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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6. 폭풍 속으로 (3) (136/449)


136. 폭풍 속으로 (3)
2022.0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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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 뭐……!”

‘뭐야?’라는 말이 헌병의 입에서 떨어지기도 전에 소음기를 단 총구에서 불이 뿜어진다.

퓩― 퓩― 푸슉, 푸슉, 푸슈슛―

뒷문으로 뛰어 들어온 네 명의 남자는 순식간에 헌병 넷을 해치웠다. 당황한 이승남은 뒤를 돌아보았다.

내 경호 병력들…….

그의 병사들은 골목으로 난입한 괴병력들과 전투 중이었다. 마지막 저항으로 발사한 총성이 하늘을 채운다.

타타타타―

그러나 맞은편 건물 옥상에서 소리도 없이 날아온 총알들은 이내 그들의 가슴과 식당 유리문을 꿰뚫었다. 식당 입구는 먼저 쓰러진 병사들의 피로 붉게 물들어 있다.

푸슛― 푸슛―

주방과 홀 안쪽에서도 잇달아 총성이 울려 댄다.

“끄으으…….”

가슴에 두 발이나 맞고도 아직 숨이 붙어 있는 헌병이 신음을 토한다. 검은 재킷을 입은 사내 하나가 그 곁을 무심히 스쳐 가며 얼굴에 권총을 발사했다.

퓨욱―

헌병은 이내 숨을 거두고 조용해졌다.

“전부 처리했습니다, 장군님.”

검은 재킷의 남자가 바닥에 떨어져 있던 채 장군의 모자를 집어 각을 잡은 뒤 건네며 보고했다. 그는 오늘 새벽 고무보트에서 가장 먼저 내렸던 사내다. 그리고 일전에 삼척에서 이 병장의 조인트를 걷어찼던 소령이기도 하다.

“늦었잖아, 이놈들아.”

“주변 건물 제압에 시간이 좀 걸렸습니다.”

“뭐…… 그래도 아슬아슬하게 합격점 안에 들기는 했다.”

러닝셔츠 바람의 채 장군은 모자를 푹 눌러쓰고 근엄한 표정을 지었다.

순식간에 전세가 역전되어 버린 이승남 일행은 겁에 질린 눈을 바쁘게 굴린다. 뒷문과 앞문을 통해 꾸역꾸역 들어와 그 둘에게 총을 겨누고 있는 사복 입은 남자들은 어느새 열 명이 넘었다.

“아참~! 저 새끼는 필요 없어.”

젓가락을 다시 들던 채 장군이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해병대 사령관을 지목했다.

말이 떨어지자마자 해병대 사령관이 몸을 일으켜 보려 했지만, 검은 재킷의 반응이 더 빨랐다. 검은 재킷은 한 발을 내디디며 권총 소음기를 그의 관자놀이에 대고 방아쇠를 당겼다.

푸슉―

머리가 터져 나가면서 뇌수와 피가 테이블 위에 흩뿌려졌다.

덜덜덜. 뜨거운 피를 뒤집어쓴 해군참모총장은 사시나무 떨듯 온몸을 부들거렸다.

“저놈이 고집 피우는 바람에 그동안 해병 애들은 써먹지도 못했잖아. 다금바리라…….”

채 장군은 피가 점점이 튄 회를 한 점 집어 올렸다. 그의 젓가락은 더 이상 떨리지 않았다. 두툼한 살을 질겅질겅 씹으며 이승남을 노려보던 채 장군이 입을 열었다.

“승남아, 대체 무슨 생각이야? 이 채양균이가 그렇게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니잖아. 너도 대가리라는 게 달려 있으니까 나만 없으면 네가 육군을 통제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을 것 같지는 않고…… 누군가 하나를 허수아비로라도 내세울 계획이었을 텐데, 그게 누구였어? 에이, 왜 그래? 우리 사이에 무슨 비밀이 있다고. 말해봐. 육군 중에 누가 너희랑 내통을 했었던 거야? 대체 어떤 개새끼가 핵 이야기를 너희한테 나불거렸어?”

이승남은 이를 딱딱, 부딪치며 눈을 내리깔고 있다. 대체 왜 이 숙청이 실패한 것인지, 이 장소에 어떻게 저런 놈들이 저렇게 많이 나타난 것인지를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다.

흥, 채 장군은 콧방귀를 뀌고서 바지 주머니를 쑤석거려 전화기를 꺼냈다.

“여보세요, 박 중장? 어, 나다. 흠, 전화 받을 수 있는 것 보니까 너희는 아직 안 건드렸나 보구나. 야, 잠깐 내 말부터 들어. 글쎄, 궁금한 건 나중에 물어보라고. 우리 애들 다 데리고 지금 빨리 기지 밖으로 나가. 가능한 한 멀리 가서 무조건 숨어 있어. 내가 따로 연락할 때까지. 그래.”

탁.

통화를 마친 채 장군이 전화기 폴더를 접어 앞에 내려놓는다. 이승남의 눈에 의문부호가 떠올랐다.

두 개의 전화기…….

채 장군이 아까 만지작거리던 스마트폰은 분명히 테이블 구석에 있다. 하지만 지금 꺼낸 저 폴더 폰은 대체 뭐란 말인가……. 그의 마음을 읽은 채 장군이 빙긋이 웃는다.

“아아! 저거? 저 스마트폰은 내 전화 아니야. 뭐? 이상하다고? 분명히 회의실에서 연구원이 나한테 주워 준 거 봤는데, 그렇지? 그거 다 그놈이 쇼한 거야. 새끼, 연기 잘하더구만. 사실 난 이게 진짜 전화기인지 아닌지도 잘 모르겠어. 하여튼 이거만 가지고 있으면 내 위치가 정확하게 추적된다 하더라고. 그러니까 얘들이 뒤를 따라왔을 테지. 허허.”

뒤에 버티고 선 사내들을 자랑스럽게 가리킨 채 장군이 금방 목소리를 위압적으로 바꾸었다.

“그 정도 떨었으면 됐잖아. 이제 윤 장관에게 전화해서 나 체포했다 하고, 따로 은밀히 좀 만나자고 해. 그놈의 미군 물건 위치를 알아냈으니 알려 드리겠다고.”

이승남은 망설였다. 킹메이커가 이들의 손에 들어가는 건, 아니,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들의 총에 머리가 뚫리는 건 상관없다.

하지만 그렇게 첫 단추가 끼워지는 순간, 채 장군 저 악마 같은 인간의 계획은 궤도 위에 오르게 될 것이다.

해군과 공군의 주요 인물들을 차례차례 불러내서 해치우거나 포섭할 것이고, 그들을 꾀어내는 미끼로는 자신을 사용할 것이다.

조직 전체를 와해시키는 배신자…… 더러운 배신자가 되고 싶지 않은 본능에 가로막혀 이승남은 쉽게 통화 버튼을 누르지 못했다.

그런 방법 말고 어떻게 다른 수를 써서 살아날 수는 없을까…… 이승남은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총소리가 울렸는데…… 누군가 신고를 했다면 지원 부대가 와주지 않을까?

그러나 저놈들이 주변 건물들을 제압했다고 했으니, 이미 다 죽여 버렸을지도 모른다.

“저, 전화는 안 하기로 되어 있습니다. 직접 방문해서 보고하는 걸로…….”

“허허…… 승남아, 아무리 상황이 어려워도 우리 최소한의 자존심은 그대로 좀 가지고 가자. 너를 기지 안으로 보내 달라고? 그게 무슨 되도 않을 소리야? 대장 계급 그대로 달고 살 수 있도록 해주겠다는데도 영 싫은가 보네. 아, 이해해. 끄나풀이 된다는 게 영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지? 그럼 내가 그 자존심의 부담을 좀 덜어줘 볼까?”

검은 재킷이 스마트폰을 집어 와 건네자, 그것을 받아 든 채 장군이 말했다.

“이게 단순히 GPS일 뿐이면 굳이 이렇게 크게 만들 이유도 없었겠지. 이 총장, 아까 우리가 본 그 4족 보행 로봇 기억나? 구형보다 적재량이 오히려 50킬로그램이나 줄었다고 한 교수가 ADD 연구원한테 막 지랄을 했었던 거. 근데 생각해 봐. ADD에 암만 똑똑한 애가 없다고 해도 신형을 만들면서 적재량을 반씩이나 뚝 떨어뜨릴 리는 없잖아. 그거 적재량은 예전 모델 그대로야. 그런데 왜 50킬로그램이라고 줄여 말했냐고? C4를 50킬로그램 채워놨거든. 괜히 적진에 침투시키면 일발 역전을 이룰 수 있는 병기니 뭐니 했던 게 아니야.”

에에?

이승남이 어이없어하자 채 장군은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빙글거렸다.

“C4라고, 이 새끼야. 관창 하나당 복합 장갑 패널처럼 위장해 둔 C4가 50킬로그램씩 붙어 있다고. 그게 아까 몇 대가 들어왔다고 했는지 기억나? 하긴, 아까 네 대가리 속에는 나를 포승줄에 묶어서 끌고 다닐 생각밖에 없었을 텐데 뭘 기억하겠어? 내가 이야기해 줄게. 여섯 대야. 제주도에 이미 여섯 대가 들어와 있어. 그리고 그중에 세 대는 작전 본부 안에 가져다 놨고. 네 생각에는 그 건물이 C4 150킬로가 터져도 멀쩡하게 서 있을 것 같냐? 어때? 이제 모두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 전화를 할 마음이 좀 들어? 윤 장관 하나의 목숨이랑 바꾸면 그게 더 윤리적이긴 하잖아?”

이승남은 얼굴을 감싸 쥐고 생각에 잠겼다.

폭탄이라고? 블러핑일까? 아니면 정말로…….

진실이 무엇이든 간에 정말 채 장군의 말처럼 양심의 부담은 한결 덜어진다. 더 많은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라는 변명이 마련되자 살고 싶은 욕망이 몇 배나 더 강하게 느껴졌다.

“제 지위는…… 어떻게 됩니까?”

마음을 거의 굳힌 이승남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채 장군은 두 팔을 벌린다.

“이 총장, 나는 마음이 좁은 사람이 아니야. 네가 나한테 욕했던 거? 난 벌써 다 잊었어. 해군에는 참모총장 이승남이 필요해. 그러니까 국군 서열 3위인 그 지위는 그대로 가지고 가. 다만, 너는 이제부터 거주 이전의 자유는 없지. 여기 정리가 끝나면 강정 기지는 육군이 관리한다. 네가 더 이상 실수만 하지 않으면 제명 다 누리고 잘살 수 있을 거니까 너무 걱정하지는 말고. 자, 이제 빨리 전화해! 나도 시간 붙들어 매놓은 사람 아니야.”

이승남은 고개를 끄덕이고 전화기를 꺼내 번호를 눌렀다. 검은 재킷이 귀를 바짝 대고 통화 내용을 같이 듣는다.

“예, 장관님. 접니다. 채 장군 체포했습니다. 군복 벗기니까 곧바로 기가 죽어서 인정했습니다. 저, 그 건 때문에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따로 좀 뵐 수 있겠습니까? 살려준다는 약속을 장관님이 직접 대면하고 해주셔야 그 상자 행방을 말하겠다고, 채 장군이 하도 고집을 부려서 말씀입니다. 기지 내로 끌고 다니기에는 아무래도 사람들의 눈이 많아서……. 예, 예, 그럼 거기에서 뵙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이승남이 한숨을 내쉰다.

“한 시간 뒤에 보잡니다. 지금 마무리 지어야 할 일이 있다고.”

“잘했어. 야, 우리도 출발해.”

채 장군의 명령이 떨어지자 모두들 재빨리 움직인다. 문밖의 병력들은 어느새 군복으로 갈아입고 승차할 준비를 마쳤다.

지프의 지붕도 도로 씌워놓았다. 에쿠스에는 운전병과 검은 재킷, 채 장군, 그리고 이승남의 순서로 앉았다.

이곳으로 올 때와 똑같은 대형으로 두 대의 지프와 한 대의 에쿠스가 이동한다. 하지만 올 때에 타고 있던 사람들 중 살아남은 것은 단둘뿐이다. 다른 대원들은 멀찍이 떨어져서 그 뒤를 따랐다.

“……장군님, 이 일 마무리 지으면 저 병사 하나 차출해 오고 싶습니다.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달리는 차 안에서 검은 재킷이 채 장군을 돌아보며 말했다. 단추가 날아가 버린 군복을 대충 여미던 채 장군이 건성으로 대답한다.

“그런 걸 뭘 나한테 일일이 말하냐? 그냥 네가 알아서 빼다가 써.”

“그게, 삼척 원전 방어 부대 놈인데, 거기 책임자가 대령으로 특진 예정자여서 제가 마음대로 하기에는…….”

“훗, 대령이 대대장이야? 그놈의 특진이 군대 족보를 개족보로 만드는구만. 새끼, 생긴 것답지 않게 섬세한 척하기는. 알았다. 까짓것, 내가 명령서 한 장 써주면…… 근데 가만. 삼척 원전이라고 했어?”

“네, 그렇습니다. 경비병으로 있는 이등병인데, 잘만 키우면 앞으로 장군님 큰일 하실 때 요긴하게 쓸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아, 너는 그 시간에 물속에서 노 젓느라 소식을 못 들었겠구나. 거기 오늘 새벽에 함락됐어. 전멸이야. 왜? 아쉬워? 똘똘한 놈이었어?”

채 장군의 이야기를 들은 검은 재킷이 무표정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그런 데서 썩기는 아까운 놈이었습니다.”

***

“……헉!”

깜짝 놀라 잠에서 깨어난 진우는 벌떡 일어나 총구를 사방으로 정신없이 돌렸다. 다행히 주변에는 아무것도 없다. 만약 잠들어 있던 도중에 좀비가 근처를 지나기라도 했다면 꼼짝없이 죽었을 것이다.

“뭐, 뭐야…… 얼마나 뻗어 있었던 거야? 윽! 콜록, 콜록.”

뼈까지 추위가 사무쳐 오는 것 같아서 견딜 수가 없다. 진우는 폐가 터져라 기침을 하면서 등에 덮고 있던 담요 자락을 끌어 올렸다.

이상하다. 분명히 계속 움직이는 중이라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잠이 들었던 것일까…….

폭우가 쏟아지는 산속을 계속 걸었었다. 밤새도록 내내 비를 맞은 탓에 푹 젖은 옷을 바람이 스칠 때마다 피부가 찢겨 나가는 것 같았다.

텅 빈 배에서는 꼬르륵 소리가 나고, 몇 미터 앞도 제대로 보기가 어려웠다. 그렇게 얼마를 헤매던 중에 이 펜션을 만났다.

펜션! 음식! 먹을 것!

구세주라도 만난 것 같은 마음에 내달려 왔지만, 가까이 다가와 보니 이미 예전부터 영업을 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폐쇄된 펜션이었다.

당장에 귀신이 나와도 이상하지 않을 것처럼 낡은 데다 귀퉁이가 부서진 문들은 바람에 제멋대로 휘둘리며 쿵쿵거렸고, 깨진 유리창을 통해 들여다보이는 방 안에 있는 물건이라고는 곰팡이가 피어 있는 꼬질꼬질한 담요 정도뿐이었다.

진우는 일단 추위를 막기 위해 담요부터 뒤집어쓰고 모든 방문을 조심스레 열어보았다. 좀비는 없구나…… 하고 안도의 한숨을 쉬며 돌아서는 순간, 그는 의식을 잃고 쓰러졌었다.

“으흐으으으~ 으으으~”

젖은 옷을 입은 채 잠이 들었던 터라 체온은 더 낮아졌고, 진우의 입에서는 계속해서 덜덜 떠는 신음이 새어 나왔다. 조

금만 더 오래 꿈속에 머물러 있었더라면 굳이 좀비의 힘을 빌리지 않더라도 저체온증 때문에 저세상에 갈 뻔했다. 고린내가 나는 담요를 한 장 더 덮어써 봐도 별로 나아지는 것 같지 않다. 너무나 추웠다.

불! 불이 필요하다.

진우는 다시 한 번 펜션을 샅샅이 뒤져 창고에서 녹이 잔뜩 슨 바비큐용 그릴과 반 봉지 정도 남은 차콜, 그리고 라이터 기름을 발견했다.

“젠장, 숯불만 있고 구워 먹을 수 있는 건 하나도 없네…….”

서둘러 방으로 돌아온 진우는 그릴에 차콜을 붓고, 그 위에 라이터 기름을 끼얹었다.

그러고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지포라이터에 불을 붙였다. 원래는 중위의 물건이지만, 필요할 것 같아 배낭 안에 담아 왔다. 습기를 잔뜩 먹고 있던 차콜이라도 라이터 기름의 힘을 얻으니 금방 불이 붙는다.

“이거…… 얼마나 오래가지?”

불안해진 진우는 다 떨어져 가는 싱크대 문짝을 뜯어내 밟아서 땔감을 만들었다. 때가 켜켜이 찌든 벽지도 북북 찢어 불 속에 던져 넣었다. 멀쩡한 창문이 없었기 때문에 환기에 대한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휘이이잉~

강풍이 몰아칠 때마다 그릴 속의 불꽃은 날아갈 듯 춤을 춘다. 더러운 담요를 머리끝까지 덮어쓴 채 덜덜거리며 한참 동안 그릴의 불을 쬐던 진우는 수통에서 물을 한 모금 들이켰다.

차츰 손발에 감각이 돌아온다. 군복과 신발도 아까에 비하면 한결 물기가 가셨다. 이후에도 벽에 머리를 기댄 채 간간이 땔감을 넣어주던 진우는 빨간 불빛을 보면서 중얼거렸다.

“아~ 그래도 이제 좀 살 것 같다.”

체온이 회복되자 이번에는 허기가 고통을 주기 시작했다. 12시간 이상 아무것도 들어간 게 없는 배는 계속 꼬르륵대며 음식을 달라고 보챈다.

아껴가며 수통의 물을 마셔 봐도 공복감은 가시지 않고 점점 더 심해져 온다. 진우는 쓰린 배를 움켜쥐고 배고픔에 대한 생각을 떨쳐 버리려고 애를 썼다.

다른 걸 생각하자, 뭔가 기분이 좋았던 걸…….

펜션이라는 공간은 자연스럽게 진우에게 작년 여름의 추억을 떠올리게 만든다.

세 친구와 함께 놀러 갔던 일, 그들과 함께 계곡에 발을 담그고 마셨던 시원한 맥주, 저녁에 별을 보며 구워 먹은 두툼한 삼겹살, 소시지…… 삼식이가 꼬셔온 여자애들이 깔깔대며 입안에 넣어주던 상추쌈…….

저절로 고인 침이 넘어가며 목젖이 꿀꺽댄다. 배고픔을 잊을 수 있을까 해서 시작한 공상인데, 오히려 음식 생각만 더 간절해졌다.

“한심하다. 가족도, 친구도 아니고, 상추쌈이 생각나다니. 이렇게 슬퍼도 뭐가 먹고 싶어지는구나…….”

싱크대 문 조각을 그릴 속에 넣고 불을 뒤적이며 진우는 혼잣말을 했다. 분대원들 모두 살아 나와서 함께 있는 거라면 얼마나 좋을까. 아니, 단 한 사람만이라도 구해낼 수 있었다면…….

새 분대로 급조되어 처음 서먹서먹하던 날 밤에 다 같이 합심해서 장교들을 엿 먹이고 포스터를 훔쳐 오던 그 순간으로 돌아가고 싶어진다.

젠장…….

진우는 머리를 감싸 쥐고 스스로를 자책했다. 다들 나만 믿고 있었는데…… 마지막까지 나만 믿고 있었는데 아무도 살리지 못했다.

‘건방진 생각 작작 하고 정신 차려, 이 새끼야. 너도 지금 살아도 살아 있는 게 아니야.’

한참을 더 괴로워하던 진우는 자신을 다잡기 위해 벌떡 일어섰다. 먹을 것……. 당장 얼어 죽을 위기는 넘겼으니 이제 배에 뭔가를 채워야 한다.

하지만 이 네 동짜리 펜션 안에 남아 있는 먹을 것이라고는 창고 안에서 죽어 있는 생쥐의 시체뿐이라는 건 이미 확인했다.

밖은……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난 근처의 텃밭에 뭔가 남아 있지는 않을까…….

진우는 고개를 내밀어 주변을 살폈다.

휘이이이이~

열어둔 문 너머로 보이는 야산에는 떨어진 나뭇잎들이 사방으로 날리고 있다. 비바람이 거세지면서 굵은 나뭇가지들까지 정신없이 춤을 춘다. 산속의 허름한 펜션은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처럼 덜컹대고 삐걱거렸다.

점점 그 위력이 거세지는 태풍을 감안할 때, 시간을 더 끌었다가는 몇 시간 동안 꼼짝없이 이곳에 갇히게 될 상황이다.

몇 시쯤 된 걸까…….

시간을 확인하기 위해 손목을 들어 올린 진우는 그제야 자신의 시계가 망가졌다는 걸 발견했다.

언제 유리가 깨졌는지는 모른다. 달리다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을 때, 혹은 발전소에서 좀비들과 뒤엉켜 싸우던 때, 그게 아니라면 강 일병이 팔을 다쳤을 때 함께 몸을 날리던 순간…….

그 어느 경우에 부서졌다고 하더라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진우는 물이 뚝뚝 떨어지는 싸구려 전자시계를 풀어 배낭에 넣었다.

“이 주위에 다른 펜션 같은 건 또 없나? 하다못해 민가라도…….”

지금 당장 눈에 보이는 곳은 없다. 하지만 어차피 이런 숙박업소는 주변에 물이 흐르는 계곡을 믿고 만들어지니까, 이곳 하나만 동떨어져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문가에 서서 망설이던 진우는 그릴에 나뭇조각을 더 채워둔 다음, 담요를 머리 위로 끌어 올리며 빗속으로 뛰어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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