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 불길한 바람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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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5. 불길한 바람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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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5. 불길한 바람 (2)
2021.12.24.
김 상병이 단정적으로 말하자 이 병장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언성을 높였다.
“야, 인마. 우리 부대가 왜 없어져? 네가 뭘 잘못 알고 있는 것 아니야?”
“아닙니다. 확실합니다. 얼마 전에 헬기로 보급품 가져다주시는 소령님께 들었습니다. 야, 박 이병, 너도 같이 들었지?”
“네, 그렇습니다.”
진우도 기가 죽은 목소리로 대답하자 분위기는 한층 더 무거워졌다.
“어? 잠깐만 있어봐. 이게 지금 무슨 소리야? 자대로 보내서 치료한다고 하는데, 정작 우리 부대는 없어진 지 오래라고? 아이, 씨발. 담배, 담배.”
호주머니를 뒤져 담배를 꺼내 문 이 병장이 불을 붙이고 길게 연기를 내뿜는다. 만약 인간들과의 전쟁에서처럼 담배를 피울 수 없었다면, 야간 경계 근무는 훨씬 더 견디기 힘들고 지루한 일이 되었을 것이다.
좀비들은 이쪽의 불빛을 보고 사격을 하는 상대가 아니니까 병사들은 눈치껏 담배를 피워 댔다.
요는 등 뒤의 간부들에게만 담뱃불을 들키지 않으면 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한 대 피워 문 김 상병이 넋두리하듯 한숨 섞인 불평을 늘어놓았다.
“암만 생각해도 왜 이렇게 충성을 다해서 여기를 지키고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위에서는 우리를 사람 취급도 안 해주는데 말입니다. 이 병장님, 만약 제가 외상을 입어서 점호 중에 끌려가면 가만히 두고 보실 겁니까?”
후우우~
이 병장은 대답하지 않고 담배만 뻑뻑 피워 댔다. 김 상병은 고개를 저었다.
“저는 이 병장님 끌고 가면 가만히 안 있을 겁니다. 무력으로라도…….”
“그만 이야기해. 더 이상 말하면 선을 넘는 거야.”
“선을 먼저 넘은 건 저쪽이지 말입니다. 왜 우리가 죄인 취급 받고 끌려가서 쥐도 새도 모르게 죽어야 합니까?”
“그래서 어떻게 하겠다고? 이 새끼야, 생활관 내에서 아군끼리 총 들고 교전이라도 하자고? 그래봐야 전부 다 개죽음이야. 정신 차려!”
이 병장이 사납게 윽박지르자 김 상병은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불만이 완전히 해소된 건 아니었다. 애초에 해소될 수 없는 불만이다. 침묵 사이로 흐르는 냉랭한 공기처럼 습기가 차오르기 시작했다.
휘이익―
짙게 차오른 안개 사이로 싸늘한 바람이 분다. 어두운 데다가 안개까지 무겁게 깔리자 서치라이트가 무용지물이 되었고, 시계는 50미터도 채 되지 않을 만큼 좁아졌다.
“이 너머에는 뭐가 있습니까?”
침묵을 깬 것은 진우였다. 진우는 여전히 경계를 늦추지 않은 채 어두운 도로 너머를 손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싱거운 새끼. 뭐가 있겠어, 도로랑 마을이지.”
“그게 아니라 말입니다. 우리 부대 외에 또 경계초소가 있습니까?”
“아닐걸? 그랬으면 우리랑 서로 연락을 취하겠지. 이 근방에는 다른 부대가 없을…….”
아무 생각 없이 대답해 주던 이 병장이 말을 끊고 고민에 잠겼다. 진우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아챈 것이다. 음, 잠시 머리를 긁적이고 있던 이 병장이 무겁게 입을 뗐다.
“……탈영을 하자고?”
뭐, 탈영? 왜 갑자기 그런 방향으로 이야기가 진행되는 거야?
눈치가 느린 김 상병과 강 일병이 깜짝 놀란다.
“지금 하자는 말씀을 드리는 건 아닙니다.”
진우는 이 병장의 눈을 정면으로 보며 대답했다.
“만약에 우리 분대원 중에 외상자가 나오면, 그때 그 사람을 보내주자는 뜻입니다. 개처럼 끌려가서 죽을 바에는 자기 힘닿는 데까지 해보라고 하고 싶습니다. 전투 중 실종으로 보고하면 되지 않습니까?”
“혼자 나가서 뭘 어떻게 한다는 거야? 너 지금 왜 탈영 사고가 없는 줄 알아? 나가봐야 살 수가 없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이렇게 좃같아도 다들 어쩔 수 없이 부대에 들러붙어 있는 거야. 사방이 다 좀비들일 텐데, 몇 시간이나 버틸 수 있을 것 같아?”
“저라면 그래도 가능성에 걸고 싶을 겁니다.”
진우는 진솔한 심정을 이야기했다. 강 일병도 안경을 치켜올리며 말했다.
“이 병장님, 저, 저도 제가 죽을 자리는 제가 정하고 싶습니다.”
“이 새끼들이 정말…….”
이 병장이 더 이상 못 들어주겠다는 듯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틀린 말이라고만은 할 수 없었다.
파파파팡―
그들이 위치한 곳과 반대편인 산 쪽에서 장갑차의 기관포 소리가 크게 울린다.
오늘도 어김없이 놈들이 몰려온 것이다. 모두 굳게 입을 다물고 있지만, 다들 머릿속으로는 복잡한 생각들이 어지러이 얽히고 있었다.
휘이이이잉~
바람 소리가 거세지고 점점 높아진 파도가 그들로부터 20여 미터 떨어진 해변을 사납게 때린다. 해안가에 세워진 소나무 가지가 춤을 추듯 아무렇게나 흔들려 댄다.
“태풍이 오려나…….”
강 일병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중얼거렸다.
“태풍? 그런 말 없었잖아. 젠장, 갑자기 바람 세지는 거 보니까 비 올까 봐 걱정되기는 한다. 판초우의도 안 가지고 나왔는데……. 어, 추워~ 그건 그렇고, 막상 부대 밖으로 나간다고 하면 어디에서 잠을 자야 합니까, 이 병장님?”
김 상병이 건빵 주머니에서 발열 팩을 꺼내 주무르며 다시 탈영을 주제로 올렸다. 이 병장은 듣기 싫다는 듯 펄쩍 뛴다.
“이 새끼들이 진짜, 듣자듣자 하니까……. 너 인마, 지금 상급자한테 탈영 예고하는 거야, 뭐야?”
“그 상급자도 같이 나가실 건데 뭐 어떻습니까? 분대장이 없으면 분대 운용이 안 되지 말입니다.”
“뭐? 혼자도 아니고, 단체로 도망을 치자고?”
“이 병장님, 그냥 까놓고 말씀드리겠습니다. 다른 분대원이라면 또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만약에…… 만약에 말입니다. 진우가 다치면 얘가 죽는 것도 그냥 손 놓고 보실 겁니까? 다른 사람도 아니고, 박 이병입니다. 그리고 얘가 빠진 다음에 우리가 며칠이나 더 살아남을 수 있다고 보십니까?”
이 병장의 언성이 올라가는 것과 반비례해서 김 상병의 목소리는 낮고 은밀해졌다. 까불까불하던 장난기는 일절 찾아볼 수 없다.
“끄응~!”
직격타를 맞은 이 병장은 대답을 하지 못하고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돌렸다. 규모 오의 습격 때 궤멸된 병력들을 모아 새로 분대가 편성된 이래, 자신의 분대에서는 아무도 죽지 않았다.
그건 이 병장 본인에게는 물론, 분대원 전체에게 커다란 자부심과 용기를 주는 성과였다.
다른 생활관에 듬성듬성 빈자리가 생겨나고, 아예 전멸 상태에 빠지기도 하는 동안 그들만은 특임대 뺨치는 눈부신 전과를 올리며 모두 살아남았다.
그런 일들이 누구 덕에 가능했는지 특별히 말로 표현하는 병사는 없었지만, 다들 분명하게 알고 있다.
낮이든 밤이든 이 시원찮은 K―2를 신의 지팡이처럼 휘두르는 명사수요, 좀비 잡는 귀신인 박 이병이 없었더라면 절대로 불가능한 결과였다.
“생존 같은 문제는 뒤로 미루더라도, 우리 목숨을 열댓 번, 아니, 수십 번 살려준 놈을 그냥 저 새끼들에게 넘기실 겁니까? 저 새끼들이 얘 목에 이렇게 주사를 박아 넣는 밤에 나머지 우리끼리 삥 둘러앉아서 맛스타에 건빵 먹으면서 ‘박 이병은 진짜 괜찮은 놈이었지’ 하면 그거 참 맛있겠습니다. 참 사는 보람 있겠지 말입니다.”
김 상병은 진우의 목에 대고 손가락을 쿡 쑤시며 주사 놓는 흉내를 낸다.
“그만해, 새끼야. 멀쩡한 박 이병 죽이는 시늉 하지 말고.”
이 병장은 아예 뒤로 물러앉으며 다시 담배를 피워 물었다.
후우~ 심란한 표정으로 연기를 내뿜는 이 병장을 보니 어지간히 효과가 있는 것 같다. 이쯤에서 압박을 잠시 멈추고 혼자 생각할 시간을 주는 게 낫다고 생각한 김 상병은 자리를 피하기로 했다.
“어디 가?”
주섬주섬 일어나는 김 상병을 향해 이 병장이 묻는다. 김 상병은 주머니에서 꺼낸, 둘둘 만 휴지로 좌측의 해안가를 가리킨다.
“똥 좀 빼고 와야 할 것 같습니다. 아까부터 부글거리는 게 속이 영 좋지 않아서…….”
“야, 강 일병. 저놈 따라갔다 와. 도망가려고 하면 경고도 하지 말고 그냥 쏴버려.”
이 병장이 악의 없는 농담을 던지자, 김 상병도 지지 않고 받아친다.
“큭큭, 살아도 같이 살고 죽어도 같이 죽어야지, 의리 없게 저 혼자서는 안 튑니다.”
김 상병과 강 일병이 서치라이트의 사각으로 이동해 해안가로 내려가는 동안 몇 모금 더 담배를 급하게 빤 이 병장은 진우의 하이바를 탁, 때렸다.
“새끼…… 이상한 말 꺼내서 사람 마음 다 뒤집어놓고, 정작 저는 아무 일 없다는 식으로 근무 서고 있네. 넌 인간 맞냐, 새끼야?”
전방을 주시하고 있던 진우는 멋쩍게 웃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콰콰콰콰쾅― 파파파파파―
산 쪽에서는 여전히 장갑차의 기관총이 메아리를 만들어내며 요란하게 울려 댄다.
눈으로 확인할 수는 없지만, 소리만 들어도 오늘 밤 몰아닥친 좀비들 역시 천 단위 이상인 것 같다. 멀리 강원도 전역에서부터 이 동떨어진 위치까지 지치지도 않고 참 질리게도 쳐들어와 댄다.
이 병장과 진우는 배경음악처럼 깔리는 총성을 한 귀로 흘리면서 말없이 캄캄한 어둠을 노려보고만 있었다.
“……음식은 둘째 치고, 저런 규모랑 갑작스럽게 마주친다면 지금 우리 화력으로는 못 버텨. 무리야.”
잠시 무겁게 침묵하고 있던 이 병장이 혼잣말처럼 입을 뗐다.
“혹시 운이 좋아서 용케 물리칠 수 있다고 해도, 그걸로 탄약이 바닥날 거야. 아홉 명이 가지고 나오는 걸 맥시멈으로 잡아도 천오백 발이 안 돼. 수류탄도 없고, 유탄발사기도 없으니까, 오로지 탄약만 가지고 잡아야 하는데…….”
만약 집단으로 탈영을 한다면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에 대해 고민하는 것이다. 귀담아듣고 있던 진우는 특유의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그날 챙겨둔 탄창이 저한테 아직 꽤 남아 있습니다.”
“그래봐야 그까짓 거 몇 발이나 된다고 그래. 그리고 말이야, 일단 도망친 다음에는 좀비만 무서운 게 아니야. 군인들도 피해 다녀야 해. 다른 부대에게 걸리는 순간, 우리는 끝장나는 거라고. 이런 때에 군법 재판 같은 게 있을 리가 없잖아. 아마 본보기 삼아서라도 대번에 공개 처형을 할걸?”
“그래도 뭘 하든 반반 확률은 됩니다. 외상을 입고 끌려가는 것보다는 훨씬 낫습니다.”
음…… 이 병장은 얼굴을 감싸 쥐었다. 그 역시 달아나고 싶다. 매일 하루도 쉬지 않고 좀비들과 마주해 놈들의 머리통을 날려야 하는, 이 지긋지긋한 쳇바퀴에서 벗어나고 싶다.
반면, 원자력발전소를 지켜야 한다는 의무감, 자신이 맡은 지역을 버리면 다른 전우들에게 피해가 갈 것이라는 책임감, 법과 명령을 준수해야 한다는 매뉴얼 따위는 달아나고 싶은 그를 압박한다.
하지만 그런 피상적 관념들보다 훨씬 더 두려운 것은 막상 정해진 위치 밖으로 한 발을 내딛고 달아나는 순간, 의식주부터 무기와 동선까지 아홉 명의 생명에 대한 모든 책임이 그에게 지워진다는 냉혹한 사실이다.
“달아나려고 하면 역시 야간 근무일 때 실행하는 게 맞긴 한데…… 그런데 그전에 아무래도 탄약을 더 확보해 놓아야 돼. 무슨 수가 있을까……. 아, 내가 진짜 미쳤나 보다. 손자 군번뻘 애 앞에서 이게 지금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거냐…….”
역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실탄이었다. 언제부터인가 점점 1인당 탄창 지급 개수가 줄어드는 이유를 막연히 보급이 부족해서라고만 생각했는데, 지금 돌이켜 보면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위엣 놈들은 알고 있었던 거다. 풍족하게 실탄을 지급해 줘버리면 아랫것들이 그걸 들고 냅다 달아나 버릴지 모른다는 것을 말이다.
탄약…….
멍하니 생각에 잠겨 있던 진우가 갑자기 눈을 크게 떴다. 쓸데없는 것이라 판단해서 뇌의 기억 가장 바닥에 깊숙이 넣어뒀던 김 상병의 비밀이야기가 포옹― 하고 떠오른 것이다.
“이 병장님! 탄약, 있습니다. 구할 수 있습니다.”
“뭐어? 어디서 구한다는 거야? 탄약고부터 털자는 소리 했단 봐라. 그런 건 안 돼.”
“그게 아닙니다. 우리 부대에 구령대 있잖습니까. 그 아래 연병장 흙 색깔이 유심히 보면 조금 다르다던데, 혹시 기억에 있으십니까?”
“구령대 아래 흙 색깔이 다르다고? 글쎄…… 그랬나? 누가 그런 걸 유심히 보고 다녀? 근데 탄약 이야기하다가 왜 갑자기 흙 이야기로 넘어가냐? 그딴 소리 말고 탄약을 어디에서 구할 수 있는지나 말해봐.”
“바로 그 이색진 흙 아래에 탄약이 묻혀 있답니다. 양도 엄청납니다. 일만 발 정도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