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 폭풍 속으로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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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7. 폭풍 속으로 (4)
2022.01.15.
허술한 나무 게이트를 지나 30여 미터쯤 더 달리자, 경사진 아스팔트 도로가 나타난다.
좋아!
진우는 속으로 외쳤다. 도로가 닦여 있다는 것은 누군가 더 많은 사람들이 이 근처에 살고 있었다는 말이다. 저까짓 펜션 하나를 위해 공무원들이 이 긴 길을 내주지는 않을 테니까…….
양방향의 길 중에서 망설이지 않고 내리막 쪽을 택한 이유는 간단하다. 물이 가까워질수록 매점을 만날 가능성도 커진다. 게다가 지금 당장은 오르막길을 뛰어오를 만한 체력이 없기도 했다.
콰콰콰콰~!
아름드리나무가 양쪽으로 늘어선 구간을 벗어나자, 도로 오른편에 계곡이 모습을 드러냈다.
콰콰콰콰―
소름이 끼칠 만큼 사나운 물소리다. 몇 시간째 쏟아진 비 때문에 불어난 누런 흙탕물이 회오리치며 쏟아져 내려온다.
부러진 나무토막, 도로 표지판…… 상류에서 떠내려온 여러 가지 물건들이 시야에 들어오기 무섭게 저 아래로 빨려 들어가듯 사라져 버린다.
비록 높이의 차이는 있지만 바로 몇 미터 옆에서 물가의 흙과 돌들이 부서져 나가고, 작은 나무들이 뿌리째 뽑혀 쓸려가는 광경은 오싹한 것이었다.
“저건…….”
떠내려오는 것들 중에는 좀비도 있었다. 흙탕물 위로 가끔씩 머리를 솟구치던 녀석은 그 짧게 스쳐 가는 순간에도 진우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롸아…….
놈이 아가리를 벌리려던 순간 한차례 세찬 물살이 밀려왔고, 좀비는 물속에 잠긴 채 사라져 갔다.
“여기까지 물이 차오르면 안 되는데…….”
진우는 정신없이 날리는 담요 자락을 붙잡고 다시 뛰기 시작했다. 마음이 급해진다. 그가 불을 피웠던 펜션부터 계곡 입구까지는 꽤나 먼 길이었다. 물기로 미끄러운 도로를 10분쯤 달려가다 보니 불평이 절로 난다.
“젠장, 저렇게 외딴 데다가 집을 지어놨으니 당연히 망하지. 대체 무슨 생각이었던 거야.”
이럴 거면 차라리 다시 돌아가서 위쪽을 찾아볼까 하는 마음이 강해졌을 때, 왼편 나무숲 사이로 목재 지붕이 눈에 들어왔다. 제발 이번에는! 진우는 간절하게 빌면서 진입로를 향해 몸을 틀었다.
할렐루야!
비록 펜션은 아니지만, 멀쩡한 상태의 농가가 나타났다. 지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신식 주택이다.
진우는 내부를 엿보기 위해 창가에 붙어 섰다. 커튼이 드리워져 있어서 안쪽이 보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 비바람 속에서도 썩은 냄새가 진동을 한다.
빠각!
진우는 총을 겨눈 채 발로 걷어차서 잠긴 문을 열어젖혔다. 그러고는 잠시 그 자리에 서서 플래시로 안쪽을 비췄다. 텅 빈 집이었다.
천천히 안쪽으로 들어선 진우의 눈에 방석 옆에 놓인 싸구려 박하사탕 봉지가 들어온다. 진우는 벌벌 떨리는 손으로 급하게 껍질을 까서 입안 가득 쑤셔 넣었다. 그런 후, 사탕을 우물거리며 주방으로 가 닫혀 있는 모든 서랍을 열었다.
식기와 조리 도구부터 배달 음식점 전단지 묶음까지…… 온갖 자질구레한 것들이 튀어나온 후에 양념류가 나온다. 간장, 고춧가루, 후춧가루, 미림, 참기름…… 설탕을 제외하면 지금 그에게는 있으나 마나 한 물건들뿐이다.
“젠장, 이런 거 말고! 당장 먹을 수 있는 거.”
냉장고 문을 열자 초록색 진물이 줄줄 흐르는, 썩어버린 야채와 고기가 모습을 드러낸다. 악취의 진원이 여기였나. 윽! 진우는 서둘러 문을 닫아 버리고 기침을 했다. 곰팡이가 코로 잔뜩 들어온 것 같다.
“도대체 뭘 먹고 산 거야, 할머니…….”
진우는 벽에 걸려 있는 할머니의 사진을 향해 투덜거렸다. 집주인일 것이라 보이는 사진 속의 할머니는 알록달록한 꽃밭 가운데에서 환하게 웃고 있다.
방문들을 열다가 드디어 창고 방을 발견했다.
말통에 든 콩, 잡곡, 쌀, 벽에 걸려 있는 말린 나물들, 박하사탕, 호박엿 사탕, 그리고…… 라면! 너무도 반가워서 신성해 보이기까지 하는 라면이 테이프도 뜯지 않은 박스째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으으으~ 아아아~”
박스에 달려든 진우는 실성한 사람처럼 신음을 흘리며 종이를 북북 찢었다. 그러고는 한 봉지를 꺼내 스프도 뿌리지 않고 생으로 와득와득 씹었다.
……맛있다. 이제부터 한평생 생라면 부순 것만 먹어도 좋다고 할 만큼 맛있다.
몇 번을 컥컥거리며 급하게 라면 한 봉지를 다 쑤셔 넣은 진우는, 입안에 든 걸 다 씹어 삼키기도 전에 두 번째 봉지를 찢었다. 이번에는 스프를 뿌릴 여유가 생겼다.
두어 입을 더 베어 먹고 목이 멘 진우는 마실 것을 찾기 위해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그보다 20년은 더 나이를 먹었을 것처럼 보이는 구식 찬장에는, 역시 만들어진 지 30년은 넘었을 게 분명한 촌스러운 유리컵들이 보란 듯이 전시되어 있었다.
그 옆으로 몇 병의 소주, 그리고 한쪽 구석에 커다란 유리병 한 개가 놓여 있다. 인삼을 넣고 담근 인삼주였다. 얼마나 오래 그 속에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팔뚝만큼이나 굵은 인삼이다.
“우와~”
진우는 망설임 없이 봉인을 뜯고 잔에다 술을 따랐다. 코끝으로 전해지는 향기가 꽤나 그럴듯하다.
한 모금을 들이켜니 짜릿한 기운이 위장까지 한 번에 퍼진다. 밤새도록 차가운 비와 바람을 맞느라 뻣뻣했던 목도 조금은 부드러워지는 것 같다.
좋은데? 딱 두 잔만 더 마셔야지…….
진우는 만족한 웃음을 지으면서 곧바로 다시 잔을 채웠다. 여유롭게 천천히 스프를 잔뜩 뿌린 생라면을 씹고, 인삼주를 기울였다. 이건 수통에 담아 가져가면 앞으로도 요긴할 것이다.
어느 정도 허기가 가시고 술 덕분에 몸에서 열도 오르자, 진우는 펜션으로 돌아가기 위해 라면을 챙겼다. 급한 마음에 조금이라도 무게를 덜어보려고 배낭을 가져오지 않았기 때문에, 이 농가 주인의 장바구니를 빌렸다.
때가 꼬질꼬질한 나일론 가방에 라면과 사탕, 인삼주, 그리고 라면을 끓일 냄비와 젓가락까지를 꽉 채워 들고 나오는데, 갑자기 소름이 돋아난다.
“이런!”
당황한 진우는 장바구니를 놓고 재빨리 K―2를 고쳐 쥐었다.
털썩!
현관의 단단한 돌 위에 떨어진 인삼주 병은 박살이 났다.
그롸아아―
대체 어디에 숨어 있었던 것인지 좀비가 텃밭의 이랑 사이로 달려오고 있다. 흘러나온 내장을 덜렁거리며 달려드는 작은 몸집의 좀비. 진우는 망설이지 않고 곧바로 방아쇠를 당겼다.
타앙―
비를 뚫고 날아간 총알이 좀비의 오른쪽 머리통을 박살 낸다. 충격을 이기지 못해 빙그그르 돈 좀비는 멀쩡한 왼쪽 얼굴을 위로 한 채 바닥에 고꾸라졌다.
“하아~ 하아~ 이런 젠장…….”
좀비가 조금 전 보았던 사진 속의 할머니라는 걸 깨달은 진우는 잠시 숨을 헐떡이며 그 썩어버린 얼굴을, 희게 변한 눈동자를 빤히 쳐다보고 서 있었다.
기분이 더럽다. 좀비였다는 점을 빼면…… 남의 집에 마음대로 들어가서 도둑질을 하다 들킨 뒤, 성질을 내며 달려드는 집주인을 죽여 버린 것이다. 그것도 쪼글쪼글한 할머니를, 한쪽 팔도 잘려 나가 없는 할머니를…….
박살이 나서 현관 위를 흥건하게 적시고 있는 인삼주가 진우에게 더욱 자책감이 들도록 한다. 저 할머니가 아끼느라 평생 마시지 못하던 것을 자신이 뜯고 마시는 것도 모자라 아예 병을 깨버렸다…….
웁! 진우는 올라오는 구토를 꾹 눌러 참고 다시 창고 방으로 들어가서 멀쩡한 라면들을 챙겼다. 아무리 엿 같고 더러워도 먹지 않으면 죽는다. 그리고 그는 죽고 싶은 생각이 조금도 없다.
할머니 좀비가 더 이상 움직이지 못하는데도 여전히 느낌이 좋지 않은 걸 보면, 부근에 아직 좀비들이 더 있다는 이야기다. 빨리 이 자리를 벗어나야 한다.
“이상하다. 아까 들어갈 때에는 왜 못 느꼈었지?”
자기의 감에 대해 어느 정도 자부심이 있던지라 바로 근처에 좀비가 있었는데도 전혀 눈치를 채지 못한 것이 이상했다.
배가 너무 고파서 다른 데엔 신경이 쓰이지 않았던 걸까?
왔던 길을 거슬러 올라가던 진우는 샛길 안으로 쑥 들어가는 누군가의 뒷모습을 보았다. 이 빗속에서 러닝셔츠만 입고 빠르게 걸어가는 사람. 아무래도 살아 있는 건 아니다. 좀비다.
이것들이 대체 왜 이렇게 몰려들지? 나한테 좀비를 불러 모으는 재주가 있는 건 아닐 테고…….
진우는 가방을 사선으로 고쳐 메고 총을 겨눈 채 조심스레 걸음을 옮겼다. 놈이 들어간 길은 조금 전 그가 불을 피웠던 펜션으로 이어져 있다.
젠장! 웬만하면 피하고 싶은데, 펜션에 배낭을 두고 왔으니 돌아갈 수밖에 없다. 게다가 거기엔 어렵게 어렵게 피워둔, 소중한 불도 있다.
“흠! 킁킁!”
펜션이 가까워졌을 때, 바람의 방향이 바뀌면서 진우의 코에 매캐한 냄새가 들어온다.
이건!
당황한 진우는 달리기 시작했다. 펜션 뜰 안에 들어서자 자욱하게 피어오른 희뿌연 연기가 그를 맞는다.
“안 돼!”
진우는 절망적으로 외치며 뛰었다. 그가 불을 피워뒀던 방에는 좀비 세 마리가 들어 있다.
조금 전 그가 보았던 러닝셔츠 차림의 좀비를 제외한 나머지 두 마리는 대체 무슨 생각인 건지 온몸에 불이 붙은 채 방 안을 서성이고 있었다.
엎어진 그릴에서 쏟아져 나온 차콜과 불붙은 나뭇조각들이 싸구려 장판을 녹이면서 불길을 옮겼고, 벽지와 싱크대, 합판으로 만들어진 계단에까지 불이 번진 상태였다.
“야! 이 개새끼들아!”
비명에 가까운 진우의 욕설을 듣고 좀비들이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는 곧바로 그를 향해 달려왔다.
치이이익―
타오르던 좀비들의 몸이 비에 닿으며 수증기가 뿜어져 나온다. 진우는 빠르게 총구를 돌리며 세 마리를 처리했다.
좀비들의 몸이 바닥에 쓰러지기도 전에 진우는 펜션 건물을 향해 뛰었다.
배낭! 내 배낭! 탄창이 들어 있는 배낭!
그의 머릿속에는 불이 붙은 배낭 생각뿐이었다. 이미 불길은 엄청나게 거세져 있지만, 그는 온몸이 푹 젖은 데다 젖은 담요를 뒤집어쓰고 있다.
이 정도면 괜찮을 거야, 라는 생각에 한 발을 방 안에 들여놓는 순간, 화르륵― 타오르는 불길의 열기가 그의 얼굴을 덮친다.
진우는 반사적으로 몸을 뺐다. 도저히 뛰어들 수 없을 만큼 뜨겁다. 그리고 방 안에는 메케한 유독가스가 가득 들어차 있다. 한 번 살짝 들이마신 것뿐인데 기침이 멈추지 않을 만큼 독한 냄새다.
“하아~ 하아~ 쿨럭! 쿨럭!”
담요를 벗어 이리저리 후려치며 불길을 잡아보려던 진우는 결국 포기하고 바닥에 주저앉아 버렸다.
불과 2미터…… 그 짧지만 도저히 닿을 수 없는 거리 너머에는 온갖 필요한 물건들과 목숨 같은 탄창이 든 그의 배낭이 잿더미로 변해 있다. 진우는 분한 마음을 이기지 못해 바닥을 내리쳤다.
왜! 도대체 왜 이렇게 경솔했을까? 왜 배낭을 바닥에 내려놓고 길을 나섰을까? 그까짓 몇 킬로그램을 덜어서 뭐 얼마나 편해지겠다고…….
하지만, 도대체가…… 이럴 수가 있나? 이렇게 비가 오는 날, 불이 나서 전 재산을 홀랑 날리다니. 이게 대체 말이 되느냔 말이야!
너무 분하고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다. 진우는 이마를 찌푸린 채 고개를 젖히고 한참을 움직이지 못했다. 쏟아지는 비와 바람은 더 거세졌다.
휘이이~ 히히히히~ 죽어라~ 이쯤 했으면 죽어라~ 그냥 얌전히 죽어버려~ 그러면 편해진다~ 어차피 넌 못 살아~ 버티면 버틸수록 너만 힘든 거야~ 히히히히히~
하이바 틈으로 울리는 바람 소리가 그렇게 약을 올리며 깔깔대는 것 같다.
“이런다고 내가 포기할 것 같아?”
마침내 눈을 번쩍 뜬 진우는 시커먼 구름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이 정도로는 약해! 더 센 걸 가져와! 우습게 보지 말라고!”
슥, 소매로 얼굴의 빗물을 훔친 진우는 다리에 힘을 꽉 주며 돌아서서 걷기 시작했다. 할머니 좀비의 집으로 향하는 샛길은 어느새 물이 질퍽한 진창으로 변해 있었다.
이제 그에게 남은 건 전술 조끼에 끼워둔 세 개의 탄창, 대검, 중위에게서 압수한 권총, 그리고 함께 수천의 좀비들과 맞서왔던 믿음직한 K―2, 그것뿐이다.
진우는 K―2의 총신을 쓸어 물기를 닦아냈다. 이걸로 버틸 것이다. 이걸 다 쓰기 전에 나는 보란 듯이 집으로 돌아갈 것이다. 이걸로 버틸 수 있다…….
진우는 마음을 다잡기 위해 똑같은 말을 수백 번 되뇌고, 또 되뇌며 걸었다.
***
사무실 소파에 몸을 묻은 채 이따금씩 고개를 끄덕이며 교수의 설명을 들은 뒤, 킹메이커가 말했다.
“흠~ 배에 적힌 일련번호라……. 한 교수님은 용케 그런 생각을 다 하셨네요. 82―08…… 그래요, 확실히 그런 숫자였던 것 같습니다. 08이라는 건 우리가 모르는 01이나 07도 있었다는 의미일까요? 역시 의도를 가진 누군가가 다수 국가를 대상으로 해서 동시다발적으로 풀었던 거군요. 어쩐지, 너무 빨리 퍼졌다 했더니…….”
아리랑 3호가 보내온 믿기 힘든 사진들도 이제는 납득이 간다.
가로세로 1미터 이내 크기의 물체는 구분하기 어려울 만큼의 해상도여서 주간의 풍경에서는 큰 차이를 발견할 수 없지만, 야간 사진을 보면 세상이 바뀌었다는 것이 확연하게 드러난다.
해안선의 대도시와 연해를 따라 빛의 띠를 환하게 이루던 조명이 1/5 수준으로 줄어들었다. 도쿄, 상하이, 런던, 뉴욕…… 예외는 없었다.
어차피 리셋이 이루어졌으니 이제부터는 좀비 소멸 후 누가 빨리 재건하느냐에 따라 세계의 정세가 개편될 거라던 태양 그룹 경제 연구소의 말이 솔깃하게 들리는 건 그런 까닭이다.
물론 그때에도 세계의 중심은 어디까지나 미국일 거라고 킹메이커와 교수는 굳게 믿었다.
“위성 6호는 아직도 교신이 안 된답니까?”
교수가 답답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킹메이커는 고개를 끄덕인다.
좀비 사태가 터지고 난 다음에야 알게 되었지만, 다목적 실용 위성 6호는 이미 지난 5월부터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상태였다. 그런데 두 달이 넘도록 보고도 하지 않은 채 쉬쉬하고 있었던 것이다.
“젠장맞을 놈들!”
교수가 항우연의 엔지니어들에게 저주를 퍼붓는다. 하지만 그들 대부분이 좀비로 변해 사살된 마당이니, 처벌할 수 있는 대상도 남아 있지 않다.
“미국도 어려운 모양입니다. 동부, 서부 가릴 것 없이 해안의 불빛 크기가 더 작아졌어요.”
킹메이커의 말에 교수도 한숨을 내쉰다.
“그래도 다행입니다. 채 장군을 체포했으니 육군 내에 한동안 혼란이 생길 테고, 그러면 자기들끼리 서로 물고 뜯느라 바빠서 다른 데 신경을 쓸 틈이 없을 테니까요……. 후우~”
군에는 기대를 하지 않는다. 지난 수십여 년간 대한민국 국군은 독자적으로 사단 이상 규모의 전투를 수행해 본 적도 없다.
그러니 미국의 지원과 지휘 없이 이 대규모 사태를 정리하라는 요구는 당연히 무리한 것이다.
현재 그들이 바랄 수 있는 것이라고는 스스로를 소위 전문가라고 하던 나부랭이들이 공통적으로 주장했던 것처럼, 외부에서 에너지를 공급받지 못하는 좀비들이 스스로 멈춰주는 것뿐이다.
“빠르면 한 달, 아무리 늦어도 가을을 넘기기 전에는 놈들의 동력원이 끊어질 겁니다.”
대부분의 전문가들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하긴 며칠 전까지 좀비라고는 본 적도 없는 놈들이 무슨 근거로 전문가를 자처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러나 가을쯤 되면 적어도 미국은 자국의 좀비 문제를 해결할 테고, 그때에는 도움의 손길을 이쪽까지 뻗쳐 줄 것이다. 그러니 일단 권력의 정상에서 버티는 게 중요하다.
“장관님, 두 시 이십 분 전입니다.”
비서실에서 걸려온 전화가 킹메이커에게 해군참모총장과의 약속을 일깨워 준다.
“음, 알았어. 준비하지. 그리고 지금 이 총장에게 연락 넣어줘요, 약속 장소를 쉐라톤으로 바꾼다고…….”
전화를 끊은 킹메이커는 양복 재킷을 걸쳤다. 직전에 약속 장소를 변경하는 것은 외부에서 누군가를 만날 때 그가 가끔 사용하는 수법이다. 물론 그는 처음부터 가짜 약속 장소와 쉐라톤, 두 군데 모두에 병력을 배치해 두었다.
자신의 경호 병력은 배치하되, 타인의 병력이 끼어들 가능성은 배제시키는 것. 그것이 그가 지금까지 뒤통수를 맞지 않고 살아남아 온 비책 중 하나다. 현재 자신의 편에 서 있는 이승남이라고 해도 예외는 없다.
“약속 장소를 바꾼답니다. 쉐라톤으로 오라고 하는데…… 혹시 눈치채 버린 걸까요?”
전화를 끊은 이승남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말했다. 채 장군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콧방귀를 뀐다.
“눈치는. 그냥 그게 그 새끼 특기야. 하여간에 겁이 더럽게 많거든.”
“지금이라도 저희 애들 빼서 그쪽으로 전부 이동시킬까요?”
검은 재킷에서 해군 장교복으로 갈아입은 앞자리의 소령이 묻는다.
킹메이커가 처음에 알려준 약속 장소 부근에는 40여 명의 특임대원들이 침투해서 저격 포인트를 잡아두고 있었다. 물론 그런 노력들은 이제 다 허사가 되어버렸다.
“됐어. 벌써 윤 장관, 그 새끼가 깔아둔 애들이 사방에 널렸을 텐데, 이 빗속에 그런 짓을 했다가는 공연히 더 눈길만 끈다. 플랜 B를 내봐.”
“제가 송 중장에게 비화기로 연락해서 쉐라톤을 치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면 간단하게 정리되지 않습니까?”
송 중장은 강정 기지 사령관이자 해군참모차장이다. 이승남의 말에 채 장군이 헛웃음을 친다.
“이봐, 간이 큰 거야, 아니면 생각이 없는 거야? 걔가 그렇게 위험한 명령을 순순히 들을 거라고 생각해? 자네 라인도 아니잖아.”
“라인은 아니지만 상관 명령이니까…….”
“그 말을 바꿔서 생각해 봐. 지금 타깃은 원래 나였어. 나랑 내 라인. 이 타깃들 정리하면 국군 서열이 확 바뀔 뻔했지. 그런 마당에 승남이 자네만 없애면 자기가 저절로 해군 넘버원이자 군 서열 전체 넘버원이 될 텐데? 날 봐! 라인이라고 코흘리개 데려다가 별까지 달아줬더니 쪼르르 달려가서 고자질하는 새끼가 있잖아.”
그 말에 이승남도 납득을 하고 고개를 끄덕인다. 하긴, 송 중장으로서는 채 장군의 편에 서버린 자신을 위해 싸워봐야 거의 득 되는 것이 없다. 대의명분으로 보나, 실질적인 득실을 따져 보나 킹메이커의 손을 들어주는 게 나을 것이다.
“얼마 정도의 손실까지 감수하실 계획이십니까?”
잠시 생각을 정리한 소령이 물었다. 채 장군은 곧바로 답을 했다.
“건곤일척의 승부니까 다소간의 희생은 어쩔 수 없겠지. 아니야, 확실하게 다시 이야기하는 게 낫겠군. 정권을 차지할 수 있다면 손실은 관계없다.”
“그러시다면 저에게 계획이 있습니다.”
소령이 은밀하게 눈빛을 빛내며 설명을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