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 변곡점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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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1.19.
“아니, 우린 안 걸어가.”
잔뜩 들떠 벽에서 지도를 뜯어내던 유빈이 대답했다.
“뭐? 그럼 어떻게…….”
질문이 보안관의 입에서 떨어지기도 전에 유빈은 말을 계속 이었다. 소풍 떠나기 전날. 슈퍼에 과자를 사러 온 아이처럼 들뜬 목소리였다.
“차를 타고 갈 거야. 간단해. 진입 못 하도록 막아놓은 돌기둥 두어 개만 부수면 돼. 이제는 산책로에 자동차를 끌고 들어왔다고 단속하는 사람도 없고, 불평할 사람도 없으니까. 넓이도 다 재봤어. 충분하고도 남아! 겨우 11킬로야, 보안관! 밟기 시작하면 15분도 안 걸려!”
3층 집으로 돌아온 뒤에도 쉽게 흥분이 가라앉지 않은 유빈은 밥도 먹는 둥 마는 둥하며 잔뜩 들뜬 목소리로 제니와 삼식이에게 산책로를 따라 이동하는 계획을 설명했다.
소주 나발을 불었는지 그새 드르렁대며 깊은 잠에 빠진 신입은 그냥 내버려 뒀다.
“흐음, 너무 괜찮아서 구라 같은 이야기네. 저 앞의 산책로가 한강까지 뻗어 있다, 이거지? 근데 그런 걸 왜 만들어놨지?”
삼식이가 벌써 며칠째 감지 못한 머리를 긁적이며 물었다.
쿠르르릉―
밖에서는 천둥이 요란스레 울리고, 사나운 빗줄기는 베란다 통유리를 두드려 댄다. 바람 때문에 격하게 흔들리는 유리가 금방이라도 깨질 것 같다.
“뭐…… 사람들 자전거 타거나 조깅하라고 만들어놓은 거 아닐까? 웰빙 시대잖아.”
“그럼 한강까지는 간 다음에는 어떻게 되는 거예요? 거기에서 잠실까지도 꽤 멀어요. 강도 건너야 하고요.”
바닥에 펴놓은 지도를 유심히 들여다보던 제니가 가늘고 긴 손가락으로 잠실야구장을 짚는다. 유빈은 이마를 찌푸렸다. 그에게도 아직 고민으로 남은 부분이었기 때문이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아마 거기까지 가면 배를 구할 수 있지 않을까? 하다못해 오리 보트 같은 것만 있어도 강은 건널 수 있으니 말이야. 그리고 대피소 부근에 가면 군인들이 보초를 서다가 구조해 줄 수도 있지 않나 하는 기대도 좀 있고.”
“이 태풍이 불어닥친 다음에 배가 멀쩡할까? 누가 묶어놓지도 않았을 텐데…….”
보안관의 말이 정곡을 찌른다. 플래시 불빛을 중심으로 머리를 모으고 앉은 네 사람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딱 하루만 일찍 생각해 냈어도…….
유빈이 기죽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런 것보다 말이지, 잠실에 정말로 대피소 같은 게 있기는 한 걸까? 말로만 있다고 해놓고 막상 가보면 아무도 없는 건 아니냐? 요즘 뭐 제대로 돌아가는 걸 본 적이 없으니까 도무지 믿음이 안 가네.”
삼식이가 보다 근본적인 것에 대한 질문을 던졌다. 제주도에 숨어서 방송을 내보내는 주제에 며칠만 기다리라고 했던 놈들이니, 뭔 허튼짓을 했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다.
그때 방송에 나왔던 여자 고위 관료는 아무리 길어도 일주일이면 사태를 수습할 거라고 했는데, 그 일주일은 벌써 지나갔다.
콰장창―
어디선가 유리창이 깨지는 소리가 요란스레 귀를 때린다. 창문을 열어둔 건물들은 여지없이 강풍에 유리가 박살 났다.
“음…… 만약 정말로 가봤는데 아무것도 없으면 다시 돌아와야지, 뭐. 하지만 그래도 시도해 볼 만한 가치는 있는 것 같아.”
그렇게 말을 하면서도 유빈은 이곳으로 다시 돌아오기 어렵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비록 아직 소수에 불과하지만, 좀비들은 벌판 쪽으로 방향을 잡고 이동하는 상황이고 벌판을 배회하던 놈들이 산책로만 건너면 곧바로 경전철역이다. 젖과 꿀이 흐르던 복지 센터 시절은 이제 막을 내렸다.
“한강까지 갔는데 아무것도 없으면 차라리 배를 고쳐서 타고 인천 앞바다까지 쭉 나가자. 그쪽에는 무인도도 꽤 많이 있거든.”
삼식이가 뒤로 벌렁 누우며 중얼거린다. 벌써 의식의 흐름이 마구 진행되기 시작했나 보다. 보안관이 어이없어 하며 묻는다.
“오리 보트 페달을 밟아서 바다까지 나간다고? 네가 무슨 사이클 선수냐?”
“헤엥~ 보안관, 너는 제니 옆에 태우고 못 가는 모양이구나?”
“나, 나야 당연히 갈 수 있지.”
보안관이 곧 말려든다.
“그럼 우리도 갈 수 있어. 까짓것, 힘들면 좀 쉬었다가 밟고 그러지, 뭐. 어차피 물이 흐르는 대로 가는 거니까 그렇게 빡세지는 않을 거야.”
“그렇게까지 해서 무인도로 가면 뭐가 좋아요? 말 그대로 아무것도 없잖아요. 어디에서 자고 뭘 먹고 살아요? 물도 없을 텐데.”
제니도 망상대전에 동참해 버렸다.
아니, 애초에 도저히 무리라니까. 무인도를 찾아가려면 인천에서부터만 계산해도 파도 치는 바다를 20킬로미터는 가야 하는 거라고…….
유빈은 얼굴을 쓸어내렸다. 하지만 나머지 세 사람은 이젠 완전히 진지해져서, 오리 보트로 무인도 가기 작전에 대한 설전이 한창이다.
“아니야. 무인도라고 해도 실제로는 사람들이 사는 곳이 꽤 많거든. 낚시꾼들 재워주는 민박집이랑 마실 물도 있어. 또 어떤 섬에는 등대 건물도 있고. 내가 가본 무인도 등대는 엄청 큰 현대식 건물에 붙어 있었어. 이 집보다도 더 커. 그러니까 잠은 그런 데서 자면 되지. 그리고 낚시를 해서 물고기라도 잡아먹으면 되고.”
촤악―
삼식이가 낚싯대를 던지는 시늉을 한다. 하지만 유빈이 아는 한, 저놈은 아직 실제로는 한 번도 낚시를 해본 경험이 없다. 휴우~ 제니가 시무룩한 표정을 짓는다.
“그렇게 원시인처럼 살아야 하는 거예요? 하아~ 죽을 때까지 양념도 하지 않은 생선 구이만 먹고 살아야 한다니, 뭔가 좀 슬퍼지네요.”
“에이, 설마. 시간이 좀 지나고 나면 좀비든 뭐든 어느 정도 정리가 되겠지. 그러면 등대를 고치기 위해서라도 수리반이 올 테고. 우린 그때까지만 버티는 거야.”
삼식이의 낙관론은 바닥이 보이지 않는다. 제니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만약에…… 아무리 기다려도 아무도 오지 않으면요? 그럼 어떡해요?”
“그래도 최소한 언제 좀비들이 쳐들어와서 우릴 죽일까, 매일 마음 졸이면서 사는 것보다야 낫지.”
어느새 대피소로의 이동 계획 논의가 무인도로의 이동 계획 논의로 변질되어 버렸다. 유빈이는 지도를 펄럭펄럭 흔들어 세 사람의 주의를 집중시켰다.
“야, 그럴 일 없어. 대피소가 분명히 있을 거야. 그러니까 로빈슨 크루소 같은 이야기는 그만해. 그런 것보다 뭘 가져갈지, 뭘 두고 갈지에 대해서나 생각해 보자. 차 두 대에 나눠 타고 간다고 해도 짐을 무한정 실을 수는 없는 거니까. 내일 산책로에서 물이 빠지는 대로 출발하려면 뭐부터 할지 미리 계획을 가지고 있어야 돼.”
“밟기 시작하면 15분이면 간다더니…….”
“거리는 11킬로미터밖에 안 되니까 짧아. 하지만 내가 어떤 인간인지 잘 알잖아. 나는 걱정이 많은 놈이라서 뭐든지 준비가 철저히 안 돼 있으면 불안하다고. 물이든 먹을 거든 적어도 사흘치는 챙겨 가고 싶어. 오피러스에 기름이 별로 없으니까 세녹스도 필요하고.”
“흐음~ 그러면 아침부터 꽤 바쁘겠는데? 세녹스도 가지고 와야 하고, 짐도 계속 들어 날라야 하는 거잖아.”
그렇게 해서 네 사람은 조금쯤은 낭만적이었던 무인도의 꿈을 놓아주고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해야 할 일들과 그 일을 할 사람을 종이에 적고, 일의 순서를 조정하는 동안에도 계속해서 벼락이 번쩍거리고 사나운 바람은 유리창을 흔들어 댄다. 꼼꼼하게 따져 보니 해야 하는 일들이 꽤 많다.
회의를 끝냈을 때, 어느새 시간은 밤 열 시에 가까워져 있었고, 마지막 폭우를 쏟아부은 태풍은 서쪽을 향해 물러나는 중이었다.
“흐아암~”
보안관이 하품을 하며 졸린 눈을 비볐다. 어제 제니의 잠꼬대 때문에 잠을 설쳤기에 졸음이 쏟아질 만도 하다.
“아, 난 도저히 더 못 버티겠다. 자야겠어. 다들 잘 자라.”
그 말과 함께 거실 구석에 팔베개를 하고 누운 보안관은 이내 도롱도롱 숨을 몰아쉬며 깊은 잠에 빠져 버렸다.
“나는 옥상에서 담배 한 대 피우고 올게. 이제 비도 더 안 오는 것 같고…… 너희, 맑은 공기 쐬고 싶지 않아?”
삼식이가 허리를 쭉 펴며 일어났다. 괜찮은 생각인 것 같아 유빈과 제니도 그 뒤를 따라나섰다.
흐으음~ 가슴 깊이 숨을 들이쉬자 청량한 밤공기가 폐에 가득 찬다. 세 사람은 난간에 기댄 채 아주 먼 곳까지 꽉꽉 들어차 있는 어둠을 바라보았다.
새 출발을 앞둔 밤, 설렘과 두려움이 빠르게 교차하며 마음을 어지럽힌다.
멀리 칠흑 같은 암흑 사이로 점점이 흩뿌려진 아주 조그만 불빛들이 눈에 띄었다. 아직 살아남은 누군가가 저 먼 곳 어딘가에서 어둠과 추위를 이겨 보려고 피워둔 모닥불이리라.
“이제 슬슬 들어갈까? 우리도 들어가서 자둬야지.”
삼식이가 담배 한 대를 다 피우고 나서도 어느 정도의 시간이 더 흘렀을 때, 유빈이 말했다. 싱긋 웃는 제니의 얼굴에 장난기가 데굴데굴하다.
“저 지금 억지로 잠들면 또 어제처럼 막 소리 지르다가 깰 거 같은데…….”
“어휴~ 그건 좀 봐줘라.”
유빈이 두 손을 모아 비는 시늉을 했다.
“그러니까 조금만 더 있다가 내려가요. 여기 있으니까 마음이 차분해지는 것 같아서 좋아요.”
“춥지 않아? 바람이 이렇게 부는데.”
“좀 쌀쌀해지는 것 같기는 한데, 괜찮아요. 오빠가 재킷을 벗어서 덮어줄 테니까요.”
그래서 유빈은 재킷을 빼앗겼다. 셔츠 차림이라도 팔짱을 끼면 버틸 수는 있다.
겨우 잠이 들었는데 비명 소리에 놀라 허겁지겁 깨는 것보다는 약간 추운 편이 나으니까. 애초에 긴팔 셔츠 하나만 입고 있던 삼식이는 이 뺏고 빼앗기는 일에서 다행히 무관했다.
“근데 아침에 그놈들 말이야.”
두 번째 담배에 불을 붙이며 삼식이가 입을 열었다.
“대체 왜 그렇게 몰려온 거라고 생각해? 하루 만에 그 많은 놈들이 우연히 모여들었다고 생각하면 너무 뜬금없잖아.”
여름답지 않게 제법 쌀쌀하게 부는 바람이 담배 연기를 사방으로 흐트러뜨린다. 잠시 생각하던 유빈이 대답했다.
“자동차들 모아놓고 불 질렀던 자리로 몰려간 거 보면 분명 불과 관련이 있는 것 같긴 한데…… 정확하게 뭐에 끌리는 건지는 모르겠어. 불인지, 아니면 탄 냄새인지…….”
“복지 센터 앞에 있던 놈들은 그럼 어떻게 이해해야 돼? 내 재떨이 주변에 무더기로 모여 서 있었던 놈들 말이야.”
“꽁초에서 탄 냄새가 나니까, 그것 때문일까?”
“글쎄, 꽁초를 물에 버린 건데 탄 냄새가 났을까? 지독한 담뱃진 냄새 같은 거라면 몰라도. 역시 그놈들, 담배를 좋아하는 걸지도 모르겠어. 그럼 이렇게 피우면 안 되는 건데…….”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삼식이는 아주 맛있게 담배 연기를 빨아들였다. 제니가 묻는다.
“그걸 피우면 답답한 게 좀 풀려요?”
“응? 아니, 뭐…… 딱히 그렇다고 볼 수는 없지만…… 한번 버릇이 들면 자꾸 생각이 나거든. 음…… 아닌가? 네 말을 듣고 보니 스트레스 해소가 조금은 되는 것 같기도 하고.”
“그럼 저도 하나 줘봐요.”
“엑?”
유빈이 놀라서 돌아보았지만 삼식이는 자, 하며 곧장 담배 한 개비를 건네고 불까지 붙여주었다. 바람 때문에 꽤 한참이나 걸려서 겨우 불이 붙었다.
“푸웁~! 쿡! 쿨럭! 풉, 에~ 이게 뭐야?”
담배 연기를 빨아들인 제니는 이내 기침을 하고 얼굴을 찡그린다. 가볍게 눈물까지 맺힌 모습에 삼식이와 유빈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도 제니는 굴하지 않고 재차 담배를 입에 가져간다.
“그냥 옆에서 맡는 것보다 훨씬 맵네요. 쿨럭! 켁!”
입에만 연기를 담았다 뿜기를 두어 번 반복한 제니는 마침내 포기하고 담배를 4층 높이 아래 바닥으로 던져 버렸다.
“여기가 그리워지겠죠? 저 복지 센터, 슈퍼, 그리고 이 건물.”
천천히 한 바퀴를 돌아보다가 멈춰 선 제니가 말했다. 그녀의 시선이 고정된 옥상 문 주변에는 깨진 유리 조각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다. 일전에 스포츠머리 일행 두 놈과 유빈이 사투를 벌였을 때의 흔적들이다.
“아마, 이보다 불편한 환경으로 가면 그렇게 되겠지. 더 나은 곳에서 살다 보면 금방 까맣게 잊을 거고.”
유빈이 대답하자 제니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여기는 정말 잊기 어려울 것 같아요. 돌이켜 보면 며칠밖에 되지 않는 시간이었는데, 정말 많은 일을 경험했어요. 나쁜 일들도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굉장히 운도 좋았고요.”
“뭐…… 어쨌든 이렇게 살아남았으니까 굳이 따지자면 운이 좋은 편이었다고 해야겠지. 후우~ 그 운이 내일도, 모레도 계속 좋아야 할 텐데.”
“무서워요?”
“응. 어떤 일을 겪게 될지 전혀 모르고 있으니까.”
유빈은 솔직하게 대답했다. 이론적으로는 불과 11킬로미터만 쭉 뻗은 도로를 따라 차를 몰고 가면 한강까지 닿는다. 그리고 거기서 강만 건너면 대피소다.
배가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다 큰 남자 네 명이 도구를 사용한다면 강을 가로지를 만한 도구쯤은 얼마든지 만들 수 있을 거라고 믿고 싶다.
하지만 현실은 분명 녹록지 않다. 이론 속에서처럼 모든 일이 척척 아귀가 들어맞지는 않을 것이다.
하수 펌프가 가동되지 않는 탓에 도로 위에 고여 있는 물만 해도 내일까지 다 빠져 주지 않으면 여러모로 귀찮아질 게 분명하다.
“그렇게 말하니까 지금 이 순간이 더 소중하게 느껴지네요. 조금만 더 있다가 내려가요.”
재킷의 지퍼를 쭉 당겨 코를 덮을 만큼 끌어 올린 제니는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컹컹컹―
멀리서 개들이 짖어 댄다. 그렇게 밤이 깊어갔다.
***
다음 날 아침, 일곱 시가 조금 지나자 민구는 자유의 몸이 되었다.
“격리 수용 시간 만룝니다. 수고하셨습니다. 나오십쇼.”
철창문을 열어준 보초병이 서명해 달라며 서류 세 장을 내민다.
민구는 뭔지 물어보지도 않고 대충 이름을 휘리릭 갈겨써 줬다. 읽어보나마나 여기 들어온 이상 어차피 해야만 하는 필수 과정일 테니까. 보초병은 도장이 찍힌 조그만 딱지를 쥐여주었다.
“뭐요, 이건?”
“이 쪽지를 대민 지원 센터로 가져가 보이시면 개인용 생필품을 지급해 드릴 겁니다.”
생필품이라고 해봐야 허접한 물건들일 테지.
민구는 귀담아듣지 않았다. 혹시 중요한 물건들이 들어 있다고 해도 일단 만배파 조직원들과 합류한 뒤에 애들을 심부름 보내 찾아오면 된다.
그런 것보다 24시간 동안이나 못 피운 담배 생각이 간절했다. 일단 가방을 찾은 뒤, 곧장 담배를 피우러 가고 싶다. 담배와 라이터는 가방에 넣어두라고 해서 철창 안에 들어가기 전 압수를 당했다.
“내 가방은 어디 있소? 여기 들어오면서 맡긴 것 말이오.”
“그것도 거기에서 보관하고 있을 겁니다.”
어쩔 수 없이 민구는 대민 지원 센터를 찾아갔다. 아직 아침인데도 대기 중에는 큰비가 내린 다음 날 특유의 눅눅하고 끈적한 열기로 후끈하다.
어지간히 푹푹 찌려는 모양이군…….
민구는 와이셔츠 단추를 하나 더 풀었다. 산더미처럼 쌓아둔 구호품 박스들 덕에 대민 지원 센터는 쉽게 눈에 띄었다.
세 개를 이어 붙여둔 테이블 가운데에는 낙타처럼 생긴 군인 녀석이 가뜩이나 못난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앉아 있다.
“가방을 찾으러 왔소.”
민구는 테이블 위에 종이 쪽지를 내려놓았다. 낙타는 그의 말이 들리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옆으로 돌린 채 그의 부하들과 잡담을 나누고 있다.
내가 사회에 있을 때는 말이야…….
낙타는 겉멋이 잔뜩 들어간 목소리로 아무 쓸데없는 헛소리들을 엄청 재미있는 이야기인 것처럼 늘어놓고 있었다.
쿵쿵, 민구는 테이블을 가볍게 두어 번 노크했다. 낙타가 눈을 흘긴다.
“뭔데, 아저씨?”
“내 가방이 여기 있다고 들었는데.”
훗, 낙타는 대답을 해 주지 않은 채 고개를 다시 부하들 쪽으로 돌렸다.
“야, 나는 말이지, 도저히 이해가 안 돼. 지금 같은 위기 상황에서 우리가 깡패 새끼들까지 보호해야 하냐? 응? 아니, 이게 말이 되는 거냐, 이 말이야. 아무 때나 제멋대로 칼이나 휘두르고 다니던 깡패 새끼들까지 다 받아주느라 막상 선량한 국민들은 제대로 도와줄 수가 없다니까? 야, 내 생각엔 그런 새끼들은 눈에 띄는 대로 그냥 싹 다 잡아다가 좀비 먹이로 던져 줘야 한다고 봐. 아니면 총알받이로 쓰든가. 하여간 그런 것들은 살려둘 가치가 없어! 좀비 세상 끝나자마자 또 나가서 죄를 저지른다고. 근데 씨발, 윗대가리들은 그런 것들도 똑같이 구호품을 주고 보호를 해주라고 하네? 에이, 좃도! 이런 구호품도 다 국민의 소중한 세금으로 산 건데 말이야. 쯧쯧쯧, 아쉬워. 내가 높은 자리에 있었으면 이런 기회가 왔을 때 아예 청소를 해버릴 텐데……. 그냥 모가지를 탁―!”
낙타가 목소리를 높여 일장 연설을 쏟아내는 바람에 아침 식사를 배급받기 위해 근처를 지나던 사람들이 멈춰 서서 구경까지 하고 있다. 민구는 무덤덤하게 말했다.
“다 지껄였으면 가방이나 내놔. 담배 피우러 가야 하니까.”
“뭐어? 아저씨, 지금 뭐라고 그랬어? 뭐? 지껄여?”
낙타가 테이블을 쾅! 치면서 일어난다.
“가방.”
민구가 낙타를 노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