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 디아스포라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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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 디아스포라 (1)
2022.01.08.
“저, 이거 붙이고 올게요.”
박스를 내려놓은 테라가 임수정에게 말했다. 어젯밤 그녀는 아주 공을 들여 자신이 건대 쉘터로 간다는 메모를 쓰고 예쁘게 꾸몄었다. 물론 그것을 읽어주길 기대하는 사람은 그리운 제니다.
비록 헤어진 지 열흘이 되도록 아무런 연락을 받지 못했지만 테라는 제니가 살아 있을 것이라고 굳게 믿었고, 그녀가 언젠가 한 번은 이곳 잠실 쉘터로 와줄 거라 기대했다.
만남의 벽 나무 구조물 앞에는 쪽지를 붙이려는 수많은 사람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모두 아주 가냘픈 희망의 끈을 꽉 붙들고 누군가를 만나길 고대하는 사람들이다. 밀고 밀리는 중에 테라는 몇 번이나 발을 밟혔다. 잘려나간 새끼발가락의 상처가 밟힐 때면 끔찍한 고통이 수반되었다.
“끄응차!”
테라는 발돋움까지 해가며 가장 높은 곳에 제니에게 보내는 메모를 붙였다. 가장 눈에 쉽게 띄는 자리는 물론 사람의 눈높이일 테지만, 거기는 경쟁이 심해서 뒷사람들이 떼어내 버릴 가능성도 몇십 배나 높다.
지금 당장만 해도 극성맞은 사람들은 남의 소중한 메모들을 뜯어버리고 그 자리에 자신의 것을 붙이고 있다.
왜 군인들이 이런 걸 통제하지 않을까…….
돌아서서 걸어오면서도 테라는 불안감을 견딜 수 없었다.
“잘 붙이고 왔어?”
임수정이 웃는 얼굴로 테라를 맞아준다. 가족을 만날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에 그녀의 얼굴은 상기되어 있다.
“네에~ 그런데 좀 걱정이 돼요. 뒷사람들이 제 메모를 떼어버릴까 봐요.”
“그런 걱정은 하지 마. 메모 같은 건 없어도 괜찮아. 제니가 오기만 하면 주변 사람들이 다 이야기해 줄걸? 테라도 얼마 전까지 여기 있었다고.”
“그랬으면 좋겠어요. 그런데 건대로 갔다는 걸 기억하는 사람들이 그때 여기 안 남아 있으면 어쩌죠? 다들 다른 지역으로 옮겨들 가는 분위기잖아요.”
테라는 불안한지 자꾸 엄지손톱을 물어뜯었다.
“자, 이제 게이트 엽니다. 나가시면 안내하는 병사들 지시를 들으시고, 질서를 지켜서 이동해 주세요. 아, 그리고 아침 식사는 이동하신 곳에서 드실 거예요.”
사람들을 두 줄로 세우고 나서 외부로 향하는 게이트가 열렸다.
끼이이이―
이곳 쉘터에 들어온 이래, 내내 단단히 잠겨 있기만 하던 두꺼운 철문이 밀리고 처음으로 그곳을 통해 외부의 공기가 들어왔다.
휘이이잉―
테라의 긴 검은 머리가 바람에 날린다.
투두두두―
머리 위에서 프로펠러가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울린다. 테라와 임수정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봤다. 오늘을 위해 동원된 두 대의 헬리콥터가 서로 교차하며 지나고 있다.
“헬리콥터까지 와 있으니 뭔가 엄청난 일인 것 같은 기분이 드네.”
임수정이 중얼거린다. 생각해 보면 열흘 만에 처음으로 그들은 기지를 벗어나 육로를 통해 움직이는 것이다.
좀비 세상이 오기 전에는 매일의 일과 속에 당연히 들어 있던 일인데, 이제는 굉장히 낯설고 두려운 모험이 되었다.
“자, 이동합니다! 밀지 마시고 순서대로 걸어 나와주십쇼!”
앞쪽에서 대기하고 있던 병사들이 손짓을 하며 나오라는 신호를 보낸다. 사람들은 시키는 대로 걷기 시작했다.
원래 있던 잠실야구장의 계단과 보행로들은 이곳이 쉘터로 지정되자마자 외부의 침입을 막기 위해 전부 끊어놓았기 때문에, 며칠 전 그 반대쪽으로 철골 통행로와 계단을 설치했다.
2층 높이의 간이 계단을 내려가면 사방이 모두 철책으로 둘러싸인 긴 이동식 복도가 나타난다. 그리고 그 위에 국방색 천막을 씌워놓았다.
바로 양옆에는 외벽이라 할 수 있는 3미터 높이의 철책이, 혹시 있을지 모르는 소규모 좀비들의 난입으로부터 이동식 복도를 보호한다.
문제는 어두운색 천막이 주는 불길한 인상이었다. 군의 입장에서는 외부를 보지 않는 편이 더 나을 거라고 판단해 나름대로 신경을 쓴 것인데, 그게 오히려 사람들의 공포심을 자극했다.
“서른여섯, 서른여덟, 마흔. 자, 여기까지 끊겠습니다. 나머지 분들은 이 선에서 기다려 주십시오.”
마흔 명을 헤아린 뒤, 병사 넷이 앞장을 섰다.
“천천히 따라오십시오!”
하지만 사람들은 쉽사리 그 어두운 공간 속으로 발을 내딛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천장에 등이 밝혀져 있다고는 해도 50미터 이상을 이 안에서 걸어가야 한다고 생각하니 두 발이 땅에 달라붙어 움직일 수가 없다. 당장에라도 저기 보이지 않는 장막을 뚫고 좀비가 튀어나와 달려들 것만 같아 두려운 것이다.
이 통로를 준비한 군에서 간과한 점은, 지금 쉘터 내에 있는 생존자들이 모두 좀비에 대한 끔찍한 트라우마를 갖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상공에서 엄호하고 있기 때문에 안전합니다. 이렇게 시간을 지체하시면 오늘 내 이동 못 합니다!”
병사들의 성화에 못 이겨 앞줄의 사람들이 천천히 움직인다. 10여 미터쯤 복도 안까지 들어갔을 때, 선두에서 한 중년 여자가 돌아서며 소리를 질러 대기 시작했다.
“도, 도저히 나는 못 가겠어! 다른 사람들보고 앞에 서라고 해요! 나는 무서워서 저기까지 못 걸어가!”
“이러지 마세요! 다들 마찬가지입니다! 저희 병사들도 지금 밖에서 대기 중입니다! 여러분은 안전해요!”
“그러니까, 다른 사람 먼저 보내라고요! 비켜요! 비켜봐요! 나 좀 나가야 돼! 숨을 못 쉬겠어!”
“안 가시려면 시간 끌지 말고 빠지세요! 다른 분들한테까지 방해됩니다.”
이쯤에서 여자가 그냥 남는 편을 택하면 좋았겠지만, 이번엔 다른 남자가 끼어들었다.
“어이, 후배님! 왜 말을 그렇게 해? 저 천막이 무서워서 그러는 거 아니야. 그러니까 그것만 좀 걷어줘.”
“저희는 그렇게 한가한 사람들 아닙니다. 안 가실 분들은 옆으로 비켜서세요.”
병사는 두 사람을 열외로 세우고 다른 이들에게 앞으로 나갈 것을 부탁했다. 그러나 그들 중 누구도 가장 선봉에 서고 싶은 마음 같은 건 없다.
빽빽이 늘어서 있던 이백여 명의 사람들이 덩달아 동요하자, 그것만으로도 대단한 혼란이 빚어졌다. 그리고 상공의 헬리콥터에서 확성기를 통해 쓸데없는 말을 보태는 통에 사람들의 공포심은 극에 달했다.
“3시 방향에서 좀비 접근 중! 규모는 넷! 거리 천오백! 신속하게 이동하라!”
“어, 어떡해! 아저씨, 일단 돌아가요! 응? 좀비가 온다잖아?”
“아닙니다, 괜찮아요. 저건 그냥 상황을 보고하는 차원입니다. 이중, 삼중으로 안전장치가 있어서 절대로 여기까지는 접근 못 합니다. 1.5킬로미터면 엄청 멀리 있는 거예요!”
2층에서 대기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아래에서 벌어지고 있는 혼란과 철책 너머를 서성이고 있는 소규모의 좀비들이 모두 한눈에 보인다. 객관적으로 보자면 분명 안전하다. 그러나 혹시 무슨 허점이 있다면?
만약 한 가지라도 계획이 어긋난다면 좀비에게 물릴 것이고, 그러면 그 사람들은 그걸로 끝이다. 다시 돌이킬 수 없다.
긴장한 사람들이 흘리는 진땀 냄새가 주변의 공기 속에 꽉 채워졌다. 테라와 임수정도 떨림을 가라앉히지 못해 서로의 손을 꽉 잡은 채 상황을 지켜봤다.
“이거 놔요! 잡아당기지 말라고!”
“아, 이러시면 정말 오늘 못 나갑니다. 그러면 태풍 지날 때까지 꼼짝도 못 하고요. 이 철책이 그동안 멀쩡히 남아날는지 장담할 수 없어서 시간이 더 늦어져요!”
처음 소동을 일으킨 중년 여자를 비롯해서 몇몇은 아예 바닥에 주저앉아 저항을 이어가는 중이다.
군인들이 달라붙어 일으켜 세우려 해보지만, 그럴수록 오히려 더 강하게 반발했고, 히스테리는 서서히 전염될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때, 육만배가 나섰다.
“잠깐만요, 잠깐만요, 일병님. 저한테 1분만, 딱 1분만 주십시오.”
실랑이를 하는 병사에게 양해를 구한 육만배는 웃는 낯으로 말을 걸었다.
“허허허, 여사님. 아직도 이렇게 소녀 같은 구석이 있으시네. 무서워하시는 모습도 어찌나 아름다운지 모르겠습니다. 허허허, 자, 제 손 잡으세요. 바닥이 찹니다. 여자는 찬 데 앉으면 안 좋아요.”
부자에 멋쟁이라는 이유로 쉘터 내에서 인기가 높았던 육 사장이 다가와 직접 손을 내밀어주고 아름답다며 웃어주자, 그 와중에도 중년 여자의 볼이 불그스름해진다.
“어머, 육 사장님…….”
중년 여자가 조금 부끄러워하며 내미는 손을 맞잡자, 육만배는 부드럽게, 그러나 단호하게 잡아 일으켰다. 그러고는 돌아서서 큰 소리로 말했다.
“여러분, 저는 겁이 많은 사람입니다! 맞는 게 무서워서 평생 싸움 같은 것도 한 번 해본 적이 없고, 혼자 자야 할 때는 불도 환하게 밝히고 TV를 켜놓아야 잠이 오는 사람입니다. 그런 데다가 보시다시피 이제는 이렇게 늙어서 힘도 없습니다. 이 길요? 물론 무섭죠. 하지만 저는 이를 악물고 걸어갈 겁니다. 스타 시티에 살고 있던 제 아들! 그 애를 만날 수만 있다면 이렇게 가슴이 떨리고 무서운 것도! 저 좀비들이 울어 대는 소리도! 다 이겨낼 수 있습니다! 제 아들이 건대 쉘터에서 저를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믿으니까요! 여러분, 우리 모두 같은 처지 아닙니까? 힘을 냅시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애타게 우리를 기다린다고 생각하면 이깟 잠시 무서운 건 얼마든지 참을 수 있습니다! 자, 겁보인 제가 한번 앞장을 서보겠습니다. 저 같은 것도 갈 수 있다면 누구나 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가시죠, 일병님.”
일장연설을 늘어놓은 육만배가 병사들과 함께 성큼성큼 걸어 들어가자, 사람들이 술렁인다.
그러고는 천천히 그 뒤를 따라 걸었다. 그래도 버티려는 이들에게는 미리 귀띔을 받은 기동이와 가희가 달라붙어 꾀고 어르며 설득을 했다.
“근데, 오빠. 우리 회장님, 아들이 있어? 건대 스타 시티에 살았었나 봐? 오빠 알고 있었어?”
사람들의 불안이 진정되고 어느 정도 한숨을 돌린 뒤, 가희가 기동이에게 물었다. 기동이는 고개를 갸웃거린다.
“글쎄…… 회장님 자제분이 있으시다는 말씀은…… 그 뭐냐, 금, 금초신문인데…….”
육만배가 겁쟁이 코스프레에 있지도 않은 자식까지 끌어들여 가며 필사적인 쇼를 한 이유는 간단하다.
혹시라도 앞에서 거치적대는 돼지 같은 연놈들 때문에 이동하지 못하고 오늘 오후를 넘기면, 그의 수하들이 꼼짝없이 군대에 끌려갈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와서 그렇게 빈손으로 다시 시작하는 일은 할 수 없었다.
“이쪽으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천막 쳐진 구간이 끝나고 복도 철책 안으로 햇살이 환하게 비추었을 때, 드디어 대기하고 있던 장갑형 트레일러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말이 좋아 장갑형 트레일러지, 그건 그냥 40피트짜리 대형 철제 컨테이너에 개폐식 옆문과 바퀴를 달아놓은 것뿐이다. 그리고 그런 트레일러들을 연결해 장갑차가 끌고 가는 원리였다.
하지만 그렇게 단순한 만큼 튼튼하다는 것에는 이견을 달 수 없을 듯했다.
투웅―
육만배가 두께를 가늠하기 위해 손바닥으로 벽면을 쳐 보자, 믿음직한 소리가 울린다. 좀비의 손톱과 이빨 정도로는 절대 뚫리지 않을 만한, 단단한 벽이다.
“안전합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트레일러 위쪽에 설치된 기총 포대에 앉아 있던 병사가 말을 건넨다.
그들이 앉은 포대는 몇 개의 쇠파이프를 덧대 좀비가 뛰어 올라올 수 없도록 높이를 강화해 놓은 것에 불과하지만, 지상 3미터 위인 만큼 안전해 보인다. 접이식 사다리는 아예 컨테이너 지붕 위에 끌어 올려놓았다.
“허허, 그러네요. 든든하군요. 잘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육만배는 기총사수들에게 살짝 고개를 숙여 보인 후, 컨테이너 내부로 들어갔다.
언뜻 보기에도 허술한 의자가 양쪽 벽을 따라 일렬로 고정되어 있고, 위쪽에는 공기를 통하게 하기 위해 뚫어놓은 조그만 구멍들이 보인다. 별도의 공조 장치나 냉방 시스템 같은 것은 없는 것 같다.
훗, 어지간히 궁하게 만들었군그래…….
자신의 소지품을 담은 박스를 의자 아래에 밀어 넣은 육만배는 의자에 앉아 벽에 몸을 기댔다.
조금 전 그가 잡아 일으켜 줬던 떼쟁이 년이 히죽거리며 옆자리에 붙어 앉아 돼지 암내 같은 악취를 풍기는 것만 제외한다면 이 상황이 그리 나쁘지 않았다.
한편, 임수정과 테라도 천막이 둘러진 통로 앞에서 자신들의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테라야, 너 괜찮아?”
도무지 안정을 찾지 못하는 테라를 향해 임수정이 물었다. 그녀는 계단을 내려오는 내내 불안한 표정으로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았고, 말없이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언니, 정말 미안한데요…….”
마침내 결심을 굳힌 듯, 테라가 입을 연다.
“아무리 고민을 해봐도 저 여기에서 며칠만 더 기다려 보고 싶어요. 제니가 여기까지 왔는데 길이 어긋나서 못 만난다고 생각하면 너무 가슴이 아파요. 며칠만, 며칠만 더 기다려 보고 그때도 안 오면 제가 건대로 갈게요. 그렇게 해도 괜찮죠? 같이 가겠다고 약속해 놓고 말을 바꿔서 정말 죄송해요.”
“아니야…… 미안할 게 뭐 있어. 그래그래, 마음이 시키는 대로 해. 그래야 후회가 안 남지. 나도 네가 제니를 꼭 만났으면 좋겠다.”
“그렇게 말해줘서 고마워요, 언니. 저, 그리고 손 좀 내밀어봐요.”
응?
임수정이 그대로 따르자, 테라는 자신이 차고 있던 작은 시계를 그녀의 팔목에 채워주었다.
“아, 아니야. 이거 안 받을 거야! 딱 봐도 비싼 것 같은데…… 이런 건 그냥 네가 차고 있어야 어울려.”
당황한 임수정이 시계를 풀어 돌려주려고 하자, 테라는 그녀의 두 손을 꼭 잡고 다정하게 말했다.
“그냥 받아주세요. 건대 쉘터에서 배급이 어떨지 몰라 걱정돼 그래요. 제가 가기 전에 언니가 뭔가 필요한 물건이 있으면 그걸로 구하세요. 그거요, 정말 좋은 시계 맞으니까 헐값에 넘기시지 말고 흥정 잘하셔야 돼요. 알았죠, 언니? 아이이~ 풀지 마요.”
“하아~ 알았어. 그렇지만 다른 거랑 바꾸지는 않을 거야. 그냥…… 너 대신, 너랑 같이 있다고 생각하고 네가 올 때까지 내가 맡아두는 걸로 할게. 이거 꼭 찾으러 와야 돼.”
하도 간곡하게 권하는 바람에 임수정은 시계 선물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테라는 그제야 안심이 된다는 듯 애잔하게 웃으며 임수정을 끌어안는다. 쉘터 내의 수많은 군인들이 왜 이 아이만 보면 열광하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웃음이다.
서로 건강히 있어야 한다는 인사를 나누고 둘은 헤어졌다. 통로를 걷다 슬쩍 뒤를 돌아보니 테라는 열외에 서서 가볍게 손을 흔들어준다. 그녀의 뒤에는 호위병처럼 병사들이 버티고 서 있다.
기분 탓일까, 그녀가 마음을 바꿔 여기 남는다는 것을 알게 된 이후 보초병들의 안색이 조금은 밝아진 것처럼 보인다.
“아이고, 안녕하십니까. 여기서 또 뵙는군요. 건대 쪽에 연고가 있으셨나 보죠? 한데 뭐가 좀 허전하다 했더니, 그 늘 함께 다니시던 젊은 아가씨가 안 보이는군요. 그분은 안 오시나요?”
트레일러에 오른 임수정이 자리를 잡고 앉자, 맞은편 좌석에서 누군가 인사를 건넨다. 고개를 들어 보니 육 사장이다. 임수정은 대충 얼버무리며 웃었다.
“아, 네…… 그렇게 됐네요.”
“허허, 그것참 아쉬우시겠습니다그려. 두 분이 단짝이시던데……. 하지만 또 이렇게 새로운 인연을 만나고 그러는 게 인생 아니겠습니까. 허허허.”
육 사장이 과장된 표정으로 사람 좋은 웃음을 지어 보인다.
임수정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는 동안, 트레일러의 문이 닫히고 장갑차와의 견인 고리가 채워지는 소리가 울렸다. 그 철컹거리는 쇳소리가 어딘가 불안함을 선사한다.
아니야, 아니야. 불안할 것 하나도 없어…….
임수정은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가만히 눈을 감고 차가운 쇠 벽에 머리를 기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