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 시가전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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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2.08.
하지만 제니는 눈길을 피하지도, 꽉 잡힌 어깨를 빼려 들지도 않았다.
그린 라이트인 건가!
보안관의 가슴이 터지기 직전이다. 보안관은 고개를 약간 돌려 다가갔다. 제니는 미동도 않고 기다린다. 그때…….
“보아안과안! 보아아안관! 좀비다! 좀비야!”
삼식이의 방정맞은 목소리가 번화가 전체를 쩌렁쩌렁 울리며 빠르게 가까워진다. 어느새 바로 등 뒤에 와 있던 모양이다.
이, 이런 개새끼. 하필이면 이런 때에…….
보안관은 원망스러운 눈으로 삼식이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그런 보안관의 마음을 알 리가 없는 삼식이는 마음껏 혼신의 연기를 계속했다.
“좀비야! 좀비! 빨리 도망가야 돼! 신입, 내 말 맞지?”
뒤를 따라오는 신입은 어정쩡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분명 이 유치한 장난에 끼어들고 싶지 않은 것이다.
“지랄하지 마, 이 새끼야! 담배나 빼버리고 급한 척을 해!”
“하하하, 왜 안 속지? 아! 보안관, 눈치 빠른데?”
“그렇게 국어책을 읽고 앉아 있는데 누가 속아? 아, 아, 따가워.”
버럭 화를 내던 보안관이 등을 움츠렸다. 제니가 살피더니 베인 곳이 있다며 소독을 하고 입김을 쐬어주었다.
오호, 따가운 곳에는 입김을 불어주는 거지?
보안관은 이미 소독약이 발라져 있는 자신의 입술 주변을 가리키며 엄살을 떨었다.
“여, 여기도 호~ 해줘, 제니야.”
“후우욱~”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입술을 가까이 대며 재빨리 입김을 불어준다, 삼식이 개새끼가. 담배 연기를 고스란히 뒤집어쓴 보안관은 얼굴을 찌푸리며 버럭 화를 냈다.
“우웩! 캑! 아우, 담배 냄새! 이 개새끼야!”
“하하하! 불어달라고 했잖아. 왜 짜증을 부려? 너 얼굴은 왜 그래? 제니한테 맞았어?”
“닥쳐! 이 미친놈아!”
“훗, 보안관. 잘난 척할 수 있는 것도 지금뿐이다. 이게 뭔지 알면 나한테 그런 식으로 굴지 못할걸?”
삼식이는 배낭에서 페트병을 꺼내 자랑스럽게 내밀더니, 뚜껑을 열고 흔들었다. 맑고 투명한 액체가 찰랑인다.
“그게 뭔데요?”
제니가 묻자 삼식이는 1초의 딜레이도 없이 곧바로 대답했다.
“세녹스!”
삼식이는 자랑스러워하며 가슴을 쫙 폈지만, 제니는 전혀 모르겠다는 표정이다.
“세……녹스가 뭐예요?”
보안관이 끼어들어 설명했다.
“자동차용 기름이랑 비슷한 건데, 조금 싼 거 있어……. 정확히 말하자면 진짜 세녹스도 아니야. 그냥 유사 휘발유지. 그런데 이건 어디서 났어?”
“흠흠, 그 트럭을 발견한 건 큰길 건너 고가도로 밑 안전지대였지. 연료 첨가제라는 포스터가 붙어 있더라고. 그래서 혹시나 하고 트럭 짐칸을 열어봤더니…… 크아! 내가 무슨 말하고 싶은지 알지? 플라스틱 말통이 가득 쌓여 있는 거야. 뚜껑 따니까 냄새가 확 올라오더라고! 그래서 얼른 물통을 비우고 이렇게 담아 왔지.”
삼식이가 페트병 뚜껑을 따고 냄새 맡는 시늉을 한다. 한 손에는 여전히 담배를 쥐고서…….
보안관은 황급히 손을 뻗어 병을 빼앗았다. 워낙 뜨거운 날이어서 그런지, 열려 있는 입구 위로 아지랑이처럼 휘발되는 것이 눈에 보인다.
“야! 큰일 나, 인마. 이거 만질 때에는 담배 좀 꺼. 불붙으면 얼굴 다 날아가.”
“아, 그렇구나. 미안, 미안.”
삼식이는 담배를 비벼 끄고 득의만면한 미소를 지었다.
“자아, 이제 우리는 발전기를 마음껏 돌릴 수 있게 됐다!”
“발전기? 발전기 돌려서 뭘 하려고?”
“보안관, 너 진짜 바보구나……. 이제 우리는 냉장고로 얼음을 얼릴 수 있어. 팥빙수를 생각해 봐.”
“냉장고가 어디 있어요?”
“사방에 널린 게 냉장고지. 아무 집에라도 들어가서 하나만 집어 오면 되는걸, 뭐. 어, 그런데 참, 유빈이는?”
“나 여기 있어.”
뒤쪽에서 유빈이 긴 코팅 종이를 둘둘 말아 들고 걸어온다. 삼식이가 물었다.
“넌 어디 갔다가 와? 그건 뭐야?”
“아, 부동산 대리점 벽에 걸려 있던 지도 가지고 오는 거야. 이 부근 자세한 지도가 있으면 좋을 것 같아서. 그보다 세녹스를 찾았다고?”
“응. 이거야, 이거!”
“도로는 어때? 어디까지 나가봤어? 좀비들은?”
“음, 동일로가 보이는 데까지 갔다가 돌아왔는데, 일단 좀비는 못 봤어. 와, 그런데 거기는 정말 차들로 꽉 막혀 있더라. 이 주변보다 훨씬 심해.”
“그러면 기름이 있어봐야 차를 타고 이동하지는 못하겠네.”
“차? 우리 차 없는데?”
“차도 냉장고랑 똑같아. 열쇠가 걸려 있으면 아무거라도 타면 돼.”
“오호, 그렇구나!”
유레카를 외치는 표정으로 보안관이 큰 소리를 내며 손바닥을 쫙! 쳤다.
“우리 오늘 당장 복지 센터 앞 도로로 내려가서 차 한 대 끌고 오자.”
“무슨 소리야, 보안관? 길이 막혀서 차는 쓸모가 없다니까.”
유빈의 말에 보안관이 답답하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복지 센터 앞 벌판부터 여기 구름다리까지는 마음대로 타고 다닐 수 있잖아. 그러면 쇼핑하고 돌아갈 때도 훨씬 편할 테고, 무거운 것도 힘 안 들이고 가져갈 수 있어. 드, 드라이브도 재미 삼아 할 수 있고.”
이유를 거창하게 댔지만, 보안관의 머릿속에 든 생각이라야 어차피 제니와 한적하게 드라이브를 즐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거의 전부일 터였다.
아파트를 세우기 위해 닦아놓은 평평한 공터니까 차가 다니기에 불편함은 없을 것이다.
드라이브라…….
유빈은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예전에 보안관이 산에서 주웠던 찌라시에는 건대 부근에 생존자용 보호소가 있다고 적혀 있었다. 자동차로 이동할 수만 있다면 30분 안에 닿을 수 있는 거리다.
공사용 트럭이 아니라 번듯한 내 차에 미래의 여자 친구를 태우고 싶었는데, 막상 눈에 보이는 모든 물건의 주인이 된 지금은 달릴 도로가 없어서 차를 몰지 못한다니…….
“세녹스 얼마나 가져왔는데?”
“지금 당장은 이게 다야. 더 가져와?”
삼식이와 신입이 페트병 하나씩을 들어 보인다. 그 정도면 당장 발전기에 부어서 쓸 양은 충분할 것 같다.
물론 이 귀한 연료로 냉장고를 돌릴 생각은 없고, 혹시 자동차를 움직인다고 해도 연료가 남아 있는 차를 고르면 되니까 당장 휘발유가 필요하지는 않을 것이다.
***
없다.
만배파가 자신에게 남긴 단서가 단 하나도 없다. 한 줄의 편지도, 간단한 약도 한 장도…….
몇 시간이나 걸려서 펜트하우스 전체를 뒤져 보고 난 민구는 어처구니가 없어서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내가 이 정도밖에 안 되는 존재였나? 큭큭큭.”
자신의 방으로 돌아와 소파에 걸터앉은 민구는 따놓은 양주를 병째로 기울이며 담배에 불을 붙였다.
해가 진 이후, 실내는 급격하게 어두워졌고, 그는 초를 하나 가져와 탁자 위에 켜두었다. 흔들거리는 촛불이 술기운과 제법 잘 어울려서 사람을 감상적으로 만든다.
후우우~ 담배 연기를 길게 뿜어낸 민구는 고개를 뒤로 젖힌 채 잠시 생각에 잠겼다.
열일곱 살 때부터였나…….
육만배가 원하는 모든 싸움에서 가장 앞장을 섰고, 또 승리를 이끌어냈다.
보통 사람들은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많은 놈들을 담그고, 그중에 정말로 향냄새를 맡게 된 놈들이 몇인지는 그조차도 세지 못한다.
그런데…… 그런데 고작 이따위 대접이라니. 다른 애송이 자식들이야 어떤 짓거리를 했어도 상관없다. 하지만 육만배와의 관계가 이렇게 끝난다는 건 민구에게 적잖은 충격이었다.
의리…… 따위의 말을 쓰는 건 촌스럽지만, 적어도 이보다는 끈적한 무엇인가가 있을 거라고 민구는 기대했었다.
“큭큭큭.”
민구는 소파에 몸을 깊숙하게 묻으며 자조적으로 웃었다. 그때, 계단으로 이어져 있는 문이 가볍게 끼익거린다. 민구는 미동도 않고 조용히 양주병만 기울였다.
저벅저벅, 누군가 복도를 걸어오는 아주 작은 소리. 불빛은 어른거리지 않는다. 민구는 자리에 그대로 앉아서 담배를 깊숙이 빨아들였다. 다섯, 아니, 여섯인가. 민구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인기척이 길거리에 있던 놈들을 이 높은 곳으로까지 끌어 올렸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아마도 이 건물 내부 어딘가에서 헤매던 놈들일 테지.
그르윽, 그르르윽!
놈들의 거칠고 낮은 숨소리가 들려온다. 그리고 곧 괴물들이 열어두었던 문 앞으로 달려들기 시작했다. 그제야 자리에서 일어난 민구는 웃으며 마세티를 거머쥐었다.
“이야~ 어서 와. 날 기다린 새끼들은 너희밖에 없구나.”
그롸아아악!
앞선 놈이 아가리를 쫙 벌리고 달려든다. 스커트에 조끼까지. 아마 은행 유니폼인 것 같다. 민구는 마세티를 높이 치켜올렸다가 그대로 내려쳤다.
쩍!
단발머리가 쪼개지며 뇌수가 바닥에 쏟아져 내린다. 손목을 비틀어 날을 빼낸 민구는 곧바로 팔과 허리를 함께 돌리며 두 번째 놈의 목을 쳐냈다.
달려들던 힘과 정확한 타격, 적당한 무게가 모두 맞아떨어지면서 한 번에 잘린 괴물의 머리가 벽을 맞고 튕겨 나온다.
데구르르~
괴물의 머리가 구르는 동안 두 놈이 더 뛰어들었다.
콰당탕!
민구가 가볍게 방향을 돌리자 놈들은 탁자와 소파를 뒤엎으며 바닥에 나뒹굴었다.
엎어진 촛불이 힘없이 흔들리다가 꺼져 버리자, 이제 블라인드를 통해 비쳐 드는 어두운 초저녁의 달빛만이 실내를 비춰주는 유일한 조명으로 남았다.
콰작!
엎어져 있는 탁자를 단두대로 삼아 마세티를 휘두르자, 일어나려던 녀석의 몸과 머리가 분리되어 탁자 아래로 떨어진다.
민구는 곧바로 네 번째 괴물에게 달려들어 무릎을 걷어찼다.
우득!
무릎이 반대로 꺾인 괴물이 맥없이 쓰러졌다. 퉤, 민구는 물고 있던 담배를 놈의 뒤통수에 뱉어버렸다. 머리카락에 맞은 담뱃불이 다시 튀어 오르기도 전에 민구가 휘두른 칼날이 덮쳐든다.
빠가각!
뒤통수가 산산이 쪼개지는 소리. 민구는 광기 가득한 웃음을 지으면서 놈의 뒤통수를 재차, 삼차 내리갈겼다. 사방으로 뇌수가 흩뿌려졌다.
그롸아악!
등 뒤에서 울리는 포효를 느낀 민구는 빠르게 허리를 숙였다.
콰당탕!
그를 덮치기 위해 몸을 날렸던 괴물은 소파에 머리를 박고 나동그라졌다.
비스듬히 들렸던 소파가 거꾸로 뒤집히며 놈을 깔아뭉갠다. 민구는 녀석을 내버려 두고 복도로 뛰어나가 마지막 놈을 상대했다.
빠직!
비스듬하게 휘두른 마세티가 괴물의 광대뼈를 부러뜨리고 달려들던 녀석을 주춤거리게 만들었다. 중심을 잃은 괴물이 다시 몸을 추스르려 할 때, 민구의 칼날이 놈의 턱을 날린다.
그리고 콰작! 녀석의 목에 다시 한 번 정반대로 방향을 바꾼 민구의 공격이 꽂혔다.
그롸아아악!
넓적한 칼날을 목에 박은 채 달려드는 괴물의 모습은 실로 기괴했다.
크크크, 미친놈들…….
민구는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 이미 몇 차례나 보아왔지만, 도무지 익숙해질 것 같지 않은 꼴이다.
민구는 왼손을 들어 마세티의 칼등을 잡고 밀며 버텼다. 양쪽에서 미는 힘이 팽팽하게 맞서자, 칼날이 목 안으로 점점 더 박혀 들어간다.
까드득!
목뼈가 으스러지는 소리가 나는 바로 그 순간에도 괴물은 어떻게든 칼날 반대편에 있는 민구의 왼손을 깨물어보려고 이빨을 딱딱거린다.
푸걱!
뼈를 지난 칼날은 꽤나 빠르게 괴물의 목을 잘라내 버렸고, 마지막 순간 민구는 얼른 몸에서 힘을 뺐다. 앞으로 고꾸라지는 좀비의 몸에 깔리고 싶은 생각은 없다.
“후우우~”
마세티의 칼날에 묻은, 찐득하고 검은 피를 털어낸 민구는 다시 방으로 돌아왔다. 소파에 깔렸던 놈은 아직도 빠져나오지 못한 채 버둥거리고 있었다.
“자, 자, 치워준다. 일어나, 이 새끼야.”
민구는 소파의 옆을 걷어차서 밀어버리고 괴물이 몸을 일으킬 때까지 잠시 기다렸다.
그롸악!
놈은 자유로워지자마자 민구를 향해 미친 듯이 달려든다.
민구는 뒤로 두어 걸음 물러나면서 놈의 얼굴을 가만히 쳐다봤다. 깨진 안경, 구겨진 넥타이, 목걸이처럼 걸고 있는 사원증. 평소였다면 감히 조폭 냄새가 물씬 나는 민구를 향해 눈도 똑바로 뜨지 못할 샌님이었을 것이다.
“세상이 바뀌었다, 이거냐?”
민구는 갑자기 이를 악물고 샌님을 향해 마세티를 휘둘렀다.
콰작!
살이 터지고 뼈가 부서지는 소리. 하지만 급소를 건드리지는 않았다.
콰작! 빠득! 와드득! 콱!
민구가 스텝을 밟아 몸을 돌리고 팔을 휘두를 때마다 괴물의 신체 이곳저곳은 사정없이 잘려 나갔다.
“하아, 젠장. 내가 지금 이게 무슨 짓이지? 왜 엉뚱한 녀석한테…….”
두 팔과 다리 하나를 잃고 나서도 여전히 적의를 드러내며 포효하는 괴물을 보면서 민구가 중얼거렸다. 놈의 얼굴은 워낙 엉망으로 훼손당해 있어서 그렇게 큰 소리를 낼 수 있다는 게 신기할 지경이었다.
더 이상 놈을 괴롭히는 건 무의미한 일이다. 아니, 아무리 애를 써봐도 놈은 괴롭지도, 고통스럽지도 않다. 그래봐야 힘이 들고 아픈 건 민구 자신의 육체일 뿐.
콰작!
민구는 일격에 샌님 녀석의 뒤통수를 부숴 버렸다. 이런 짓을 해봐도 공허함이 달래지지 않는다.
달칵, 민구는 병원에서부터 가져온 플래시를 켰다. 시체들이 엉망으로 널려 있는 사무실의 꼴을 보니 후회가 밀려들었다.
“복도에서 처리해 버릴 걸 그랬나…….”
민구는 담배를 꺼내 물고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이런 젠장, 라이터를 안 챙겼잖아.”
탁자 위에 라이터를 놓아둔 채 싸운 모양이다. 민구는 혀를 차면서 플래시로 바닥을 훑었다.
라이터는 거꾸로 엎어진 소파 옆에 떨어져 있었다. 라이터를 집을 때, 민구의 눈에 작은 포스트잇 조각이 들어왔다. 아까 방을 뒤져 볼 때는 분명히 없던 물건이다.
“소파 틈바구니에 박혀 있었던 건가?”
불을 붙인 민구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종이를 집어 들었다. 아주 짧은 한 문장이 적힌 메모였다.
- 잠실 쉴터에서 기다립니다, 형님.
쉴터? 잠실에 그런 데가 있었나?
민구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쓴 사람의 이름도 적혀 있지 않고 필적 따위 알 턱이 없지만, 꼬라지를 보니 상황이 단박에 이해됐다. 쪽지를 구겨 바닥에 던져 버리고서 민구는 큰 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아나~ 하하하! 기동이, 이 같잖은 새끼. 크크크크, 아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