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4. 불길한 바람 (1) (114/449)


114. 불길한 바람 (1)
2021.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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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젠장!

갑자기 피곤이 걷잡을 수 없이 밀려오는 것 같아 민구는 이마를 감싸 쥐었다. 아까 지하철 지도를 볼 때 아마 방향을 잘못 잡았던 모양이다.

후우~ 오지 않았어도 될 길을 기껏 거슬러 올라와서 할 필요 없는 수고를 했다는 생각에 저절로 한숨이 난다. 시간도 어지간히 손해를 봤다.

“……어쨌든 좀 자야겠다. 짭새들 있던 데가 어디야?”

“아, 네. 올라가셔서 오른쪽으로 도시면 역무원실이 있는데요…….”

쇠파이프가 귀빈을 모시듯 두 손으로 방향을 가리킨다. 민구는 놈의 엉덩이를 냅다 걷어찼다.

“있는데요, 같은 소리 하네. 앞장서, 이 새끼야.”

엉덩이를 차인 쇠파이프는 그래도 좋다고 헤헤, 웃음을 흘리며 플래시로 길을 비춘다. 민구는 양손에 가방을 든 채 놈의 뒤를 따랐다. 그가 움직이고 나서 여자들은 다시 나까무라에게 린치를 가하기 시작했다.

퍽! 퍽!

“으윽!”

매질 소리와 비명 소리가 승강장 전체에 가득 메아리치고 있다.

“끄으으~ 제발, 제발 살려줘. 피, 피를…… 너무 많이 흘렸어.”

계단 근처까지 기어와 뒹굴고 있던 짭새 중 하나가 손가락이 잘려 나간 손을 휘저으며 그의 발목을 잡아보려 버둥거린다. 옷에 피를 묻히기 싫어 민구는 얼른 방향을 틀었다.

“포기해. 너나 나같이 죄 짓고 사는 새끼들은 끝에 가서 험한 꼴 보는 거야.”

민구는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성큼성큼 계단을 올랐다.

퍼억! 퍼억!

나까무라에게서 더 이상 비명이 터져 나오지 않게 된 뒤에도 여전히 여자들은 그동안 당했던 일들의 앙갚음을 멈추지 않았다.

흐아암~ 민구는 한 번 더 길게 하품을 했다.

***

“내가 어디에서 읽은 적이 있는데, 야간에 근무하는 게 피부에 그렇게 무리가 간대. 노화도 촉진시키고.”

김 상병이 아직도 잠이 덕지덕지 붙은 눈을 비비면서 중얼댔다. 특별히 한 시간을 더 재워줘서 오후 10시에 일어났는데도 여전히 피로는 지워지지 않았다.

게다가 요즘 김 상병은 아주 자그만 틈만 생겨도 운전병들과 어울려 시간을 보내느라 바쁘다. 덕분에 어느새 육공 트럭도 곧잘 몰게 되었지만, 그만큼 몸은 고되다.

“쪼글쪼글해져도 좋으니까 노화가 촉진됐는지 어떤지 알 수 있을 만큼 오래 살게 되기만 하면 좋겠습니다.”

강 일병이 안경을 벗어서 렌즈를 닦으며 대꾸한다. 어제 안경 가게에 들어가 털어온 안경 중 그나마 자신에게 맞는 것을 골라 쓰기는 했지만, 여전히 시야는 좁고 사물은 흐릿하다.

그래서 강 일병은 버릇처럼 자꾸 안경을 닦게 되었다. 물론 그래도 안 쓴 것보다야 백배 낫다.

“야, 너 손을 아래로 해서 뭘 자꾸 조몰락거려? 엄청 추잡스럽게.”

이 병장이 나무라자, 김 상병이 허벅지 사이에 끼고 있던 것을 들어 보이며 웃는다.

“아이, 이 병장님. 무슨 생각을 하시는 겁니까? 체온 떨어지지 않으려고 그러는 겁니다. 전투 능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이 병장님도 잠깐 잡아보시겠습니까? 한기가 싹 가십니다.”

김 상병이 건네준 것은 전투식량을 데우는 데 쓰는 발열 팩이었다. 꽤나 고열을 내고 열기도 오래가서 밥을 데워 먹은 뒤 손난로처럼 사용된다는 것은 비밀도 아니다.

게다가 한여름인데도 강원도의 밤을 지새우고 나면 오한이 들기 일쑤였다. 하지만 오늘 저녁 식사는 즉각 취식형이 아니었다. 내일 먹을 아침 식량에서 뺀 것이다.

“너, 인마! 그걸 써버리면 당장 내일 아침에 찬밥 먹으려고 그래?”

이 병장의 말에 김 상병은 뻔뻔한 표정으로 웃으며 대답했다.

“하하, 병장님도 참! 제 밑으로 애들이 몇인데 제가 찬밥을 먹겠습니까? 그치 않니, 박 이병, 강 일병?”

김 상병이 너스레를 떨며 진우의 어깨를 끌어안는다.

네, 그렇습니다. 진우도 같이 웃었다. 그야말로 피를 나눈 전우에 사수인데, 그까짓 발열 팩쯤이야 얼마든지 나눠 줄 수 있다.

“아닙니다, 제 걸 쓰십시오, 김 상병님.”

강 일병이 장난스럽게 끼어들자, 김 상병이 여유롭게 대답했다.

“응, 알았어. 그럼 네 거는 내일 쓰지, 뭐.”

촤아아~ 철썩!

해안에 파도치며 날린 바닷물 방울이 밤바람에 날아와 차갑게 얼굴을 적신다.

정문 밖 해안에 위치한 참호에는 네 사람이 한 조를 이루어 앉아 있었다. 다들 제 딴에는 조용히 소곤거린다고 하는 중이지만, 실은 꽤나 큰 소리를 내며 떠들고 있다.

열흘이 넘도록 하루도 쉬지 않고 적어도 수백 발씩 계속 사격을 해 댄 덕에 모두들 조금씩 청력에 손상을 입었고, 그 증상은 날이 갈수록 점점 더 심해졌다.

사각거리는 발소리 따위는 이제 잘 들리지도 않는다. 그만큼 위험도 올라갔다.

“그런데 이 병장님, 어제 그 작전…… 대체 뭡니까? 생존자 구출이라고만 알고 갔더니 갑자기 작전 성공이라고 돌아간다고 하지를 않나, 무슨 상자가 들어온 다음에 갑자기 좀비들이 몰려왔다고 하지 않나. 아는 건 아무것도 없이 그저 죽어라 싸우기만 하고……. 저희는 대체 왜 갔던 겁니까?”

“몰라. 원래 쫄따구들은 그런 거 모르는 거야. 그냥 쏘라면 쏘고, 까라면 까면 돼.”

이 병장이 귀찮아하며 대꾸했다. 하지만 김 상병은 포기하지 않고 진우와 강 일병에게도 물었다.

“야, 너희들 생각은 어떠냐? 대체 뭐였을까?”

“철수하기 직전에 특임대 장교가 열쇠를 하나 얻었습니다.”

진우는 자신이 아는 정보를 털어놓았다.

“열쇠? 커다란 상자에 열쇠라…… 어째 핵무기 냄새가 난다?”

김 상병이 나름 날카로운 추리를 선보였지만, 이 병장으로부터 되도 않는 소리 그만하라는 타박이 돌아왔을 뿐이다. 물론 그런다고 입을 다물 김 상병은 아니다.

“하지만 생각해 보십시오. 핵이라고 하면 갑자기 좀비들이 몰려온 것도 다 설명이 됩니다.”

“설명이 되기는 개뿔이 돼?”

“여기도 핵발전소인데 좀비들이 원수진 것처럼 몰려들지 않습니까? 좀비들이 핵 냄새를 칼같이 맡는 겁니다. 아, 이거 진짜, 핵무기를 찾아내고 지킨 거면…… 우리 훈장감 아닙니까? 태극무공훈장.”

“그따위 훈장 개나 주라고 해라, 씨발. 그걸로 뭐할 건데? 그런 거 말고 뭐 재미있는 이야기나 좀 해봐.”

원래부터 야간 경계 근무에서 가장 재미있는 여흥이라야 누군가의 난잡한 러브 스토리를 듣는 것 외에는 별다른 게 없다.

게다가 지금은 하루하루 목숨이 조여드는 것 같은 위기감 속에 빠져 살고 있으니, 긴장을 떨어낼 수 있는 이야깃거리가 필요하다. 아니, 절실하다. 이 병장의 요구에 김 상병은 곧바로 대응했다.

“아, 그런 거라면 간단합니다. 이 병장님, 오랜만에 VS 놀이 한번 하시겠습니까?”

“뭐랑 뭘 비교하는 건데?”

“핑크 펀치 둘 중에 누구랑 할 건가입니다. 테라 VS 제니, 둘 중에 누굴 고를 것인가.”

김 상병은 가능한 한 음란한 표정을 지으며 씨익 웃는다. 이 병장도 싫지 않은 듯 수염이 돋은 턱을 쓰다듬고는 흠흠, 콧소리를 낸다. 생활관에 붙여놓은 포스터에서 매일 보고 키스를 건네는 그녀들이랑 할 수만 있다면…….

“흐흐, 마음에 드시죠? 자, 꼬맹이들부터! 박 이병, 너부터 읊어. 누구랑 어떻게 할 거고, 왜 그런지 아주 상세하게…….”

“네? 어…… 꼭 하, 합니까?”

전방을 주시하고 있던 진우가 옆을 슬쩍 돌아보며 얼빠진 표정으로 전제 자체를 부정하는 질문을 던졌다.

“당연하지, 이 새끼야. 넌 둘 중에 하나랑 하게 해준다는데, 안 할 거야? 네가 무슨 부처님이야?”

“아니, 그런 게 아니라 말입니다. 제가 도대체 뭐 잘난 게 있다고 걔네가 그렇게 해줄지…….”

“아나, 이 꽉 막힌 새끼. 상상력을 좀 발휘해 봐! 네가 실은 엄청 잘났어. 알고 보니까 재벌 2세야! 아, 그래! 태극무공훈장! 태극무공훈장을 받아서 엄청난 스타가 됐어. 좀비들을 다 죽이고 세계를 구한 영웅이라서 여자애들이 너만 보면 다 죽어, 그냥. 오빠, 한 번만 만나 달라고 울면서 매달리는 애들 뿌리치느라고 힘들어. 핑크 펀치도 마찬가지고! 됐지, 이 새끼야?”

아흐흥~ 진우는 가만히 있는데 옆자리에서 듣고 있던 강 일병이 신음소리를 흘린다. 여자들이 달라붙는 상상을 하는 것만으로도 흥분이 되는 모양이다. 진우는 잠시 눈을 껌뻑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에, 둘 다 예쁘기는 하지만, 저는 역시 제니일 것 같습니다. 그…… 몸매가…….”

“이런 솔직하지 못한 새끼! 가슴이라고 똑바로 말을 못 하고 삥 돌려서 몸매가 뭐야?”

“그, 그러면 역시 그 가슴이…….”

진우가 말을 다 맺지 못하고 얼굴을 붉히자, 다들 웃음을 터뜨린다. ‘다음은 접니다!’ 강 일병이 콧김을 씩씩거리면서 자발적으로 나섰다.

“전 테랍니다. 저는…… 후우, 그 순진해 보이는 얼굴이 음란해지는 상상만 해도…… 후우~ 아우, 미치는 것 같습니다. 맨 처음에는 실크 스카프로 눈을 가리고 말입니다…….”

강 일병은 반듯해 보이는 인상으로 잘도 저런 소리를 지껄인다 싶을 만큼 음란한 소리를 지치지도 않고 떠들어 댔다.

처음부터 시작해서 어떤 소품을 어느 타이밍에 사용할 것인지, 테라의 반응은 어떨는지, 또 일이 끝나고 난 뒤의 행위와 대사까지 아주 자세한 묘사를 해서 세 사람은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아주 제대로 만든 포르노 영화를 한 편 본 것 같았다.

“하아, 하아, 제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김 상병님은 누굴 고르십니까?”

“훗, 너희들은 그래서 안 된다는 거야, 이 애송이 새끼들아.”

김 상병은 냉소적으로 비웃었다.

에? 왜 그러십니까? 이것보다 더 야하게 하실 수 있습니까?

아직도 흥분이 가시지 않은 얼굴의 강 일병이 물었다.

“당연하지. 너희들은 생각의 틀에 갇혀 있어! 왜 하나만 고르냐? 둘이 다 매달리면 둘을 다 안아주면 되지!”

“엑, 그러면 애초에 VS 놀이가 성립 안 되지 않습니까?”

“핑크 펀치 둘을 다 데리고 잘 수 있는데, 그까짓 VS 놀이가 무슨 상관이야. 안 그렇습니까, 이 병장님?”

“으음, 나는 말이야…… 제니를 고를 거긴 한데, 좀 색다른 걸 꿈꾸고 있어.”

이 병장은 그리운 것을 떠올리듯 애잔한 표정으로 먼 하늘을 보며 입을 열었다.

“제니가 나한테 막 적극적으로 매달리는 거지. 오빠, 제발 한 번만! 한 번만 안아달라고!”

“자기가 블라우스 단추도 막 풀었습니까?”

“음, 맞아. 너 아는구나. 네 개까지 풀었어. 그런데 나는 그날 영 기분이 언짢아서 그걸 하고 싶은 기분이 아닌 거야. 그래서 제니의 어깨를 살살 밀어내면서 말하는 거지. 제니야, 미안해. 이런 기분으로 너를 안고 싶지가 않아. 그리고 돌아서는 거야. 그러면 제니는 차마 더 붙잡지 못하고 주저앉아서 우는 거지. 난 몇 걸음 걷다가 돌아서서 그런 그녀를 잠시 바라보고, 제니가 혹시나 싶어서 고개를 들면 다시 걸음을 떼는 거야. 바바리코트 깃을 촤악― 세우면서…….”

“아니, 지금 그게 무슨…….”

“왜? 이런 정서가 이해가 안 되냐? 존나 애잔하잖아?”

“허…… 애잔하고 아니고를 떠나서 말입니다. 남자가 그게 가능할 리가 없잖습니까? 아니, 총알이 영 좋지 못한 곳을 스치지 않고서야…….”

네 사람의 나름 진지한, 그러나 얼빠진 대화가 끊긴 것은 뒤쪽에서 다가온 라이트 불빛 때문이었다.

부우우웅~

후방에서 헤드라이트가 비춰지고 자동차의 엔진 소리가 들려온다. 자정을 기해 발전소 주변을 크게 도는 순찰인 모양이다.

네 명의 병사는 서둘러 자세를 바로잡았다. 가뜩이나 스트레스를 받는 일이 많은데 공연히 근무 태도를 지적받아서 속이 뒤집어지기는 싫다.

“어, 수고 많다. 정신들 똑바로 차리고 있지?”

간단한 암구호를 형식적으로 주고받은 후, 다가온 장교가 네 병사의 안색을 살핀다. 참호와 라이트의 배치를 쓱 훑어본 장교는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도 장갑차 덕에 많이 편한 줄 알아.”

그는 기갑부대 소속이라는 티를 내려고 들었다.

이게 편한 거냐? 하루에 여섯 시간도 못 자고 매일 이렇게 뺑이를 치고 있는데?

비록 소리 내어 말하지는 않아도 네 병사의 얼굴에는 불만이 가득 드러난다. 그런 눈치도 모르는지, 장교는 시답지 않은 농담을 던졌다.

“전방 주시 똑바로 해. 괜히 한눈팔다가 외상 입지 말고.”

“알겠습니다. 저 그런데 중위님, 질문 하나 해도 되겠습니까?”

김 상병이 알랑거리며 궁금한 것을 묻는다. 장교는 통 큰 척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 그래. 말해봐.”

“외상 입어서 격리되는 사람들 중에도 비감염자가 있지 않겠습니까?”

“……있겠지.”

“그럼, 그런 사람들은 대체 어디로 가는 겁니까? 한번 끌려가고 나면 다시는 얼굴을 못 봤지 말입니다.”

알몸 점호 중에 끌려가는 병사들이 적지 않았다. 힘들게 싸우다 상처를 입었다는 게 이유의 전부였다.

소위가 적어준 사유서가 없었다면 이 병장도 어제 점호를 무사히 넘기지 못했을 것이다. 덕분에 병사들의 수는 점점 줄어드는데, 지원 병력은 다음 달이나 되어야 도착할 거라는 소문이 돌았다.

“음, 그건 걱정하지 마라. 자대로 보내서 관리하고 비감염자인 경우에는 잘 치료해 주니까. 일단 몸이 건강해져야 싸울 수도 있잖아.”

“자대라고 하시면…… 그…… 기갑부대로?”

김 상병이 더듬거리자 장교는 어처구니없다는 듯 너털웃음을 지으며 김 상병의 어깨를 팍, 두드렸다.

“야, 인마. 엄연히 소속이 다른데 왜 거기로 가겠어? 당연히 너희 부대지. 짜아식! 이거, 이거, 정신 못 차리고 있네. 하하.”

어안이 벙벙해져 있는 김 상병을 남겨두고 장교는 자동차에 몸을 실었다.

시내에서 징발해 온 SUV였다. 규모 오짜리 좀비들이 습격해 오던 날, 워낙 많은 차량들이 파손되는 바람에 장교들은 근처에서 경유 사륜구동 차량을 끌어다 쓰고 있다.

“뭐야, 김 상병? 너 왜 그래?”

장교에게 경례를 마친 이 병장이 김 상병의 안색을 살피며 걱정스레 물었다.

하아아~ 얼굴이 파랗게 질린 김 상병이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쉰다. 곁에 선 진우 역시 가슴이 먹먹해서 견디기가 힘들었다. 설마설마했던 일이 사실이라는 걸 확인한 셈이다.

“……이 병장님, 저 새끼들 정말로 끌고 간 애들을 감염자든 뭐든 가리지 않고 싹 다 죽여 버리고 있나 봅니다.”

“뭔 소리야, 자식아. 자대로 보내서 치료해 준다잖아.”

“이 병장님, 저희 부대는 없어졌습니다. 지금 거기로 가봐야 아무도 없지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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