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 시가전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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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 시가전 (8)
2021.12.09.
나들이를 나온 지도 벌써 여러 시간. 긴 여름의 해가 기울면서 서쪽 하늘이 조금씩 붉게 물들어가고 있다.
마음이 급해진다. 보안관과 제니도 어지간히 놀랐었으니까 편안한 곳에서 안정을 취할 필요가 있다. ‘세녹스, 더 갖고 올까’ 하는 삼식의 물음에 유빈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어차피 누가 훔쳐 갈 것 같지도 않고, 필요하면 그때 가져오면 되겠지. 이제 슬슬 돌아가자.”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각자의 배낭 속에 짐을 꽉꽉 채운 채 지하 통로를 지나 경전철역을 통과했다. 삼식이와 신입은 굳이 자전거를 끌고 가느라 땀을 흘렸다.
“야, 그런데 가만 생각해 보니까 웃기다. 거기에 뭐가 있다고 꼭 돌아가야 하냐? 하다못해 문짝 하나도 없는 집에를……. 필요한 물건이 저쪽에 다 있는데, 그냥 아예 저기 자리 잡고 눌러살까? 아무 집이나 하나 골라잡으면 되는 거잖아?”
구름다리를 건너 길게 뻗은 산책로에 들어섰을 때, 삼식이가 번화가 방향을 되돌아보며 말했다. 신입도 솔깃하게 받아들였다.
“아, 그렇게 해도 되겠구나. 정말이네.”
“그래, 생각해 봐. 저런 집들에 들어가서 시체만 치우고 살면 방이랑 이불도 각자 쓸 수 있어. 물탱크에 물만 채우면 샤워도 할 수 있고. 심지어 수세식 변기도! 좋지, 좋지? 응?”
기가 산 삼식이가 목소리를 높인다.
아예 이사를 한다고? 번화가 쪽으로?
막연하게 복지 센터를 집처럼 여기던 유빈과 보안관도 조금 충격을 받아서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확실히 이곳에는 제대로 만들어진 집이 있다. 깨끗하게 목욕을 한 다음 이불을 덮고 침대 위에서 잠을 잔다. 스티로폼이 아닌 진짜 침대……. 얼마나 사치스럽고 아늑한 상상인가.
“그렇기는 한데, 단점은 없을까요? 저기로 옮기면…….”
“글쎄, 실내니까 불을 피울 수 없겠지만, 그건 가스레인지나 랜턴으로 해결하면 되는 거고, 그 외엔 약수터에 가서 물을 길어 오기가 좀 힘이 들겠지. 생수가 쌓여 있다고는 해도 계속 흐르는 물을 쓸 때처럼 마음이 편하지는 않을 테니까……. 하지만 평지에서 2킬로미터 정도밖에 안 되니까, 하자고 하면 못 길어 올 거리도 아니야.”
보안관이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유빈은 입을 다문 채 고개를 숙이고 생각에 빠졌다. 분명히 번화가 쪽의 집들이 더 편안하기는 할 텐데, 왠지 불안하다. 그 이유가 뭘까…….
단순히 약수터와의 거리가 멀다거나 하는 문제가 아니다. 턱을 잡고 고개를 숙이고 있는 그의 눈에 흰 페인트로 바닥에 그려져 있던 화살표와 숫자가 눈에 들어왔다.
“……11,200.”
이미 오래전에 페인트칠이 되어 있던 것인지, 조금 닳아 지워져 있다.
그 숫자와 화살표의 의미가 무엇인지는 몰랐지만, 유빈은 더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런 것보다는 거처를 옮길지의 문제에 대해 고민하는 게 훨씬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사라…….”
잠시의 침묵을 깨고 유빈이 입을 열었다.
“나는 있지, 왠지 불안해. 일단 저기는 한 번 좀비들이 점령했던 지역이기도 하고…… 복지 센터는 1층과 2층이 분리되어 있지만, 저기의 집들은 다 계단으로 이어져 있잖아. 좀비들이 떼로 닥치면 달아날 곳이 없어.”
“쇠문이 달린 집으로 들어가면 되지.”
신입은 별것 아니라는 투다.
“게다가 아무래도 좁아. 음식을 쌓아둔다고 해도 집 안에 두는 양 정도로는 며칠 못 버틸 거야. 백 평이 넘는 복지 센터하고는 물탱크 크기부터가 다르지. 하긴 뭐, 이건 내 생각일 뿐이니까……. 너희는 어때? 이사를 하는 게 낫다고 생각하냐?”
음, 다들 갈등하는 표정이다. 등 뒤의 산 너머에 대규모의 좀비들이 머물고 있는 복지 센터냐, 번화가의 집이냐. 가장 먼저 결정을 내린 건 보안관이었다.
“역시…… 익숙한 게 더 나은 것 같기는 해. 나는 그냥 복지 센터에 있는 게 좋아.”
“내가 처음 말해놓고 이런 이야기 하면 좀 웃기지만, 저 동네에서 나는 악취가 신경 쓰여. 길거리 전체에 시체 썩는 냄새가 진동해서 영…….”
삼식이까지 말한 시점에서 이미 과반수를 넘어섰지만, 다들 제니의 입을 쳐다보고 서 있다. 제니는 멋쩍어하며 말했다.
“흐…… 저는 뭐, 오늘도 한 번 까불다가 죽을 뻔했었으니까……. 아무래도 저기에서 산다는 건 좀 무섭네요. 하지만 오빠들이 정하는 대로 따를게요.”
이걸로 결정이 내려졌다. 쇼핑은 번화가에서, 생활은 복지 센터에서 하는 것으로. 신입이 조금 아쉬워하긴 했지만, 그 결정에 대해 그리 큰 불만은 없어 보인다.
“우리 내일은 호프집에서 플라스틱 의자랑 테이블도 가져오자.”
잡초가 무성하게 자란 벌판을 가로질러 걷다가 보안관이 제안을 하자 다들 반겼다. 의자에 앉아 밥도 먹고 커피도 마신다면 훨씬 기분 좋게 매일을 보낼 수 있을 것이다.
플라스틱 의자를 시작으로 해서 다들 자신이 가지고 싶은 걸 떠들어 대기 시작했다. 알루미늄 야구방망이부터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앰프까지, 필수품과 사치품이 정신없이 섞여 나온다.
“덥다. 끈적끈적해.”
신입이 목덜미를 쓰다듬으면서 투덜댔다. 며칠 동안 제대로 씻지를 못했고, 하루 종일 7월의 햇빛을 받고 돌아다녔으니 당연한 일이다.
“그…… 있잖아, 어린이용 튜브 풀장. 그런 것도 있으면 좋을 텐데. 옥상에 놔두고서 더울 때마다 푹 담그고 싶다. 아휴, 생각만 해도 시원하다.”
삼식이가 군침을 삼키면서 말하자, 보안관이 타박을 준다.
“거기에 물이 얼마나 많이 들어가는데, 그 많은 물을 누가 더 져서 날라?”
“에이, 한 번만 채워놓으면 되는걸 뭐.”
“너 지금 물에 10분만 불려놓으면 아마 때가 둥둥 뜰걸? 그 물에 나도 들어가라고? 싫어.”
하지만 삼식이는 기죽지 않았다.
“잠자리채 같은 걸로 건지면 깨끗해. 우리끼리인데 뭐 어때. 유빈아,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그런 문제는 일단 풀장이 생기고 난 다음에 싸워도 될 것 같은데. 지금 우린 풀장이 없잖아.”
“아!”
그렇게 농담을 하고 웃는 동안에 그들은 복지 센터와 마주하고 있는 철책 앞에 다다랐다. 그리고 곧 그것을 보았다.
“젠장!”
철책이 뚫린 곳에 걸쳐 두었던 레이저 와이어에 청바지의 천 조각과 회색빛으로 썩어가는 주먹 크기의 살덩어리가 걸려 있다.
아무 해도 끼칠 수 없는 살덩어리에 불과했지만, 즐겁게 웃고 떠들던 분위기를 단박에 죽이기에는 충분했다. 좀비가 이곳에 왔었다.
모두의 얼굴이 굳는다. 다들 과잉되게 즐거운 척 가장하며 애써 외면해 왔던 공포의 감정이 순식간에 수면 위로 떠올라 버린 것이다.
“움직이지 마. 조용히…….”
보안관은 등에 메고 있던 배낭을 내려놓고 두 손으로 해머를 쥐었다.
상처 때문에 반창고투성이가 된 두 팔의 근육이 순식간에 팽팽해진다. 유빈도 삽을 고쳐 쥐면서 어둑해진 주변을 훑었다. 놈들 특유의 포효는 들리지 않는다.
“이게 어디서 온 거지?”
보이는 범위 내에는 움직이는 것이 없다. 보안관과 유빈은 철책을 넘어 발소리를 죽이면서 복지 센터 쪽으로 걸어갔다.
“까짓것 한 마리일 뿐이야. 너무 긴장하지 마.”
보안관이 뒤쪽에 선 일행들을 돌아보며 달랜다. 하지만 앞서 걷던 유빈은 절망감에 사로잡혀 삽을 늘어뜨리고 얼굴을 감싸 쥐었다.
“왜 그래, 유빈아?”
“이런 제기랄, 이것 좀 봐.”
유빈이 복지 센터 건물 내부의 1층을 가리켰다. 눕혀두었던 나무 사다리가 부서진 채 박살이 나 있다. 허리를 숙이고 사다리의 파편들을 살피던 유빈이 못이 튀어나온 나무 조각 하나를 들어 보인다.
거기에 묻어 있는 찐득한 검은 액체에서는 독특한 악취가 풍겼다. 말라붙어 있지 않은 것으로 보아 못에 찔린 지 그리 오래된 건 아니었다. 그리고 이렇게 지독한 냄새가 나는 건 하나밖에 없다.
“한 번 쓸고 갔나 봐, 여길.”
유빈이 쓸쓸하게 중얼거린다. 보안관이 물었다.
“좀비가 사다리를 박살 냈다고? 그런 생각을 해낼 만한 대가리가 되나?”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밟고 지나갔겠지. 워낙 수가 많았을 거야. 그랬으니까 나무도 견디지 못하고 부서진 거고. 한두 마리가 밟았다고 해서 이렇게 되지는 않을 테니까.”
“어느 방향에서 온 거지? 혹시 뒷산에서?”
황급하게 뒤쪽으로 뛰어갔던 보안관이 고개를 저으며 돌아온다.
“저쪽은 아니야. 트랩이 우리가 걸어놓았던 모양 그대로 남아 있어.”
“그래, 산에서 온 건 아닐 거야. 만약 그랬다면 여기가 온통 흙투성이가 되어 있었을 테지. 오늘 비도 왔었잖아.”
앞도, 뒤도 아니면 측면밖에 남지 않았다. 유빈은 건물 밖으로 나와 복지 센터 앞을 가로지르는 먼지투성이 도로를 바라보았다. 작업반장이 이 길을 따라 차를 몰고 내려갔다가 다시 돌아오지 못했다.
곁으로 다가온 보안관이 물었다.
“이걸 타고 온 건가? 그런데 여기까지는 길을 따라 잘 걷던 놈들이 왜 하필 우리 사는 건물로 기어들어온 거지? 이상하잖아.”
그건 유빈 역시 알고 싶다. 왼쪽에서 온 것인지, 오른쪽에서 온 것인지, 몇 마리나 몇 시에 왔었는지, 그리고 대체 뭘 찾으려고 복지 센터 건물 내부로 들어와 서성거리다가 갔는지.
알아보고 싶은 건 산더미처럼 많지만, 지금 그것보다 더 중요한 건 이 소름 끼치는 좀비의 루트에서 벗어나는 일이다.
놈들의 움직임은 규칙성을 띤다. 한 번 나타났으니 언제든 또 나타날 수 있고, 그게 언제일지는 그들 중 아무도 모른다. 고민을 하는 동안에도 점점 사방이 어두워지고 있다.
“보안관, 해머랑 연장 몇 가지만 챙겨.”
해머와 공구 가방을 집으면서 유빈이 말했다. 보안관은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철책 너머에서 기다리고 있던 일행들에게 다가간 유빈은 최대한 침착하게 설명을 했다.
“좀비들이 한바탕 휩쓸고 갔어. 정확한 규모는 모르지만, 꽤 많았던 것 같아. 언제 또 올지 모르니까 빨리 자리를 피해야 돼.”
아, 세 사람의 입에서 가볍게 탄식이 흘러나온다. 삼식이가 물었다.
“어디로 갈 거야?”
“번화가 쪽으로 다시 가야 할 것 같아.”
“조금 전에 네 입으로 거기는 위험해서 별로라고 했잖아?”
“지금은 여기보다 안전하겠지. 아니…… 안전했으면 좋겠네. 하여간 여기에는 있으면 안 돼. 오늘 밤에 혹시 또 올지도 모르니까.”
불안한 표정의 제니가 물었다.
“이제 이곳으로는 다시 돌아오지 않는 거예요?”
“아니, 아니. 어디까지나 일시적인 거야. 지금 우리는 이만큼 많은 놈들이랑 싸울 준비가 안 돼 있으니까.”
“빨리 가자! 가면서 말해.”
공구들을 다 챙긴 보안관이 유빈과 제니의 어깨를 돌려세운다. 일
행은 조금 전 그들이 걸어왔던 길을 그대로 되짚어 걸었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데, 불안한 마음은 자꾸 뒤를 돌아보게 만든다. 거대한 그림자처럼 방치된 복지 센터가 음침하게 느껴져서 그들은 발걸음을 재촉했다.
“전에 철책 올려놨던 거 어디에 있냐?”
한동안 걷다가 유빈이 보안관에게 물었다.
“아, 그거 슈퍼 근처에…….”
“그거 나랑 제니가 들어갔던 집 옥상으로 옮겨두자. 오늘 거기에서 자는 게 나을 것 같아. 방범문도 잠겨 있고, 계단이 옥상이랑 이어져 있으니까 여차할 때 시간을 꽤 벌 수 있어.”
“하지만 거기에는…….”
제니가 말을 맺지 못하고 주저한다. 무슨 말을 하는지 유빈도 잘 안다. 그 집 욕실에는 죽은 여자의 시체가 있다. 지금쯤 아마 냄새도 엄청날 것이다. 나쁜 세균이 생겨났을 수도 있다. 그리고 아무래도 불길하다.
“테이프로 문을 막아두면 돼. 정 찜찜하면 잠은 옥상에서 자도 괜찮고. 일단 하룻밤만 보내면 되는 거니까.”
“너희만 아는 소리로 뭐라고 하는 거야? 거기에 뭐가 있는데?”
날카로워진 신입이 언성을 높이며 캐묻는다. 유빈은 별거 아니라는 투로 대답해 줬다.
“그냥…… 욕실에 죽은 사람이 하나 있어. 근데 거기에만 들어가지 않으면 돼.”
“야, 씨발, 널린 게 집인데 하필이면 그렇게 귀신 나올 것 같은 집을 골라 들어가려고 하냐? 차라리 아까 우리 밥 먹은 데로 가자. 거기 좋더구만. 깨끗하고.”
“거기는 안 돼. 유리문이고, 옥상으로 가는 길이 1층에도 개방되어 있어서.”
“그럼 다른 집을 골라. 나는 반대야.”
이런 일로 말씨름을 하고 싶지는 않다. 유빈은 단호하게 말했다.
“그럴 시간 없어. 사방에 보이는 집들 다 멀쩡해 보여도 실은 그 안에 시체가 몇 구씩 있을 가능성이 반이 넘어. 가만히 죽어 있는 시체면 그나마 다행이고, 좀비가 숨어 있을지도 모르지. 거기보다 더 나은 집을 찾아보고 싶으면 너 혼자 해. 나는 야밤에 낯선 집을 뒤질 만한 용기가 없으니까.”
“뭐래, 이 등신새끼가! 제 친구들밖에 없다고 아주 신났네? 야, 그렇게 안전이 중요했으면 낮에 탱자탱자 놀지만 말고 기지가 될 만한 집을 찾았어야지.”
“그러니까 잘난 네가 시체도 없고 위험하지도 않은 집을 찾으라고. 안 말린다니까?”
신입이 유빈을 노려본다. 냉랭해진 공기가 압박처럼 느껴질 때, 삼식이가 힘없이 입을 열었다.
“배고프다…….”
그 말이 사실인 것을 증명하려는 듯 삼식이의 배에서는 꼬르륵, 소리가 났다.
그리고 보안관과 유빈의 배에서도 비슷한 소리가 합창처럼 울어 댔다. 삼식이 때문에 카레를 제대로 먹지 못했으니 다들 꽤나 허기가 진 상황인 것이다.
“저두요. 우리 빨리 가서 저녁 먹어요.”
제니가 재빨리 신입과 유빈의 사이에 끼어들며 웃는다. 보안관도 제니를 거들었다.
“그래. 야, 신입. 예전에 생각해 봐. 1층에 좀비 시체를 몇십 마리나 쌓아두고서 잘만 잤잖아. 게다가 그때는 음료수밖에 먹을 게 없었어. 그거에 비하면 이건 정말 아무것도 아니야.”
씩씩거리던 신입도 수긍할 수밖에 없는 이야기다. 그렇게 해서 논쟁은 더 이어지지 않고 억지로 종결됐다.
다섯 명은 다시 입을 다물고 걸음을 서둘렀다. 어깨에 짊어지고 있는 가방의 무게 때문에 모두의 몸은 약간씩 앞으로 굽어 있다.
박모의 어스름이 깔리기 시작하자 어둠 때문에 시야가 급격하게 줄어든다. 삼식이가 헤드 랜턴을 꺼내 쓰고 앞을 밝혔다.
휘이잉―
저녁이 되며 불기 시작한 바람이 잡초들을 이리저리 흔들며 춤추게 한다. 다들 알고 있었다.
짧았던 파티는 이제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