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 변곡점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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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2. 변곡점 (3)
2022.01.20.
민구의 사나운 눈빛에 움찔한 낙타는 자기도 모르게 한 발짝 물러났다. 그리고 그랬다는 것 때문에 더 화가 났다.
“아저씨! 독방에서 나오기 전에 사인한 거 그새 다 잊어먹었나 보네? 군인들의 지시를 잘 따르고 말썽을 일으킬 시 어떤 불이익도 달게 받아들이겠다는 거에 사인했을 텐데?”
그러자 주변의 사람들이 웅성거린다.
“저 낙타 닮은 군인, 저거 또 시작이다.”
“왜 저렇게 만날 사람들을 못살게 굴어?”
“아니, 근데 저 양복 입은 사람이 깡패래, 깡패…….”
여론이 2:1 이상의 비율로 자신에게 부정적으로 돌아가고 있음을 깨달은 낙타는 분을 이기지 못하고 소리를 질렀다.
“야, 가방 줘버려! 내가 진짜 참는다! 군인 신분으로 민간인을 깔 수가 없어서 참는다고!”
부하 병사가 구호품 상자와 사물함 열쇠, 민구의 가방을 테이블 위로 올려놓았을 때, 낙타는 갑자기 팔을 휘둘러 그것들을 밀어쳤다.
콰당!
구호품이 바닥에 떨어졌다. 민구의 표정이 서늘하게 바뀐다.
후우, 민구는 성질을 가라앉히기 위해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여기까지 온 길을 생각해라……. 육 회장을 만나는 게 우선이다…….
그렇게 자신을 설득하자 화가 조금은 가라앉는다.
“오늘 용꿈 꿨다고 생각해라. 박스만 주워. 그러면 살려준다.”
민구의 말에 낙타는 코웃음을 쳤다.
“참내…… 뭐라는 거냐, 이 새끼? 큭큭.”
그러면서도 낙타는 의자를 뒤로 조금 물려 민구와의 거리를 벌렸다.
“박스 주워. 더 말하지 않는다.”
“당신이 손이 없어? 이까짓 게 뭐라고! 자! 당신이 직접 줍든가!”
낙타는 성질을 이기지 못하고 소리를 빽! 지르며 박스를 걷어차 버렸다. 그건 실수였다. 발에 부딪혀 멈춘 박스를 잠시 보고 있던 민구의 눈에 살기가 어렸다.
민구는 생각했다.
급소를 피해서 딱 두 대만 때리자. 앞니 네 개랑 코뼈 정도면 이 녀석의 버르장머리도 좀 바로 잡힐 테지…….
군인을 때렸다가는 곧바로 추방당할지 모른다는 걱정이 들기도 했지만, 도저히 참고 봐줄 수가 없다.
24시간 동안이나 담배를 피우지 못해 극도로 예민해져 있는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민구의 허리가 꿈틀하면서 오른 주먹이 채찍처럼 휘둘러져 나온다. 낙타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제가 주울게요! 그럼 되잖아요.”
갑자기 둘 사이에 뛰어든 계집애 때문에 민구는 깜짝 놀라 주먹을 거뒀다. 짧은 원피스, 긴 검은 머리. 어제 철제 계단을 올라오면서 눈이 마주쳤던, 그 바짝 마른 계집애다.
“넌 뭐야? 비켜. 떨어뜨린 건 저놈인데…….”
박스를 주워 올리는 희고 가느다란 팔을 낚아채며 민구가 성질을 부린다. 겁먹은 눈으로 돌아보면서도 계집애는 입가에서 웃음을 거두지 않았다.
“하, 하하…… 에이, 왜 그러세요. 이런 건 정말 아무것도 아니잖아요. 화내지 마세요.”
“야! 너 그 손 안 놔! 테라 씨! 괜찮으세요?”
낙타와 시비하는 동안에는 뒤에서 그저 멀뚱멀뚱 보고만 있던 군인들이 갑자기 달려들어서 민구는 잠시 얼떨떨해졌다.
테라…… 어쩐지 낯이 익다 했더니, TV에서 보던 얼굴이었군…….
“아…… 괜찮아요, 오빠들. 저 이분, 아는 분이에요.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테라는 군인들과 민구를 떼어놓고 박스와 가방, 사물함 열쇠까지 모두 챙겼다. 그리고 아직도 분이 안 풀려 낙타를 노려보고 있는 민구를 잡아끌었다.
“자, 자, 가요. 가요, 아저씨. 사물함 어딘지 알려 드릴게요.”
평소의 민구였다면 상황이 이쯤 되었을 때 말을 들을 리가 없다. 하지만 지금 그는 테라의 손에 이끌려 순순히 그 자리에서 걸어 나오고 있다. 자기가 저지른 일을 잘 알기 때문이다.
“이만큼 멀리 왔으면 됐잖아. 내려놔. 그런 것보다…… 너, 맞은 데는 괜찮나?”
민구가 물었다. 갑자기 몸을 날린 테라를 보고 멈추기는 했지만, 분명 주먹이 입술을 스쳤다.
“조금 얼얼해요. 이따가 부을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괜찮아요.”
바닥에 물건들을 내려놓은 테라가 왼 입술을 살살 누르며 생글 웃는다. 아랫입술 끝에 살짝 피가 맺혀 있다.
젠장, 이런 미숙한 실수를…….
원할 때 제대로 주먹을 거두지 못했다는 것 때문에 기분이 상한 민구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걸 자책이라고 해석한 테라는 다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러니까 미안해하지 마세요.”
“왜 끼어든 거야? 뭘 바라는 건데?”
민구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그 무례함이 낯설었는지 커다란 눈을 깜빡거리던 테라가 대답했다.
“음, 어제요…… 아저씨가 들어오시는 걸 봤어요. 여기에 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걸어서 들어온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거든요. 여기까지 얼마나 고생스러웠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렇게 힘들게 싸우면서 겨우 왔는데 이까짓 작은 일을 못 참아서 하루 만에 다시 쫓겨나면 너무 억울하잖아요. 그래서요. 그냥 그것뿐이에요. 그럼…….”
테라는 공손히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 뒤돌아 가버렸다.
이게 지금 뭐지? 바라는 게 없다고?
테라의 행동이 너무 낯설게 느껴져서 민구는 혼란스러웠다. 지금이라도 그녀를 멈춰 세워서 어떻게 하면 입술 터뜨린 값을 치르는 게 되느냐고 물어보려 할 때, 귀에 익은 목소리가 그를 부른다.
“꺄아~ 오빠아! 강 실장 오빠아~!”
만배파에서 관리하던 연예인 계집애가 그를 향해 소리를 지르며 달려오고 있다. 워낙에 똑같이 성형수술을 해놓은 탓에 먼발치에서는 초희인지 가희인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그들에게 쏠린다.
“오빠아~ 벌써 나왔었구나! 독방 앞에서 기다려야지 했었는데, 그만 깜빡 늦잠을 잤지 뭐야~ 오빠, 내가 어제 강 실장 오빠 도착한 거 보고 얼마나 좋아했는지 모르지? 내가 막 손 흔들었는데.”
초희는 민구의 팔짱을 꽉 낀 채 가슴에 가져다 대며 아양을 부렸다.
“몰라. 안 들렸어. 이것 좀 놔.”
민구의 시선 끝에서 테라를 발견한 초희가 발끈한다.
“뭐야, 또 테라 저년이야? 흥, 여우 같은 년. 그새 벌써 강 실장 오빠한테도 꼬리를 치고 갔나 보네. 있지, 오빠. 저거 병신 됐다? 발가락이 뭉텅 하고 잘려 나갔더라고. 가까이서 보면 얼마나 징그러운지 모르지? 그런데도 좋다는 새끼들이 있으니 참…….”
“좀 닥쳐. 회장님은?”
초희를 떼어낸 뒤, 민구가 물었다.
“으응, 회장님이랑 우리 식구들 다 다른 데로 옮겨 갔어. 여기 말고 건대에도 또 이런 데가 있나 봐. 회장님이 나한테 신신당부를 하고 가셨거든. 강 실장 오빠 꼭 올 거니까 잘 모시다가 꼭 뒤따라오라고. 그게 어젠데…… 아마 며칠 동안은 기다려야 할 거야. 후훗, 생각해 보니까 그동안 강 실장 오빠는 내가 독점하는 거네?”
“다른 데로 갔다고? 왜?”
“군대에 끌려가지 않으려면 일단 피해야 한다나 뭐라나 했었는데…… 어? 강 실장 오빠, 어디 가?”
민구가 가방을 챙겨 들고 성큼성큼 걸어가자 초희가 종종걸음으로 뒤따른다.
“담배 피우는 데 어디야?”
“그쪽 아니야, 오빠. 반대로 가야 해.”
외야석 흡연 구역에 도착한 민구가 담배를 물자 초희는 재빨리 불을 붙여 주었다.
후우우~ 민구는 깊이 빨아들인 연기를 천천히 내뱉었다. 오랜만에 피우는 거라 가벼운 구토까지 일 정도다.
“강 실장 오빠, 근데 나 소원이 하나 있는데…….”
바로 곁에 서서 담배를 뻑뻑 피우던 초희가 눈치를 살피며 입을 뗐다. 민구가 신경도 쓰지 않자 다급해진 초희는 바짝 몸을 붙이며 귀에 대고 속삭였다.
“있지…… 건대로 가기 전에 테라, 그년한테 칼빵 좀 놔주고 가면 안 돼? 그 쌍년이 회장님이랑 우리 식구들 다 좃나게 무시하고 우습게 봤었단 말이야. 응? 오빠, 그년 그 꼴 난 얼굴 딱 세 번만 그어주라. 그러면 나 속이 다 후련할 것 같아. 몰래 긋고 화장실에 처박아놓으면 아무도 모를 거니까, 건대로 출발하기 직전에 하면 돼.”
듣고 있던 민구가 초희를 빤히 쳐다본다.
“너 아침부터 약 먹었냐?”
“아잉, 오빠는 무슨 그런 말을 해요? 약도 없어. 기동이 오빠가 다 가지고 가서…… 악!”
민구에게 머리채를 휘어 잡힌 초희가 겁에 질린 비명을 삼키고 몸을 움츠린다.
“이년이 지금 누구한테 심부름을 시키는 거야? 응?”
“오, 오빠…… 강 실장 오빠, 잘못했어요. 너, 너무 반가워서 그만…… 한 번만 용서해 주세요…….”
싹싹 비는 초희를 밀친 민구는 두 개비째 담배를 꺼내 물었다.
젠장, 가뜩이나 이래저래 더러웠던 기분이 미친년 때문에 몇 배나 더 엿 같아졌다.
***
민구가 초희의 머리채를 잡고 밀친 그 아침에, 진우는 웃통을 벗은 채로 좀비 할머니의 집 텃밭을 파헤치고 있었다.
삽은 별채로 지어진 창고에서 가져온 것이다. 농사를 짓는 집답게 여러 가지 연장이 많았고, 할머니가 쓰던 것치고는 상태도 좋았다.
“후욱! 후욱!”
진우는 용을 써가며 열심히 삽질을 했다. 비를 잔뜩 먹은 땅이라 삽이 팍팍 박히는 건 좋은데, 자꾸 삽 끝에 진흙이 엉겨 붙는 바람에 계속 흙을 털어가며 작업을 하는 게 귀찮다.
틱, 사선으로 메고 있는 K―2가 가끔씩 삽에 부딪히지만, 이걸 몸에서 떼어놓을 수는 없다.
- 야, 이 새끼야! 그렇게 하는 게 아니라 이렇게 손목을 쓰란 말이야! 이렇게! 팍! 팍! 봤냐?
삽질의 요령을 설명하며 시범을 보이던 김 상병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진우의 입에서 씁쓸한 미소가 흘러나왔다.
줄곧 노가다를 뛰다 들어온 신병에게 삽질의 기본을 가르쳐 줄 만큼 어딘가 허술하고, 뻥뻥거리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만큼 따뜻하고 인간적인 사람이었다.
“후우~”
어느 정도 팠는지를 살펴보기 위해 진우는 허리를 펴고 땀을 닦았다. 아침 이른 시간인데도 벌써 푹푹 찐다. 불을 피우지 않고는 도저히 버텨낼 수 없던 길고 긴 어젯밤이 거짓말인 것 같다.
하늘은 맑고, 해는 다시 뜨거워졌다. 여기저기 무너져 내린 흙더미들과 뿌리째 뽑혀 자빠져 있는 나무들만 아니라면 태풍이 지나간 흔적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대충 된 건가…….”
자신의 파낸 땅의 크기와 넓이를 살펴보며 진우는 종이 팩에 든 두유로 갈증을 달랬다.
좀비 할머니의 집에는 생수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사방에 샘물이 널려 있고 수도만 틀면 물이 콸콸 흘러나왔을 거라, 애초에 따로 물을 담아둘 필요가 없었을 터였다.
하지만 진우에게 그것은 생존에 심각한 위협을 주는 문제였다. 믿고 마실 만한 물이 없다. 그렇게 간절하던 때 찾아낸 것이 이 두유다.
할머니가 12개짜리 박스에서 딱 하나만 빼 먹고 곱게 모셔두었던 것을 밤새 몇 팩이나, 그리고 지금도, 생전의 할머니와는 일면식도 없는 어린 군인이 마시고 있는 것이다.
진우가 할머니의 집에서 챙긴 것은 두유만이 아니었다. 곁에 놓아둔 낡은 천 가방에는 라면과 쌀이 담겨 있다.
욕심 같아서는 눈에 띄는 먹을거리를 다 챙기고 싶었지만, 그렇게 무거운 짐을 가지고 이동할 수는 없기에 적당한 양만을 담았다.
하지만 그는 도둑놈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지금 그 음식들에 대한 값을 치르는 중이다.
“끄응차~!”
이불보로 감싼 좀비 할머니의 시체를 조금 전 파둔 구덩이 쪽으로 끌어당겼다.
조그만 할머니의 시체를 옮기는 것뿐이지만, 밤새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한 데다가 아침부터 삽질을 하느라 기진맥진한 덕에 진우의 입에서는 저절로 용쓰는 소리가 새어 나온다.
할머니의 시체가 눕혀진 자리 바로 곁에는 그녀가 얼마 전까지도 정성들여 돌봤을 채소들의 뿌리가 제멋대로 널려 있다.
진우는 부지런히 삽을 놀려 퍼둔 흙을 다시 덮었다. 그렇게 한참을 진땀 흘려 일한 덕에 할머니는 땅에 묻혔다.
깊게 파지도 못했고, 봉분이랄 것도 없이 그저 거칠게 만들어진 무덤이지만, 적어도 장사는 지낸 셈이다.
진우는 천 가방에서 할머니의 사진이 든 액자를 꺼내 축축하게 젖은 무덤의 흙에 박았다. 나중에라도 누군가 이곳을 지난다면 이 액자를 통해 무덤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아낼 수 있도록.
“……이걸로 봐줘요.”
벽에 걸려 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흙 위에서도 환하게 웃고 있는 사진 속의 할머니를 향해 진우가 중얼거렸다.
그렇게 작업을 마무리 지은 그는 다시 군복을 걸치고 먹을 것이 든 천 가방을 사선으로 둘러멨다. 죄의식을 좀 덜어내자 왠지 가방의 무게도 한결 가벼워진 것 같다.
할머니의 집에서 빠져나온 진우는 흙투성이가 된 비탈길을 따라 씩씩하게 걸어 내려갔다.
자신이 지금 정확하게 어디에 있는지도, 동서남북 중 어느 방향으로 가고 있는 중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비관적인 생각에 젖어 있기에는 너무도 화창한 햇살이 온 세상을 가득 비춰주고 있다.
“좋아! 가보자!”
스스로를 향해 격려를 보낸 진우는 걸음을 더욱 서둘렀다. 이 포장도로를 따라 걷다 보면 반드시 넓은 차도를 만나게 될 것이라고, 그리고 그 길 위에서 꼭 해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그렇게 믿기로 했다.
***
“으아, 장난 아니야. 진짜 너무하다.”
번화가 길 위에 세녹스 통을 내려놓으며 삼식이가 투덜댔다.
찰박.
그의 발이 닿자 고여 있던 물에 파장이 일며 흔들렸다.
골목 전체가 20센티미터가량의 물로 뒤덮여 있다. 그리고 그 위로는 깨진 유리 조각부터 좀비의 내장이나 오물까지 온갖 것들이 둥둥 떠다닌다.
“왜 물이 안 빠진 거야? 어제 비가 기록적인 폭우, 뭐 그런 거였나? 아니, 실제로 비 왔던 시간은 그렇게 길지도 않았잖아? 에이, 축축해. 씨발.”
세녹스를 가지고 오는 동안 신발을 흠뻑 적신 신입이 원망스러운 얼굴로 욕설을 늘어놓았다.
“그런 게 아니야. 하수 펌프가 작동하지 않으니까 낮은 지대에서 빗물이 제때 빠져나가지를 못하고 있는 거지.”
유빈이 말했다. 흙으로 된 지반과 달리 콘크리트와 아스팔트는 도무지 빗물을 빨아들여 주지 않는다.
전기와 수도가 끊기고 나니, 도시에서의 생활이라는 게 보이지 않는 곳에서 얼마나 많은 비용을 지불해야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인지가 실감되었다.
이 정도의 물난리만으로도 행동의 제약은 부쩍 늘었고, 모든 것이 계획보다 더 많은 시간을 필요로 했다.
물론 달리기가 느려지는 만큼 위험도는 반비례하며 상승해 있다. 다행인 것은 아무도 다치지 않고 음식과 세녹스를 가지고 왔다는 점이다.
“근데 그 큰 봉투는 뭐예요, 오빠?”
보안관과 함께 슈퍼에서부터 음식을 가지고 온 제니가 유빈의 손에 들린 커다란 비닐 봉투를 가리키며 물었다.
“응. 이거, 우리 신을 새 신발. 차에 타기 전에 물로 대충 씻고 이걸로 갈아 신어야지.”
유빈이 열어 보인 봉투 안에는 등산용품 가게에서 집어 온 새 등산화와 양말이 머릿수에 맞게 한 켤레씩 들어 있다.
그들이 지금껏 신어온 안전화는 고어텍스로 만들어진 꽤 좋은 놈이지만, 빗물이 발목을 넘겨 들어가 버린 순간, 방수라는 게 아무런 의미도 없어졌다.
그리고 이 더러운 물을 신발에 담고서 계속 돌아다녔다가는 언제 무슨 피부병에 걸린대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다.
“다 가지고 왔나? 그럼 출발하자.”
물의 저항 때문에 잘 구르지 않는 쇼핑 카트에 짐들을 싣고 지하 통로 앞에 도착한 일행은 계단 아래로 플래시를 비춰 보다가 고통스러운 탄식을 내뱉어야 했다.
지하 통로 전체가 탁한 물에 잠겨 있었다. 비가 한창 퍼부을 때 넘치던 물이 이곳으로 쏟아져 들어갔고, 오물과 쓰레기 탓에 이 배수구도 막힌 모양이다.
“어휴, 어쩌냐?”
난감하다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유빈은 일단 천천히 계단을 따라 걸어 내려가 봤다.
찰박.
계단이 아직 네댓 개나 남은 시점부터 벌써 시궁창 냄새가 나는 물이 그를 반겨준다.
차가운 물이 발목을 거쳐 종아리를 적신다. 이 물속에 수많은 사람의 피와 좀비의 뇌수가 오물과 함께 섞여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자 구역질이 치밀어 오르는 것 같다.
우웁, 유빈은 뒤집어지는 속을 달래며 난간을 꽉 붙잡고 한 계단씩 더 아래로 내려갔다. 허벅지, 허리를 지나 명치 부근까지 담갔는데도 아직 바닥에 닿았다는 느낌이 없다.
계단이 얼마나 남은 걸까…….
플래시를 비춰봐도 물이 워낙 탁해서 보이지를 않는다. 유빈은 이를 질끈 다물고 한 발짝을 더 내디뎠다.
겨드랑이가 서늘해진다. 그리고 마침내 평평한 바닥을 만났다. 이 정도 수심이라면 제니에게는 거의 턱 끝까지 차오를 것이다.
“어휴, 냄새. 이 근처 화장실이 다 이쪽으로 역류했나 보다.”
뒤를 따라 내려온 보안관이 물가에 서서 코를 막는다. 그 말 그대로 엄청난 악취가 지하 통로 전체를 메우고 있었다.
하아~ 하아~ 유빈은 가능한 한 입으로 숨을 쉬면서 플래시로 통로 반대편 끝을 비췄다. 다행히 눈에 보이는 범위 내에 좀비는 없었다.
하지만 판단을 내리기에는 시야가 너무 좁다.
만에 하나 좀비가 물속에 잠겨 있다면 어쩌지?
걱정이 유빈의 얼굴을 스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