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 디아스포라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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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 디아스포라 (2)
2022.01.09.
그 무렵, 민구는 플래시로 어둠을 밝히며 깜깜한 지하철 선로 위를 걷는 중이었다. 바로 곁에는 길 안내 역할의 스패너와 쇠파이프가 각각 한 개씩 가방을 들고 따라온다.
스패너가 든 가방에는 민구가 만배파 건물을 떠날 때부터 들고 나온 물건들과 마세티가, 쇠파이프가 든 가방에는 어젯밤 짭새들에게서 빼앗은 총이 들어 있다. 민구는 손에 달랑 물병 하나만을 들었다.
“이, 이걸 저한테 맡기셔도 돼요?”
총이 든 가방을 들고 따라오라고 했을 때, 쇠파이프는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왜? 그것만 있으면 나한테 이길 것 같아?”
민구가 히죽 웃으며 물었다.
“아, 아, 아니에요, 형님. 무슨 그런 생각을…… 저, 저는 그냥…….”
“잠실역까지만 길을 안내해. 그러면 그건 늬들한테 줄 테니까.”
“저, 정말이십니까, 형님?”
총 가방을 꽉 끌어안은 쇠파이프가 세계의 절반이라도 넘겨받은 것같이 벅찬 표정을 지었다. 민구는 코웃음을 친 뒤, 빨리빨리 움직이라고 녀석의 엉덩이를 한차례 걷어차 주었다.
빨리 이놈들과 헤어지고 혼자 남아야 담배를 한 대 시원하게 피울 수 있다. 불만 붙였다 하면 애새끼들이 뒈지는 소리를 하며 애원을 하는 통에 그냥 꺼버리기를 몇 차례나 반복했던 것이다.
“이쪽으로 가셔야 돼요. 여긴 저희가 함정을 만들어둔 데거든요.”
두 놈의 안내에 따라 민구는 아무 생각 없이 걸었다. 허술하기는 해도 꽤 많은 함정을 파둔 걸 보니, 이놈들이 살아남아 보려고 나름 얼마나 치열하게 준비를 했는지 눈에 보이는 것 같다.
비단 함정 문제가 아니라도 지하철 선로라는 것은 생각보다 훨씬 넓고 또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지하 생활에 익숙한 이놈들과 함께 길을 나서지 않았더라면 꼼짝없이 미아가 되어버렸을 거라고 민구는 생각했다.
“그, 그런데요, 형님. 그 잠실 쉘터라는 데는 어떻게 아셨어요?”
목적지를 두 정거장 앞뒀을 때, 쇠파이프가 물었다.
“음, 누가 아주 친절하게 메모를 남겼더라고. 왜? 가고 싶어?”
“아, 아니요. 저희는 그런 데는 안 가요. 짭새들이 저희들 겁주려고 여러 개소리를 지껄였지만, 딱 한 가지 맞는 말을 했다고 생각하는 게 뭐냐면요, 나라 꼴이 이렇게 됐으니까 이제 젊은 남자들은 눈에 띄기만 하면 군대에 끌려갈 거라고 하는 말이에요. 제 생각도 비슷하거든요. 씨발, 괜히 끌려가 가지고 총알받이로 내몰리기는 싫어요.”
스패너가 끼어들었다.
“야, 근데 있잖아, 그래도 거기 가면 굶어 죽지는 않을 거 아니야.”
“씨발아, 굶어 죽기는 왜 죽어? 등신 소리 작작해. 물탱크 파이프 열면 물이 콸콸 나오지, 편의점 창고에 과자랑 라면 있지, 그리고 어떻게 다시 찾은 여친인데……. 이제는 죽어도 걔랑 안 헤어질 거니까.”
“아, 맞아. 너넨 분위기 열라 좋더라? 난 자꾸 좀 그렇더라고. 짭새 새끼들하고 나까무라한테 무슨 짓 당했을지 훤히 짐작이 되는데……. 얘는 자기가 찔리는 게 있어서 그러는지 자꾸 더 엉겨 붙기는 하는데…….”
“지랄하네, 등신 새끼가. 걔네가 좋아서 한 일이 아닌데 그렇기는 뭐가 그래? 저는 만약 그런 상황이었으면 그것들 똥구녕까지 쪽쪽 빨았을 새끼가 대단한 열녀인 척하고 자빠졌네.”
“미친, 나라고 그걸 모르겠냐! 말하자면 그렇다는 거지. 근데 쉘터 말이야…… 혹시 모르잖아? 나라에서 안전하게 쉴 만한 데를 만들어두고 잘 관리해 주고 있을지도.”
“야, 우리나라에서? 좃도 그런 일이 있겠다. 그렇죠, 형님?”
뭐가 그렇게 신이 났는지 두 새끼가 떠들어 대는 꼴을 보니, 가만 내버려 두면 한도 끝도 없을 것 같다. 물을 한 모금 마신 뒤, 민구는 대답 대신 차갑게 말했다.
“시끄러워, 이 새끼들아. 관심 없으니까 그딴 건 너희끼리 남아 있을 때 실컷 지껄이든가 하고, 걷는 속도나 올려. 어디인지 빤히 알겠다, 가고 싶으면 아무 때라도 가면 되잖아.”
얼굴에서 웃음기가 걷힌 두 놈은 입을 꽉 다문 채 보폭을 넓혔다. 총을 준다고 하는 바람에 들떠서 잠시 잊고 있었는데, 이 남자는 거짓말처럼 잔인하고 강한 살인 전문가라는 게 기억났다.
어젯밤을 떠올려 보니 민구가 담배로 지진 뒷목이 공연히 따가워져서 스패너는 머리를 긁적였다.
시간이 꽤나 걸린다는 점만 제외하면 이동은 순조로웠다. 중간에 괴물을 하나 만나기는 했지만, 민구가 나서서 별 힘을 들이지 않고 처리했다. 그놈 역시 땅 위의 녀석들에 비하면 현저하게 느렸다.
민구가 쿠크리에 묻은 좀비의 체액을 닦는 동안 두 녀석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감탄했다.
“여깁니다. 다 왔어요. 이 위가 종합운동장역이에요.”
햇살이 환하게 내리비치는 통풍구 아래에서 쇠파이프가 말했다.
쿠르르르릉―
뭔가 굉장히 묵직한 물체가 근처를 지나는지 민구가 위치한 곳까지도 그 진동이 전해진다.
키리릭거리며 아스팔트를 갈아대는 소리가 나는 걸로 봐서 단순한 자동차는 아니다. 진동은 한동안 계속되다가 북쪽을 향해 멀어졌다.
투투투투투―
헬리콥터의 프로펠러 소리가 그 뒤를 따랐다.
“뭐가 움직이는 걸까, 이거? 탱크?”
스패너가 묻자 쇠파이프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런 것 같아. 우와, 장난 아니다. 진짜 쉘터라는 데가 있기는 한가 본데?”
두 놈은 다시 ‘군대에 잡혀간다’, ‘아니다’를 주제로 토론을 벌이기 시작했다. 귀가 아프기도 하고 이제 슬슬 이 녀석들을 놓아줘도 될 것 같다고 생각한 민구는 스패너에게서 연장이 든 가방을 빼앗았다.
“이제 돌아가도 돼. 아, 그리고 너, 나 자던 방 어디인지 알지? 총알은 거기에 있으니까.”
“엑? 그럼 이 가방 안에 든 거는 전부 빈총이에요?”
“하하, 웃기는 놈이네. 그러면 너한테 장전된 총을 들려줄 줄 알았나? 왜 그렇게 쳐다봐? 뭐 더 할 말 있어?”
머뭇거리던 쇠파이프와 스패너는 마주 보고 고개를 끄덕이더니, 그 자리에 넙죽 엎드려 큰절을 한다.
“형님, 저희 살려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됐어, 꺼져.”
민구는 얼른 돌아서서 계단 위로 올랐다. 녀석들이 다시 한 번 감사하다는 합창을 했지만,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돌아서는 놈들의 발소리가 가볍다.
이제 저것들의 세계에서 또 다른 완장과 계급이 생겨나겠구만.
“이런 젠장, 몇 번 출구로 나가야 하는지 물었어야 하는데……. 정작 중요한 건 놔두고 엉뚱한 소리만 지껄이다 헤어졌군.”
개찰구 부근까지 올라와서야 민구는 자신이 지하철 지리에 대해 전혀 모른다는 사실을 깨닫고 혀를 끌끌 찼다.
뭔 놈의 출구가 그리 많은지, 사방 곳곳마다 출구라는 화살표가 달려 있다. 인근 지도 앞에 서서 궁상맞게 한참을 갸웃거린 끝에야 민구는 자신이 나가야 할 곳을 찾았다.
출구 위에 올라선 민구를 맞은 건 높다란 철책이었다. 3미터는 족히 될 법한 2중 철책에 날카로운 레이저 와이어까지. 어지간히 둘러쳐 두고 있다.
휘이이잉―
먼지를 가득 담고 매섭게 몰아치는 바람 때문에 민구는 눈살을 찌푸렸다.
“아무도 없는 건가…….”
주변을 둘러보던 민구는 순찰을 돌던 군인 둘과 눈이 마주쳤다. 민구와 철책 두 개를 사이에 두고 마주 선 군인들은 외계인이라도 본 것 같은 표정으로 입을 다물지 못했다.
지하철에서 불쑥 튀어나온 민구 때문에 그들은 어지간히 쇼크를 먹었다. 철책 외곽을 살아서 돌아다니는 사람은 처음 봤다. 그것도 산책이라도 나온 것처럼 여유 만만한 얼굴로…….
손에 가방을 들고 있지 않았다면 좀비라고 간주해서 발포했을 것이다.
뭐지? 미친 사람인가?
좀비 세상이 너무 두려운 나머지 정신 줄을 놓아버린 것이라면 납득이 갈 만도 하다.
“여기가 잠실 쉘터요?”
목소리가 멀쩡하고 발음도 정확하다. 미친 사람도 아니다!
“어, 어…… 아…… 맞긴 합니다. 근데 아저씨, 대체 어디서…….”
“잘됐군. 이것 좀 열어봐요. 들어갑시다.”
민구는 굳게 잠겨 있는 철망을 가볍게 흔들었다. 병사들은 난감한 표정을 짓는다.
“이, 이쪽에는 문이 없어요. 왼쪽으로 돌아오셔야 됩니다.”
“얼마나?”
“한…… 이, 이백 미터 정도요. 거기로 가면 문이 있습니다.”
병사가 왼손을 들어 건물 반대쪽을 가리킨다. 조금 전, 건대로 가는 장갑형 트레일러가 출발했으니 아직 경비병들이 업무를 보는 중일 것이다.
“아니, 왜 지하철 출구 앞에 문을 안 만들어놓은 거요?”
민구가 짜증 섞인 목소리로 묻자 병사는 여전히 입을 다물지 못하고 대답했다.
“그, 그야…… 그리로 나오는 사람이 아무도 없으니까……. 근데 대체 뭐하는 분이시기에 이렇게 당당하게…… 좀비 세상 온 거 혹시 아십니까?”
“그거 모르는 사람도 있겠소? 이쪽으로 200미터라고?”
병사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확인한 민구는 철책을 따라 걸었다. 조금 귀찮기는 하지만 이제 다 왔으니 굳이 성질을 부릴 필요까지는 없다. 절반 정도 걸어왔을 때, 다급한 목소리가 등 뒤를 시끄럽게 만든다.
“어! 어! 어! 아저씨! 뛰어! 뛰어! 아니, 엎드려! 이거 어떡하지?”
뭐라는 거야? 저놈도 어지간히 부산을 떠는군…….
민구는 고개를 돌렸다. 저 멀리 조금 전 그와 이야기를 나눴던 두 병사가 필사적으로 손을 휘저으며 뛰라고 외쳐 댄다. 그리고 그들보다 100여 미터 뒤에서 예닐곱 마리의 괴물들이 미친 듯이 달려오고 있다.
오! 오랜만이군, 저렇게 팔팔한 놈들은. 역시 지하에 있는 놈들이 이상한 거였어…….
민구가 괴물의 운동 능력을 보면서 고개를 끄덕이고 있을 때, 병사들은 무전기를 꺼내 다급하게 외쳤다.
“당소 1번 게이트! 여기는 1번 게이트! 1루 외야석 저격수들! 올림픽로 방향 좀비들 시야 확보 가능한가? 저격 부탁한다! 생존자가 위험하다! 생존자가 있다!”
― 불가하다! 구조물에 가려져 시야 불량하다! 불가하다!
“이런 젠장!”
병사들은 급하게 뛰어가며 총을 겨눠본다. 하지만 달리는 좀비들을, 그것도 한두 마리가 아닌 저렇게 많은 녀석들이 이곳에 닿기 전에 처리하는 일은 그야말로 불가능하다. 그건 그들 자신이 제일 잘 안다.
“뭐해요, 아저씨! 빨리 도망치라고!”
병사 중 한 명이 쉰 목소리로 외쳤다. 민구는 마지못해 몇 걸음 물러났다. 괴물들이 무서운 게 아니라, 저 철책 안의 군인들이 쏘는 눈먼 총알이 더 신경 쓰인다.
“어, 어, 어~ 저 사람 어떻게 해? 왜 저기 서 있어?”
“으아, 씨발. 저거 꼼짝없이 죽었네.”
근처의 군인 서넛이 수군거리는 방향으로 테라는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조금 전 출발한 장갑형 트레일러를 배웅하기 위해 2층의 철제 통로 위에 서 있었다.
어머…….
놀란 테라는 두 손으로 입을 가렸다. 군인들의 말처럼 철책 밖에 한 남자가 서 있고, 그를 향해서 여러 마리의 좀비들이 달려드는 중이다.
‘어떡해, 불쌍해서…….’ 하는 생각이 테라의 가슴을 흔들었다. 더 이상 볼 수 없을 것 같아 눈을 감으려 할 때, 남자가 가방에서 아주 긴 물건 하나를 꺼냈다.
스르릉―
마세티를 꺼낸 민구는 가방을 바닥에 내린 다음, 뒤로 쭈욱 밀듯이 던졌다. 가방은 3미터 정도 밀려가 철책에 부딪히며 멈춰 섰다.
저 정도 거리면 일껏 가지고 온 소지품들이 썩은 뇌수를 뒤집어쓸 일은 없을 것이다. 뭐, 어차피 그리 대단한 물건들은 아니지만…….
그롸아아아―
녀석들은 언제나처럼 아가리를 쫙 벌리고 고함을 질러 대며 정면에서 달려온다.
“와라!”
민구는 철책에 등을 붙인 채 마세티를 쳐들어 올리며 놈들을 맞을 준비를 했다. 일곱. 그리 많은 수는 아니지만, 더 편하게 싸우려면 한쪽으로 모는 편이 낫다.
첫 번째 놈의 악취가 코에 닿을 것같이 다가왔을 때, 민구는 스텝을 밟아 방향을 바꿨다.
일직선으로 곧장 내달리던 괴물이 철책에 얼굴을 짓찧으며 철컹, 철책이 울리자 안쪽의 경비병들이 본능적으로 움찔거렸다. 민구는 방향을 틀기 위해 돌아서는 놈의 무릎을 마세티로 내려찍었다.
콰작!
내딛는 발의 하중이 고스란히 실려 있던 무릎이 꺾이면서 괴물이 앞으로 고꾸라지려 한다. 하지만 민구는 녀석이 얌전히 엎어지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다.
“아냐, 그리 자빠지면 안 되지.”
칵―!
다시 한 번 휘두른 민구의 칼날이 괴물의 아가리에 박힌다. 믿음직한 두께의 쇳덩이가 턱뼈 사이에 단단히 물렸다 싶은 순간, 민구는 팔을 확 잡아챘다.
괴물은 낚싯바늘에 꿰인 물고기처럼 옆으로 끌려오다가 넘어졌다. 민구는 놈의 성한 나머지 다리 뒤쪽에도 한차례 칼질을 해서 쉽게 일어설 수 없도록 해두었다.
그롸아아아―!
두 번째, 세 번째 놈이 거의 동시에 몸을 날린다. 민구는 마세티를 좌우로 휘둘러 놈들의 중심을 흩고, 빠르게 서너 발짝을 뛰어 물러났다. 달려들던 괴물들이 속도를 이기지 못하고 철책을 들이받는다.
이제 괴물들과 민구는 위치를 바꾼 모양이 됐고, 맨 처음 두 다리를 잃어 엉거주춤하게 서 있는 놈이 나머지 녀석들과 민구 사이에 낮은 벽을 만들어주었다.
그 이후는 쉬웠다. 뼈 사이에 칼날이 끼어버리는 일이 없도록 주의하기만 하면 된다.
뛰어오른 놈들이 동료의 어깨와 대갈통을 걷어차고 달려들 때마다 민구의 칼날이 번뜩이며 춤을 췄고, 괴물들은 차례로 뇌수를 흩뿌리며 바닥에 고꾸라졌다.
“하여간 정직한 새끼들이라니까.”
이것들에게는 무리를 나누어 양방향으로 덤벼드는 협공이나 위장 공격 같은 건 없다. 여섯 번째로 뛰어드는 놈의 발목을 후려친 뒤, 엎어진 녀석의 목을 사정없이 난도질한 민구는 첫 번째 놈을 향해 몸을 돌렸다.
몇 번이나 다른 괴물들의 발에 차여 땅바닥에 굴렀던 놈은 두 팔과 부러진 다리를 이용해서 그로테스크한 자세로, 하지만 여전히 빠르게 민구를 향해 돌진해 오고 있다.
한 발짝을 뗄 때마다 부러진 뼈의 각도가 더 심한 각도로 꺾이지만, 놈에게 머뭇거리는 기색 따위는 없다.
“그래? 그럼 나도 전력으로…….”
민구는 오른팔을 어깨 위로 들어 올렸다가 힘차게 내리꽂았다.
빠가각!
마세티는 괴물의 이마와 정수리 사이, 뼈들이 연결된 지점을 정확하게 타격했다. 괴물이 휘청하며 잠시 움직임이 늦춰진다. 민구는 같은 자리에 다시 한 번 더 풀스윙을 해 칼을 박아 넣었다.
으직!
마세티가 박히는 것과 동시에 녀석의 목뼈가 부러지고, 스위치가 끊긴 괴물은 두 팔을 가슴에 깔며 앞으로 자빠졌다.
“후우우~”
민구는 마세티를 녀석의 쪼개진 머리통에 잠시 맡겨두고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놈들 외에 별다른 괴물이 눈에 띄지 않으니 한 대쯤의 여유는 있을 것이다.
꽤나 오랜만에 제대로 피우는 담배는 그 맛이 각별해서 민구는 그 자리에 선 채 몇 모금 더 깊숙하게 연기를 빨고 난 이후에야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세티를 빼내 괴물의 옷자락에 슥슥, 닦고 가방을 집어 든 민구는 다시 쉘터의 출입구를 향해 걸었다.
“물, 물렸어요? 혹시 물렸습니까?”
민구가 출입구 앞에 서자 경비병들이 당황해하며 묻는다. 다들 조금 전의 싸움을 보고 어지간히 충격을 받았기 때문에, 정작 좀비들과 싸운 건 민구인데 오히려 이쪽이 숨을 헐떡이고 있다.
“처음부터 다 봐놓고서, 안 물렸다는 거 알잖아.”
“그, 그런데 다, 당신, 뭐야? 응?”
그다음은 당연히 정체에 관해 묻는 순서였다. 민구가 말한 대로 그 말도 안 되는 싸움을 처음부터 전부 지켜본 군인들로서는 당연한 질문이다. 게다가 이 태연한 태도는 대체 뭐란 말인가.
뭐라고 대답할지 잠시 생각한 민구가 입을 열었다.
“음, 저쪽 군인들은 생존자라고 부르던데…….”
말을 마친 민구는 담배를 빨아들이며 고개를 들어 출입구와 철책, 그리고 철제 계단과 통로를 살폈다. 이중으로 잠긴 두 개의 문 중에 안쪽 것은 쇠창살로 단단히 보강이 되어 있다.
계단 위쪽에서는 역시 긴장한 빛이 역력한 군인들 서넛과 바짝 마른 계집애 하나가 그를 향해 호기심 가득한 시선을 던지고 있다.
계집애가 입은 짧은 원피스 자락은 정신없이 부는 바람에 날려 팬티가 보일락 말락 한다.
“그, 그런 말이 아니잖습니까? 도대체 뭐하는 분인데 그런 무기를 들고 다니는 겁니까?”
“그럼 저런 괴물들하고 뭐로 싸우라는 거요? 기도로 물리치나? 그런 것보다 이것 좀 열지. 괴물들이 언제 또 올지 모르는데, 애써 살아남은 사람 문 앞에서 죽이지 말고.”
민구의 말에 군인들은 문득 정신을 차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이 남자가 들고 있는 저 커다란 칼, 조금 전까지 좀비의 대갈통에 박혀 있던 저 뇌수가 잔뜩 묻은 칼까지 안에 들이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알았으니까 일단 그 칼부터 버려요. 그러면 문을 열어드리겠습니다.”
나 이런…… 저희들이 사 준 것도 아니면서 왜 버려라 마라야…….
민구는 속으로 혀를 차면서도 순순히 바닥에 마세티를 내려놓았다.
어차피 저 문을 통과할 때 무기를 가지고 가지는 못할 것이라는 정도는 예측한 참이다. 민구가 지시에 순응하자, 군인들도 한숨을 돌리고 자물쇠를 푼다.
드디어…….
쉘터의 철책 안으로 한 발을 들여놓으며 민구는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가볍게 웃었다. 한참을 돌고 돌아서 드디어 만배파 식구들과 만나게 되었다.
“그밖에 무기 더 없습니까? 가방 내려놓고 손을 위로 올리세요.”
병사들은 아직도 경계를 완전히 풀지 않았는지 그를 향해 총을 겨누고 있다. 이쯤 되면 몸수색을 당하기 전에 자수를 하는 편이 훨씬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칼이 몇 자루 더 있긴 한데…… 내가 꺼내겠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