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 변곡점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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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4. 변곡점 (5)
2022.01.22.
철책과 옅은 구릉까지밖에는 보이지 않지만, 다행히 경전철역 쪽은 아직 평화로워 보였다. 철책 한 칸을 떼어내 바닥에 설치해 둔 트랩도 그대로다. 이 부근에는 아직 좀비들이 오지 않은 것이다.
휴우, 경전철역 위까지 올라가 본 뒤에야 안도한 유빈은 자기도 모르게 버릇처럼 얼굴의 비지땀을 손바닥으로 훑었다. 물론 곧바로 실수를 깨달았다.
“우웩― 카악! 퉤! 퉤엣!”
정신없이 침을 뱉고 나서 유빈은 다시 지하 통로로 돌아왔다.
“어때?”
삼식이가 묻는다.
“응, 올라와도 돼. 여기는 깨끗해.”
우와아아, 흥분한 삼식이가 앞장을 섰고, 보안관은 제니를 안고서 두 계단씩 뛰어 올라왔다. 일단 맑은 공기를 쐬고 싶다.
“너희 둘은 여기 있어. 금방 짐 가지고 올게.”
유빈이 다시 계단을 내려가며 제니와 보안관에게 말했다.
“저, 저도 도울게요.”
“그냥 숨이나 좀 돌려. 이미 충분히 도와줬어. 정말 용감하게 잘 건넜어.”
후들거리는 다리로 다시 일어서려는 제니의 손을 잡으며 보안관이 말했다. 유빈과 삼식이도 같은 생각이었다.
제니는 허망한 얼굴로 조금 전 벗어난 지하 통로를 돌아보았다. 저 안에서 무한한 지옥에 빠져 버린 것처럼 괴롭고 무서웠던 기억이 거짓말 같다.
지나고 나서 보니 별것도 아닌데…… 언젠가는 지금 이렇게 힘들었던 모든 시간들도 그저 꽤 견딜 만했던 추억의 편린으로 여겨지게 될까…….
짐과 카트를 전부 따로 끌어 올려서 역까지 가져가는 데만도 시간이 제법 걸렸다. 창문이 깨진 정도만 빼면 역 건물에는 태풍이 미친 피해가 없는 것처럼 보였다.
산책로 건너 언덕의 코롤라와 오피러스도 그들이 세워놓았던 모습 그대로 서 있다.
혹시 좀비가 들어가지는 않았을까 해서 경전철역 건물 내부를 살펴보고 났을 때쯤에는 다들 녹초가 되어버렸다. 물론 악취가 큰 원인을 차지했다.
“먼저 씻고 나와. 여기에서 기다릴게.”
보안관이 비닐에서 벗겨낸 생수병과 비누를 제니에게 건넸다.
“이 냄새…… 안 지워질 것 같아요.”
제니가 엉망으로 더럽혀진 자신의 배낭 냄새를 맡으며 눈살을 찌푸린다.
“내 생각에도 쉽게 빠질 냄새는 아니긴 해. 저기…… 혹시 잘 안 되거든 먼저 이걸로 닦고 비누를 써봐.”
유빈이 제니에게 준 것은 짙은 푸른색의 리스테린 병이었다.
“이건 구강청결제잖아요. 이런 게 효과가 있어요?”
“영화에서 봤는데, 미국 FBI가 살인 사건 현장에서 냄새를 지울 때도 이걸 사용한대. 물론 다른 약품들도 같이 쓰겠지만…….”
“FBI가 청소를 한다고요?”
“아…… 그게 아닌가? FBI가 용역을 주는 거였나? 뭐, 어쨌든 살균도 되는 거니까 손해 볼 일은 없을 것 같아. 그게 싫으면 주방 세제를 줄까? 기름때 만지는 사람들은 이걸로 손을 닦거든.”
“아뇨, 오빠 말대로 해볼게요. 그 파란색만 봐도 뭔가 진정되는 것 같아요.”
제니는 가볍게 웃으며 짐을 챙겨 역 1층의 화장실 안으로 들어갔다. 화장실이라고는 해도 아직 개시도 하지 않은 건물이니 깨끗하다.
“짜잔!”
20여 분 뒤, 제니가 옷을 갈아입고 나왔을 때, 다들 약간, 아니, 조금 많이 놀랐다.
제니는 엄청 짧은 반바지에 운동화, 몸에 딱 달라붙는 자전거 라이더용 티셔츠를 입고 환하게 웃으며 모두의 앞에서 한 바퀴 빙그르르 돌았다.
지퍼가 내려진 라이더 티셔츠 사이로 가슴골이 뚜렷하게 보인다. 예전에 TV에서 보던 제니의 모습이다.
“이제 11킬로미터만 가면 대피소라면서요? 그래서 이렇게 입었어요. 이제 걸을 일 없으니까. 어때요, 보안관 오빠. 예뻐요?”
“응? 으응…… 예뻐. 엄청 예쁘긴 한데…….”
보안관의 표정이 떨떠름해졌다. 유빈도, 신입도 비슷하다. 그런 남자들의 얼굴을 가만히 쳐다보던 제니가 훗, 웃었다.
“보안관 오빠가 무슨 생각 하는지 내가 맞춰볼까요?”
“내 생각? 나 그다지 별생각 없는…….”
“에이, 솔직히 이런 생각 하잖아요. 저 계집애, 우리랑 있을 때는 주구장창 긴바지만 입고 비싸게 굴더니, 이제 사람들 많은 곳에 간다니까 저렇게 홀랑 까고 나왔구나. 치사하다. 나쁜 년, 나는 정말 진심으로 잘해줬는데 그동안 우리를 이용만 했던 거구나…… 이런 생각 했죠? 그쵸?”
“아, 아냐, 아냐! 그 정도까지는 아니고.”
섭섭한 마음을 들켜버린 보안관이 말을 더듬자, 제니는 싱긋 미소를 지었다.
“하하하, 오빠들은 아직 어리네요. 생각해 보세요. 거기를 누가 지킬 건지. 군인이나 경찰들이잖아요. 전부 남자라고요. 그러니까 제 바지가 짧을수록…….”
그러면서 제니는 도발적으로 긴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한쪽 다리를 들어 역 계단 위에 척 걸쳤다. 그녀의 희고 탄력 있는 허벅지 안쪽을 라이브로는 처음 본 남자들은 자기도 모르게 끄응, 하고 앓는 소리를 냈다.
“……우리가 받는 대우는 더 좋아질 거라고요. 이런 게 바로 전략이라는 거죠. 그리고 그 전략은!”
제니는 티셔츠의 지퍼를 5센티미터 정도 더 아래로 내렸다.
단단한 라이크라 섬유에 의해 갇혀 있던 커다란 가슴이 흔들리고, 핫핑크색의 스포츠 브라가 언뜻 비친다. 보안관과 신입이 헉, 하는 소리와 함께 엉덩이를 뒤로 뺀다.
“이 지퍼가 내려가도 비슷한 효과가 나지요. 얼마나 확실한 전략인지는 다들 몸으로 확인하셨죠?”
제니는 눈을 내리깐 채 잘난 척을 한다. 몸의 특정 부위에 한꺼번에 피가 쏠린 세 남자는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고 어떻게든 그 변화를 드러내지 않으려 애를 썼다. 엉거주춤한 자세로 서 있지 않은 건 삼식이뿐이다.
***
산책로와 벌판이 이어진 곳에는 차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아둔 돌기둥이 나란히 늘어서 있다. 그중 세 개는 부숴 넘어뜨려야 차가 빠져나올 수 있다.
옷을 갈아입고 나온 남자들이 차로 짐을 옮겨 싣는 동안, 보안관은 트렁크에서 꺼낸 해머로 돌기둥을 열심히 후려갈겼다.
제니의 말을 들은 이후 계속 생각에 잠겨 있던 유빈이 머뭇거리며 말을 꺼냈다.
“그런데 말이야……. 대접 받는 것도 좋지만, 나는 그렇게 입고 가는 게 아무래도…… 걔들이 어떤지 모르지만, 너무 흥분을 시키면 좀 위험하지 않을까 해서…… 차라리 조금 푸대접을 받더라도 안전한 게…….”
그 문제로 의논을 하지는 않았지만, 보안관도 비슷한 걱정을 하던 참이다. 자동차 지붕 위에 서서 망원경으로 벌판을 살피고 있던 제니가 무슨 뜻인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입고 갔다가 몹쓸 짓 당할까 봐요?”
“응? 으음, 뭐, 굳이 말하자면 그런 이야기지.”
“거기 분위기가 그렇다면 어차피 제가 누구인지 아는 순간, 똑같은 일이 일어날 거예요. 아무리 허술하게 입고 가도 마찬가지고요. 하지만 저는 대피소에 질서가 유지되고 있을 거라고 믿고 싶어요. 지금으로서는 거기가 유일한 희망이니까.”
“거기가 어떤 곳이든 간에 너한테 다른 놈이 손대는 일은 없어! 그런 놈들은 내가 다 죽여 버릴 거야!”
보안관이 해머로 돌기둥을 세차게 후려갈기며 소리친다. 말만 들어도 피가 거꾸로 솟는 모양이다.
“어! 와요! 와요!”
제니가 다급하게 외쳤다.
엑! 진짜?
삼식이가 얼른 뛰어 올라가서 망원경을 건네받았다.
“정말이네! 이런 젠장, 차가 지나갈 수 있을 만큼 길을 트려면 아직 시간이 좀 있어야 하는데!”
“어느 쪽에서 와? 몇 마리나 되는데?”
유빈이 아까 보험이라고 불렀던 모자와 분유 깡통을 챙겨 들며 물었다.
“10시! 몇 마리냐면…… 에, 대충만 봐도 스무 마리는 넘어. 하여간 꽤 많아. 어, 유빈이, 너 어디 가? 가지 마, 위험해!”
“괜찮아. 놈들 근처까지는 안 가!”
유빈은 깡통을 옆구리에 끼고 열 시 방향으로 뛰었다. 그리고 아직 좀비들이 꽤 멀리 있을 때, 뚜껑을 열고 불을 붙였다. 담배가 활활 타오르는 것을 확인한 유빈은 얼른 뚜껑을 닫고 테이프로 위아래를 동여 묶었다.
“이야아~!”
그들의 위치로부터 먼 방향을 향해 힘껏 깡통을 집어 던졌다. 풀밭 위로 날아가 떨어진 깡통의 구멍 사이로 흰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것을 확인한 유빈은 다시 일행을 향해 뛰었다.
저놈들을 끌어들인 게 불인지, 탄 냄새인지, 아니면 삼식이의 재떨이에서 풍겨 나오는 찌든 담배 냄새인지 알 수 없으니까 그 세 가지를 모두 캔 하나에 담아보았다. 셋 중에 하나만이라도 걸려라 하는 심정이었다.
저 허술한 미끼가 어느 정도나 효과를 발휘할 수 있을지는 모른다. 하지만 가능성은 꽤 높다고 생각했다. 단 몇 분만이라도 놈들의 발을 묶어줄 수 있다면…….
“뭐하고 온 거야, 대체? 놀랐잖아.”
방전이 돼버린 보안관을 대신해서 세 번째 돌기둥을 향해 해머를 휘두르던 삼식이가 물었다.
보안관은 물집이 터져 버린 손으로 열심히 볼트를 풀어 철책을 뜯어내고 있다. 신입조차도 새파랗게 질려서 부지런히 스패너를 돌린다.
지금 빨리 여기에서 달아나야 한다. 또다시 저 좁고 더러운 지하 통로의 물을 건너갈 수는 없다. 모두의 얼굴에 똑같은 생각이 드러난다. 삼식이에게서 해머를 넘겨받으며 유빈이 물었다.
“좀비들 어때? 아직도 이쪽으로 걸어와?”
콰앙―!
돌기둥에 해머가 부딪치자 손바닥이 찢어지는 것 같아 유빈은 이를 악물었다. 그동안의 노동으로 생긴 굳은살이 무색한 고통이다. 이런 걸 참으면서 기둥을 두 개나 박살 낸 보안관이 새삼 대단하게 느껴진다.
“아니, 방향을 좀 트는가 싶었는데, 아까부터 멈춰 있어요. 신기하네요. 대체 무슨 마술을 부렸기에 쟤들이 저기에서 멍하니 서 있는 거죠?”
효과가 있다! 얼마나 지속될는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저 방법이 놈들의 관심을 끈다는 건 확인했다!
유빈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힘껏 해머를 휘둘렀다.
아드레날린이 솟아 잠시 고통을 이기는가 싶었지만, 몸은 정직해서 곧바로 한계를 알린다. 아무리 멀쩡한 척하려고 애를 써도 해머를 휘두르는 강도가 눈에 띄게 약해져 버렸다.
“교대!”
보안관이 다시 유빈으로부터 해머를 빼앗아 쥐고서 돌기둥을 후려갈겼다.
쩡―! 쩡―!
벌써 소리의 클래스가 다르다. 그리고 한 번 더 해머를 맞은 돌기둥이 굵은 쇠 볼트와 함께 자빠진다. 길이 열렸다.
“가자! 다들 타!”
주먹을 불끈 쥐어 보인 보안관은 지붕에 서 있던 제니를 안아 내리며 코롤라의 운전석에 뛰어올랐다. 유빈도 오피러스의 기어를 D로 바꾸었다. 트렁크에 마지막 짐을 실은 삼식이와 신입이 좌석 깊숙이 기댄다.
부우우웅―
완만한 언덕길을 내려간 두 대의 자동차는 아직 물기가 남은 산책로를 따라 기분 좋게 달리기 시작했다.
11,200, 11,100, 11,000…….
순식간에 바닥의 숫자가 확확 줄어든다.
“우와~ 이 정도 페이스면 금방이겠는데?”
간만에 담배를 피워 문 삼식이가 황홀한 표정으로 연기를 내뿜으며 중얼거렸다. 뒷자리에 앉은 신입도 라이터를 열심히 켜고 있다. 기침이 좀 나기는 했지만, 유빈은 별 잔소리를 하지 않았다. 다들 상을 받을 자격이 있다.
물론 가장 큰 상을 받은 사람은 보안관이다. 섹시한 복장의 제니를 옆자리에 태우고 달리게 된 보안관은 껍질이 벗겨져 피가 나는 손바닥으로 핸들을 돌리면서도 아픈 줄을 모를 만큼 흥분해 있었다.
200여 미터를 더 전진하자 T자형 교차로에서 두 개의 산책로가 합쳐졌다. 위쪽으로는 높다란 고가도로가 보인다.
“저거, 북부간선도로 맞죠?”
그저 단순한 고가도로일 뿐이지만 제니에게는 뭔가 특별하게 느껴졌다. 막연하게 골목과 벌판이라는 개념 속에 갇혔다고 느끼고 있던 그들 앞에 처음으로 어딘가와 연결된 게 확실한, 명칭을 아는 길이 나타난 것이다.
으, 응, 보안관은 전방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건성으로 대답했다.
좁은 산책로인 데다 물난리가 휩쓸고 가며 낸 생채기가 여기저기 움푹움푹 파여 있어서 방심할 수가 없다. 보안관이 심상치 않다는 걸 눈치챈 제니가 핸들을 꽉 쥔 그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겹쳐 다독이며 말했다.
“이제 좀 천천히 가도 돼요. 우리 꽤 멀리 왔어요.”
그 말을 듣고서야 진정이 된 보안관은 가속 페달에서 발을 떼고 속도를 줄였다.
“그, 그러게. 내가 왜 이렇게 밟았지?”
미처 인식하지 못했지만, 그 역시 어지간히 두려웠던 모양이다. 아직도 벌렁거리며 격하게 뛰는 심장이 그 증거다.
“그 물속에서 엄청 무서웠을 텐데도 너는 침착하구나. 살면서 그렇게 더러운 일도, 또 그렇게 무서운 일도 아마 처음 겪었을 텐데.”
애정이 가득한 시선으로 제니를 보며 보안관이 말했다.
음, 잠시 생각하던 제니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더 무서웠던 적도 있고, 더 더러운 일도 있었어요.”
“진짜?”
“네, 유감스럽게도 그러네요. 그때는 테라랑 같이 있어서 그나마 참을 수 있었지만요. 그런 것보다 이것 좀 마셔요, 오빠. 아까부터 계속 일하느라 물도 제대로 못 마셨죠?”
제니가 뚜껑을 열고 물병을 입에 대준다. 황송하다는 표정으로 물을 받아 마시던 보안관이 갑자기 진지해져서 물었다.
“저기…… 지금 이렇게 잘해주는 것도 혹시 그 아까 말했던…… 전략이라는 개념에 들어가는 거야?”
“에? 설마요? 오빠도 참, 왜 그런 생각을 해요?”
“사실…… 네가 그렇게 입고 가면 더 좋은 대우를 받을 수 있다고 했을 때 좀 놀랐어. 나는 닳고 닳은 여우같은 애들이나 그런 생각을 하는 줄 알았었거든…….”
“하하하, 저 여우같이 닳고 닳은 애 맞아요. 아이돌이라는 게 원래 순진한 사람들 홀려서 지갑을 열게 만드는 직업이잖아요. 그리고 별처럼 많은 아이돌들 중에서도 테라랑 제가 제일 많은 사람들을 홀렸었고요. 우리는 그런 일에 익숙해요. 다리를 보여주고, 웃어주고, 진심이 아니어도 남들의 호감을 사는 일…… 아마 테라가 제 상황이었더라도 비슷한 컨셉으로 입을 옷을 골랐을걸요.”
보안관의 눈이 조금 슬퍼졌다. 중랑천을 만나면서 산책로는 다시 합쳐졌다.
그리고 여러 개의 물길이 하나로 만나게 될 때마다 더 강해진 물살은 길을 뭉텅이째로 뜯어내 놓은 바람에 운전이 더 조심스럽다. 잠시 침묵하던 제니가 다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영혼이 없다는 말은 아니에요. 진심으로 대해야 하는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분간할 정도는 되거든요. 오빠들 앞에서 거짓으로 웃은 적은 한 번도 없어요. 앞으로도 늘 그럴 거예요.”
보안관은 속도를 줄이고 제니를 돌아보았다. 분홍색 입술이 너무 예뻐서 지금 그냥 확 덮쳐 버리고 싶다. 어디 입술뿐인가……. 저 다리! 저 가슴! 저…….
하아아~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내쉰 보안관은 도리질을 쳐서 뇌의 거의 전부를 꽉 채운 망상을 겨우 몰아냈다. ‘왼쪽 길은 동부간선도로인가 봐요’ 따위 제니가 하는 말들은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한번 불이 붙어버린 마음속에는 오로지 그녀를 꽉 껴안고 미친 듯이 키스를 퍼붓고 싶은 욕망만이 가득하다.
산책로를 따라 배치된 몇 개의 농구장과 자전거 연습장을 지나는 동안 하천 쪽으로 무성하게 자라 있는 갈대가 흔들리며 분위기를 더 로맨틱하게 만들어준다.
하지만 완만한 코너를 돌았을 때, 갑자기 냉혹한 현실이 모습을 드러내며 보안관의 환상을 박살 내버렸다.
“이, 이런 젠장!”
브레이크를 밟으며 보안관은 욕설을 내뱉었다. 좁아져 있는 길 위로 굵직한 가로수가 뿌리째 뽑혀 쓰러져 있다. 그것도 연이어 세 그루나. 아마도 한쪽 방향으로 뻗어 있던 가지들이 강풍에 흔들리면서 이 사달이 난 모양이다.
“끄응~!”
차에서 내린 보안관은 나무를 밀 수 있는지 용을 써봤다. 꿈쩍도 않는다.
“막혔네.”
뒤차에서 내린 삼식이가 나무를 뒤꿈치로 쿵쿵, 차본다. 신입까지 참견을 하기 위해 내렸다.
“밧줄이나 그런 걸로 묶어서 차로 끌어내면 되잖아. 어…… 저 새끼, 저거 뭐야? 어딜 도망가?”
신입이 말을 하다 말고 소리를 지른다. 돌아보니 유빈은 차를 후진시키고 있다.
위이잉―
오피러스는 순식간에 코너를 빠져나가 시야 밖으로 사라져 버렸다. 신입이 갈라진 목소리로 생난리를 친다.
“아니, 저 미친 새끼, 뭐하는 거야? 15분만 차로 달리면 한강이네 어쩌네 하더니……. 야, 이 개새끼야! 우릴 여기다 내려두고서 혼자 도망가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