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 불꽃처럼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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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 불꽃처럼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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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 불꽃처럼 (3)
2022.01.06.
바닥에 넘어진 대대장이 화를 내며 권총집에 손을 댄다. 하지만 어느새 중위는 K―2를 꺼내 들고 있었다.
타앙!
중위가 하늘을 향해 위협사격을 하자 대대장은 알아먹었다는 표시를 하며 두 손을 들어 보였다.
“왜! 왜 그랬어? 왜 도망갔어? 이 개자식아!”
중위가 눈물을 그렁거리며 외쳤다.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깨달은 대대장이 그를 달래보려 다급하게 거짓말들을 늘어놓았다.
“내, 내가 도망을 친 게 아니야! 이게 전투 선봉에 서려고 한 거란 말이야! 응? 안 중위! 내 말 믿어야 돼! 네 선배, 그런 사람 아니라는 거 잘 알잖아?”
“네가 지휘만 제대로 했으면…… 지휘 체계를 무너뜨리고 도망가지만 않았어도 이렇게까지 될 일은 아니었어! 오백 명이야! 자그마치 오백 명이! 저 어린애들 오백 명이 아무 죄도 없이 죽었어! 너같이 무능한 겁쟁이 새끼를 상관으로 뒀다는 이유만으로!”
“그, 그래! 내가 좀 판단 착오를 일으켰던 것 같아. 그래도 이제 한 수 배웠으니까 다시는 이런 실수가 없…….”
대대장의 얼굴이 흙빛으로 바뀐다. 중위가 총을 고쳐 쥐었기 때문이다.
투투투투투투투투둑―!
중위는 경고도 없이 곧바로 방아쇠를 당겼고, 탄창이 빌 때까지 사격을 멈추지 않았다. 대대장은 비명도 제대로 지르지 못한 채 온몸이 꿰뚫리고 터져 죽어버렸다. 총을 떨어뜨린 중위가 얼굴을 훔치며 웅얼거렸다.
“그래, 이렇게 해두면 다시 실수하지 못하겠지…….”
진우는 그저 멍하니 중위의 행동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기도 했지만, 딱히 말리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대대장의 몸에서 흘러내린 피가 빗물을 타고 번져 온다. 그 더러운 피가 발에 닿기 전, 진우는 중위를 태우고 그 자리를 떠났다.
“……어디로 갈 거냐?”
대대장을 처형하느라 온 힘을 다 쓰고 기진맥진해서 잠시 기절해 있던 중위가 문득 정신을 차리고 물었다. 진우는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어디로라니…….
그저 죽음으로부터 달아나는 것 외에는 아무런 계획도 없었다.
“모르겠습니다. 머릿속이 텅 빈 것 같습니다.”
“그럴 거야……. 나도 그러니까.”
창가에 얼굴을 기댄 중위가 힘겹게 숨을 쉬며 대꾸했다. 그의 안색은 시체처럼 납빛으로 변했고, 눈동자는 자꾸만 위로 올라간다.
“그렇게…… 좋은 친구들을 한꺼번에 전부 잃은 너야 말할 것도 없겠지. 좋은 놈들이었어…….”
친구, 좋은 친구…….
분대원들의 얼굴이 하나씩 스쳐 간다. 껄렁거리는 사수라고만 생각했던 김 상병, 함께 핑크 펀치 포스터를 훔치면서 친해졌던 엉뚱한 이 병장, 무뚝뚝한 정 상병, 사근사근 친절했던 강 일병, 그리고 모두…….
그제야 비로소 진우의 눈에 왈칵 눈물이 솟았다. 이제 다시는 그들을 볼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 너무도 절실하게 느껴졌다.
흐으으윽~! 진우는 눈물을 훔치며 브레이크를 밟았다.
전부…… 전부 죽어버렸다.
“……중위님은 무슨 계획이 있으십니까?”
핸들에 얼굴을 박은 채 한참을 통곡하고 나서 어느 정도 감정이 추슬러졌을 때, 진우가 물었다. 대답이 없다. 또 의식을 잃었나……라고만 생각했다.
그러나 그 밀폐의 공간을 채우는 것이 한 사람만의 숨결이라는 것을 깨닫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조수석 유리창에는 더 이상 김이 서리지 않는다. 중위가 숨을 거둔 것이다.
그래…… 이제 진짜 혼자만 남았구나…….
진우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후로 얼마나 더 차를 몰았는지도 잘 계산이 되지 않는다.
하여간 발전소의 환한 불빛이 이제 잘 보이지 않을 만큼 멀어졌을 때, 도로 맞은편 저 멀리에서 여러 개의 헤드라이트가 다가오는 게 보였다.
“윽…….”
진우는 서둘러 라이트를 끄고 차를 세웠다. 이런 때에, 이런 날씨에 저렇게 여러 대의 차량을 한꺼번에 움직일 수 있는 것은 군대뿐이다. 그리고 그는 절대, 두 번 다시 군에 끌려가 소모품으로 내돌려지고 싶지는 않았다.
내가 봤으니 저쪽도 나를 봤겠지…….
그렇다면 이 근처에 머물러선 안 된다. 진우는 탄약과 몇 가지 물건들을 눈에 띄는 대로 배낭에 담은 후, 자신의 K―2를 들고 차에서 내렸다.
쏴아아아~!
매섭게 휘몰아치는 비가 그를 반겨준다.
진우는 갓길 울타리를 넘어 흙이 무너져 가는 비탈을 올랐다. 워커가 미끄러지고, 얼굴은 흙투성이가 되었다.
그래도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산속 깊숙이 들어갔다. 이제는 절대로 도로에서 보이지 않겠다 싶을 만큼이 되었을 때, 진우는 겨우 멈춰 섰다. 그러고는 한숨을 내쉬며 얼굴에 흘러내리는 빗물을 닦고 고개를 들었다.
“아~!”
눈앞에 펼쳐진 광경 때문에 진우의 입에서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숲과 산, 그 뒤에 또 숲과 산, 그리고 또 숲과 산이 수십 겹으로 자신을 둘러싸고 있다. 이제 그는 압도적인 강원도의 자연과 홀로 맞서야 한다.
***
“아하아~암.”
제주 공군 기지 제3경비대 소속의 도진상 원사는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천천히 걸었다.
여름이라는 게 무색할 만큼 오라지게 추워서 자꾸 팔짱을 끼게 된다. 그는 월정 해수욕장에서부터 출발해 해맞이 해안로를 따라 동쪽 방향으로 걸으며, 경계 근무병들을 순찰하는 중이다.
해안은 조용했다. 평소였다면 한창 여행객들로 붐빌 칠월 말이지만, 육지를 온통 덮은 좀비 떼 탓에 제주도가 계엄령 아래 놓인 때라서 인적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
“젠장, 이 시간에 왜 이리 어두워? 태풍이 온다더니, 꽤 큰 놈인가 보네…….”
전자시계를 확인한 도 원사는 입맛을 쩝쩝 다시면서 불평을 했다. 동틀 때가 가까워졌는데 바람만 거세게 몰아칠 뿐, 동녘이 훤해지려는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어라? 또 이러네? 어제만 해도 멀쩡하더니……. 여기만 대체 몇 개째야?”
불이 들어오지 않는 가로등을 발견한 도 원사는 내일 필히 대대적으로 손을 좀 보라고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저 멀리 보이는 것까지 합하면 불 꺼진 가로등만 네 개다. 이것만 믿고 탐조등도 설치해 두지 않았기 때문에 발밑도 잘 보이지 않았다.
한적한 제주도에서라고 해도 혹시나 윗사람들이 봤다가는 공연히 긴 잔소리를 들어야 할 것이다. 윗사람들은 잔소리를 좋아한다.
“어이, 저거 혹시 일부러 꺼놨어요? 응? 껌껌한데 숨어서 농땡이치고 싶어서?”
방파용 차단벽이 시작되는 자리에서 보초를 서고 있던 예비군 둘을 만나자 도 원사가 물었다. 수염이 덥수룩하게 자란 예비군들은 천만의 말이라는 표정이다.
“아니, 저희가 원숭이도 아니고, 거기를 어떻게 올라가서 끕니까?”
그가 입을 열 때마다 살이 쪄서 팽팽해진 군복 단추가 뜯어져 나갈 것 같다.
“그야 난 모르지. 올라간 놈들이 알겠지.”
“아이구, 원사님, 왜 이러십니까? 우리라고 껌껌한 데 서 있는 게 좋겠어요? 그런 것보다 저희들, 집에나 좀 보내주세요. 이 동네는 조용하잖아요. 장가가서 애 낳고 잘사는 사람 2박 3일 예비군 훈련이라고 불러놓고서 지금 이게 며칠째 무슨 꼴입니까? 내 식구들 제대로 밥이나 먹고 있는지 안부도 모른다니까요.”
끄응~ 도 원사는 이렇다 할 대꾸를 찾기가 어려워서 앓는 소리가 먼저 나왔다.
예비군을 소집해서 즉시 전력 자원으로 활용한다는 것은 윗대가리들 머리에서 나온 것이니까 그가 관여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눈치 빠른 놈들은 통지서를 받고도 재빨리 도망가 자취를 감춰 버렸고, 그의 눈앞에서 하소연을 하는 이 두 사람처럼 아무 생각 없이 시키는 대로 따르던 녀석들만 붙들려 벌써 열흘째 경계 근무를 서고 있다.
“난들 어쩌겠어요, 국방부에서 전시에 준하는 상황이니까 그렇게 하라고 다 지시가 내려온 걸……. 육지 애들을 생각해서 좀 참아요. 거기는 지금 매일 좀비들이랑 싸우느라 서로 죽고 죽이고 아주 난리도 아니라고 하던데. 사실 우리야 좀 귀찮아서 그렇지,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일은 아니잖습니까.”
도 원사는 억지로 웃는 얼굴까지 만들어가며 살살 달랬다. 평소였다면 이렇게 엉기는 놈들 상대도 하지 않았겠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실탄까지 지급되어 있는 요즘 같은 때, 억지로 찍어 누르려고 했다가는 언제 등에 바람구멍이 생길지 모른다. 안경을 쓴 예비역 병장은 푹푹 한숨을 쉬었다.
“너무 억울하다고요. 그냥 우리 둘 보내주신다고 무슨 큰일이 나는 것도 아니잖습니까……. 걸어가도 30분이 안 걸리는 집 근처에 서 가지고 찬바람 맞으면서 이게 지금 뭐하는 건지도 모르겠어요. 아니, 아무리 좀비고 뭐고 난리라고 해도 항만이나 공항 막았으면 됐지, 상식적으로 그것들이 여기까지 헤엄을 쳐서 오겠습니까, 비행기를 타고 오겠습니까? 그리고 정 병력이 필요하면 육지에서 팔팔한 젊은 애들을 데리고 오면 되잖아요. 왜 우리 같은 아저씨들을…….”
“그래그래, 알았어요, 알았어. 나도 다 생각하고 있다고. 기회를 봐서 말이 좀 먹힐 것 같은 때가 오면 내가 위에다가 이야기 잘해보려고 마음먹고 있으니까. 응? 조금만 더 고생합시다. 다들 힘드니까……. 지금 여기 법이 없어요. 거, 괜히 성질난다고 말썽 부리지 말고……. 제주에 전국의 똥별이란 똥별들은 다 모여 있기 때문에 눈에 났다가는 괜한 트집 잡혀서 시범케이스로 아주 인생 고달파진다고. 알잖아? 그냥 며칠만 더 죽었다~ 생각하고 꾹 참으면 이제 예비군이고 민방위고 더 이상 안 부르도록 내가 조처해 줄게!”
예비군 보초병들에게 신신당부를 하고 돌아서면서도 도 원사는 뒤통수가 당기는 것 같아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았다.
평소 간단한 훈련 몇 가지를 시키는 데에도 속이 시커멓게 썩어 들어가는 예비군들을 데리고 경계 근무를 서게 하려니 영 귀찮고 힘들다.
“하긴 저놈들 말이 맞지. 여기까지 뭐가 오겠어? 다 위엣것들이 미친 짓을 하는 거지…….”
정말로 치안이 우려되는 상황이었다면 저렇게 배 나온 아저씨들이 아니라 정예군들에게 임무를 맡겼을 것이다. 사나운 해류를 감안해 볼 때, 좀비는 절대로 이곳까지 닿을 수 없다.
또 만에 하나 그런 놈들이 있다고 해도 저쪽 먼바다 위에 잔뜩 늘어서 있는 해군함들이 그걸 허용할 리도 없다.
도 원사는 뒤로 고개를 돌려 아직까지도 불이 환하게 밝혀져 있는 김녕항을 바라봤다.
어선, 아니면 부자들 낚싯배나 세워두던 조그만 항구였지만, 지금은 소형 군함들과 상륙정으로 밤낮없이 북적이고, 수백 이상의 병력이 상주하며 내리는 사람들의 신체와 소지품을 일일이 검사한다. 단순히 좀비를 방역하는 수준이 아니다.
“대강 좀 마무리하고 외지 사람들은 육지로 좀 돌아갔으면 좋겠는데…….”
도 원사는 투덜거리며 2차선 도로를 따라 더 걸어갔다. 순찰을 돌아야 할 구간이 아직 많이 남았다.
후웅― 후웅―
해안가를 따라 세워진 풍력발전기가 돌며 위협적인 소리를 냈다.
“오빠, 갔어? 갔냐고?”
도 원사가 멀어진 지 30초 정도 지났을 때, 차단벽 아래 그늘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 원사에게 항의하던 예비군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자 어둠 속에 쭈그린 채 숨어 있던 사람들이 일어나 기지개를 켰다.
“아우~ 놀래라. 썩을.~ 뒈지는 줄 알았네. 아이, 진짜. 내가 묶인 몸이라 하기는 하는데, 이건 추가 요금 줘야 돼. 존나 애 떨어지는 줄 알았잖아.”
“그러게. 이러다가 우리 걸리면 총 맞는 거 아니야, 오빠? 저 사람 또 오면 어떡해?”
젊은 여자 둘이었다. 소매 없는 셔츠에 반바지 차림인 여자들은 껌을 짝짝, 씹으면서 불평을 한다. 호리호리한 두 번째 예비군이 낄낄 웃었다.
“한 번 돌았으니까 아침까지는 절대로 안 와. 저 사람도 좋아서 하는 짓이 아니라 나가보라고 쪼니까 그냥 시늉만 하는 거야.”
“흠, 그래? 경찰이나 군인이나 다 비슷한가 보네……. 근데 어디에서 하려고? 설마 모래밭에서? 아우, 여기 너무 춥다. 오빠, 남자가 좀 매너가 있어봐라. 그 옷도 좀 벗어서 걸쳐 주든가.”
여자가 오들오들 떠는 시늉을 하자, 안경 예비군은 순순히 군복 윗도리를 벗어 여자의 어깨에 걸쳐 준다. 그러면서도 너스레를 잊지 않았다.
“어차피 벗을 건데 뭘 또 새삼스럽게 걸치고 그러냐?”
“야, 주문한 거나 좀 내놔 봐. 술 마시면 안 추워진다.”
호리호리의 말에 여자 1이 핸드백에서 팩 소주 세 개를 꺼낸다. 호리호리는 혀를 찼다.
“애걔! 이게 뭐야? 이건 두 병도 안 되는 양이잖아. 그걸 뉘 코에 붙여? 장난하냐?”
“이게 요즘 얼마나 귀한 줄 모르는구나, 오빠. 담배랑 소주가 씨가 말랐다고 다들 난리야. 정 아쉬우면 원샷해. 원샷하면 빨리 취하지, 뭐.”
여자 1은 건성으로 대꾸하며 마른오징어를 찢어 호리호리의 입에 물려주었다.
그녀들이 원래부터 군인을 상대하던 건 아니었다. 지난 7월 15일 이후, 제주도에 있던 외국인 관광객들은 모두 보호의 차원에서 격리 수용되었다.
말이 좋아 보호지, 실은 외국 정부를 압박하기 위한 인질이었고, 그래서 제주도 거리에는 그 많던 외국인들이 싹 다 씨가 말랐다.
그러한 일들의 여파가 피부로 느껴진 계층은 그녀들처럼 외국인 관광객을 상대하던 유흥업 관계자들이다.
서울에서 온, 방귀깨나 뀌시는 분들은 다들 제 와이프에 세컨드에 서드까지 거느리고들 왔는지, 매춘 수요가 눈에 띄게 줄어든 것이다.
하지만 포주들은 재빨리 업종을 변경함으로써 그들에게 닥친 위기를 타개하였다.
새로운 고객은 여기 그녀들의 눈앞에서 마지막 한 방울까지 팩소주를 빨아 먹고 있는, 두 사람 같은 예비군들이다.
PX를 대신해 몇 군데나 돌아가는 황금 마차에서 술과 여자에 굶주린 예비군들을 슬쩍 떠보기만 해도 어느새 거래는 성립된다.
외곽 경계 근무를 서는 시간과 위치를 미리 알려주면 정확한 때에 여자들이 술을 가지고 찾아온다. 외상이라는 것 때문에 거래가 무산되는 일은 없었다.
어차피 이곳은 사방 어디로도 달아날 수 없는 섬이고, 지장 찍힌 영수증 하나면 포주들은 이 난리가 끝난 뒤에 충분히 돈을 받아낼 자신이 있었다.
설사 최악의 경우로 무일푼인 고객이라 해도 관계없기는 하다. 군대에 끌려올 정도의 건강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몸속에 꽤나 값나가는 걸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몇몇 주요 보직을 맡은 이들을 구워삶지 않았다면 이런 일이 가능할 리 없다. 육지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낱낱이 알지 못하기에 제주도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긴장이 느슨했고, 두려움보다는 귀찮게 됐다는 감정이 더 컸다.
“카아~ 좋다! 씨발, 우리가 무슨 스님도 아니고, 도대체 이거 없이 어떻게 살라는 거냐.”
팩 소주를 원샷한 안경이 담배에 불을 붙이며 중얼거린다. 곁에 앉은 여자는 하품을 했다.
“다 마셨으면 우리 빨리빨리 하자, 오빠. 어명 내려오기 전에 끝내야 서로 깔끔하지.”
어명이란 약속된 시간이 5분 남았을 때, 포주가 무전기를 통해 보내는 신호다.
전파방해 때문에 서로 교신할 수는 없지만, 무전기에서 치이익― 하는 잡음이 들리면 그것으로 충분히 의미는 전달된다. 팔을 잡아끄는 여자 1을 안경이 나무랐다.
“가만있어 봐. 한 대만 빨고 좀 하자. 너는 소주, 담배, 이 두 가지가 모두 갖춰져야 제대로 된 떡인 것도 모르냐?”
“그럼 나도 한 대만 줘. 가만히 있으려니까 심심해.”
안경이 여자 1에게 담뱃불을 붙여주는 동안 호리호리는 여자 2를 데리고 일어나 두리번거리며 동쪽으로 걸어갔다.
“그냥 대충 아무 데서나 해. 뭘 장소를 골라? 어차피 가로등도 나가서 깜깜하구만.”
안경이 호리호리를 놀린다. 둘은 중학교, 고등학교를 모두 함께 다닌 사이다. 완전히 친했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래도 함께 어울려 논 시간은 꽤 된다. 어차피 좁은 동네다. 호리호리가 뒤를 돌아보고 받아쳤다.
“넌 이 새끼야, 나랑 같이하면 비교당해서 안 돼. 다 너 놀림당하지 말라고 배려해 주는 거야. 자, 글라.”
모처럼의 여흥에 신이 난 호리호리는 제주도 사투리까지 써 가면서 여자를 잡아끌었다.
“지랄하네, 미친 새끼. 크크.”
“근데 진짜 오빠들이 저 가로등 껐어?”
“아니. 그냥 오늘 밤에 나와보니까 다마가 나가 있더라. 아마 우리 둘이 만리장성 잘 쌓으라고 하늘이 도우신 모양이지.”
둘만 남으니 한결 호젓하고 분위기도 야릇해지는 것은 사실이다. 안경은 일어나서 지퍼를 내리며 모래밭에 아무렇게나 담배를 퉤, 뱉었다.
“우리도 슬슬 연애 한번 해볼까? 흐흐.”
여자가 옷을 벗으려다가 뒤를 흘끔거린다. 해수욕장 주변과 달리 모텔이나 펜션도 없고, 도로 건너편에 커다란 2층 건물 하나만 외따로 떨어져 있을 뿐이다. 짓다가 만 듯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는 집을 가리키며 여자가 말했다.
“오빠, 저기 저 큰 건물 있잖아, 우리 저기 가서 하자. 보아하니까 빈집 같은데, 나 진짜 모래밭에 눕는 거 싫어서 그래. 읍!”
여자의 입을 자기 입술로 덮으며 억지로 자빠뜨린 안경이 반바지를 끌어내리며 말했다.
“나는 말이지, 누가 싫다는 걸 억지로 하면 그게 그렇게 흥분이 되더라고. 으흐흐흐.”
여자는 체념하고 순순히 남자의 손에 몸을 맡겼다. 이 정도 흥분한 걸로 봐서 어차피 조금만 참으면 끝날 것 같다.
여자의 입에서 영업적인 신음 소리가 파도 소리와 섞여 울릴 때, 그들로부터 20여 미터 떨어진 해변의 물속에서 뭔가가 움직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