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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 학살 (3) (108/449)


108. 학살 (3)
2021.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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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아니라니까! 너도 봤잖아. 체온도 없고, 생각도 없고, 불에 타고 있는 줄도 몰라. 그런 건 사람이라고 부르지 않는다고.”

“사람이 아니라고 해도 죽였다는 건 변함이 없어요! 그걸 누가 용서해 줄 수 있는데요?”

제니가 목청을 높인다. 여전히 흥분이 가라앉지 않은 상태였다. 유빈은 안타까웠다. 그녀가 오늘 던진 볼라가 자신의 선물이었기 때문에 더 가슴이 아팠다.

“내가 용서해 주지!”

난데없이 끼어든, 커다랗고 위엄을 가장한 목소리의 주인공은 삼식이었다.

유빈이 플래시를 돌려보니 바지춤에 두 손을 넣고 긁적이며 걸어오고 있다. 가까이 다가온 삼식이는 바지춤에서 손을 꺼내 마치 성직자가 축복을 내리는 것처럼 두 사람의 눈앞에 대고 휙휙 휘두르며 말했다.

“뭔지는 모르지만, 너희의 모든 죄를 다 사하노라~ 웃통을 벗고 제니에게 치근거린 유빈이의 이 죄 많은 영혼까지도 전부!”

손톱 끝에는 꼬불거리는 털이 하나 끼어 있다. 유빈이는 더 보고 싶지 않아서 얼른 플래시를 치웠다.

“자, 전부 다 용서됐어. 이제 나 세수 좀 하자.”

삼식이가 수돗가에서 허리를 숙인다. 갑자기 열이 식은 제니는 영혼이 빠져나간 사람처럼 멍하니 그 모습을 보고 서 있다.
그래, 쉽게 잊어버리기는 어렵겠지…….

유빈은 고개를 저으며 공구 가방에서 낡은 옷을 꺼내 걸쳤다.

그녀는 이제부터 아마 지독한 악몽에 시달릴 것이다. 단순히 무서운 것을 보았을 때와는 다른, 아주 끔찍한 기억들이 끊임없이 꿈속에 비집고 들어와서 마음을 할퀴고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하게 할 것이다.

유빈은 그걸 잘 안다. 그 옥상에서 빨랫줄에 매달렸던 날, 사람을 죽여야 했던 이래로 놈들의 얼굴이 떠올라 매일 밤을 악몽 속에서 보내고 있는 자신처럼…….

***

하루하루 시간이 지날수록 잠실야구장에는 더 많은 생존자들이 몰려들었다. 증가세가 폭발적으로 오르기 시작한 것은 중요 거점들과 쉘터 사이의 육로가 개척된 사흘 전부터였다.

비록 중앙선 두 줄이기는 해도 중장비로 뚫어놓은 도로를 장갑 수송차로 이동하면서, 헬리콥터로 1, 20명을 겨우 실어 나르던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생존자들이 구조되었다.

구조된 사람들은 잠실이나 상암, 용산 전쟁기념관 같은 대규모 쉘터로 옮겨져 안전한 잠자리를 보장받을 수 있었다.

물론 그에 따라 문제도 함께 증가했다. 가히 기하급수적이라 할 수 있는 인원의 증가는 인구밀도를 대폭 올려 버렸고, 지급받은 돗자리를 깔 공간이 부족해지기 시작했다.

공포와 배고픔, 더위에 지친 아이들이 우는 소리는 잠시도 끊이지 않고 콘크리트 벽을 타고 울리면서, 그렇지 않아도 지쳐있는 사람들을 더 힘들게 하기에 충분했다.

젊은 사람들은 아예 인파로 북적거리는 실내를 벗어나 야외의 관중석에 자리를 잡았다. 시큼한 땀 냄새와 불쾌한 끈적거림, 소음에 시달리느니 차라리 한뎃잠을 자는 편이 낫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 새끼가! 어디서 눈을 부라리는데?”

“당신이 먼저 어깨를 부딪쳤잖아!”

“당신? 당신? 이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새끼가 애비도 없나!”

“그래, 씨발! 닷새 전에 돌아가셨다, 이 개새끼야!”

사람들은 아주 시시하고 하찮은 문제로 계속 싸웠다.

화장실 앞의 긴 줄을 새치기했거나, 돗자리 외에 다른 것들을 깔아 남들보다 넓은 자리를 차지했다거나, 지나가면서 발을 건드렸다는 식의 말하기도 부끄러운 이유들 때문에 열심히 목에 핏대를 올리고 멱살을 잡았다.

그것은 그들을 지배하는 공포에서 벗어나려는 발버둥이기도 했고, 절대 손해를 보지 않겠다는 피해 의식이 체면 따위의 얇은 가면을 벗겨 버리면서 드러난 대중 심리이기도 했다.

그렇게 여기저기서 시비가 붙고 싸움이 벌어지면, 임수정은 이마를 찌푸리면서 고개를 돌려 일부러 외면해 버렸다.

아무리 날씨가 덥고 생활이 불편하다고는 하지만, 겨우 살아난 귀중한 목숨들이면서 왜 저렇게까지 못되게 아등거리는 것인지 그녀로서는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처음엔 치안 유지를 위해 열심히 말리고 떼어놓던 군인들도 어느 시점이 지난 후부터는 포기해 버렸는지 큰 부상자가 나오지 않는 한 관여하지 않는다.

“흐에에엥~ 흐에에엥~”

근처에서 또 아이가 운다.

에휴우~ 임수정은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아이와 엄마들로 둘러싸인 위치적 특성상 그녀와 테라의 주변에는 하루 종일 잠시도 끊이지 않고 아이 우는 소리가 들렸고, 아무리 참아보려고 해도 가벼운 두통이 이는 것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마침 아이들 홀리기 전문인 테라가 약을 얻으러 가서 자리를 비운 터라 아이의 울음소리는 더 커지고 길어졌다. 주변 사람들이 슬슬 짜증을 내는 것이 공기를 타고 전해져 온다.

“어허허허, 울지 말아야지. 자, 이거 먹고 뚝 그치렴, 뚝! 옳지, 그래. 착하다. 허허허. 아이고, 예쁘다.”

갑자기 나타나 손바닥 가득 사탕을 내미는 중년의 신사 덕에 아이는 울음을 그쳤다. 그리고 멀뚱멀뚱 사탕을 바라보다가 조심스럽게 손을 뻗는다. 중년 신사는 웃는 낯으로 아이의 머리를 살살 쓸어주었다.

어쩌다 한 번 지급되는 사탕은 이 쉘터 내 아이들 사이에서 최고의 인기품이었지만, 그만큼 구하기도 어렵다.

건빵 한 봉지와 사탕 한 알이 1대 1로 교환되고 있으니 부모 중 한 사람이 하루 종일 배를 곯아야 겨우 한 번 간식을 줄 수 있는 것이다.

너무 사람이 몰린다는 이유로 배식이 중단되고 보급품으로 때우는 상황에서 그건 너무 큰 희생이었다.

“어휴, 죄송해요. 아이가 너무 시끄럽게 울었죠. 이걸 죄송해서 어떡해요. 지금 당장 갚아드릴 수는 없지만, 내일 보급품을 받으면…….”

아이 엄마가 일어나 몇 번이고 허리를 숙인다. 하지만 정작 중년 신사는 당치 않다는 듯 손사래를 친다.

“허허허, 아이쿠, 참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아이들 웃는 소리, 우는 소리가 저 같은 늙은이에게는 음악보다 더 기분 좋게 들립니다. 이런 아이들이 없다면 미래도 없는 거니까요. 허허허, 신경 쓰지 마십시오.”

중년 신사는 사람 좋은 웃음을 잠시 더 흘리고는 아이 엄마와 인사를 나눈 뒤 뒤돌아 걸어갔다. 그의 등에 대고 아줌마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한다.

“저 사람이지? 육 사장이라는 분이?”

“응, 사람 정말 신사래. 아이들도 좋아하고, 매너도 좋고, 인심이 또 그렇게 좋아서 어려운 사람 보면 도와주지 못해서 안달이 난다더라고.”

“근데 육 사장? 무슨 사장인데?”

“무역 회사 크게 했다던데? 강남에서. 그 왜, 옷 입은 것만 봐도 벌써 부티가 자르르 흐르잖아. 완전히 그거야, 드라마에 나오는 착한 재벌 회장.”

“그러게. 게다가 또 얼마나 카리스마가 있는지, 젊은 애들이 시비 붙어서 칼부림 날 뻔한 때에도 여러 번 저분이 끼어들어서 말렸다는 거야. 그냥 눈으로 척 바라보면서 ‘젊은이, 이러지 말게’ 그러면 중재가 된다네, 글쎄? 그래서 군인들도 육 사장한테는 신뢰가 있대.”

“호호호. 어머, 자기는 흉내도 잘 낸다. 하여간 멋있다. 저런 게 로맨스그레이지.”

아줌마들이 제멋대로 지껄이는 동안 약을 받아 돌아오던 테라와 육 사장이 좁은 통로에서 마주쳤다. 테라가 한쪽으로 비켜섰는데도 육 사장은 굳이 가볍게 목례를 하면서 길을 비키고 먼저 지나가시라는 손짓을 한다.

“아…… 네, 감사합니다.”

“천만에요, 아가씨. 레이디 퍼스트 정도의 에티켓은 아는 놈입니다. 후후.”

육 사장은 쓰고 있지도 않은 모자를 들어 올리는 시늉까지 한다. 테라는 떨떠름한 미소를 짓고 목례를 한 뒤 자리로 돌아왔다.

“어, 혜린이 사탕 생겼네! 언니도 가지고 왔는데, 누가 줬어?”

테라가 해열제와 간식거리를 꺼내며 묻는다. 며칠이 지났어도 그녀의 사물함은 여전히 선물 받은 간식들로 터질 듯했고, 또 여전히 그녀는 그것을 주변의 아이들에게 아낌없이 나누어 주었다.

“누구겠어, 육 사장이지.”

아줌마들이 대답해 준다.

“육 사장요?”

“그래. 테라도 조금 전에 지나치면서 인사했잖아. 목소리도 멋지지?”

“크…… 모르겠네요. 아무 생각 없이 들어서.”

대충 얼버무린 테라가 간식을 아이들에게 나눠 주고 임수정의 옆에 와서 앉았다. 허공을 응시하고 있는 눈을 보니 아마 생각에 잠겨 있는 모양이다.

육 사장에 대해 생각하는 것일 테지.

임수정은 그렇게 추측했다. 그녀에게만 집중되어 있던 쉘터 사람들의 관심에서 적어도 10퍼센트 정도는 육 사장이 가져가 버렸다. 말하자면 넘버 투 스타다. 테라의 마음을 읽은 임수정이 말했다.

“그래도 최소한 깔끔해서 좋아 보여. 일주일을 넘기고 구조된 사람들이 대부분 엉망인 상태잖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해서 머리카락은 새집처럼 덥수룩하고, 옷은 찢어지고 얼룩투성이고……. 하지만 저 육 사장이라는 사람하고 그 비서들은 깔끔하게 슈트를 입고 있잖아. 저 사람 주변만 보면 그냥 아침에 회사에 출근한 사람들 같아 보여. 난 그게 마음에 들더라고.”

테라는 잠시 더 생각을 하다가 입을 열었다.

“전 바로 그 점 때문에 저 아저씨 일행이 더 무서워요. 대체 그런 상황 속에서 어떻게 하면 일주일 동안 저렇게 깔끔한 상태로 버틸 수 있었던 거죠? 양복도 이상하지만, 구두를 보셨어요? 긁힌 자국 하나 없고, 아직도 광이 나요. 대체 저 육 사장이란 사람은 뭘까요?”

그렇게 말을 하는 테라는 아직도 베르사체 미니 원피스에 하이힐 샌들을 신고 있다.

외모와 옷차림으로만 보자면 여기에서 가장 이질적인 건 너란다…….

굳이 입 밖으로 말을 꺼내지는 않았지만, 임수정은 테라가 약간의 시샘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세상에, 이런 애도 질투라는 걸 다 하는구나…….

“여어~ 수고가 많으십니다. 오늘도 별일 없이 흘러가고 있죠?”

그라운드 쪽으로 걸어 나간 육만배는 군인들 사이를 스스럼없이 지나쳐서 서류 작업을 하고 있던 위관급 장교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전광판을 반만 켜놓았는데도 그라운드는 꽤나 환하다.

“아, 육 사장님, 오셨습니까. 어쩐 일이십니까? 앉으세요.”

장교들은 익숙한 듯 그를 반긴다.

“그냥 뭐, 도와드릴 일이나 있을까 해서 찾아뵈었습니다. 평생을 바쁘게 일만 하던 사람이라 그런지, 가만히 앉아 있으려니까 이거 영 좀이 쑤시는군요. 허허허, 청소라도 좀 할까요? 허허.”

육만배는 위선적인 웃음을 지으면서 간이 의자에 앉았다.

시장에서 고가의 시계를 건빵과 사탕이랑 바꿔 나눠 주며 여자들의 환심을 사고, 젊은 놈들이 시비를 일으켜 격하게 몸싸움을 벌일 때 몇 번의 중재로 얼굴을 알렸더니, 군인들도 슬슬 그를 신뢰하고 있다.

물론 그 몸싸움을 일으켰던 것도, 또 위엄 있는 그의 말 몇 마디에 머리를 숙이고 사과하며 훈훈한 마무리를 지은 것도 전부 미리 그의 귀띔을 받은 만배파 조직원들이다.

‘군인분들 업무를 줄여 드리기 위해서 우리가 청소라도 합시다!’라고 나섰을 때, 함께 데리고 온 두 연예인 계집애인 가희, 초희를 시켜 자원봉사하는 척 바람을 잡게 했더니 호응도 좋았다.

덕분에 그는 군인들의 일을 덜어준 고마운 신사로 통하고 있다. 짧은 시간 동안 이 쉘터의 인심을 사로잡은 것이다.

역시 사기를 치려면 처음엔 먼저 좀 좋은 걸 줘야지. 후후후…….

허접한 먹을거리와 교환하기 위해 시계가 없어져 휑해진 손목을 보며 육만배는 속으로 사악한 웃음을 지었다.

“오지 마라, 오지 마라, 제발 거기에서 돌아!”

모니터 화면을 보고 있던 장교 하나가 혼잣말을 중얼거린다. 육만배가 어깨너머로 보자니 하늘에서 바라보는 근처 거리의 풍경이다.

아파트 단지 부근의 도로에서 대량의 괴물들이 행진하고 있다. 2중으로 크레모어를 설치해 둔 철책 근처까지 접근했던 괴물들은 더 이상 다가오지 않고 아래로 방향을 틀었다.

휴우~ 장교가 가볍게 한숨을 쉰다. 규모 여섯의 좀비들이어서, 만약 놈들이 그대로 걸어왔다면 크레모어 정도로는 다 처리가 안 되었을 것이다.

“허, 그건 어떻게 보시는 겁니까? 헬기 소리도 들리지 않는데, 신기하군요.”

“헬기는 이렇게 어두워지면 잘 뜨려고 하지 않습니다. 아무래도 위험이 커지거든요. 저걸 띄우는 겁니다. 헬리캠이라고…… 왜, 예전에 방송에서 많이들 썼었죠.”

장교가 가리키는 것은 직경 3미터 정도의 거미 모양 도구였다. 길게 뻗은 다리마다 프로펠러가 달려 있고, 가운데에는 카메라가 장착되어 있다.

고장에 대비한 것인지, 아니면 배터리 시간이 짧아서 교대를 하기 위한 것인지는 몰라도 꽤나 여러 대의 헬리캠이 준비되어 있었다.

“저게 넘어오면 위험해지는 겁니까? 안에서도 사람들이 수군거리더군요. 아이들도 있는데, 걱정이 큽니다.”

육만배가 묻자 장교들은 고개를 저었다.

“정확한 수치를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유언비어가 떠도는 걸 막기 위해서라도 육 사장님께는 대충 알려 드려야겠네요. 잠실 방어 병력만 3천 명이 넘습니다. 바로 근처에도 지원 병력이 상주하고 있고요. 혹시라도 시민분들 사이에 그런 말이 나돌면 육 사장님이 조곤조곤 말씀 좀 해주십시오. 저희가 이렇게 감시하면서 마음을 졸이는 건 그냥 매설 작업을 또 하게 될까 봐 그게 싫어서 그러는 겁니다. 크레모어, 지뢰, 철책까지 새로 완전히 설치하게 되면 피곤한 점이 한두 개가 아니거든요.”

“하하하, 그렇군요. 조금은 찜찜했었는데, 이렇게 설명을 듣고 나니 한층 더 안심이 됩니다. 하하하, 든든하네요.”

겉으로는 웃었지만 육만배는 조금 놀랐다.

3천이라니…… 눈으로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었군…….

이 조직과 장비를 손에 넣으면 작은 나라의 왕처럼도 굴 수 있을 것 같다는 계산이 떠올랐다.

어서 하부 장교들과 더 친해진 다음, 최상위 지휘부로 넘어가 그놈들을 포섭해야 할 텐데…….

오늘도 정보 몇 가지를 더 얻어낸 육만배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인사를 했다. 엉덩이를 오래 붙이고 있어봐야 다음에 찾아올 때 부담스러워지기만 한다. 적당히 아쉬울 때 일어서 주는 게 좋다.

“그럼 전 다시 올라가 보겠습니다. 전광판을 보니까 슬슬 저희 조가 화장실 청소할 시간이네요.”

“참…… 고생이 많으십니다. 아무래도 사람들이 너무 북적거리니까 힘이 드시죠? 그래도 하루만 더 참으십시오. 내일부터는 조금이나마 한산해질 테니까요.”

응? 내일부터 왜 한산해진다는 거지?

육만배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허허, 고생은 아니죠. 다 같이 살아보겠다는 건데, 조금 불편한 건 참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내일 무슨 일이 있나요?”

“아아, 그거요? 말씀드려도 되겠지? 어차피 조금 있다가 방송이 나갈 거니까.”

장교가 주변을 돌아보자 다른 장교들도 고개를 끄덕인다.

“현 시설이 포화 상태라서 내일 새로운 쉘터로 이동하실 분들을 지원받습니다. 건대, 한양대, 이 두 곳에 새로 수용소가 완비됐거든요. 거기로 한 곳에 삼백 분씩 빠져나가시면 조금은 공간이 생기겠지요. 오늘 저녁부터 내일 저녁까지 선착순 지원을 받는 겁니다. 앞으로 수용소는 계속 신설될 예정이고요.”

“헬기로 그 많은 인원을 실어 나를 수 있나요?”

“아닙니다. 도로를 확보해서 장갑 수송차로 갑니다. 오히려 더 안전한 겁니다.”

“그곳들도 여기만큼 인원이 많은가요?”

“한 시설당 민간인 천 명 수용을 목표로 하고 만들어진 곳이니까 아무래도 훨씬 작은 데죠. 그게 오히려 더 편하실 수도 있습니다.”

“하하하, 그런데 어째 제 짧은 생각에는 다들 안 가려고 할 것 같은데요? 여기가 아무래도 익숙하기도 하고, 또 그 뭐랄까…… 여럿이 겪는 난리는 난리가 아니라는 말처럼, 사람들이 더 많은 곳이 아무래도 더 안전하다는 생각이 들기 마련이거든요. 그리고 육백 명이 빠진다고 해봐야 그리 표가 날 것 같지도 않고요. 하여간 고생들 많이 하셨습니다.”

별것 아닌 소식이라 육만배는 금세 흥미를 잃었다. 그런 구석에 처박힐 일은 없다.

자고로 큰물에서 놀아야 하는 법이다. 육만배가 그렇게 생각하며 장교들을 지나쳐 돌아 나올 때, 그들끼리 나누는 대화 소리가 조그맣게 들렸다.

“정말 저분 말대로 되면 어떻게 합니까? 차츰 인원을 분산시키라고 몇 번이나 지시가 내려왔는데 말입니다.”

“아, 그거 상부로부터 벌써 조기 징집하는 걸로 해결하라는 명령 하달됐어. 뭐, 어차피 다음 달 초부터는 병력 차출하기로 돼 있었고……. 며칠 차이니까 큰 상관이야 없겠지.”

“입영을 시킨다고 해도 멀쩡한 훈련소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육만배는 자기도 모르게 우뚝 멈춰 섰다.

징집? 징집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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