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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2. 디아스포라 (3) (132/449)


132. 디아스포라 (3)
2022.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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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이라는 단어가 민구의 입 밖으로 흘러나오자 군인들의 눈빛이 번뜩였다.

그들을 자극하고 싶지 않아 민구는 손바닥을 내보인 뒤, 허리를 숙이고 아주 천천히 쿠크리가 들어 있는 나이프 홀더를 풀어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재킷을 벌려 젖히고 울트라마린 나이프도 꺼냈다.

그가 한 자루씩 날카로운 쇠붙이를 꺼내놓을 때마다 군인들의 표정에서 ‘뭐 이런 새끼가 다 있지? 이거 어쩌지…….’ 하는 당혹스러움이 읽힌다.

혹시 하는 마음에 무기를 몽땅 버리고 오지 않은 게 실수라면 실수였다. 세 자루의 칼을 얌전히 바닥에 내려놓은 민구는 다시 두 손을 들고 최대한 부드러운 어조를 꾸며 말했다.

“이게 다요.”

사실을 말하자면 재킷의 안주머니에 재봉된 금속 홀더 아래쪽에는 라 그리프 나이프가 숨어 있다.

그가 울트라 마린 나이프를 빼낸 바로 그 자리다. 손가락을 구멍에 끼워서 쓰는 라 그리프는 날의 길이가 엄지손가락 정도밖에 안 되는 짧은 칼이지만, 맨주먹보다야 수십 배는 유용하다.

먼저 울트라마린 나이프를 빼서 건네주면 대부분의 경우, 그 칼집 안쪽에 또 하나의 작은 칼이 숨겨져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게다가 이건 안감에 넣고 꿰매둔 거라 옷을 전부 뜯어 까보지 않는 이상 발견하기 어렵다. 민구는 예전에 이 수법으로 몸수색을 통과한 뒤 방심하고 있는 상대의 목을 여러 번 땄다.

군인 하나가 다가와 그의 몸을 두드리듯 더듬었지만, 그 역시 큰 칼이 들어 있던 금속 홀더는 그냥 무시하는 눈치였다. 민구는 태연히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서 있었다.

“사람을 찾고 있는데, 생존자들이 어디에 있소?”

몸수색이 얼추 끝났을 때, 민구가 물었다. 조금 전 칼을 버리라고 하던 병사가 대답했다.

“야구장 건물 안에 안전하게 보호받고 계십니다. 외상 있으십니까?”

“외상?”

“네. 겉으로 드러나는 상처 말입니다. 찢어지거나 베이거나, 하여간 최근에 피가 흘러나온 곳 있습니까?”

“이런 거 말하는 건가? 보름 가까이 된 거요.”

민구는 와이셔츠를 젖혀 수술받은 어깨의 꿰맨 자국을 드러내 보였다. 유심히 바라보던 병사가 고개를 끄덕인다. 이미 상처도 아물었고, 정식으로 병원 치료를 받았다는 게 분명하다.

“뭐, 제가 보기도 그런 것 같군요. 치료받은 상처이니, 그럼 24시간만 계시면 됩니다.”

24시간? 어디에 있으라는 말이지?

병사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민구는 그를 빤히 쳐다봤다. 길을 안내하려던 병사가 다시 설명을 해준다.

“안전을 위해서 외부에서 들어오신 분들은 전부 일정 기간 동안 개별 격리 시설에 수용됩니다. 외상이 있는 경우는 48시간, 외상이 없으면 24시간. 예외는 없습니다. 아, 그 가방은 검색을 마쳤으니 가지고 가셔도 됩니다.”

병사가 지퍼가 열린 채 어지럽혀져 있는 민구의 가방을 가리켰다.

24시간이라…….

불만스러웠지만 예외 없는 규칙이라니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병사를 따라 걷던 민구는 천막이 씌워진 통로 앞에 서자 갑자기 중요한 문제가 생각났다는 듯 물었다.

“그 안에서 담배를 피울 수 있소? 그 개별 뭐……라는 데 말이오.”

“쉘터 내에서 흡연은 제한된 구역 안에서만 가능합니다. 그 외에는 전부 금연이 기본입니다.”

“그럼 여기에서 한 대만 더 태우고 갑시다.”

그렇게 말한 민구는 허락이 내려지기도 전에 담배를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앞뒤로 그를 둘러싼 채 걷던 병사들은 제멋대로인 그의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이해 못 할 일도 아니어서 굳이 제지하지는 않았다.

후우~ 무표정한 얼굴로 연기를 내뿜은 민구가 가까이에 있는 병사들을 향해 담배를 권한다. 담뱃갑을 내미는 민구의 손등에는 조금 전에 튄 좀비의 뇌수가 얼룩처럼 말라붙어 있다.

병사들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들 중 두 명은 흡연자였고, 브랜드도 사회에서 즐겨 피우던 것이지만, 저 손으로 주는 담배를 받아 입에 대느니 차라리 평생 담배를 끊는 편을 택하리라고 생각했다.

***

“오, 우리 지금 한강 건너고 있어요. 허허, 이제 강북이네. 신기하다.”

“분위기는 어때요? 네? 혹시 좀비도 보여요?”

“아뇨, 좀비는 없어요. 그냥 차들이 한쪽으로 밀려나 있고, 철책들이 쭈욱 늘어서 있어요.”

의자 위에 발돋움을 하고 서서 공기구멍에 눈을 대고 바깥을 살피던 남자는 끊임없이 지껄이며 중계방송을 해주었다. 가끔씩 사람들이 궁금한 걸 물어보면 열심히 대답도 해준다.

“위험합니다. 앉으십쇼!”

앞자리의 군인들이 몇 차례 경고를 하고, 두어 차례 억지로 끌어 앉히기도 해봤지만, 남자는 막무가내였다. 게다가 컨테이너에 타고 있는 다른 사람들 역시 남자가 전해 주는 바깥의 상황을 듣고 싶어 했다.

옆자리의 사람들은 남자가 넘어지지 않도록 다리를 잡아주기도 했다. 그래서 군인들은 그냥 남자가 하고 싶은 일을 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저러다가 굴러떨어져서 머리가 깨진다고 한들 뭐 어떤가. 어차피 제 대가리인데…….

“아…… 젠장, 살아 있는 사람이 하나도 안 보여. 자동차로 이렇게 한참을 달렸는데…….”

남자가 또 혼잣말을 한다. 그의 목소리에 담긴 절망감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것 같아 임수정은 한숨을 쉬었다.

투투투투― 호위하며 상공을 나는 헬리콥터의 소리, 크르릉거리는 장갑차의 엔진 소음 같은 것들 때문에 더 불안해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임수정은 귀를 막고 고개를 푹 숙였다.

흔들리는 찜통 컨테이너 박스 안에서 이동하기를 40여 분. 두근거리며 출발한 길이지만, 이제는 몸도 마음도 꽤나 지쳐 버렸다.

쒸이이이잉―

양쪽 공기구멍을 통해 바람이 통과하며 내는, 소름 끼치는 소리 역시 그녀를 우울하게 만든다. 게다가 그 바람에는 쉘터에서 제대로 씻지 못한 사람들의 지독한 땀 냄새가 섞여 있다.

“아, 지금 가는 곳도 괜찮을 겁니다. 그렇게 심려하지 마세요. 허허, 마음 붙이는 곳이 바로 고향이라고들 하지 않습니까.”

임수정이 다시 머리를 들었을 때, 맞은편의 육만배가 한쪽 눈을 찡긋하면서 그녀를 달랜다. 그 옆의 중년 여자는 무섭다는 핑계로 육 사장의 손을 꼭 쥔 채 수줍은 소녀 흉내를 내고 있다.

“고향요…….”

그 말이 너무 허망하게 들려서 임수정은 맥없이 웃었다.

가족도, 친구도 없는 고향이 다 뭐란 말인가. 삼복더위 속에서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철모를 벗지 못한 채 총을 꽉 부여잡고 있는 어린 병사들을 볼 때마다 군에 있는 동생이 생각난다.

이들만큼만이라도 그 애가 안전하게 지내고 있는지 늘 걱정이 되지만, 임수정에게는 동생의 안부를 물을 방법도, 용기도 없다.

건대 쉘터가 가까워질수록 그녀의 마음속에는 다가올 실망에 대한 두려움이 점점 더 커졌다. 그녀의 가족이 살아남아 그곳으로 와 있을 가능성은 현실적으로 극히 낮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어, 이거 왜 이래? 지금 안 움직이잖아?”

속도를 줄이던 트레일러가 마침내 그 자리에 멈춰 서고, 그 상태로 시간이 흐르자 사람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불안증이 도진 일부는 앞자리의 군인들을 향해 이유를 물었지만, 외부와 완전히 차단되어 있는 상황이니 그들이라고 해서 알 리가 없다. 군인들 역시 두려움이 번진 얼굴을 가로로 저을 뿐이다.

“뭐가 좀 보여요? 네? 밖에 지금 무슨 일이에요?”

사람들은 이제 공기구멍에 매달린 남자에게 질문했다. 어떤 이들은 자신들도 자리에서 일어나 공기구멍에 눈을 대고 밖을 보기 위해 필사적으로 발돋움을 하고 있다.

“모, 모르겠어요. 여기 지금 보이는 데에는 아무 일도 없어요. 그냥 조용해요.”

남자의 답이 돌아왔다.

“어딘데요? 우리가 있는 데가 지금 어딘데요?”

“스타 시티 막 지났어요. 건대역 사거리 바로 전이에요……. 어, 저, 저거…….”

남자가 갑자기 말을 더듬더니 마침내는 입을 굳게 다물어 버렸다. 사람들의 궁금증이 폭발하기 직전, 머리 위로 헬기가 지나는 굉음이 울린다.

그러고는 곧바로 기관총 소리가 요란하게 고막을 흔든다. 그들이 타고 있는 컨테이너 위의 기관총 포대에서 발사되는 건 아니었다.

“아니, 왜 갑자기 입을 다물어? 무슨 일이에요? 응? 뭐냐고요?”

육만배 옆자리의 중년 여자가 악을 쓴다. 남자는 겁에 질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처, 처, 철책이 무너졌나 봐. 좀비들이 뛰어와요.”

“뭐라고요? 그럼 안 되잖아!”

사람들은 악을 쓰고 울음을 터뜨리거나, 다른 사람에게 안기거나, 혹은 직접 눈으로 확인하기 위해 의자 위로 뛰어올랐다.

임수정은 눈을 꾹 감고 얼굴을 감싸 쥐는 편을 택했다. 가슴이 너무 두근거려서 양팔로 심장 주변을 눌러봐도 도무지 진정이 되질 않는다.

어떡해…… 어떡해…….

겁먹은 사람들이 날뛰면서 컨테이너 내부는 순식간에 극도의 혼란에 빠졌고, 네 명뿐인 군인은 통제보다도 자신들이 가진 총기를 탈취당하지 않는 것에 더 신경을 바짝 곤두세워야 했다.

“앉아요! 가까이 오지 말고 앉으라고!”

이런 젠장…….

육만배가 기동이와 눈빛을 교환했다. 여차하면 중년 여자를 총알받이로 앞세워 다가간 다음, 저 군인 놈들이 들고 있는 총이라도 빼앗아야겠다고 생각한 육만배는, 뱀처럼 도사린 채 틈이 나기를 기다렸다.

투투투투투투―

그러는 동안에도 프로펠러와 기관총 소리는 쉼 없이 울려 댄다. 공기구멍에 매달려 있던 남자는 온몸을 바들바들 떨면서도 잠시도 눈을 떼지 못하고 홀린 듯 그 제한된 광경을 지켜보았다.

투투투투투―

하늘에서 불덩이처럼 새빨간 총알이 날아와 저 멀리로 떨어진다. 총알 줄기가 훑고 지날 때마다 잘려나간 좀비들의 팔다리가 사방으로 튀고, 박살이 난 자동차에서는 화염이 솟구쳤다.

와장창창!

스타 시티와 주변 건물들의 유리창이 부서지는 소리, 그리고 좀비들의 울음소리, 로데오거리의 골목에서 뛰쳐나온 좀비들은 그들을 향해 미친 듯이 달려오고 있다.

투루루루루룩―

또 한 차례 개틀링 건이 수백 발의 총알을 퍼부었고, 조금 전까지 살아 움직이던 좀비들은 썩은 고깃덩어리 조각들로 바뀌었다.

“제발…… 제발…….”

임수정은 누구인지 특정할 수 없는 존재를 향해 간절하게 빌었다. 죽음의 기운이 바로 코앞까지 다가오자, 가족도 친구도 모두 잃었다고 풀 죽었던 게 얼마나 사치스러운 투정이었는지 비로소 깨달을 수 있었다.

텅텅텅텅텅텅―

지붕의 포대에서 기관총들이 일제히 불을 뿜었고, 그 진동은 단단한 쇠 벽을 타고 고스란히 전달되어 큰 종처럼 컨테이너 내부를 울렸다.

쾅쾅쾅―!

장갑차에서 발사된 40㎜ 유탄이 폭발하면서 로데오거리의 건물들을 박살 내고 검은 연기를 피워 올린다. 무너진 돌 더미는 좀비들이 튀어나오는 통로를 아예 막아버렸다.

그렇게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커다란 소음들이 폭풍처럼 휘저어 대기를 얼마나 계속했을까. 사람들의 고막이 반쯤 기능을 잃었을 때쯤, 갑자기 사방이 고요해졌다. 그리고 조금 뒤, 컨테이너는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제 끝난 거야? 우, 우리 살아남은 거야?”

감정이 북받쳐 오른 사람들이 울음을 터뜨린다. 임수정의 눈에서도 역시 눈물이 흘러나왔다.

휴우우~ 군인들은 한숨을 쉬며 승객들을 향해 겨누고 있던 K―2를 다시 내려놓았다. 쉘터에 도착할 때까지 잔여 10여 분 동안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다들 자신이 얼마나 보잘것없고 약한 존재인지 확실하게 알게 된 것이다. 겁먹은 사람들이 지려놓은 소변이 그 증거라도 되는 양 고약한 냄새를 풍기며 코를 자극한다.

쿵―! 쿵―!

목적지에 도착했다는 것을 알리는 두 번의 긴 노크가 바깥쪽에서 울려왔다. 병사들은 자물쇠를 풀고 문을 열었다.

“고생하셨습니다. 줄을 맞춰 순서대로 내립니다.”

무뚝뚝하게 말하는 병사의 얼굴에도 조금 전 휩쓸고 간 공포의 흔적이 남아 있다. 사람들은 후들거리는 다리를 달래가며 서둘러 컨테이너 아래로 내려섰다.

“아…….”

자신을 맞는 것이 또 다른 철책이라는 걸 보게 된 순간, 임수정은 낮게 신음했다. 주차장이었던 공간을 빙 둘러 2중으로 세워진 높다란 철책은 그들이 출발할 때 보았던 그 황량한 모습의 복사판이었다.

“멈춰 서지 않습니다.”

병사의 채근을 받고서야 임수정은 다시 걷기 시작했다.

넓은 주차장 건너편에는 4층 높이의 실내 체육관이 문을 활짝 열고 새로운 이주민들을 받아들이는 중이었다.

체육관 내부는 어두웠다. 3층까지의 창문이 모두 벽돌과 시멘트로 단단히 봉인되어 있어서 들어오는 햇빛의 양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한때 농구 코트였던 나무 바닥은 칸막이 두 개를 이용해 셋으로 구획을 나누어놓았다. 공간을 넓히려고 객석을 들어냈는지, 귀퉁이 쪽에는 콘크리트가 황량하게 드러나 있다. 그보다…….

그런 것들보다 임수정을 맥 빠지게 만드는 일은 이 쉘터가 거의 텅 비어 있는 채로 그들을 맞았다는 사실이다. 먼저 와 있던, 몇 안 되는 사람들 중에 임수정이 아는 얼굴은 없었다.

“가장 오른쪽이 남자분들, 가운데가 가족 일행이신 분들, 그리고 여자분들은 이쪽을 사용하시면 됩니다. 샤워실과 화장실은 저 표지를 따라 나가시면 됩니다.”

“안쪽으로 가자! 안쪽이 좋아!”

“화장실에서 먼 데다 자리 잡아!”

설명을 듣자마자 사람들은 더 좋은 자리를 선점하기 위해 급하게 뛰었다.

더 좋은 자리? 다 똑같은 딱딱한 바닥일 뿐이고, 개인적인 공간 따위는 전혀 없는데, 도대체 어떤 점이 좋다는 거지?

자신의 몸을 밀치고 달리는 사람들의 뒷모습을 멍하니 보고 있던 임수정은 소지품 박스를 가슴에 안고 다시 주차장으로 돌아 나왔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이곳이 싫다. 불길하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저 낯선 곳에 처음 들어섰기 때문에 느껴지는 감정은 아니었다.

부르르릉―

철책 너머에서는 그녀를 태우고 왔던 장갑형 트레일러가 잠실로 귀환하기 위해 막 출발하려는 참이다. 지금 마음 같아서는 체면이고 뭐고 달려가 잠깐만 멈춰 서서 자신을 좀 태워 달라고 사정하고 싶었다.

“그래, 잠실도 처음에는 낯설고 힘들었어. 어차피 내 집 아닌 다음에야 다 똑같아.”

한참을 더 멍하니 앉아 있던 임수정은 그런 말로 자신을 다독이면서 일어났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테라가 와주면 이 고독감도 한결 나아질 거라고.

***

3층 집 옥상에서 두 번째로 맞는 아침은 전날보다도 별로였다. 다들 해가 중천에 떠올라서야 깨어났는데, 그래도 여전히 컨디션은 좋지 않다.

유빈이가 애써 차린 아침도 다들 먹는 둥 마는 둥했다. 심지어 요리를 만든 유빈이 본인조차 몇 숟갈 떼지 않고 전부 버렸다.

입안에 모래가 가득 들어 있는 것 같이 껄끄러워 뭘 씹을 수가 없다. 온몸이 다 부서지는 것 같다. 어제 하루 종일 뙤약볕과 불길에 덴 피부는 자고 일어나니 더 화끈거리며 따가웠고, 눈도 잘 떠지지를 않는다.

“아하아암~”

두 개째 캔 커피를 마시던 삼식이가 입이 찢어져라 하품을 한다. 카페인이 도무지 위력을 발휘할 생각이 없는 것 같다. 좀비 세상이 와버린 이후 편한 꿈을 꿨던 적은 거의 없지만, 어젯밤만큼 괴로웠던 적은 처음이었다.

죽을 만큼 피곤한데도 이상하게도 정신만은 반쯤 깨 잠을 편히 이루지 못했다.

게다가 결정적으로…… 그런 어려움들을 다 이기고 어떻게, 어떻게 눈이 감기는가 싶으면 여지없이 누군가가 천장이 떠나가라 비명을 질러 대는 통에 다들 놀라 다시 깨기를 새벽까지 반복해야 했다.

“오늘은 바람이 꽤 세게 부네요. 아우, 목이야…….”

문제의 범인이 배낭을 챙겨 들면서 갈라진 목소리로 혼잣말을 한다.

어젯밤 제니는 열두 번도 넘게 잠꼬대를 하면서 소리를 질러 댔었다. ‘으아! 으아!’ 하는 단순한 비명부터 ‘미안해요! 미안해요!’ 하는 애원까지…… 참 다양하기도 했다.

불타오르던 시체들에 대한 죄책감이 어지간히도 강렬하게 남았던 모양이다. 두어 번인가는 테라의 이름을 부르며 흐느끼기까지 하면서.

“잠꼬대를 그렇게 했으니 목도 아프겠지. 너 엄청 높이까지 올라가더라. 혹시 예전에 네 잠꼬대 때문에 경찰 출동한 적 없었어?”

삼식이가 장난을 걸어왔지만 제니는 그를 차가운 시선으로 바라보며 등을 홱 돌렸다.

“아, 몰라요. 오빠랑은 말 안 할 거예요.”

“어? 왜?”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을 해봐요, 나한테 잘못한 거 없었나.”

“응? 모르겠는데? 내가 뭘…… 네가 자꾸 깨서 괴로워하기에 재워주려고 옛날이야기까지 해줬잖아. 기억 안 나?”

“악몽 꾸다 깬 사람한테 해준 이야기가 여고 2등이 1등을 밀어 죽이고 혼자 자습하는 이야기였잖아요! 듣는 내내 어째 이상한 기분이 들어도 설마설마했는데.”

“하하하, 그래. 너 그거 싫어하더라. 하지만 네가 하지 말라고 해서 곧바로 다른 이야기로 바꿨잖아.”

“그래요. 그다음 한 게 ‘어? 아빠, 왜 엄마 업고 와?’ 이거였잖아요. 둘 다 사람 죽인 살인자가 귀신들한테 복수당하는 이야기잖아요!”

“맞아, 이 개새끼야! 너 때문에 나도 잠 못 잤어. 안 그래도 바로 아래층에 여자 시체가 있다며?”

갑자기 끼어든 신입도 분통을 터뜨렸다. 한쪽 눈썹이 없으니 그래 봐야 웃음만 나온다.

“하하하! 뭐, 어때. 살인을 한 놈들은 벌도 좀 받아야지. 제니, 너는 사람 죽이지 않았잖아.”

“죽였다고요! 바로 어제! 수백 마리나 한꺼번에! 태워서! 그래서 악몽을 꾼 거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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