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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5. 폭풍 속으로 (2) (135/449)


135. 폭풍 속으로 (2)
2022.0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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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비들의 거대한 웨이브가 서울을 덮칠 것이라는 경고와 함께 대령은 몇 가지의 정보를 더 전했다.

하지만 불행한 사실은, 이 귀가 솔깃할 만한 아이디어에 대해 방 안의 사람들 중 아무도 별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는 점이다.

채 장군과 킹메이커, 두 패로 나뉘어 신경전을 펼치고 있었기 때문에 일개 대령이 나불대는 소리 따위는 그들의 귀에 들어올 여유가 없었다.

이후 몇 가지의 보고가 더 이어진 뒤, 회의는 끝이 났다. 회의를 마치며 킹메이커가 마이크를 잡았다.

“비록 우리가 지금 예기치 못한 위기 상황을 겪고 있지만, 우리 민족의 저력은 이까짓 작은 위협보다 훨씬 더 크고 강력하다고 믿어요. 그러니 물론 이겨내고 극복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 그런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아군끼리 숨기는 사실이 없어야 한다는 점이겠지요. 아주 중요한 뭔가가 있을 때 그걸 뒤로 빼놓거나, 혼자만 알고 있으려고 몰래 감춰놓는 일은 없어야죠. 그런 사람은 한 식구라고 부를 수 없을 거 아니겠어요? 그건 배신자죠. 그리고 조직 내의 배신자는 반드시 처벌을 받아야 할 거예요. 채 장군님, 어떠신가요? 제 의견에 동의하시나요?”

킹메이커가 노회한, 그러나 사악한 지혜로 번들거리는 눈동자를 들어 채 장군을 바라본다. 채 장군은 고개를 빳빳이 들었다.

“그런 건 그야말로 기본 중에 기본 아닙니까?”

“그렇죠? 그럼 오늘 회의는 여기에서 마치는 걸로 하죠. 더 모이실 일이 있으면 추후에 개별적으로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회의가 끝나고 모두 컨퍼런스 룸을 나서는 동안 국방과학연구소에서 파견 나온 연구원은 해병들의 도움을 받아 쓰러진 관창을 다시 일으켜 세우기 위해 애를 먹고 있었다.

고양이 방울 전략의 결제를 받지 못한 대령은 안타까운 표정으로 장성들의 뒤를 따라 퇴장했다.

흥, 해군과 공군 똥별 놈들의 뒤통수에 대고 콧방귀를 뀌어준 뒤 방을 나서려던 채 장군은 뒷걸음질을 치던 연구원과 부딪치고 말았다.

털썩, 스마트폰이 바닥에 떨어지고 채 장군은 화난 표정으로 연구원을 노려본다.

“죄, 죄송합니다, 장군님. 여기에 있습니다.”

연구원은 얼른 스마트폰을 주워 소매로 닦은 뒤, 두 손으로 채 장군에게 돌려주었다. 무슨 일인가 싶어 뒤쪽을 돌아보던 킹메이커 쪽 일행들이 비웃음을 던지고 다시 제 갈 길을 간다.

채 장군은 그들과 반대쪽을 택해 서쪽 엘리베이터를 타고 아래로 내려왔다. 구역질 나는 놈들과 한자리에 너무 오래 있었다. 신선한 공기가 필요하다.

“장군님, 아무래도 저쪽에서 눈치를 챈 것 같습니다. 회의 마지막에 그 너구리가 한 말도 그렇고.”

로비 앞에서 담배에 불을 붙여준 참모 하나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채 장군에게 귀엣말을 한다. 채 장군은 연기를 내뿜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내 생각에도 새어 나간 것 같아. 어떤 개새끼가 흘린 거지? 흥, 약아빠진 새끼들. 눈치 하나는 기가 막히게 빠르군. 그래도 그거는 못 넘겨주지.”

그렇게 말하며 채 장군은 부하들이 열어놓은 문을 통해 밖으로 나갔다.

휘이이잉―

아침보다 한층 더 강해진 바람이 빗방울까지 실어서 세차게 몰아치고 있다. 채 장군이 말한 ‘그거’란 며칠 전 삼척에서 회수한 미군의 핵탄두다.

원래 비핵 선언 국가인 대한민국 영토 내에 있어서는 안 되는 물건이나 어쨌든 지금은 그의 손에 들어와 있고, 채 장군은 그걸 아무에게도 양보할 의사가 없었다. 물론 미국은 예외지만…….

그에게는 킹메이커나 교수가 가지고 있는 미국과의 커넥션이 전혀 없다.

하지만 그가 미국에게 되돌려 줄 선물로 핵을 보유하고 있는 이상, 아주 작은 하나의 연결 고리만 생겨나면 킹메이커나 교수에 못지않은 미국의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언젠가 이 세상이 다시 정상화될 때 핵은 미국과 그 사이의 우정을 쌓아줄 중요한 기초가 될 것이라고, 채 장군은 믿었다.

“날씨도 참 지랄 맞네. 야, 차 가져오라고 해.”

채 장군은 투덜거리며 스마트폰의 전원을 켰다. 저 더러운 놈들은 작전 본부 내 핸드폰 사용 금지라는 수칙을 육군들에게만 지키라고 강요하고 있다.

운전병이 도무지 나타나지 않아 채 장군의 이마에 세로로 주름살이 생기기 시작할 때쯤, 뒤쪽에서 그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여어, 채 장군님. 아직 계셨네요. 다행입니다. 저희랑 점심이나 같이하시죠?”

해군참모총장 이승남과 해병대 사령관이다. 이승남은 뭐가 그리 좋은지 계속 빙글거리며 다가와 채 장군의 옆에 선다.

그는 뒤쪽에 무장한 해병들을 쭈욱 도열시키는 것으로 무력시위를 하고 있다. 채 장군의 참모들이 발끈하지만, 저항할 방법은 없다. 말이 좋아 권유지, 이쯤 되면 명령이나 다름없다.

“점심? 벌써? 난 아직 생각이 없는데…….”

채 장군은 여전히 느물거림을 잃지 않고 그 자리를 벗어나 보려 한다. 하지만 이승남은 그의 앞을 막으며 말했다.

“아, 아, 이러지 마시고 같이 가십시다. 서귀포 쪽에 다금바리회를 기가 막히게 하는 집이 있어서 제가 다 예약을 해놓았습니다.”

“뭘 그렇게 멀리 갈 필요가 있습니까? 영내에도 식당이 있는데.”

채 장군이 달가워하지 않자 이승남이 씨익 웃는다.

“오붓하게 따로 드릴 말씀도 있어서 그렇습니다. 오, 마침 차가 왔네요. 타시죠.”

해군참모총장은 전용 에쿠스의 문까지 직접 열어주며 승차를 권한다. 어떻게 해서든 함께 나가겠다는 것이다.

그래, 갑시다. 까짓것.

채 장군은 껄껄 웃으며 상석을 차지해 버렸다. 순간, 자신이 부하들에게 했던 말이 불현듯 떠올랐다. 킹메이커는 언제나 피 흘리는 자리에서 빠진다.

“어딥니까? 그 다금바리회 기가 막히는 집이?”

헤드 레스트에 머리를 기댄 채 장군이 물었다. 왼쪽으로 들어와 앉은 이승남이 한쪽 입꼬리를 올린다.

“이제 금방 가시게 될 건데 몇 분 미리 듣는다고 뭐가 달라지겠습니까? 저희가 알아서 다 좋은 데로 주선해 뒀습니다.”

“신비주의구만! 그런 것도 좋지!”

해병대 사령관이 조수석에 오른다. 당황해하는 채 장군의 참모들을 남겨두고 에쿠스가 출발하자, 두 대의 지프가 따라와 앞뒤를 호위한다. 호위 차량들은 기관총과 같은 중무장을 하지 않은 채였다.

사실 뻥 뚫린 2차선은 별도의 호위조차 필요해 보이지 않을 만큼 평화로워 보인다.

차량 통제가 엄격히 이루어지고 있는 제주의 모든 도로는 말 그대로 한적했고, 가끔 눈에 띄는 차량들이라야 거의 대부분 정부 관계자나 군인들임을 증명하는 스티커를 붙인 것들이었다.

후드드득―

굵어진 빗방울이 앞 유리를 때린다. 가까워진 태풍 때문에 대낮인데도 하늘빛은 어두웠다.

“저런 작은 군함들은 동해 발전소 있는 쪽으로 좀 지원을 보내주지. 어제 삼척 같은 경우만 해도 해군의 지원이 있었으면 버틸 수 있었잖아. 내륙이랑 이어진 제주도 앞바다까지 이렇게 철통같이 지킬 필요가 있나? 어차피 아군들이 주둔하고 있어서 안전한데 말이야.”

태풍을 피하기 위해 항구에 정박하고 있는 참수리급 고속 경비정들을 보던 채 장군이 혼잣말인지 부탁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이야기를 중얼거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승남은 야릇한 미소를 지으며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10여 분을 내달려 서귀포 시내에 도착한 자동차는 몇 개의 코너를 돈 뒤, 3층으로 된 일본풍의 건물 앞에 멈췄다.

“라쇼몽? 뭐, 어디서 쪽발이 이름을 가져다가 붙여놨어? 여튼 겉만 봐서는 굳이 이 비바람을 뚫고 와서까지 먹어야 할 만한 데는 아닌 것 같구만.”

지프에서 내린 병사들이 뛰어와 문을 열고 우산을 받쳐 주자 채 장군은 투덜대며 차에서 내렸다. 식당 안에 들어서자 먼저 와 기다리고 있던 병사 넷이 경례를 한다. 그들 외에 다른 손님은 없었다.

“쉬어, 쉬어. 에~ 그 사람들, 밥 한 번 참 요란하게 먹자고 하네.”

채 장군은 성큼성큼 앞서 걸어가 중앙의 테이블 가장 좋은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유리문 너머 그들 일행이 타고 온 지프와 에쿠스가 보이는 자리다.

“나 전화 한 통 해도 되나? 지금 생각이 났는데, 약속해 놓은 걸 깜빡했네…….”

채 장군이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내 켜자 이승남이 웃는 얼굴로 다가와 그의 손을 지그시 누른다.

“누구인지는 몰라도 채 장군님을 기다리는 거라면, 영광으로 여기면서 기쁘게 시간을 보내고 있을 겁니다.”

해병대 사령관의 사나운 눈초리가 전화는 허용되지 않는다는 메시지를 확실하게 전한다. 채 장군은 끄음~ 고개를 끄덕이며 널찍한 테이블 한쪽 구석에 스마트폰을 던져 두었다.

이승남이 자리에 앉아 손짓을 하자, 식당 내부를 지키고 있던 병사들은 자리를 피하기 위해 후문으로 나가버렸다.

“근데 말이지, 사실 나도 이런 자리 한 번쯤은 마련하려고 했었소. 이 총장도 알다시피 우리 지금 아슬아슬하게 버티고 있잖습니까? 먹물들이야 무슨 생각을 하면서 저렇게 느긋한지 몰라도, 우리 군끼리는 좀 더 협심해서 하루라도 빨리 대규모 섬멸 작전을 시작해야 할 것 같아서 말이지.”

셋만 남게 되자 채 장군이 테이블 위로 몸을 기울이며 은밀하게 말한다. 이승남은 피식거리며 받았다.

“섬멸 작전요? 어떤 겁니까?”

“뭐, 그야 내가 지금껏 열 번도 넘게 이야기했던 건데…… 뭐, 또 한 번 이야기하지. 돈 드는 일도 아닌데. 네이팜이야. 네이팜으로 수원부터 그 북쪽으로는 싹 다 밀어버리고 거기에서 시작하면 되는 거야. 그래도 살아남은 것은 탱크로 깔아뭉개면서 내려오면 될 거고. 음, 우리가 가진 설비를 지금부터 풀로 돌려도 그만한 수효의 네이팜을 만들려면 아마 꽤나 시간이 걸릴 테니까 한시라도 서두르는 게 이득이지.”

“채 장군님.”

이승남이 말을 끊는다.

“채 장군님께서는 왜 그렇게 불바다를 좋아하십니까? 서울이 육이오 직후로 돌아가야 마음이 후련하시겠습니까? 그리고 아직도 그 지역에 남아 있다고 추정되는 생존자만 이백만이 넘습니다. 그 사람들은 대체 어떻게 하시려고요?”

“난 일단 우리가 현실을 냉정하게 인정해야 된다고 봐. 서울? 경기? 거기는 이미 끝이 난 거야. 그렇지 않소? 지금 그 두 군데에 있는 좀비들의 수만 대충 천오백만이야, 천오백만. 상상이나 갑니까? 엄청나지. 역사상 그 어떤 군대도 한 지역에서 천오백만을 사살해 본 경험이 없어. 그 혹독하다던 레닌그라드에서 죽은 사람들을 다 더해봐야 이백만이 될까 말까야. 그런데 천오백만이 한꺼번에 아래로 밀고 남하하면 그걸 어떻게 할 거야? 당해낼 수 있나? 못해. 절대로 못한다고. 핵이라도 쓴다면 모를까. 생존자가 이백만이라고? 그게 무슨 의미인 줄 아시오? 걔들이 있는 자리를 천오백만이 휩쓸고 지나오면, 그 이백만도 좀비가 돼서 우리가 상대해야 하는 적의 수가 천칠백만으로 불어나 버린다는 뜻이야. 우리 군이 늑장을 부릴수록 죽여야 하는 좀비는 더 늘어나면 늘어나지, 절대 줄지를 않는다고. 아니, 나머지라도 어떻게든 살아봐야 할 거 아니야. 그러니까 지금이라도 보호하고 있는 생존자들은 남쪽으로 이송하고, 싹 다 불을 질러서 태워 버려야 돼.”

채 장군은 과장된 몸짓으로 열변을 토하면서 천오백만이라는 수를 강조했다. 이승남은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살살 저으면서 정종을 따랐다.

“채 장군님 비관주의는 정말 못 당하겠군요. 좀비들이 기계처럼 일사불란하게 한날한시를 기해서 일제히 남하한다? 그런 일이 없을 거라는 것쯤은 우리 모두 다 잘 알고 있잖습니까? 그리고…… 그렇게 해서 사태를 정리할 수 있다고 해도 그 뒤에 대체 뭐가 남습니까? 채 장군님, 사람은 이민을 받아 머릿수를 채울 수 있지만, 기간 시설들은 절대 이민 오지 않습니다. 건물 하나, 도로 한 칸, 이런 것들은 전부 돈이 생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어느 날 갑자기 뚝딱하고 생겨나는 게 아니란 말입니다.”

“훗, 이민? 어디에서 온다는 거야? 잘 생각해 봐. 주한미군들까지도 우리에게 통보 한 번 없이 일제히 철수했어. 천하의 미군이 전 세계 유일한 분단국가이자 혈맹에서 병력을 빼낸 뒤, 보름이 지날 동안 아무런 조처를 하지 않고 있다고. 거기까지도 문제가 생긴 게 아니라면 이런 일이 일어날 리가 없겠지. 미국이 그렇다면 나머지 나라들은 어떻겠어? 난리도 아닐 테지. 사실 당신들도 그 정도는 다 추측하고 있잖아? 왜 자꾸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고 싶어 하는 거야? 내 말이 틀리다면 증거를 보여줘. 육군은 근처에 얼씬도 못 하게 하지만, 당신들은 아리랑 5호가 보낸 위성사진 가지고 있을 거 아니야.”

독자적으로 군사위성을 운용하지 않기 때문에 의존할 수 있는 정보는 그 정도뿐이다. 이승남은 대답 대신 정종 잔을 건넸다. 채 장군이 술잔을 기울이는 동안 다금바리회가 나왔다.

커다란 접시 가운데 대가리만 잘라서 세워놓은 다금바리는 입을 꿈뻑거리며 자신이 조금 전 회 쳐진 신선한 고기임을 증명하고 있다. 이승남이 입을 열었다.

“채 장군님, 오늘 평소답지 않게 말씀을 굉장히 길게 하시네요. 하긴 뭐, 힘이 없으니 말이라도 많이 하고 싶어지는 거겠죠. 하지만 저는 그런 말들 전부 동의할 수 없습니다. 어차피 이렇게 된 마당이니까 앞으로는 얼마나 지켜내는가와 좀비들이 전부 처리된 후, 재건의 여력이 있는가의 싸움이 될 겁니다. 전 세계가 새로운 출발을 앞두고 있는 시점인데, 국가 기간 시설을 파괴하려 들다니, 어리석은 것도 정도가 있는 겁니다……. 그리고 지금 중요한 이야기는 그게 아닙니다. 더 큰 문제는 이렇게 위중한 시국에 적전 분열을 일으키려는 세력들이 군 내부에 존재한다는 사실입니다. 혹시 짚이는 거 있으십니까?”

아니…….

채 장군은 몸을 뒤로 젖히고 고개를 저었다.

“대체 무슨 소리인지 알아듣게 이야기를 해줘야 할 것 아니오.”

이승남이 또 피식거린다. 웃음보가 터져서 질질 새기라도 하는 모양이다.

“윤 장관님은 그래도 마지막으로 고백할 기회를 주고 싶어서 일부러 회의까지 소집하셨는데, 끝까지 배신을 하려고 드는군요. 채 장군님, 당신 영 몹쓸 사람이구만.”

갑자기 웃음기를 걷어낸 이승남은 킹메이커를 거론하며 테이블을 탁, 내려쳤다.

“삼척에서 미군 물건 챙긴 거 우리가 모를 것 같아? 우리에게도 다 눈과 귀가 있는데 그런 게 비밀로 남을 것 같았나 보지? 그걸 혼자 몰래 가져가서 뭘 어쩌겠단 거야? 응? 정말로 서울 한복판에서 그걸 터뜨려야 당신 속이 시원하겠어? 길게 말하지 않겠어. 그 상자 지금 어디 있어? 어디에다 숨겨뒀어?”

역시 누군가가 흘렸다. 어떤 개새끼가 비밀을 누설한 거지?

채 장군은 속으로 이를 갈았지만, 끝까지 능청을 부린다.

“크크크, 그거? 그 상자? 미군 물건? 야, 왜 핵탄두라는 말을 못 하고 빙빙 돌려 말하는 거야? 그게 무슨 금지어라도 되는 거냐?”

약이 오른 이승남은 더 목소리를 높였다.

“그래, 인정했지? 나라가 이런 위기에 처해 있는데 사리사욕을 위해서 귀중한 병력을 맘대로 움직여? 그것도 정권에 반하는 목적을 위해서? 이 반역자 새끼! 야, 이 새끼 체포해!”

이승남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2층에서 헌병들이 워커 소리를 요란하게 울리며 뛰어 내려왔다.

“채양균! 반역 및 국가 전복 시도 혐의로 체포한다. 너는 이 시간부로 이등병으로 강등됐다. 군복 벗어!”

양쪽에서 헌병들이 달려들어 그의 계급장을 떼고 옷을 잡아 뜯는다.

투둑, 단추가 떨어져 나간 옷들이 양쪽으로 벌어지고, 탁자 위에 올려두었던 모자는 바닥에 구른다. 이승남은 콧구멍을 벌렁거리며 그 광경을 구경하고 있다.

“이 총장…….”

포승줄을 든 헌병이 다가오자 채 장군은 애원하는 말투로 입을 열었다. 양팔이 헌병들에게 붙잡혀 있어서 꼼짝도 하지 못하는 그의 얼굴은 이제 그저 노인으로만 보인다.

“나 아직 이거 한 점도 못 먹었어……. 이 총장이 그래도 나 생각해서 사 준 건데 입은 대보고 가고 싶어. 어차피 지금 들어가면 이런 거 다시는 못 먹을 거 아냐. 점심 대접해 준다고 약속했었잖아…….”

“시끄러워, 이 새끼야! 이등병 새끼 주제에 어디 해군참모총장님께 반말을 찍찍 지껄여!”

지금껏 말없이 노려보고만 있던 해병대 사령관이 벌떡 몸을 일으키며 채 장군에게 물을 끼얹는다.

촤악―

물벼락을 맞은 것에도 아랑곳 않고 채 장군은 향해 다시 한 번 애원의 눈길을 보냈다.

별이 번쩍이는 껍데기를 벗겨내자 갑자기 비굴해진 채 장군의 모습을 보면서 이승남은 새어 나오는 웃음을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그렇게나 오랫동안 꿈꿔오던 순간이 지금 현실이 되었다.

천하의 채양균이 이미 죽은 목숨을 자신에게 애걸하고 있다.

접시 위에 놓인 채 뻐끔대는 다금바리 대가리와 다를 바 없는 신세가 된 것이다. 이런 좋은 구경거리는 시간을 충분히 두고 지켜보고 싶은 것이기도 했다.

“채 장군, 당신 말이 맞아. 내가 점심 대접한다고 했으니 숟가락 내려놓을 때까지는 책임져 줘야지. 어이, 물러나. 잠시 놔드려.”

헌병들에게서 풀려난 채 장군은 물수건으로 얼굴과 젖은 옷을 닦아내고 젓가락을 들었다. 침울한 표정으로 회를 집으려고 했지만, 손이 부들부들 떨리는 통에 자꾸 떨어졌다.

밖에 세워둔 지프에서는 병사들이 캔버스 탑을 벗겨내고 있었다.

채 장군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비가 쏟아지는 날 굳이 오픈카를 만드는 이유로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은 한 가지밖에 없다. 포승줄에 묶은 자신을 퍼레이드하듯 끌고 다니며 망신 주겠다는 야비한 발상이다.

흥분 때문에 젓가락은 더 떨리고, 두 번, 세 번 집어도 계속해서 회는 떨어진다. 그리고 이승남의 비웃음 속에 네 번째로 한 점을 집어 들려는 순간, 뒷문이 벌컥 열리며 누군가가 뛰어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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