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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1.18.
“돌아가자……. 애들이 걱정하고 있을 거야.”
한동안의 정적을 깨고 유빈이 말했을 때, 보안관은 입술을 앙다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유빈은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액셀러레이터를 밟았다.
씨이잉―
진창으로 변해가는 흙바닥에서 잠시 헛돌던 타이어는 이내 접지력을 확보하고 그가 모는 방향으로 차를 움직였다. 안개등까지 켜야 할 만큼 어느새 사방은 어두워져 있었다.
우우우우웅~
바람의 음산한 울음소리가 앞 차창을 흔들어 댄다.
“어휴…….”
유빈이 산책로 바로 앞에 차를 세우자, 보안관이 한숨을 푹푹 내쉬다 문을 열고 내린다.
뭐라고 한마디를 하려다가 꾹 삼키는 것 같다. 구름다리를 건너고 지하 통로를 지나 번화가로 들어서는 동안에도 두 친구는 아무 대화 없이 몇 걸음의 차이를 두고 묵묵히 걸어갔다.
가로수의 가지들이 전부 한 방향으로 휠 만큼 강한 바람이 쉬지 않고 불어온다. 번화가 쪽으로 가기 위해 물이 발목까지 차오른 지하 차도를 빠져나오자 제니의 얼굴이 보였다.
“보안관 오빠…… 유빈 오빠…….”
삼식이와 함께 지하 통로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제니가 보안관을 보자마자 얼른 뛰어와 우산을 씌워준다.
우산을 쓰고 있었다고는 해도 워낙 강풍이 함께 몰아치는 중이어서 둘 다 홀딱 젖어 있었다. 가격표도 떼지 않은 새 우산 손잡이를 건네는 제니의 손이 얼음처럼 차다.
“……왜 나와 있어, 추운데.”
도끼눈이 되어 있던 보안관이 감정을 억누르고 물었다.
“그야…… 걱정이 되니까. 괜찮아요? 다친 데는 없어요?”
“응. 들어가자.”
“유빈 오빠도 괜찮아요?”
“응.”
유빈은 무덤덤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왜 분위기가…….”
제니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자 삼식이가 거든다.
“그러게. 너희 싸웠어?”
“애들이냐? 싸우기는 누가……. 얼른 들어가자. 춥다.”
보안관이 말을 얼버무리며 성큼성큼 걸어 앞서갔다. 3층 집 안으로 들어와서도 쉽게 화가 삭여지지 않는지 보안관은 베란다 앞에 서서 담배를 피우고 있던 신입에게 버럭 화를 냈다.
“밖에 나가서 피워, 이 새끼야! 추워 죽겠는데 창문은 있는 대로 다 열어놓고!”
그러고는 방문을 쾅! 소리가 나도록 닫고 들어가 버린다.
“뭐, 뭐야? 갑자기 왜 저렇게 성질을 부려? 나는 배려한다고 문 열어놓고 피운 건데.”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조금 겁을 먹은 신입은 얼른 밖으로 꽁초를 던져 버리고 창문을 닫았다.
분위기가 이렇게 되다 보니 삼식이와 제니의 시선은 유빈이에게 쏠렸다. 제니가 건네준 수건으로 머리를 털던 유빈은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그냥 속이 상해서 저러는 거야. 생각보다 좀비들이 많았어.”
“에, 정말? 한두 마리가 아니야?”
“음, 그렇더라. 다 못 잡았어.”
최대한 별것 아니라는 듯 말했지만, 말하는 유빈도, 듣는 세 사람도 금방 마음이 무거워졌다.
좀비의 더 많은 발길이 그들이 있는 방향으로 향하고 있는데, 그걸 돌리거나 멈출 능력이 없다. 그리고 그들은 이미 아침에 수천이나 되는 커다란 좀비 무리를 직접 눈으로 확인했다.
“그래서…… 제일 가까이 와 있는 놈은 얼마나 근처에 있는데?”
신입이 물었다. 유빈은 고개를 저었다.
“몰라. 산책로에서 100미터도 안 떨어진 데에서까지 몇 마리를 잡았으니까 그 근처에 또 있다고 해도 이상할 건 없지. 근데 전부 눈으로 확인한 건 아니야. 아니, 못해. 너도 그 벌판이 얼마나 넓은지 알잖아.”
“씨발, 좃 됐네. 내가 이럴 줄 알았어. 아무것도 안 하고 탱자탱자 여유 부리면서 노닥거릴 때부터 내가 이렇게 될 줄 알았다고! 씨발, 어떡할래? 이 비가 쏟아지는데 이제 도망도 못 친단 말이야! 진작 멀리 쨌어야지! 에이그, 모자란 새끼들!”
제멋대로 원망을 늘어놓은 신입은 담배와 소주를 챙겨서 학생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어차피 그런 놈이란 걸 알고 있으니 별로 화가 나지도 않고, 대거리할 필요가 느껴지지도 않았다. 그리고 녀석의 말속에 적어도 하나는 뼈아픈 진실이 담겨 있기도 했다.
분명 요 며칠…… 시간이 있었다, 달아날 수 있는 시간이. 하지만 위험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쉽사리 낯선 곳을 향해 발을 떼지 못했던 것이다. 어제의 안일함이 오늘 아주 단단히 발목을 잡고 있다…….
거기에 생각이 미치자 유빈은 스스로의 뺨이라도 후려치고 싶어졌다. 작은 램프 하나만 켜진 거실의 분위기는 어둡고 무거웠다.
“괜찮아. 도망가기로 마음만 먹으면 내일이라도 출발하면 돼. 그러니까 일단 옷부터 갈아입어, 유빈아. 너 감기 걸리겠다.”
삼식이는 정말 아무것도 아닌 일을 말하는 듯 술술 쉽게도 이야기한다.
별생각 없이 저 해맑은 얼굴을 마주하고 들으면 ‘그렇구나’ 하고 믿어버릴 만큼 설득력이 강하다. 모르긴 해도 아마 삼식이 자신 역시 그 말을 하는 것과 동시에 철석같이 믿어버릴 것이다.
“그런데 내일은 비가 그칠까요?”
장대비가 사선으로 사정없이 긋는 베란다 밖을 내다보며 제니가 물었다. 삼식이는 또 1그램의 고민도 거치지 않고 날름 답을 해준다.
“응, 그칠 거야. 이게 그냥 비라면 며칠 동안도 내릴 수 있지만, 태풍인 거잖아. 태풍은 원래 아무리 길어도 한 대여섯 시간이면 지나가.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
“그러면 좋겠는데…….”
어지간히 추운지 제니는 움츠린 채 두 어깨를 감싸 안고 가볍게 떨었다. 하긴, 계속 그 비바람을 맞으며 두 사람을 기다렸으니 이상할 일도 아니다.
“너도 옷 좀 갈아입어야겠다. 내가 가게에 나가서 옷 좀 집어 가지고 올까?”
“아니에요. 그냥 안방 장에 있는 거 아무거나 입을게요.”
제니가 아줌마의 헐렁한 옷으로 갈아입고 나올 때, 갑자기 영감이 떠오른 삼식이가 보안관이 들어가 버린 작은방 문에 대고 과장스러운 목소리로 떠들어 댄다.
“우왓! 제니야, 여기서 바지 갈아입으면 안 되지! 암만 우리가 가까운 사이라도 그러면! 보안관, 제니 좀 말려!”
그러고는 문에 귀를 가져가 보았지만, 보안관에게서는 아무 대꾸도 돌아오지 않았다. 삼식이는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평소 같았으면 분명 ‘삼식이, 이 미친 새끼야! 왜 애를 이상한 사람 만들어?’라면서 발끈했을 텐데, 저렇게 조용한 걸 보면 기분이 어지간히 상한 모양이다.
“아무래도…….”
유빈이 마룻바닥에서 엉덩이를 떼며 말했다.
“내가 없어야 보안관이 나왔을 때 분위기가 좀 편할 것 같아. 제니야, 네가 잘 달래서 밥도 같이 먹고 그래.”
“오빠는 어디 가려고 그래요, 비가 이렇게 오는데…….”
“망이나 보다가 올게. 사실 좀비들이 어디까지 왔는지 걱정도 되거든. 비는 걱정하지 마. 가게에서 비옷 하나 집어 입으면 되니까.”
“오빠…….”
유빈을 잡기 위해 제니가 손을 뻗는다. 하지만 삼식이에게 잡히는 바람에 그녀의 손은 유빈에게 닿지 않았다.
어째서 만류하는지 이해 못 한 제니가 돌아보자 삼식이는 고개를 살랑살랑 흔든다. 그러는 동안 유빈은 문을 닫고 나가 버렸다.
“그냥 둬.”
“왜요? 오빠 저러다가 병나요.”
삼식이가 다가와 귀에 대고 속삭였다.
“있지……. 남자들은 자기 밑천이 바닥나면 그게 제일 창피해. 그 창피한 걸 들키기 싫어서 자꾸 화가 난 척하고 혼자 있고 싶어 하는 거야. 어린애들도 아니고, 그게 뭔 유치한 짓이냐고 할지 모르겠지만…… 어쩌겠어, 그렇게 생겨 먹은걸. 그러니까 두 놈 다한테 기분을 추스를 시간을 줘.”
“하지만 이러다가 혹시 무슨 일이라도 나면…….”
“그런 일은 없어. 쟤가 얼마나 약은데. 그리고 또 강해. 10년을 넘게 매일 얼굴을 보고 살아온 친구로서 하는 말이니까 믿어도 돼. 일단 밥부터 해놓고 이따가 눈치 봐서 보안관이나 불러내자. 너한테 이제 안심해도 좋다는 말을 못 해준 것 때문에 저놈도 어지간히 자존심이 상했을 거니까.”
3층 집을 나선 유빈은 등산용품 가게에 들러 젖은 옷을 갈아입고, 그 위에 판초 우의까지 뒤집어쓴 뒤, 다시 경전철역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래도 여전히 추웠다. 빗방울은 더욱 굵어져 있고, 떼어놓은 펜스들이 바람개비처럼 날아다닐 만큼 강한 바람이 분다.
콰장창―!
펜스들끼리 부딪치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아직 낮이지만 가게에서 집어 온 플래시가 필요할 만큼 사방이 어두워져 있었다. 다행히 이 근처까지는 아직 좀비들이 오지 않은 듯하다.
“후우우~”
구름다리 앞에 서자 여러 가지 의미가 담긴 한숨이 절로 나온다.
발밑으로는 몰라볼 정도로 불어난 물이 콸콸 흐르고 있다. 하도 사나운 물줄기로 변해 있어서, 이제는 그냥 산책로를 따라 흐르는 개천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할 지경이다.
산책로 위로 넘실넘실 넘쳐흐르는 물은 그에게 달아날 수 없다고 경고를 하는 것 같다.
좀비 세상이 닥친 첫날, 보안관이 바로 이 자리에서 개 아저씨를 발로 차 떨어뜨렸을 때가 떠오른다. 그때까지만 해도 이런 상황에 처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젠장…….”
한계에 부닥친 것 같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도무지 그럴싸한 계획이 떠오르지를 않는다. 낙천적인 삼식이는 내일이라도 도망을 치면 된다고 제니에게 호언을 했지만, 사실 그건 아주 어려운 일이다.
어디로 몸을 피하면 여기보다 안전할지, 자신들은 알지 못한다. 당장 옆 동네에 어떤 규모의 좀비가 얼마나 자주 돌아다니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까맣게 모르고 있는데…….
대피소…… 쉘터…….
궁지에 몰리자 도움을 청하고 싶어지고, 그러자 예전에 보았던 삐라가 기억났다. 안전한 잠자리를 제공해 주겠다는 유혹적인 문구.
한데 거기 적혀 있던 대로라면 가장 가까운 대피소도 한강 부근까지는 가야 한다. 도로마다 꽉 막혀 있고, 언제 어디서 좀비의 대군과 만날지 모르는데 태릉에서부터 거기까지 걸어가려면 목숨이 열 개라도 모자랄 거다.
“안 돼, 그건.”
유빈은 이내 대피소라는 선택지를 머릿속에서 지워 버렸다.
그럼 다리를 끊을까? 이 다리만 없으면 개천 때문에 저쪽이랑 격리될 수 있을 텐데…….
자꾸 바보 같은 욕심만 고개를 든다. 작지만 콘크리트로 지어진 단단한 다리를 소수 인력의 힘만으로 부술 수 있을 턱이 없다. 그렇게 유빈은 혼자서 머리를 쥐어짜며 폭우가 쏟아지는 어두운 벌판을 보고 서 있었다.
얼마나 그렇게 하고 있었을까. 뒤쪽에서 플래시 불빛이 흔들리며 다가왔다. 유빈은 고개를 돌렸다.
“……혼자서 뭐해? 밥 먹으러 가자.”
보안관이었다. 말투는 아직 완전히 풀어지지 않았지만, 그래도 이제는 어지간히 감정을 다스렸는지 편안해 보인다. 머리를 긁적이며 다가온 보안관이 바로 곁에 와 섰다.
“저 차 세워놓은 데까지 물이 차오르지는 않겠지?”
산책로까지 넘쳐 오른 물을 멍하니 보고 있던 보안관이 산책로 위쪽에 세워둔 코롤라와 오피러스를 가리키며 말했다. 수면과는 적어도 3미터 이상의 높이, 그리고 8미터 이상의 거리 차이가 있다. 유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음, 저기까지는 안 닿을 거야. 뭐, 한 일주일씩 쏟아진다면 또 모르지만.”
“그럼 됐어. 들어가자, 배고프다.”
보안관이 유빈의 어깨를 콱, 끌어안는다. 고릴라처럼 강한 힘에 휘청거린 유빈이 쥐고 있던 플래시를 떨어뜨렸다.
엇, 하는 사이 다리 아래로 떨어진 플래시는 빠르게 흐르는 개천에 집어삼켜져 떠내려가 버렸다. 그 모습을 본 유빈이 대수롭지 않게 물었다.
“그런데 이 개천, 이거 어디로 흐르는 걸까?”
딱히 그럴듯한 대답을 기대한 건 아니었다.
어차피 유빈이나 보안관이나 모두 이 동네 사람이 아니고 일하는 동안 잠시 머무는 신세였으니, 그가 모르는 건 보안관 역시 모른다고 보는 편이 맞다. 보안관이 깊이 생각하지 않고 대답했다.
“당연히 한강이겠지. 강북에 흐르는 물들은 다 결국엔 그리로 가는 거 아냐?”
그 말을 들은 유빈은 눈동자가 똥그래져서 보안관을 돌아보았다. 머리에 벼락이라도 내리꽂힌 것 같은 기분이다.
“……그래, 네 말이 맞아. 서울 전체를 가로지르면서 지나가는 강이니까…… 어디서 뭐랑 합류하든 흐르는 물이라면 결국 한강이랑 만나게 되어 있어. 허어, 왜 지금까지 그 생각을 못 했지?”
그가 하도 감격한 표정을 짓고 서 있자 보안관이 이상한 눈으로 바라본다.
“야, 유빈아. 너 괜찮냐?”
유빈은 대꾸하지 않았다. 그간 아무 쓸모가 없는 것처럼 보여서 뇌의 아주 깊은 구석에 박아두었던 생각의 파편이 의미를 가지며 붕 떠올랐다.
11,200…… 한강으로 흐르는 개천, 그 개천을 끼고 나란히 닦여진 산책로…… 11,200…….
잔뜩 상기된 얼굴로 보안관에게서 플래시를 빼앗아 든 유빈은 구름다리를 단번에 건너 산책로 위에 섰다. 보안관이 당황스러워하며 쫓아온다.
“갑자기 왜 그래, 인마? 대체 무슨 일인지 말을 좀 해!”
“여기! 여기가 11,200이야! 이게 뭔지 이제 알 것 같아!”
뜬구름 잡는 대답을 한 유빈은 플래시로 도로를 비추었다. 예의 그 글씨가 보인다.
11,200
그리고 화살표. 유빈은 화살표가 그려진 방향을 향해 전속력으로 뛰었다. 하도 급하게 달리다 보니 하마터면 자신들이 쳐둔 레이저 와이어 트랩에 걸릴 뻔하기도 했다.
으이크! 깜짝 놀라 황급히 몸을 틀면서도 유빈은 달리기를 멈추지 않았다. 저만큼 멀리 뛰어가 다시 발밑을 살피던 유빈이 두 팔을 번쩍 들어 올리며 환호성을 질렀다.
“맞았어! 네 말이 맞았어, 보안관! 여기는 11,100이야!”
“나는 네가 뭔 소리 하는지 모르겠어!”
다시 달려온 유빈은 아, 하고 머리를 두드리더니, 두 팔을 벌려 산책로의 폭을 재본다. 그러더니 뭐가 만족스러웠는지, 보안관을 꽉 끌어안은 채 펄쩍펄쩍 뛴다. 딱 미친 사람 같았다.
“지도! 지도! 그래, 복덕방에 가면 거기에는 있겠다. 이제 하나만 더 확인하면 돼! 가자!”
이번에는 다시 왔던 길을 거슬러 뛰어간다. 얼마나 흥분했는지 경전철역부터 번화가 복덕방까지 숨도 거의 쉬지 않고 단숨에 내달렸다.
“하아~ 하아~ 너, 너 때문에 숨차서 쓰러지겠다. 이게 갑자기 다 뭔데? 11,200이니, 11,100이니, 그게 뭐 어쨌다고? 하아~ 아, 이 새끼, 사람 답답하게 설명도 안 해주고…….”
덩달아 이리저리 뛰어다녀야 했던 보안관이 숨을 헐떡이며 투덜댄다.
그러는 동안에도 유빈은 지난번 떼어 온 것보다 더 큰 지도가 부착된 복덕방 벽에 바짝 달라붙어서 플래시와 손가락으로 지도를 훑으며 계속 중얼거렸다.
“이거 봐, 보안관. 응? 이거 봐. 여기 이 녹지…… 이게 저 벌판이야. 그치? 그리고 이 골목이, 지금 우리가 서 있는 번화가고…… 경전철역이 여기, 그럼 우리가 조금 전 뛰었던 산책로는…….”
손가락으로 지도 위의 도로를 따라가는 유빈의 표정에서는 광기마저 느껴진다. 그만큼 엄청나게 흥분해 있었다.
젠장, 찬바람을 너무 오래 맞아서 저놈이 머리가 어떻게 된 걸까?
보안관이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유빈이 말했다.
“찾았다! 이 개천, 중랑천으로 흘러 들어가는 거였어.”
그러더니 책상 위에 놓여 있던 지도책을 넘겨 서울 지도를 찾았다.
맞았다. 그래, 맞았어…….
웅얼거리면서 손가락 마디로 길이까지 대보는 모습은 마치 광인처럼 어딘가 오싹하다.
“한강이 아니고?”
“아니, 결국 한강으로 가는 거지. 중랑천이 한강으로 합쳐지니까. 11,200 기억나지? 그게 이 길이야. 우린 이제 살았어, 보안관!”
지도의 아주 가느다란 선 하나를 짚으며 유빈은 감격에 찬 표정을 짓는다.
“아우, 답답하게 굴지 말고 좀 알아듣게 말을 하라고! 11,200이 뭔데?”
“산책로 끝까지의 거리지. 그리고 그 끝은 당연히 한강일 거고! 겨우 11킬로미터밖에 안 돼. 우리는 그냥 저 산책로를 따라서 쭉 가기만 하면 되는 거라고! 뻥 뚫린 길을 11킬로만 가면 바로 강 건너에 대피소가 있어!”
콰르르릉!
때맞춰 벼락과 천둥이 내리치자 극적인 효과는 몇 배나 증폭되었다. 잠시 멍해져 있던 보안관은 의심이 가득한 표정으로 물었다.
“잠깐만……. 저 산책로를 따라서 11킬로미터만 가면 한강이라고? 그걸 어떻게 그렇게 확신해?”
“이 지도에 나와 있잖아. 맨 아래에 이 작은 스케일 표 보이지? 이거 한 칸이 1킬로미터야. 아니, 이게 부르는 이름이 스케일 표가 아니었는데…… 명칭이 뭐더라? 우리 초등학교 때 배웠잖아. 지도 보는 법.”
“명칭 같은 건 됐으니까 그냥 설명이나 계속해 봐.”
“그래, 알았어. 한강에서부터 중랑천, 그리고 우리가 있는 여기까지 이 거리. 봐봐, 11킬로미터 맞아. 내가 손톱으로 재봤어. 그리고 우리 산책로에 적혀 있는 숫자. 그게 11,200이었지. 내가 100미터쯤 뛰어가니까 거기에는 11,100이라고 박혀 있었고.”
“그게 만약 다른 데로 가는 거리라면? 우린 이 산책로 동서남북도 잘 몰라.”
“아니야. 저 벽에 붙은 지도를 봐. 그 위쪽으로는 그만큼 길게 뻗어 있지도 않아. 여기가 거의 끝에 가까워.”
보안관도 생각에 잠겼다. 말이 되는 것 같다. 하지만 여전히 한 가지 어려운 난관이 버티고 있다.
“좋아, 유빈아. 네 말이 맞는다고 치자. 그런데 11킬로미터를 걸어가는 것도 문제야. 저 길 쭉 따라서 걷다가 만약에 좀비 떼라도 만나면 어떻게 할지도 생각해야 되는 거잖아. 걔들이 우리보다 훨씬 빨라. 달아날 방법이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