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 불꽃처럼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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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9. 불꽃처럼 (4)
2022.01.07.
한 지점에서 출발한 네 개의 그림자가 빠르게, 소리 없이 모래사장을 내달려 두 덩어리로 뭉쳐진 네 사람에게 다가간다. 하지만 두 쌍의 남녀는 그런 기미를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다른 일에 몰두하고 있었다.
“오빠아~ 진짜 끝내준다아~”
“그, 그렇지? 너는 오늘…… 허억~ 아주 죽었어. 허억~”
네 개의 그림자는 속도를 더 높였다. 젖은 발바닥이 모래에 닿을 때마다 나는 철퍽거리는 소리 정도는 바닷바람 속에 묻혀 사라진다.
첫 번째 그림자가 안경의 목을 뒤로 젖히며 울트라마린 나이프로 긋는 동안, 두 번째 그림자는 여자를 덮치며 입을 틀어막았다.
읍―! 눈이 화등잔만 해진 여자가 방어를 위해 무의식적으로 상체를 일으키자 그녀의 가느다란 목에 낚싯줄 올가미가 걸렸다.
끄윽, 큭! 여자가 몸을 뒤채며 발버둥을 치려 들자, 그림자가 두 다리로 옥죄어 누른다. 여자는 이내 축 늘어져 버렸다.
그들로부터 10여 미터 떨어진 장소에서는 호리호리와 여자 2가 비슷한 방식으로 죽어가고 있었다. 호리호리의 목에서 올가미를 풀어낸 그림자가 이쪽을 향해 팔목을 잡고 원을 만들어 상황이 종료되었다는 신호를 보낸다.
“칼을 쓰지 말라니까…… 이 새끼야, 이 피 이거 다 어쩔 건데?”
두 번째 그림자가 첫 번째 그림자를 나무란다. 첫 번째 그림자는 히죽거리며 발로 모래를 쓸어 덮었다. 모두 검은 잠수복을 입고 있다.
“이렇게 하면 되지 않습니까? 어차피 흔한 게 모래인데. 흐흐, 근데 이런 데에 웬 여자가 다 있네…….”
“아가리 다물어. 이빨 보이지 마!”
그들의 곁으로 다가온 세 번째 그림자가 목소리를 낮춰 으르렁거린다. 첫 번째와 두 번째는 곧바로 경직되어 자세를 고쳐 섰다.
“장비 점검해. 너, 후방 경계!”
명령을 받은 두 번째 그림자는 사선으로 메고 있던 소총을 들었다. 총구에 물이 들어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씌워놓았던 콘돔의 고무줄을 벗겨낸 그는 차단벽에 바짝 붙어 섰다.
장비를 매단 채 차가운 밤바다의 파도를 뚫고 한 시간 반이나 헤엄을 쳐서 이곳에 도착했지만, 그들의 표정에서 지친 기색은 보이지 않는다.
첫 번째와 네 번째가 시체들을 끌어 한군데 얌전히 모으는 동안, 세 번째 그림자는 바다 쪽을 향해 서서 플래시를 켰다.
손바닥으로 플래시를 막았다 다시 떼는 방식으로 세 번 불빛을 깜빡거리자, 저쪽에서도 똑같은 신호가 온다. 세 번째 남자는 이번에는 간격이 길게 두 번 불빛을 깜빡였다.
“각자 위치로.”
명령이 떨어지자 세 개의 그림자는 산개해서 어둠 속에 자신들을 묻은 채 사격 자세를 취했다. 그들의 총구에는 소음기가 붙어 있고, 탄창에 든 것은 308 윈체스터 서브소닉 탄약이다.
발사되자마자 음속을 돌파하면서 요란하게 날아가는 일반 총알과 달리, 308 서브소닉은 찰칵거리는 정도의 쇳소리밖에는 만들어내지 않는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총격은 어디까지나 최악의 상황일 때만 벌여야 한다는 걸 다들 잘 알고 있었다. 인간이라는 건 급소에서 조금만 빗나가도 죽기 직전까지 엄청난 비명을 지를 수 있는 동물이기 때문이다.
칙, 치이이익―!
시체들을 모아둔 곳에서 갑자기 이상한 소리가 난다. 무전기가 전파방해를 받았을 때 내는 잡음 같다.
이상하군. 보초병들에게 무전기가 지급되었다는 소리는 못 들었는데…….
세 번째 그림자는 긴장한 표정으로 시체들을 뒤졌다. 예비군의 주머니를 아무리 털어봐도 무전기는 나오지 않는다. 그러는 동안 또 한 번 치칫대는 잡음이 울렸다.
여자의 핸드백이라는 의외의 장소에서 무전기를 찾아낼 때까지 몇 번이고 치익거리는 소리가 났고, 점점 그 주기가 짧아졌다. 멀리 퍼질 리야 없겠지만, 시나리오에 없던 일이라 진땀이 난다.
땀을 뻘뻘 흘리며 무전기를 꺼낸 세 번째 그림자는 개머리판으로 내리쳐 작살을 낸 뒤, 다시 핸드백 속에 던져 넣었다.
“하아~ 하아~ 뭐야, 대체…….”
땀을 씻어낸 세 번째 그림자가 고개를 들었을 때, 제2대는 이미 꽤 가까운 곳까지 와 있었다. 모터를 끈 검은 고무보트 한 대당 여덟 명씩의 건장한 남자들이 몸을 바짝 숙인 채 열심히 노를 저으며 해안으로 다가오고 있다.
“별 이상 없나?”
검은 고무보트에서 제일 먼저 내린 사내가 세 번째 그림자에게 물었다.
무전기에 관해서 말을 해야 할까…….
잠시 망설이던 세 번째 그림자는 결국 그냥 무시하기로 했다. 그게 왜 거기 있냐고 추궁을 당해봐야 자신만 골치가 아파질 뿐이다.
“옛, 돌발 사항 없습니다. 시나리오 대롭니다.”
“좋아, 빨리빨리 움직여.”
명령을 내린 사내는 반라의 상태로 죽어 있는 남녀들의 시체를 경멸하는 눈으로 내려다봤다. 그러는 동안 보트들이 속속 도착했고, 남자들은 자신이 타고 온 보트를 들고 해변의 외딴 2층 건물을 향해 망설임 없이 뛰어갔다.
드르르륵―
기름칠이 잘되어 있는 셔터를 들어 올리자 널찍한 주차장이 나타난다. 가장 먼저 도착한 보트의 인원들이 시체를 집 안으로 들였을 때, 차고에 세워둔 보트들도 거의 다 정리가 끝난 상황이었다.
바람을 빼버리자 열 대라고 해도 그리 많은 공간을 차지하지 않는다. 자신의 보트를 정돈한 인원들은 바닥에 빼곡하게 붙어 앉은 채 다음 명령을 기다리고 있다.
“지금 시각이 공네 시 삼십이 분. 지금부터 이십팔 분 동안 환복하고 모든 준비 마친다.”
등 뒤에서 셔터가 내려지는 동안 시계를 들여다본 사내가 명령했다. 80명의 잠수복을 입은 남자들은 입을 굳게 다무는 것으로 동의의 뜻을 전했다.
그들은 건물 내에 위치한 계단을 타고 순서대로 2층에 올랐다. 널찍한 마루의 긴 옷걸이 랙에는 알록달록한 티셔츠와 카고 반바지부터 와이셔츠와 정장 상하의까지…… 수백 벌의 다양한 의상이 갖춰져 있었다.
“아이, 씨발. 진짜 이년들, 말도 좃나게 안 들어요. 하여간 옛말에 그른 게 하나도 없다니까……. 조선 년들은 사흘에 한 번씩 패줘야 말을 들어. 아니, 씨발, 무전으로 어명 내린 지가 언젠데…….”
2층 건물에서 남자들이 옷을 갈아입고 있을 때, 해변 진입로에는 한 사내가 투덜거리며 걸어 들어왔다. 오늘 이곳에 여자들을 보내고 근처의 차 안에서 기다리고 있던 포주다.
몇 차례나 무전기로 신호를 보내도 도무지 답이 없어서 결국 여자들을 회수하기 위해 직접 나선 것이다. 그는 이 기회에 군인들에게도 단단히 못을 박아둬야겠다고 생각했다.
“씨발, 이런 건 말이지, 그냥 상도덕이라고 하기 전에 민주 시민이 갖춰야 될 기본 매너잖아. 아니, 남이 장사하는 물건을 가지고 놀았으면 반납을 제때 해야 할 것 아니야. 입장을 바꿔서 생각을 해보면 간단하게 답이 나올 텐데도 이러네…….”
포주는 군인들을 나무랄 말을 미리 연습 삼아 중얼거리며 배달 장소인 차단벽으로 걸어갔다. 그런데 아무도 없었다.
“앵두야! 자두야!”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은 포주는 두 여자의 이름을 불렀다. 처음에는 소리 죽여 부르던 것이 꽤나 커질 때까지 대답이 없다.
“이런 개 같은 년들! 쨌어?”
포주는 왔던 길을 다시 돌아오며 씩씩거렸다. 어차피 섬이라서 도망을 칠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가끔씩 이렇게 미련한 년들이 나온다. 이번에는 아마 근무 서기 싫은 예비군 사내놈들이랑 작당을 한 모양이다.
아주 요절을 내줘야지…….
포주는 여자들을 잡으면 어떻게 할까에 대해 고민하면서 걸었다.
고통을 주고 그년들이 비명을 지르며 살려 달라고 비는 상상을 하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조금은 나아지는 것 같다. 그러다가 그는 하지 말아야 할 실수를 저질렀다. 무전기를 꺼낸 것이다.
“아, 씨발! 아직 안 터지나? 조금 더 나가서 걸어야겠다.”
그는 똘마니들에게 계집애들을 잡아 오라는 명령을 내릴 참이었다. 몇 번을 시도해 봐도 무전기는 치익대며 잡음만 냈다. 그때, 누군가 뒤따라오고 있다는 인기척이 느껴졌다. 포주는 뒤를 돌아보았다.
어쩌면 그 잡것들이 뒤늦게 쫓아와 ‘오빠, 용서해 줘요~’라고 빌려 들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런 그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윽!”
포주는 입이 틀어막힌 채 공포로 질린 눈을 껌뻑거렸다. 깨물어보려고 해도 워낙 억센 손이어서 입이 벌어지질 않는다. 목에 차가운 쇠가 닿는 느낌이 든다. 섬뜩하다.
“너 뭐야? 누구에게 무전하려고 한 거야?”
질질 끌려 2층 건물의 그늘 안으로 끌려 들어가 두 손을 테이프로 포박당한 포주에게 한 사내가 물었다.
입을 풀어주자마자 포주는 항의를 하려 들었다. 사내의 말투에서 군인의 낌새를 느꼈기 때문이다. 군인이라면 뭔가 오해가 있던 게 틀림없다.
“아니, 아저씨. 우리 서로 돕고 사는 처지에…….”
개머리판이 얼굴을 후려치는 바람에 포주는 입을 다물어야 했다.
크으윽, 이가 부러지고 피가 뚝뚝 흐르는데, 그 아픈 상처를 또 꽉 움켜쥐고 비명도 지르지 못하게 한다.
“이 새끼가, 묻는 말에 대답 안 하지? 다시 물어본다. 너, 뭐하는 새끼야?”
사태가 심각하다는 것을 깨달은 포주는 얼른 고개부터 납작 숙였다. 얼굴을 보지 않았다는 걸 상대에게 알리기 위해서다.
“저, 저는 그냥 계집애들 두서넛 데리고 정직하게 장사하는 놈입니다. 나, 나쁜 놈 아닙니다.”
“무전은 누구한테 때렸어?”
“그, 그…… 아무것도 아닙니다. 오늘 여기서 계집애들이 배달을 왔는데 회수가 안 되어가지고…… 그년들, 아니, 그 애들 잡으려고…….”
묻던 사내는 더 들을 필요 없다고 생각해서 턱을 까딱거렸다. 곧바로 또 억센 손이 포주의 입을 틀어막는다. 움직임들이 워낙 빨라서 살려주세요……라는 말을 내뱉지도 못했다.
“처리하고 같이 둬.”
사내의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포주의 목젖에 강력한 손날치기가 꽂힌다.
그리고 그가 끔찍한 고통을 느낄 때, 입이 자유로워졌다. 하지만 비명을 지를 수는 없었다. 비명은커녕 쇳소리조차 나지 않는다. 포주의 목에 올가미가 씌워지고 꽉 조여졌다.
하아아~ 포주는 몇 번 몸서리를 치다가 결국 숨을 거뒀고, 그의 시체는 그가 그토록 찾으려 했던 앵두와 자두의 바로 곁에 던져졌다.
펄럭, 남자들은 커다란 푸른색 공업용 포장을 펼쳐서 바람 뺀 고무보트와 시체들을 한 번에 덮어 고정시키고, 억지로 포장을 젖히는 순간 핀이 빠지도록 수류탄 트랩과 휘발유도 장치해 두었다.
그리고 20여 분 뒤, 커다란 가방을 하나씩 든 80명의 사내가 건물에서 빠져나와 어둠 속에 몸을 숨긴 채 섬의 중앙을 향해 빠르게 달려나갔다. 이제 그 장소에 남은 것은 맨 처음 예비군을 죽인 네 명뿐이다.
그들은 2층의 커튼 틈으로 소총의 총구만을 내밀고 조준경을 통해 외부를 감시했다.
두 시간이 가까워지도록 단 한 사람도 보이지 않을 만큼 해안로는 한적했다. 그러나 사실은 그들의 눈에 띄지 않는 각도에서 누군가가 그곳을 지나기는 했다. 혹시나 싶은 불안감에 예비군들을 다시 찾은 도 원사다.
모래사장을 통해 천천히 걸어온 도 원사의 모습은 차단벽에 가로막혀 있어 2층의 저격수에게는 보이지 않았다.
“어허, 이거 진짜 도망을 쳐버렸네……. 이 사람들, 이거…… 실탄까지 가지고……. 허어! 참 큰일 낼 사람들일세…….”
근처의 다른 보초병들은 멀쩡히 잘 근무를 서고 있는데…….
역시나 예감이라는 게 무시할 수 없다. 도 원사는 답답한 마음에 혀를 끌끌, 찼다.
어쩌지?
도 원사는 차단벽 끝자락에 기댄 채 잠시 고민을 하며 서 있었다.
탈영병이 있다는 신고를 하려면 서쪽 항구의 초소에 가야 한다. 그리고 그는 모르고 있지만, 차단벽 밖으로 한 발짝을 내미는 순간 2층의 저격수는 그의 머리에 구멍을 내버릴 터였다.
“에이, 저희들도 다 가정이 있고 생각이 있는 놈들인데, 무슨 큰 사고야 치겠어? 한잠 자고 나면 겁이 나서라도 복귀할 테지.”
도 원사는 그렇게 중얼거리고 나서 차단벽을 따라 되짚어 돌아갔다. 어차피 예비군들이 차고 넘쳐서 인원 관리는 제대로 되지 않는다.
그가 서류에 복귀라고만 적어두면 당장 오늘 밤 점호가 있기 전까지는 아무런 문제도 없을 것이고, 그놈들이 가지고 나간 실탄이라야 다 합쳐도 달랑 스무 발이다.
게다가 사실 큰 난동을 일으킬 만한 이유도 없는 녀석들이라는 걸 그 자신도 잘 알고 있다.
“점심때쯤 그놈들 집에다가 전화나 한 통씩 해봐야겠군.”
도 원사는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귀찮았다. 하지만 방금 내린 결정 덕분에 그의 목숨이 아직 붙어 있다는 생각은 조금도 하지 못했다.
***
― 건대 쉘터 이동을 신청하신 분들께서는 지금 1루 더그아웃 석에 집결해 주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건대 쉘터 이동을 신청하신 분들은 지금 1루 더그아웃 석에 집결해 주십시오. 장갑형 트레일러, 일곱 시 반에 출발합니다. 기다리지 않습니다.
아침 여섯 시가 되자 잠실야구장 쉘터의 장내 스피커에서는 계속해서 같은 말이 흘러나왔다. 아직 새벽잠이 다 깨지 않은 사람들이 일어나 앉아서 눈을 비비고, 그 사이를 헤치고 다니며 군인들도 똑같은 메시지를 전달했다.
“웬일이야…… 지금 몇 시인데…….”
어젯밤 잠을 설친 임수정이 얼굴을 쓸어내린다.
“여섯 시네요. 아함~”
옆자리에서 잠들었던 테라가 시계를 들여다보고 일러주었다. 한뎃잠을 자다가 막 깬 얼굴인데도 어지간히 예쁘고 사랑스럽다.
“이상하다? 어제 분명히 점심 먹고 출발할 거라고 했었는데…… 너무 이르잖아. 뭐지?”
“그러게요. 왜 갑자기 바뀌었을까요?”
넋두리를 늘어놓으면서도 두 사람은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짐을 챙겼다. 짐이라고 해봐야 조그만 박스 하나에 전부 들어갈 보잘것없는 것들뿐이지만, 그거라도 없으면 당장 곤란해진다.
어젯밤 테라는 자신과 임수정의 사물함에 가득 차 있던 음식들을 모두 주변의 아이 엄마들에게 나눠 주었다. 어차피 그 많은 짐을 건대 쉘터에까지 들고 갈 수는 없는 일이다.
건대에 쉘터가 있고, 이제 그곳으로 이동할 수 있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임수정은 들떠서 어쩔 줄을 몰라했다. 혹시 자신의 가족들이 그곳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 때문이었다.
임수정은 테라에게 함께 가자고 제안했고, 테라는 그걸 순순히 받아들였다. 어차피 비슷한 수용소 생활인데, 이왕이면 처음부터 가장 힘든 시기를 같이 보낸 격리 시설 동기의 곁에 있고 싶었던 것이다.
“이봐요, 왜 이런 건지는 좀 이야기해 줘야지. 이렇게 갑자기 스케줄을 바꾸고 그러면 어떻게 해. 곤란하다고.”
중년 여자 한 사람이 지나가는 병사를 붙잡고 항의를 한다.
“바람 세진 거 느껴지시죠? 오후에 태풍이 올 거라고 합니다. 꽤 큰 태풍이래요. 그래서 일정을 당겼습니다. 장갑형 트레일러로 이동하시는 동안 상공에서 헬리콥터가 호위를 해야 하는데, 태풍이 불면 헬기가 못 뜨거든요. 물론 육로로 이동하는 것도 더 어려워지고요…… 어?”
한창 설명을 하던 병사가 일순 놀라서 경직되었다. 박스에 짐을 담고 있던 테라의 모습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아…… 저, 테라 씨도 그리로 가시는 거군요…….”
병사의 얼굴에서 기운이 한꺼번에 빠져나간다. 테라는 얼른 그에게 다가가 두 손을 꼭 잡으며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그동안 정말 고마웠습니다, 오빠. 건강하세요.”
“아니…… 저는 뭐, 해드린 것도 없는데…….”
테라와 손을 잡는 뜻밖의 행운에 기쁘면서도 이제 저 얼굴을 볼 수 없다는 게 슬프다. 병사는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테라 씨도 건강하세요. 후우~ 건대 경비병 애들은 좋겠네요. 거기는 좁다니까 서로 얼굴 볼 일도 많을 텐데.”
어깨가 축 늘어진 병사가 떠나고, 임수정과 테라도 이웃의 아이 엄마들에게 인사를 한 뒤 더그아웃 석을 향해 이동했다. 벌써 꽤나 많은 사람들이 길게 줄을 지어 서 있다.
“잠시만요. 허허, 아이구, 미안합니다. 좀 지나가겠습니다. 허허.”
주변을 메운 구경꾼들 사이를 뚫고 주름진 얼굴 하나가 웃는 낯을 내민다.
아줌마들 사이에서 절정의 인기를 누리는 육만배다. 그의 뒤에 바짝 붙어 한 무더기의 덩치 큰 남자들도 줄에 합류해 섰다. 대략 이십여 명. 그들 역시 건대로 가려는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