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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 시가전 (6) (98/449)


98. 시가전 (6)
2021.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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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긋하게 샤워를 마치고 나온 민구는 벽장 안에서 새 옷을 꺼내 입고 구두도 갈아 신었다. 그러고는 소파 위에 앉아 몇 가지 간단한 음식을 먹고, 물을 마시고 양주로 입가심을 했다.

비록 장기 보존식이기는 해도 모두 고급 재료들이어서, 언제나 고급을 지향하는 육만배다운 음식들이다.

짐승처럼 몸을 던져 이권을 취하고 나면, 그는 거기에서 발생하는 부를 고급 소비재로 바꾸어 소유한 후, 그 일부를 부하들에게 나누어 주며 생색을 냈다.

이 빌딩의 마감재나 지금 민구가 손에 쥐고 있는 최고급 양주 따위들이 그렇게 제공되었다.

- 네 자신이 너를 푸대접하는데 누가 너를 제대로 대우해 주겠나?

언젠가 왜 꼭 마음에 들지도 않는 비싼 시계와 양복을 억지로 사야만 하느냐고 민구가 물었을 때, 육만배는 그렇게 대답했었다.

그럴듯하게 들리는 말이어서 이후부터 민구는 굳이 따지지 않고 육만배가 지시하는 브랜드로 자신의 옷장들을 채워 나갔고, 어느 순간이 지난 시점부터는 그 역시 그런 것들에 익숙해져 버렸다.

훈제 고기와 크래커, 말린 과일 등으로 어느 정도 허기를 채운 민구는 창가로 가서 내려져 있던 블라인드를 걷어냈다.

환한 여름의 햇살이 비쳐 들자 순식간에 방 안의 온도가 약간은 올라가는 것 같다. 아래쪽 거리에서는 좀비 몇 마리가 바퀴벌레처럼 꼬물거리며 돌아다니고 있다.

커다란 무리에서 떨어져 나와 따로 배회하는 놈들의 모습이 꼭 자신과 닮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민구는 잠시 킥킥거리다가 몸을 돌렸다. 그는 다시 펜트하우스 전체를 한 바퀴 돌아보기로 했다.

달칵.

문을 열고 복도로 나서자 익숙한 공간이 주는 환청이 들려오는 것 같다.

‘형님―!’ 하고 일제히 고개를 숙이는 부하들의 인사, 애교를 피우는 칠성이 녀석의 목소리, 최성호의 짜증 나는 빈정거림, 육만배의 조용하고 낮은 명령이 전부 이 장소를 채웠었다.

하지만 지금 25층은 텅 비어 있고, 실제로 고막을 울리는 것은 자신이 가볍게 돌리는 마세티가 공기를 가르는 소리뿐이다.

부웅.

차례로 방문들을 열고 안쪽을 살펴보는 동안 민구는 멈추지 않고 계속 마세티를 놀려 댔다. 앞으로 이놈과 아주 많은 일을 해야 할 테니 충분히 길을 들일 필요가 있다.

***

매섭게 쏟아지던 비는 구름과 함께 지나가 버렸고, 아스팔트의 물기도 걷히는 중이었다.

“무리하지 마. 알았지? 자전거 하나만 믿고 너무 멀리 가면 안 돼. 자동차 막혀 있는 쪽으로는 아예 가지 말고.”

유빈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충고하자, 삼식이는 지금껏 수백 명의 여자들을 홀린 그 미소를 지으면서 머리칼을 넘겼다.

“네, 엄마!”

“농담 아냐, 인마.”

“야, 잔소리 그만해. 내가 같이 가니까 괜찮다고.”

신입이 나불거리며 자전거 핸들 위에 달린 종을 때르릉, 울린다. 녀석은 두 개밖에 없는 자전거가 어지간히 차지하고 싶었는지 평소답지 않게 삼식이를 따라 정찰을 가겠다고 나섰다.

보안관이 못마땅한 얼굴로 신입을 노려본다. ‘네가 같이 가서 더 불안해, 이 새끼야’라는 말을 꾹 참고 있는 표정이다. 어쨌든 정찰을 다녀오는 건 중요하긴 했다.

“30분만 기다려 줄 거니까 너무 늑장 부리지 마, 걱정하게 만들지 말라고. 알았지!”

보안관의 당부에 삼식이와 신입은 동시에 팔목에 찬 시계로 눈을 돌렸다. 조금 전, 나이키 대리점에서 하나씩 집어 온 스포츠 시계다.

“알았어. 지금 아예 타이머로 정해둘게.”

삼식이가 시계를 조몰락거리고 나서 기운차게 페달을 밟았고, 신입이 그 뒤를 따랐다. 좌우로 흔들리며 출발한 자전거는 이내 스피드를 내면서 빠르게 멀어져 갔다.

“확실히 빠르기는 하구나, 뛰는 것보다.”

보안관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면서 중얼거렸다.

“제니야, 이따가 쟤들 돌아오면 나랑 자전거 타고 산책로 한 바퀴 돌래?”

웃으며 고개를 돌렸지만, 제니가 보이지 않는다. 조금 놀란 표정의 보안관이 유빈에게 묻는다.

“제니는…… 어디 갔어?”

“제니? 몰라…….”

유빈은 고개를 저었다. 조금 전까지 보안관과 함께 삼식이에게 신신당부를 하던 중이었으니 알 수 없기는 그도 마찬가지이다.

아니, 잠깐…….

유빈의 머릿속에 조금 전의 일이 떠올랐다.

“아! 어쩌면 소, 속옷 가게에…….”

“뭐? 혼자?”

유빈의 시선을 따라 골목 입구를 바라보던 보안관이 해머를 내던지고 곧바로 달리기 시작했다.

유빈도 그 뒤를 따라 뛰었다. 그러나 숨 쉬는 것도 뒤로 미루어둔 채 힘차게 허벅지를 끌어 올리는 보안관이 훨씬 빠르다.

“제니야!”

유빈은 목소리를 높여 제니의 이름을 불렀다. 제발 그녀가 평소처럼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지으며 내다봐 주기를 간절하게 빌었다. 하지만 대답이 없다.

“제니야!”

유빈이 한 번 더 외치는 동안 보안관은 40여 미터를 더 내달려 속옷 가게에 거의 도착해 있었다.

꺄아악―! 가장 듣고 싶지 않았던 비명 소리가 들려오자 유빈은 가슴이 찢어지는 것만 같았다.

콰장창!

문으로 돌아 들어가는 시간을 줄이기 위해 보안관은 깨져 있던 유리를 뚫고 몸을 날렸다.

찌이익―

날카로운 유리의 단면에 찢긴 팔에서 피가 흐른다. 하지만 보안관은 그 상처들을 인식하지 못했다.

그의 오감 중 유일하게 작동하고 있는 시각에, 가게 밖을 향해 필사적으로 기는 제니의 모습이 들어왔다. 그녀의 발목을 낚아채기 위해 팔을 뻗는 좀비도 보인다.

“으아아아!”

보안관은 야수처럼 포효하면서 좀비를 향해 몸을 날렸다. 놈의 팔과 어깨를 꽉 잡아 벽을 향해 집어 던졌다.

와장창!

벽에 꽂힌 녀석은 비틀거리면서도 다시 몸을 뒤집어 달려들 채비를 한다.

그롸아아악―

뒤쪽에서 또 다른 좀비가 제니를 향해 덤빈다. 보안관은 곁에 세워져 있던 토르소 마네킹을 집어 들고 놈의 머리통을 후려갈겼다.

우드득!

마네킹과 좀비의 목뼈가 함께 부서져 나간다. 보안관은 첫 번째 놈을 향해 몸을 돌리고 마네킹을 사정없이 휘둘렀다.

“이! 씨발! 놈이! 감히! 어디서! 어디서!”

한마디를 내뱉을 때마다 한 방씩을 후려갈겼다. 내동댕이쳐지면서도 곧바로 몸을 일으키던 좀비지만, 다섯 방을 맞은 이후로는 더 이상 움직이지 못했다.

엉망으로 박살 나 철심이 드러난 마네킹의 날카로운 조각이 녀석의 부러진 목에 박혀 버렸다. 보안관은 마네킹을 놓고 녀석의 가슴팍을 세게 걷어찼다.

콰드득.

갈비뼈가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이미 죽은 좀비는 벽에 내동댕이쳐졌다.

그롸아악!

뒤늦게 유빈이 도착했다. 두 마리가 더 남았고, 무기는 없다. 그리고 보안관은 화가 머리끝까지 나 있었다. 보안관은 왼발을 내디디며 풀 파워의 스트레이트를 앞선 놈의 턱에 날렸다.

투둑.

좀비의 턱이 돌아가며 탈골되는 소리가 울린다. 아래턱이 빠져 버린 좀비가 사선으로 날아가 나동그라지자, 보안관은 마지막 놈에게 달려들어 머리칼을 움켜쥐고 벽에 얼굴을 짓찧었다.

콰득! 빠가각!

벽에 튀어나와 있던 철제 팬티 걸이가 놈의 안구를 뚫고 들어갔다.

우두둑! 우두두둑!

보안관은 놈의 뒤통수를 꽉 밀어 돌리면서 뇌가 전부 뭉개질 때까지 깊이 박아 넣었다. 이제 움직이는 놈은 하나뿐이다.

귀신같은 얼굴의 보안관은 아래턱이 날아간 좀비를 향해 뛰어올라 드롭킥을 날렸다.

뚜둑!

목뼈가 뒤로 꺾인 녀석이 카운터에 걸려 넘어가면서 먼지를 일으킨다.

몸을 일으킨 보안관은 손가락 사이에 끼어 있는 좀비의 머리카락을 털어버리고 곁에 걸려 있던 레이스 팬티를 집어 더럽혀진 손바닥을 닦았다.

“후우우…….”

한숨을 몰아쉰 보안관은 제니를 향해 몸을 돌렸다.

“괜찮아?”

괜찮을 리가 없다. 부들거리고만 있던 제니는 울음을 터뜨리며 얼굴을 가렸고, 그 눈물 때문에 화를 더 참지 못한 보안관은 소리를 버럭 질렀다.

“왜? 왜? 왜 혼자 움직여? 왜!”

“으! 흐으아~ 미안해요, 오빠……. 미안해요…….”

“말만 하면 됐는데! 왜?”

“미안……해요.”

두 손에 얼굴을 묻은 제니는 울먹이며 미안하다는 말만 반복했다. 보안관은 멍해진 눈으로 가게를 바라봤다. 창고로 향하는 쪽문이 열려 있고, 그 앞에 한 무더기의 속옷들이 떨어져 있다.

저곳에서 나왔던 건가…….

하긴, 하필이면 여기에만 좀비가 숨어 있을 줄은 아무도 몰랐다. 무슨 말인가를 더 하려던 보안관은 제니의 어깨를 꽉 끌어안았다. 훌쩍일 때마다 가녀린 그녀의 어깨가 떨렸다.

“……울지 마. 이제 괜찮아. 이제…….”

“말하기 싫었어요, 창피해서……. 흐으으…… 미안해요. 잘못했어요. 피…… 어떡해……. 흐윽.”

보안관의 굵은 팔뚝에서 흘러내린 뜨끈한 피에 놀라서 제니의 울음소리는 더 커졌다.

“울지 마. 이런 건 정말 아무것도 아니야. 괜찮아.”

엉망이 된 두 사람의 모습을 보면서 유빈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죄책감을 느꼈다.

“으으으~ 아, 따거! 하지 마! 그만! 제니야, 왜 자꾸 벌려? 가뜩이나 따가운데. 아흐으!”

아무리 엄살을 부리고 사정을 해봐도 제니는 눈살을 찌푸린 채 보안관의 팔뚝에 난 긴 상처를 단호하게 벌리고 알코올을 부어 댄다.

유빈이 약국에 가서 가져온 상처 치료용 약들이 그녀의 옆에 놓여 있다. 보안관의 팔에는 여러 개의 베인 자국이 남았고, 마네킹이 깨져라 꽉 쥐었던 손바닥은 피멍이 들고 잔뜩 찢겼다.

“아후! 오빠, 가만히 좀 있어요. 유리 가루가 상처에 들어갔을까 봐 그러는 거예요.”

“좀 들어가면 어때서 그래?”

“혈관을 타고 흐를까 봐 그렇죠. 어으, 이거 어떡해?”

유리 가루가 혈관을 타고 흐른다는 말에 보안관의 표정이 굳는다.

“정말? 확실한 거야? 유, 유리 가루가 그렇게 돼?”

“저도 몰라요. 그냥…… 어디서 그런 말을 들은 것 같아서…….”

제니가 다시 상처를 벌리고 알코올을 붓는다. 으윽! 찢어진 상처에 불이 붙는 것 같았지만, 보안관은 이를 악물고 참았다.

사람 크기의 좀비는 안 무섭지만, 핏줄을 타고 흘러 다니며 여기저기를 찢는 유리 가루는 무섭다. 주먹질을 해서 눕힐 수 없는 상대니까.

“아야야야!”

“따가워요? 아, 어떡해……. 미안해요, 오빠.”

제니 역시 울상을 지으면서 보안관의 상처에 입술을 가까이 대고 후, 후, 불어준다. 그러고 있는 동안 졸지에 죄인이 되어버린 유빈은 뒤치다꺼리를 했다.

제니가 골랐다가 바닥에 떨어뜨린 속옷들을 집어 먼지를 털고 쇼핑백에 담아 제니의 배낭 속에 넣어준 뒤, 유빈이 힘없이 입을 열었다.

“그놈들, 속옷 가게 2층에 숨어 있었던 네 명이야.”

“제비 아저씨한테 라면 십만 원에 팔던 새끼들 말이야?”

“응. 얼굴 알아보겠더라.”

“흥, 그랬나? 여러 번 속 썩이네, 새끼들. 하필이면 왜 거기에 기어 들어가 있었지?”

“창고 안에 식칼 같은 무기들도 떨어져 있더라고. 아마 먹을 걸 구하러 나왔다가 물려서 그리로 도망갔던 거겠지. 그리고…….”

유빈은 말하고 싶지 않은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미안해. 사실 나더러 가자고 했었는데, 내가 싫다고 했어. 다 내 탓이야.”

“그래? 정말?”

보안관이 깜짝 놀라며 제니를 돌아본다. 제니는 잠시 유빈을 쳐다보고 나서 고개를 끄덕였다.

“응…… 네.”

“아휴~ 제니야.”

보안관이 답답하다는 듯 말한다.

“부탁할 상대를 잘못 골랐어. 쟤는 너랑 똑같아. 완전 약골이라고! 나한테 이야기를 했어야지. 이거 봐, 이 알통! 아야야!”

근육에 힘을 주어 부풀리자 상처에서 또 피가 찌익, 솟는다. 보안관은 얼른 팔을 움츠리며 엄살을 떨었다.

“그냥…… 미안해요, 오빠. 유빈이 오빠한테도 미안하구요.”

제니는 쓸쓸하게 말하면서 보안관의 상처를 닦고 습윤 반창고를 붙여주었다. 보안관의 팔은 온통 희고 두툼한 의료용 반창고로 뒤덮여 버렸다.

“어후~ 얼굴에도 상처가 났네요. 이거, 흉터 남으면 어떡하지?”

“괜찮아. 나는 어차피 너한테만 잘 보이면 되는데.”

보안관이 아무렇지도 않게 민망한 소리를 지껄이자, 제니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더니 곧바로 다시 우울해져서 고개를 숙인다. 보안관은 제니의 어깨를 토닥여주고 말했다.

“그렇게 기죽어 있지 마. 나한테는 이 일이 평생 자랑스러운 기억으로 남을 테니까. 너를 구할 수 있어서 영광인 거야. 그러니까 나한테 미안해할 필요도 없는 거고. 그냥…… 조심하겠다고 약속만 해줘. 네가 너무 중요해서, 휙 사라질까 봐 그게 제일 두려워. 알았지?”

“……네.”

그렇게 대답을 하면서도 제니는 여전히 고개를 들지 못했다. 제니의 어깨에서 손을 떼지 않은 보안관이 유빈을 향해 고개를 돌리더니 휙― 휙― 머리를 챈다.

지금 내가 엄청 멋진 말을 해서 분위기 좋아지고 있으니까 자리 좀 피해줘! 뽀뽀 한 번 해보자, 쫌!

보안관의 찡그린 한쪽 눈이 전하는 의미를 알아챈 유빈은 조용히 뒷걸음질을 쳐줬다. 유빈이 멀어진 것을 확인한 보안관이 목소리를 큼큼, 가다듬고 제니를 은근하게 불렀다.

“제, 제, 제니야.”

제니가 고개를 든다. 울었던 탓에 눈과 입술이 조금 부어 있는데, 그게 또 얼마나 사람의 애를 태우는 매력이 있는지! 저기에 내 입술을 포개도 되지 않을까? 분위기도 어느 정도 무르익었는데?

‘아이, 오빠. 유빈이 오빠 보잖아요’, ‘아니야, 제니야. 유빈이 지금 없어. 아마 다른 볼일이 있었나 봐’, ‘어머, 몰라. 그러면 한번 해 보든가……’.

망상에 빠진 보안관은 입술을 뻐끔거리며 거친 숨을 내뿜었다. 제니의 눈이 보안관을 본다. 그녀 역시 보안관이 하고 싶은 게 뭔지 알아챘는지 가볍게 얼굴을 붉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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