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 안간힘 (3)
(122/449)
122. 안간힘 (3)
(122/449)
122. 안간힘 (3)
2021.12.31.
그것은 물론 되도 않는 거짓말이지만, 아인슈타인에게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더 시간을 끌게 되면 이 차장의 부인은 물론이고, 그와 이 발전 시설 내의 직원들도, 그리고 그가 억지로 발목을 잡아끌고 온 이 꽃다운 나이의 군인들도 전부 죽는다. 그리고 이 차장은 발전소 내부에 남아 설비를 운용해 줘야 한다.
아인슈타인이 워낙 더듬거리는 바람에 꾸며낸 이야기라는 냄새가 잔뜩 풍겼다. 하지만 의외로 이 차장은 한숨을 가볍게 내쉬었을 뿐, 더 캐묻지 않고 순순히 기계 앞에 섰다.
위이잉― 위이잉―
컴퓨터의 경보가 봉인이 시작되었음을 알린다.
“구 부장님!”
닫히는 문 쪽으로 달려온 이 차장과 직원들이 한목소리로 아인슈타인을 불렀다. 아인슈타인이 고개를 돌리자, 이 차장이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묻는다.
“이렇게 하는 게 헛된 노력이 아니겠지요?”
“나도 확신은 없네. 하지만…….”
쿠우우―
두꺼운 콘크리트 문이 닫히며 아인슈타인의 말은 전부 전달되지 못했다.
“하지만 하는 만큼은 해봐야지…….”
다시는 못 보게 될지도 모르는 동료들을 향해 힘없이 중얼거리는 아인슈타인의 어깨를 윤 일병이 잡아끈다.
“아직 안 끝났습니다! 빨리 이동하세요!”
세 사람은 바로 마주 보고 있는 3호기를 향해 뛰었다. 2호기와 3호기 간의 거리는 약 700미터. 트럭으로 돌아가 모두 타고 다시 내리느니 차라리 직선으로 빨리 달려갔다 오는 편이 낫다.
“미끄럽습니다! 조심하십쇼!”
두 건물 사이의 최단 거리는 잔디밭을 가로질러 뛰어가는 것이었다. 앞서 달리던 진우가 경고한다.
열흘이 넘도록 제대로 관리를 받지 못한 여름 잔디가 제멋대로 자라나 있는 데다가 비에 흠뻑 젖기까지 한 터라, 조금만 부주의해도 넘어질 것 같다.
콰콰쾅!
번쩍하고 벼락이 치는 순간, 왼쪽 나무 뒤에서 기어 나오는 좀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하반신이 없는데도 놈은 엄청난 스피드를 내면서 진우 일행을 향해 기어오는 중이었다. 플래시 불빛에만 의존해 있는 동안에는 전혀 보이지 않았던 놈이다.
투투둑―
진우는 재빨리 녀석을 처리한 뒤 주변을 다시 훑었다. 새삼스러운 이야기지만, 지금 현 위치는 너무 어둡다. 사방에 좀비들이 널려 있는 이런 상황에서는 육감 따위도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조금 더 시간이 걸려 돌아가더라도 가로등이 밝혀진 산책로 쪽을 택하는 편이 나았을 거라는 후회가 들었다. 진우의 달리는 속도는 자연스럽게 느려진다.
“더 있냐? 더 있어?”
윤 일병이 따라잡으며 묻는다. 진우는 고개를 저으며 머리가 박살 난 반 토막 좀비를 턱으로 가리켰다.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놈도 벼락이 치지 않았더라면 못 봤을 겁니다.”
하이바에 밴드로 고정시켜 둔 플래시는 비 때문에 효력이 반감된 상태였다. 사방을 둘러봐도 확신이 잘 서지 않았다. 짙은 나무 그림자 속에서 무엇이 튀어나온다고 해도 이상할 것 같지 않다.
바로 그때였다. 갑자기 전방이 환해질 만큼 눈부신 빛이 그들을 향해 쏟아졌다.
“윽!”
놀란 세 사람은 눈을 가늘게 뜨고 신음 소리를 흘렸다.
그리고 신경을 집중하자 들려오는 엔진 소리. 하이 빔까지 환하게 밝힌 미니버스의 헤드라이트였다. 발전소 3호기 앞에 주차되어 있던 통근용 미니버스가 방향을 꺾어 도로로 진입하고 있었다.
“이, 이런! 막아야 돼! 나가봐야 개죽음인데!”
아인슈타인이 당황한 목소리로 외치며 버스 진행 방향을 향해 뛰어보려 든다. 하지만 전속력으로 달려가는 버스는 그가 두어 발짝을 떼기도 전에 그들에게서 멀어졌다.
“못 따라잡아요! 그보다, 지금 빨리 가야 합니다!”
헤드라이트가 밝혀준 덕에 좀비들의 위치를 파악한 진우는 앞장서서 뛰며 순서대로 총구를 돌렸다.
투투둑― 투투둑―
코 윗부분이 날아간 좀비들이 화단에 처박힌다. 그리고 세 사람은 3호기 문 앞에 도착했다.
“허억, 허억~ 이봐! 저 버스, 어디로 가는 거야? 누가 저걸 움직였어?”
강화유리문을 열고 들어간 아인슈타인이 숨을 헐떡이며 직원들에게 물었다. 엔지니어들이 적어도 20여 명은 있어야 하는데, 눈에 보이는 인원은 다섯이 전부였다.
“조, 좀비가 이 근처까지 돌아다녔어요. 차 과장님이 빨리 군인들이 있는 곳으로 도망가야 한다고…….”
“그래서 다들 가버린 거야? 남아 있는 건 이게 다고?”
“네……. 이제 저희 괜찮은 거죠? 군인들이 방어하러 와준 거죠?”
어지간히 겁에 질려 있었던지 여직원은 눈물을 그렁거린다. 아인슈타인은 난감한 표정으로 진우와 윤 일병을 돌아보았다.
“미안하지만…… 돌아가는 길 안내는 못 할 것 같네. 며칠이나 걸려서 구조대가 상황을 정리할지는 모르겠지만, 그동안 나라도 여기 남아서 작업을 해야 하는 상황이야. 인력이 너무 모자라…….”
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든 꼭 살아남으시라는 상투적인 인사를 따로 남길 필요는 없었다. 그 정도의 의지가 없는 사람들은 이미 한참 전에 더 버티지 못하고 목숨을 놓아버렸다는 걸 잘 알고 있다.
“가겠습니다.”
두 병사가 짧은 거수경례를 하고 돌아서서 발전 시설 밖으로 뛰어나가자, 당황해서 그 뒤를 쫓으려는 사람들을 아인슈타인이 붙잡았다. 문이 완전히 닫히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 진우와 윤 일병은 트럭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이제 세 기의 삼척 원자력발전소는 외부로부터 완전히 차단되었다. 외부에서 저 문을 열어주지 않는다면, 아인슈타인을 포함한 수십 명의 엔지니어들은 천천히 굶어 죽게 될 것이다.
드르르르륵― 드르르륵―
2호기 너머에서 연사하는 소리가 끊이지 않고 울려온다. 총성이 멈추지 않았다는 것은 좋은 소식이다. 그들의 분대가 아직 살아남아서 저항하고 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
이 병장의 상황은 그다지 낙관적이지는 못했다. 정말 쉴 틈을 주지 않고 몰려드는 놈들 때문에, 바로 곁에 탄약통을 쌓아두고서도 탄창을 보충하지 못해 죽을지 모른다는 위기감이 느껴졌다.
“열 시! 지원! 열 시 지원!”
자신의 전방을 전부 처리하지 못한 강 일병이 다급하게 지원을 요청한다. 하지만 막바지까지 몰린 것은 그만이 아니었다.
“한 시 지원! 지원!”
필사적인 지원 요청을 들으면서도 이 병장은 자신의 총구를 반대 방향으로 돌리지 못했다. 그가 담당하고 있는 세 시 방향에서 가장 많은 좀비들이 몰려오고 있는 까닭이다.
K―3가 무너지면 전원이 위험해진다. 하지만 지원 요청은 계속해서 울려 댄다.
여기까지가 한계인가…….
이 병장은 반쯤 포기하면서도 계속 방아쇠를 당겼다. 한 시 방향에서는 중위가 비명을 질렀다. 디젤 터빈 뒤쪽에서 튀어나온 대여섯 마리의 좀비들이 맹렬하게 달려오고 있다. 이놈들을 모두 처리한다는 건 불가능했다.
가장 앞선 놈은 물안경을 끼고 있었다. 계속해서 눈을 조이는 압력 때문에 결국 터져 나온 놈의 눈알이 또렷하게 보일 만큼 가까워졌다.
“으아아아아!”
중위는 놈의 머리 중앙을 노리고 방아쇠를 당겼다. 하지만 맞지 않는다. 놈의 귀밑으로 허무하게 스치고 지나가는 예광탄이 야속하게만 느껴진다. 그리고 바로 뒤에 두 놈이 더 달려왔다.
철컥, 설상가상으로 총알이 바닥났다. 탄창을 갈아 끼울 여유 따위는 없었다.
“비켜어어어~!”
빠앙! 빠! 빠아아아―
경적을 요란하게 누르면서 김 상병이 맹렬하게 후진했다. 분대원들은 옆으로 몸을 굴리면서 가까스로 트럭의 타이어를 피했다.
콰자자자작!
달려들던 좀비들을 모두 깔아뭉갠 다음에도 트럭은 한참을 더 후진하고 나서야 멈춰 섰다.
트럭의 돌진으로부터 살아남은 좀비들이 운전석의 김 상병을 노리고 몸을 날린다.
“어림없다! 이 씨발아!”
부우웅―
재빨리 기어를 바꾸고 핸들을 튼 김 상병은 놈들을 차례로 들이받았다.
쨍강!
좀비의 머리에 들이받힌 오른쪽 라이트가 박살 난다. 매끄러운 차체를 붙잡아보려고 버둥거리던 녀석들은 결국 타이어 아래로 빨려 들어가 으스러졌다.
“이렇게 해서는 더 못 버텨! 다른 수를 내야 돼!”
탄창을 갈아 끼우는 동안 중위가 비명을 지르듯이 외쳤다.
하아~ 하아~ 다른 병사들 역시 동의하지 않을 수 없는 이야기다.
그들로부터 3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엉망으로 박살 난 좀비들의 시체가 걸레처럼 널려 있다. 김 상병의 판단이 아니었다면 바닥에 흩뿌려진 저 누런 이빨들이 그들의 혈관을 찢어발겼을 것이다. 이 병장도 작전을 바꾸기로 했다.
“전부 승차해! 트럭에서 이동하며 교전한다!”
이 병장의 손짓을 본 김 상병이 트럭을 크게 돌려서 그들 앞으로 와 서행했다. 좀비들이 어디에서 달라붙을지 모르기 때문에, 완전히 멈춰 설 수는 없었다.
“빨리빨리 타! 빨리!”
이 병장이 K―3를 연사하며 분대원들을 독려했다. 가장 몸이 무거운 중위까지 다른 병사들의 손을 붙잡고 짐칸에 무사히 뛰어오르는 것을 확인한 이 병장이 조수석을 향해 달렸다.
투투투투두― 투투투투둑―
짐칸에서는 먼저 탑승한 병사들이 이 병장의 뒤를 따라 달려오는 좀비들을 향해 총알 세례를 퍼부었다.
“빨리 타십쇼!”
김 상병이 안타까운 목소리로 이 병장을 부른다. 반쯤 열어둔 조수석 문이 덜컹대서 도무지 잡기가 쉽지 않다.
“저 앞에서 크게 한 바퀴 돌려! 호위하러 갔던 애들 돌아왔을 때, 우리가 없어졌다고 생각하면 안 돼!”
가까스로 조수석에 오른 이 병장이 왼편의 사각형 건물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들이 탄 트럭은 2호기와 1호기의 사이에서 달리는 중이었고, 뒤따르던 좀비들은 어느 정도 정리가 끝난 상황이었다.
완만한 유턴을 거의 끝마치고 건물 뒤를 돌아 나오려는 순간, 터빈을 통해 또다시 대량의 수증기가 뿜어져 나온다. 잠깐이기는 하지만 마치 구름 속을 헤치고 달리는 것처럼 사방이 온통 뿌옇기만 하다.
“이거, 방사능 있는 거 아닙니까?”
열어둔 조수석 창문을 타고 들어온 수증기를 손으로 흩으며 김 상병이 말했다.
“설마 방사능 있는 걸 계속 이렇게 뿜어 대도록 만들었겠…….”
콰쾅―!
순간, 전혀 계산에 넣지 않았던 엄청난 충격이 트럭의 뒤쪽을 강타했다. 이어 들려오는 총성!
끼이이이―
트럭은 타이어를 끌면서 옆으로 밀리다가 옆으로 넘어갔다. 으윽! 세상이 빙글빙글 돈다. 김 상병과 이 병장은 목을 가누지 못하고 사방에 머리를 찧었다. 하이바를 쓰고 있지 않았다면 벌써 머리가 터져 죽었을 것이다.
“으으으~ 이게 대체 무슨…….”
이 병장은 목을 움켜쥐고 정신을 추스르기 위해 애를 썼다.
왼편에는 그와 문 사이에 끼인 채 앓는 소리를 내는 김 상병이 있다. 트럭이 왼쪽으로 넘어진 상태라는 간단한 사실을 인식하는 데에도 짧지 않은 시간이 필요했다.
“이, 이 병장님, 아이고…… 괜찮으십니까? 아우, 아파……. 지금 뭐에 받힌 겁니까?”
김 상병이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물었다.
“몰라. 일단 여기서 나가야 돼.”
기다시피 해서 조수석 문을 통해 밖으로 빠져나온 이 병장은 김 상병을 끌어 올렸다. 숨을 쉬기가 힘들어 입안 가득 고인 피를 뱉어내자, 부러져버린 이가 피와 섞여 나온다. 몸 전체가 다 지독하게 아프다.
그들이 유턴을 해서 돌아 나오던 자리에는 앞부분이 납작하게 우그러진 미니버스가 서 있다. 어디서 갑자기 튀어나온 놈인지는 모르겠지만, 저 좃같은 것이 범인인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다들 괜찮나? 빨리 정신 차려!”
트럭 아래로 뛰어내려서 짐칸을 향해 걸어간 이 병장이 아직도 신음 소리만 내고 있는 분대원들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한 발짝을 안으로 내딛던 이 병장은 발이 미끄러져 넘어질 뻔했다.
“뭐, 뭐야? 왜 이렇게 미끄덩거리는 게…….”
고개를 돌리자 처참한 광경이 그를 기다리고 있다.
그가 밟았던 것은 분대원들의 몸에서 쏟아져 나온 피였고, 플래시 불빛이 비춰진 곳에는 머리가 엉망으로 터진 병사의 시체와 탄약통에 얼굴을 박고 쓰러진 채 목이 부러져 죽은 병사의 시체가 나란히 쓰러져 있다.
부러진 손가락이 아직도 방아쇠에 걸려 있다. 충돌 때 총구가 돌아가면서 옆 병사의 턱을 날려 버린 모양이다.
“윽! 이 새끼들아…….”
이 병장의 무릎이 힘없이 꺾인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그렇게 치열하게 싸웠는데…… 차라리 아까 달아나 버릴걸……. 이런 씨발, 이런 씨발!
대상을 특정할 수 없는 증오가 가슴을 가득 채워서 슬픈 감정을 덮고 차올랐다.
“으으으~”
강 일병과 중위가 피투성이 바닥을 간신히 기어 나온다. 그 와중에 무너져 내린 탄약통에 부딪히면서도 용케 살아남았다.
“잘했어! 잘했어!”
비틀거리는 강 일병을 부축해 안으면서 이 병장은 그의 등을 쓸어줬다.
이제 그의 분대 중에서 아직 시체가 되지 않은 사람은 다섯 명뿐이다. 그것도 발전 시설로 아인슈타인을 호위해갔던 박 이병과 윤 일병이 돌아왔을 때의 이야기다.
으아아악! 버스 쪽에서도 신음과 비명이 섞여서 울려 온다.
“빨리 갑시다! 애들 돌아올 때 됐습니다. 아우, 씨발. 왜 이렇게 온몸이 다 아파…….”
뒤늦게 따라온 김 상병이 배낭 안에 탄창을 쓸어 넣으며 말했다.
찢어진 눈 주위에서 흘러나온 피가 빗물에 희석돼 뚝뚝 떨어진다. 고통에 일그러진 표정으로 총을 들어 전방을 경계하고 있던 중위가 김 상병을 보고 깜짝 놀라 중얼거렸다.
“어! 너, 너 다리가…….”
“네? 제 다리가 뭐 말입니까?”
김 상병이 고개를 숙인다. 왼쪽 무릎이 반대로 꺾여 있었다. 완만하기는 하지만 확실하게 부러진 것이다.
“씨발! 끄으으~ 어쩐지 걷기가 더럽게 힘들더라. 후우…… 그래도 다행입니다.”
김 상병은 애써 웃었다.
“꺄아아아!”
“안 돼에!”
버스 쪽에선 계속 비명을 질러 댄다.
그롸아아~!
좀비들의 포효도 섞여 들리기 시작한다. 살육이 시작된 것이다. 하지만 이쪽도 도울 수 있는 상황은 아니다.
“뭐가 다행이야? 다리가 이 모양인데……. 으으, 이 새끼야!”
이 병장이 분을 이기지 못해 자신의 하이바를 주먹으로 쾅쾅, 두드린다. 개머리판을 지팡이 삼아 2호기 쪽으로 걸음을 떼면서 김 상병이 말했다.
“오른 다리만 멀쩡하면 운전은 할 수 있지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