 내내 그렇게 진땀을 쏟아가며 톱질을 하지 않았어도 됐다.

뱃속 깊숙한 곳에서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허탈하게 웃고 있던 유빈은 결국 화를 못 이겨 자동차 지붕을 쾅쾅! 내려쳤다.

“멍청한 새끼! 그렇게 정찰 좋아한다고 잘난 척을 해 대더니! 이게 뭐 하는 짓이야! 조금만 걸어왔어도 빤히 볼 수 있는 거였잖아! 이익! 이익!”

신중하지 못했던 자신에게 실컷 욕설을 퍼붓는 동안 주먹의 살갗이 찢어지고 피가 흐른다.

자신의 아이디어만 믿고 찢어진 손바닥으로 전기톱과 씨름하느라 톱밥을 한 주먹은 삼킨 보안관에게, 담배를 꾹 참으며 일한 삼식이에게, 제니에게, 심지어 신입에게도 미안하다. 허탈해진 유빈은 차 문을 붙잡고 기대섰다.

“하아~ 씨발, 이게 뭐냐고…….”

유빈처럼 자해를 하지는 않았어도 다들 어지간한 충격을 받았다. 잠실의 수용소는 이제 그야말로 물 건너간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그들의 앞을 가로막고 출렁이며 호수를 이루고 있는 물이 자연히 빠질 때까지 시간을 두고 기다리든가, 아니면 저 건너편까지 우회해서 이동한 후 새로운 차를 찾아 언덕 아래로 구르지 않도록 끌어내리는 수밖에 없다.

둘 중 어느 쪽을 택하더라도 적지 않은 시간이 걸리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런 걱정을 하는 동안에도 꾸준히 시간은 흘러서 이제는 사방이 어둑해졌다.

“이제 어떻게 할 거야? 계획을 좀 세워봐.”

잠시의 침묵을 깨고 보안관이 유빈에게 묻는다. 유빈이 씁쓸하게 웃으며 되물었다.

“야, 너 진짜…… 이렇게 된 상황에서도 아직 나를 믿어? 봤잖아, 계속 헛발질만 하는 거. 11킬로미터만 가면 된다고 방방 뛰더니, 안전하게 잘 지내던 동네에서 괜히 너희 끌고 나와 가지고 계속 고생만 시키잖아.”

“바보 소리 그만해, 새끼야. 안전한 동네가 아니었잖아. 좀비들이 들이닥치기 직전에 도망쳐 놓고 뭔 소리를 하는 거야. 그리고 헛발질 좀 할 수도 있지. 이 세상에 실수 안 하는 사람은 없어. 쓸데없는 말 하지 말고, 당장 오늘 밤 어떻게 새울지부터 정하자고.”

주저앉아 버리고 싶은 마음뿐인데, 무너지려는 그 마음을 보안관이 억지로 잡아당겨 일으켜 세운다. 유빈은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마음을 가라앉혔다. 보안관의 말이 맞다. 여기서 발을 뺀다고 책임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일단 저기로 갈래? 이 근처에는 눈에 띄는 큰 건물이 저거 하나뿐인데?”

삼식이가 말했다.

후우~ 잠시 고민해 본 유빈은 차 지붕을 퉁퉁, 두들겼다.

“뒤로 후진해서 빠져나가자. 오늘은 차에서 자야 할 것 같다. 불침번도 돌아가면서 서야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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