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 덫을 놓다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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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 덫을 놓다 (4)
2021.12.13.
“어? 신입, 도와주러 온 거야? 잘 왔어. 이거 잡아.”
케이블 통을 엎어놓고 줄을 길게 풀고 있던 삼식이가 반가워한다.
“제니가 부탁하지 않았으면 안 왔어.”
줄을 잡고 당기면서도 신입은 토를 달았다. 근처에서 해머로 자동차 유리를 박살 내고 있던 보안관이 발끈한다.
“지랄하네. 퍽이나 그랬겠다.”
“됐어. 어쨌든 일하러 온 거잖아. 이거 계속 풀면 돼.”
삼식이가 신입의 편을 들어주었다. 직경이 2센티나 되는 굵은 전선줄을 위로 크게 돌리며 풀어내는 일이어서, 요령도 없고 체력이 달리는 신입은 금세 숨을 몰아쉬어야 했다.
“핵~ 핵~ 존나 무겁네. 이걸 왜 풀어? 그리고 너희는 뭐하는 거야?”
“그걸 이 사이에 엮어서 엉성한 그물처럼 만들 거야. 차로 무게를 분산시켜 주는 거지.”
유리창이 없어서 해골처럼 드러난 차체 필러를 가리키며 유빈이 설명한다.
“그럼 자동차 한두 대만 하면 될 텐데, 왜 굳이 그 앞쪽까지 돌아다니면서 멀쩡한 유리창을 다 부수냐고?”
“그래야 열기가 빨리 전달이 되니까 그렇지. 어제 계획 짜면서 다 이야기한 건데…… 그때 좀 잘 듣지.”
짧게 대답을 마친 유빈은 스패너로 유리창이 작살난 자동차의 주유구 덮개를 뜯어냈다. 이따가 철사를 이용해 주유구 안으로 천 조각을 밀어 넣기만 하면 된다.
놈들이 어제 지나갔던 것이 비가 마른 다음이었고, 오늘 아침에 다시 이 길을 걸어갔다.
즉, 시간 간격은 열두 시간이 좀 넘는 정도다. 그러니까 앞으로 아홉 시간 내에는 작업을 모두 마친 채 기다리고 있어야 한다. 할 일이 많다.
“꽤 풀었네. 이제 엮어볼까?”
신입이 진땀을 빼며 풀어놓은 케이블을 당겨서 자동차 밑으로 던지고, 반대편에서 잡아 가드레일에 걸친 다음 계속 잡아당겨 다시 반대로 도로를 가로질렀다.
이번에는 자동차 창문마다 걸쳐 묶고 지나간 뒤, 가로등에 걸어 돌렸다.
네 명이 모두 달려들어서 힘을 쏟아야 할 만큼 시간도, 공도 많이 드는 일이지만, 그래도 이 성긴 그물이 멍청한 좀비들의 전진을 저지해 줄 것이다.
고압 케이블 한 통을 다 써서 4차선 도로를 팽팽하게 네 번 왕복했다. 승합차의 지붕 높이부터 발목 조금 위인 자동차 바닥까지. 이제 선을 그어놨으니 걸려들어 주기를 바라야 한다.
***
민구가 예상했던 대로 길은 막혀 있었다. 역삼역 사거리 앞에 이르자 4미터가 넘는, 높다란 장벽이 나타났다.
인도 위에도 철조망이 여러 겹 꼼꼼히 쳐져 있어서, 절대 통과할 수 없도록 해놓았다. 장벽 앞에는 여러 대의 자동차들이 차곡차곡 겹쳐진 채 쌓여 있어서 마치 폐차장을 연상시켰다.
장벽을 쳐야 하는 자리에 정차되어 있던 자동차들을 중장비를 동원해 끌어낸 모양이다.
민구는 오토바이를 몰고 장벽 가까이 다가갔다. 큼직한 안내판에는 접근 금지라는 글자와 함께 이 군사시설을 훼손하면 법적 책임을 물겠다는 내용이 자잘하게 적혀 있다.
흥, 괴물들에게 법적 책임을 잘도 물으라지. 걔들이 이따위 경고문에 수긍을 할까 보냐.
“귀찮게 됐군.”
더 전진하기 위해서는 골목으로 빠져서 우회해야 한다. 민구는 고개를 돌려 좌우를 살폈다.
지금 막 올라온 방향을 다시 되돌아가고 싶지는 않았기에 그는 핸들을 왼쪽으로 틀어 비좁은 왕복 2차선 도로 안으로 들어갔다.
인도 위에까지 걸쳐서 아무렇게나 세워진 자동차들. 그중에서도 문을 열어놓고 달아난 빌어먹을 놈들 때문에 속도를 내기는 어려웠다. 이렇게 비좁은 길에서 괴물들을 만나면 꽤나 번거로워질 터다.
우회전할 수 있는 첫 번째 골목은 포기했다. 조그만 호텔 셔틀버스가 비스듬하게 벽을 박고 있어서 오토바이로 통과할 수가 없다.
“저놈 때문에 다 죽었겠군.”
깨어진 운전석 유리 밖으로 머리가 튀어나와 피투성이가 된 채 숨을 거둔 버스 운전사를 보며 민구는 혀를 끌끌, 찼다. 그다음 골목의 끝은 대로와 이어진 부분이 철책으로 막혀 있었다.
오토바이를 돌리면서 민구는 자신이 미로 속에 들어온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막다른 골목, 갈 수 없는 골목이 계속 등장하는 바람에 몇 번이고 다시 왔던 길을 되짚어 가야 했다. 골목 안쪽에서 목격한 군인의 시체도 여럿이다.
“쳇, 도대체 무슨 짓을 해놓은 거냐.”
좁은 골목 사이에서 20여 분을 빙글빙글 돌며 북진하던 민구의 RMZ 450은 봉은사로에 도착해서야 겨우 큰길로 겨우 빠져나올 수가 있었다.
하지만 기뻤던 것도 잠시. 논현로와 만나는 사거리가 가까워지면서 보이는 풍경에 위화감이 들기 시작했다.
매일 지나면서 보던 그 풍경이 아니었다. 200미터쯤 더 나가자 그 위화감의 원인이 밝혀졌다. 사거리에서 가장 높은 빌딩이었던 15층짜리 J타워가 반 토막이 난 채 앞으로 꺾여 있던 것이다.
차량 사이를 천천히 달리던 민구는 사거리 근처에서 오토바이를 세우고 내렸다. 금이 쩍쩍 갈라진 아스팔트 도로, 이리저리 뒤집혀 있는 자동차들…… 마치 지진이라도 난 듯한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이거였나…….”
사거리 전체에 걸쳐 분화구처럼 뻥 뚫려 있는 커다란 구멍 앞에 서서 민구는 조금 놀란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지하철 공사가 아직 마무리되지 않아 쇠판으로 덮어두었던 부분이 모조리 날아가 버린 자리에는 수십 미터 깊이의 구멍이 나 있었다. 떨어져 내린 자동차와 좀비들의 잔해가 콘크리트 철근 잔해 사이에 박힌 채다.
“완전히 작살났구만.”
민구는 감탄하며 커다란 구멍 주변을 천천히 걸었다. 쇠판을 받치고 있던 H빔 지지대가 잘린 단면은 불에 탄 흔적이 역력하다.
지반이 무너지면서 발생한 2차 충격 때문에 떨어져 내리지 않은 사거리 주변의 건물들조차 유리창이 전부 박살 난 채 기운 상태였고, 절반으로 동강이 나 무너진 J타워의 잔해 사이에는 깔린 사람들의 팔다리가 튀어나와 있다.
이미 오래전에 숨을 거둔 것이어서 괴물이었는지, 인간이었는지는 알 도리가 없다.
“뭘 어떻게 하면 이렇게 되는 거지?”
상상을 초월하는 크기의 거대한 싱크홀을 내려다보면서 민구는 턱을 긁적거렸다. 직각으로 햇살을 받은 구멍 바닥으로 사람의 손과 발, 머리를 포함해 엄청나게 많은 잔해들이 어지럽게 얽힌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폭격이었을까?
민구는 고개를 저었다. 단순히 괴물들을 죽이기 위해서 이만큼 큰일을 저질렀을 것 같지는 않다. 철저하게 초토화된 도로를 잠시 더 구경하던 그는 방향을 돌려서 다시 북쪽으로 올라갔다.
계속 이런 식으로 가다가는 올림픽대로까지 가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혼자 히죽거리고 웃을 때, 멀리서 묵직한 쇳소리가 고막을 울렸다.
위잉― 쿵― 위잉― 쿵―
이건 분명히 사람이 중장비를 이용해서 내는 소리다. 쇳덩이끼리 부딪치는 소리도 들린다.
“혹시 또 길을 막고 있는 건가?”
아까 양재역 사거리에서 봤던, 층층이 쌓인 자동차들의 모습이 생각나서 민구는 속도를 높였다. 만약 그렇다면 군인 놈들이 작업을 마치기 전에 그 자리에 도달해야 한다.
개나리 공원을 지났을 때, 에에엥~ 하고 커다란 사이렌 소리가 울려 퍼졌다.
뭐지…… 공습이라도 있는 걸까?
민구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살폈다. 낮게 위치한 하얀 구름들뿐, 비행기는 모습이 보이지도, 소리가 들리지도 않는다.
열흘이나 자동차가 다니지 않은 서울의 대기는 몰라볼 정도로 맑아져서, 꽤 먼 곳까지 아주 또렷하게 보인다.
골목에서 빠져나가 논현로로 재진입하자, 지난 며칠간 한 번도 보지 못했던 광경이 그를 맞았다.
중앙의 두 개 차로가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고, 걷어낸 자동차들은 부서진 채 길 양편에 쌓여 있다.
추석 당일의 서울 도로처럼 훤하게 뚫린 도로라니! 직접 그 위를 내달리고 눈으로 보면서도 도무지 믿어지지가 않는다.
에에엥~
그러는 동안에도 사이렌은 여전히 시끄럽게 울려 댄다. 어디인지는 몰라도 고층 건물 위에서 틀어대는 것 같다.
타타타타타! 투투투투투투둑! 타타타타타―!
갑자기 사격이 시작되었다. 총성이 들려오는 곳은 대로의 오른쪽이다. 그가 지나가야 하는 방향이기도 하다.
민구는 한 블록 전에 방향을 틀어 골목으로 진입했다. 괜히 흥분한 군인들의 사선 속으로 오토바이를 몰아 들어가고 싶지 않아서였다.
아까 그 사이렌은 괴물들이 다가온다는 신호였던가 보군…….
상황을 대충 이해한 민구는 골목 끝까지 내달렸다. 대로를 거치지 않고 이곳을 통과할 생각이었다.
그롸아아악―
그때, 등 뒤에서 괴물들의 포효가 전해졌다.
끼이익―
출구가 또 막혀 있는 것을 본 민구가 급하게 브레이크를 밟을 때, 자동차 때문에 가려진 골목 안에서 사람의 고함 소리가 들려온다.
“빨리 와, 이 새끼야! 빨리!”
“갑니다! 조 상병님!”
땡그렁!
공구를 내던지는 소리, 이어서 네 명의 군인이 달려 나왔다. 모양새를 보니 아마 출구에 철책을 치고 있던 녀석들인 모양이다.
그롸아악!
대열에서 이탈한 소규모의 괴물들은 벌써 골목 사이를 누비며 뛰어다니고 있다.
투투둑! 투투둑!
한 군인이 사격을 시작해 보지만, 목표와의 거리가 너무 멀어서 맞지 않는다.
그롸아악―
이번에는 위쪽에서 괴물들이 튀어나왔다. 거리는 약 150미터. 앞뒤로 좀비들 사이에 갇혀 버린 네 명의 군인은 점점 바짝 붙어 서며 막다른 골목 쪽으로 뒷걸음질을 쳤다. 그러던 중 이병 하나가 민구를 발견하고 소리를 질렀다.
“어! 조 상병님, 저, 저기……!”
“뭐? 어디? 어…… 생존자야? 이런 데에 아직도 살아 있는 사람이 돌아다닌다니…….”
믿기지는 않았지만, 오토바이 위에 멀쩡히 앉아 있다는 것이 민구가 좀비가 아닌 인간임을 한눈에 인정하게 했다. 군인들은 주변을 경계하며 민구를 향해 다급하게 손짓을 했다.
“아저씨! 이리 와요! 빨리! 거기 있으면 위험해!”
“뭐해요? 아참! 빨리 오라니까!”
그럽시다…….
느긋하게 대답한 민구는 오토바이를 세우고 손을 뒤로 뻗어 가방에서 마세티를 꺼냈다.
스르릉―
길고 넓적한 칼이 쇳소리를 울리며 뻗어 나오자 손짓하던 군인들은 동시에 말을 잃었다.
“헐……!”
맨 처음 그를 발견한 이병이 자기도 모르게 외마디 감탄사를 내뱉는다. 민구가 마세티를 든 채 그들 방향으로 한 걸음을 내딛자 군인들은 다시 소리를 질러 대기 시작했다. 다만, 이번에는 내용이 달랐다.
“아니야! 오지 마! 거기 서! 멈춰! 쏜다!”
“오지 말라고!”
오랬다가 말랬다가, 시끄러운 녀석들일세…….
민구는 목을 두둑두둑, 꺾은 다음 뒤로 몸을 돌렸다. 다른 놈들보다 달리기가 빠른 좀비 세 마리가 자동차와 벽 사이를 누비며 뛰어오고 있다.
빙글, 마세티를 한 번 가볍게 돌린 민구는 부웅, 몸을 날려 가장 앞선 놈의 목과 턱 사이에 칼을 내려쳤다.
칵!
중량감 있는 마세티의 칼날이 놈의 목에 박히며 밀어 치자, 괴물은 자동차에 지붕에 머리를 부딪치며 쓰러진다.
녀석이 비스듬히 누워버린 덕에 절단하기에 딱 좋은 자세가 나왔다. 민구는 곧바로 칼을 빼서 다시 같은 자리를 향해 빠르게 휘둘렀다.
카드득!
목뼈가 사선으로 꺾이면서 괴물은 맥없이 고꾸라졌다. 죽었는지 확인해 볼 필요조차 없을 만큼 깔끔하게 들어간 공격이다.
두 번째 놈을 상대하기 위해 민구는 방향을 45도 틀었다. 그리고 달려드는 녀석의 아가리에 마세티를 박아 넣었다.
와자작!
아래턱이 작살난 괴물이 벽에 대가리를 부딪친다.
그리고 퉁, 하고 튀어나오는 반동이 민구가 휘두르는 힘과 더해지면서 놈의 머리통 윗부분은 단번에 잘려 나갔다. 이빨이 부러진 턱 아랫부분만 남은 괴물의 몸이 벽에 박힌 듯 멈춰 서 있다.
탁, 자동차 보닛을 밟고 뛰어오른 민구는 마지막 괴물의 정수리를 직각으로 내리찍었다.
쩌쩌쩍!
뼈가 조각나고 골이 터져 나가는 소리와 목뼈가 으스러지는 소리가 동시에 울린다.
삐걱!
민구는 팔목을 틀어 놈의 조각난 해골 틈에 낀 칼을 빼냈다.
“으……!”
순식간에 괴물 세 마리를 해치우고 민구가 몸을 돌렸을 때, 군인들은 난감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자신들의 눈앞에 서 있는 것이 대체 어떤 종류의 인간인지 도무지 가늠이 되지를 않는다.
그러는 동안에도 위아래 양방향에서 좀비들은 빠르게 덮쳐 오고 있다. 혼자서만 상대하기에는 수도 어지간히 많다. 민구는 자신이 상황을 통제하기로 했다.
“내가 이쪽을 맡지!”
위쪽 골목에서 뛰어오는 괴물들을 마세티로 가리킨 민구가 자동차 지붕을 밟으며 뛰어나가자, 군인들 중 세 명은 얼결에 고개를 끄덕이고 아래쪽으로 몸을 틀었다.
어차피 이 골목 안으로 진입한 좀비들은 대열에서 떨어져 나온 부스러기들이다. 많아 봐야 전부 합쳐 20여 마리 정도.
한 방향에 열 마리씩만 집중한다면 상대하기 어려운 것만도 아니다.
갑자기 오토바이를 타고 나타난 사내를 마지막까지 의심스러운 시선을 풀지 않고 바라보고 있던 상병도, 민구가 좀비 둘의 머리통을 차례로 날리는 것을 보고 나서는 전방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수상하기 짝이 없는 인간이지만, 지금 이 순간 뒤통수를 칠 것 같지는 않았다.
“한눈팔지 말고 집중해! 다 잡을 수 있다!”
“옛!”
투투투투둑― 투투투― 투투둑―
한 번씩 훑고 지나갈 때마다 한두 마리씩 좀비가 쓰러진다. 하지만 역시 방치되어 있는 자동차들이 문제였다.
자동차가 좀비들을 위한 엄폐물처럼 작용하기 때문에 놈들을 맞출 수 있는 기회는 3분의 1 이하로 줄어들어 버렸다.
그롸아악―
우직! 콰당!
등 뒤에서는 좀비들의 아우성과 뼈가 부러지고 자빠지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린다.
그 칼 든 사내가 제대로 싸우고 있는 것인지 궁금했지만, 돌진해 오는 좀비들을 상대하는 데만도 벅차서 뒤를 돌아볼 여유가 없다.
“11시! 11시! 머리 쏴! 머리!”
“빨간 옷! 빨간 옷! 으아아아!”
네 명이서 사격을 하는데도 마지막 좀비를 쓰러뜨린 것은 놈이 불과 5미터 앞까지 다가왔을 때였다.
“하아~ 하아~”
네 군인은 숨을 헐떡이며 이마에 흘러내린 진땀을 닦아냈다. 차 한 대 거리 너머에는 심하게 부패한 좀비가 머리통과 상체가 벌집이 된 채 쓰러져 있다.
살았다…….
안도의 한숨이 절로 나온다. 재수가 없는 동료들은 전투를 마쳤을 때의 이런 기쁨을 누리지 못하고 저 녀석들의 먹이가 되곤 했다. 오늘 그들도 만약 이 칼 든 사내를 만나지 못했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장담하기 어렵다.
“그러고 보니 그 남자는…….”
등 뒤가 갑자기 서늘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