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 시가전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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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 시가전 (5)
2021.12.06.
그렇게 당부에 당부를 거듭했던 것이 이틀 전의 일이다.
그의 생각대로 수용소에서 접수를 받는 군인들은 별 의심 없이 그들을 별도의 네 그룹으로 간주했고, 개별 격리 시설에 24시간 동안 가둘 때에도 그룹끼리 근처에 있도록 배려까지 해주었다.
중간에 육만배 같은 노인이나 여자가 섞여 있다는 점 때문에 덩치 큰 젊은 남자들의 부정적인 이미지가 어느 정도 희석되었을 것이다.
이후에도 그들은 서로 멀리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고 가능한 한 한곳에 모이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육만배는 무역 회사 사장의 연기를 잘 수행하기 위해서 조용히 움직였다. 그가 부하들을 만나는 것은 담배를 피우러 외야석 쪽으로 걸어가거나, 화장실을 갈 때뿐이다.
“큼, 큼.”
육만배가 기동이의 자리 앞을 지나며 헛기침을 하자, 일부러 먼 곳을 보고 있던 기동이가 잠시 후 허리를 붙잡고 일어서서 기지개를 켜는 척하다가 거리를 두고 그를 따라 걷는다.
두 사람이 나란히 마주 선 것은 외야석의 흡연 구역에 이르러서다.
“담뱃불 좀 빌립시다.”
육만배가 기동이에게 웃는 낯으로 말을 건넸다.
“아, 예. 회…… 예.”
기동이는 나름 연기를 해보려 하지만, 속옷처럼 몸에 달라붙어버린 버릇을 갑자기 떼어내기란 영 어색했다.
육만배는 기동이가 불을 붙여준 담배를 천천히 빨고 연기를 내뿜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둘이 나누는 말소리가 들릴 만큼 가까운 위치에 있던 사람들이 꽁초까지 아껴 피우고 나서 자리를 뜨자, 그제야 육만배는 평소의 낮은 어조로 돌아가 명령했다.
“너도 한 대 피워라. 그래야 남들이 이상하게 안 보지. 매번 담배도 안 피우면서 여기 멀뚱거리고 서서 뭐할래?”
“하지만 제가 어떻게 감히…….”
“귀찮게 하지 말고 빨리 불붙여.”
“네, 넵.”
기동이가 고개를 돌린 채 억지로 담배를 물자, 육만배가 말했다.
“저기 좀 봐라. 이런 와중에도 살아보겠다고 버둥거리는 인간들 말이다. 기동이, 너는 저 바글대는 사람들 속에서 뭐가 보이나?”
육만배가 말하는 것은 이 수용소의 시장에 모여서 흥정을 하는 사람들이다. 여전히 건빵과 콘돔, 담배와 옷가지, 보석 따위를 서로 바꾸기 위해서 바쁘게 움직이고들 있다.
“잘 모르겠습니다.”
“저런 게 바로 기회다. 건빵 부스러기에 홀린 인간들 눈에야 안 보이겠지만, 기회라는 거는 혼란 속에서 생기는 거거든. 혼란이 크면 기회도 커지지. 나는 말이다, 내가 나이가 한 스무 살만 많았으면 하고 바라왔다. 왜 그런지 아나?”
“저 같은 둔한 놈이 회장님 생각하시는 걸 어떻게…….”
“그랬으면 해방되고 육이오 겪는 난리 통 속에서 내가 크게 한몫 잡을 수 있었을 테니 그렇다. 지금 태양 그룹 못지않게 높이 올라갔을지도 모르지. 그때는 사방이 다 기회였으니까……. 때를 잘못 만나서 이보다 더 크지를 못하는 게 평생 한이었는데, 이제 그 기회가 온 건가 하는 생각이 든다. 세상이 뒤집어졌으니 말이야.”
“아, 예…….”
자신의 말을 녀석이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아 육만배는 화제를 바꿨다.
“계집애들은?”
물론 두 명의 여자 연예인을 일컫는 말이다. 그 둘은 이 수용소를 장악하고 손아귀에 넣고 싶은 육만배의 계획에서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는 수단들이다.
지휘부의 장교들을 후리고 다니면서 조금씩 특혜를 받고, 그것을 바탕으로 점차 더 큰 무언가를 쟁취할 수 있으리라고 보았다.
“예, 열심히 웃고 다니기는 하는데…….”
“그런데 군인 애들이 왜 그 근처에 몰려 있지를 않아?”
그 부분이 조금 이상했다. 애초부터 굶주려 있던 군인 놈들이 이런 삭막한 시절에 연예인을 실제로 보면 좋아서 간이고 쓸개고 다 빼 줄 줄 알았는데 말이다.
연예인 계집애들이 윙크를 하고 웃어줄 때에는 몇몇 젊은 군인들이 잠시 움찔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예상했던 것보다 반향은 훨씬 약했다. 그것은 육만배의 예상과 어긋나는 일이었다.
“그게…… 여기 놈들이 애초부터 다른 계집애한테 홀딱 빠져 있어서, 생각보다 관심을 덜 받고 있습니다. 물론 시간문제인 건 확실합니다.”
“허허, 처음부터 싹수가 노란 일은 암만 이쪽에서 지랄을 해도 안 되는 거다. 그년들 뜯어고쳐 주느라 들어간 돈이 얼만데, 그 정도도 못해? 그래, 그 군인들이 홀딱 빠진 다른 계집애라는 게 누구야?”
“테라라고…… 톱클래스 연예인이었는데, 그게 하필이면 여기 와 있었습니다.”
육만배는 TV를 볼 정도로 한가한 사람은 아니지만, 그래도 들어본 적도 있는 이름 같기는 했다.
어쨌든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육만배는 여자 따위에게는 크게 애정을 두지 않는다. 대상이 누구든 간에 중요한 것은 육만배 자신에게 이득이 되는 일을 해줄 수 있는가 하는 문제뿐이다.
“그래, 그 테란지 하는 게 실제로도 예쁘던가? 우리 애들이 몸부림을 치고 지랄을 해봐도 영 안 될 정도야?”
“그게 좀 스타일이 달라서요……. 얘는 뭐랄까…… 육덕진 건 아닌데, 사내놈들이 자꾸 돌봐주고 싶어 하는, 그런 타입입니다, 회장님. 아! 저기 마침 지나갑니다. 저겁니다.”
육만배는 기동이가 가리킨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외야석 근처에서 여자 두 명이 나란히 걸어가며 마주치는 군인들마다 일일이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 있다.
“저기 두 년 중에 짧은 원피스를 입고 있는 년이…….”
육만배는 손을 들어 설명하려는 기동이의 입을 막았다. 굳이 구차한 이야기를 들을 필요도 없었다. 딱 보자마자 알 수 있는 주인공의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자신이 거느리고 왔던 연예인 계집애들이 상대가 안 된다는 것쯤은 먼발치에서도 확연히 드러난다.
애초에 태생 자체가 달랐다. 가늘고 흰 팔다리가 까맣게 윤기가 흐르는 머리와 어우러져 신비롭기까지 하다. 물론 얼굴은 말할 것도 없다.
“으음…….”
탄식과 감탄이 섞인 육만배의 신음을 듣고 기동이가 재빨리 주워섬겼다.
“며칠만 주시면 제가 저년을 반드시 저희 식구로 만들어서 회장님께 인사드릴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겁을 주든가, 아니면 돈이라도 듬뿍 쥐여 준다고 약속을 해서…….”
“기동이, 너 돌았어?”
육만배의 질책에 기동이는 말을 끊고 머뭇댔다. 육만배는 기동이의 눈을 잠시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이놈은 멍청한 머리통에 비해 야망이 너무 크다. 싸움 실력은 봐줄 만하지만, 그게 전부다.
“저렇게 군인 놈들이 전부 하나같이 저 계집애만 쳐다보고 있는데, 그걸 빤히 보고 나서도 뭘 어떻게 하겠다고? 겁을 줘? 네가 우리 조직을 여기서 다 쫓아낼 생각이냐?”
“아니, 그런 말씀이 아니라…….”
“정신 나간 소리 지껄이지 말고, 저 계집애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어. 혹여 껍죽거린다는 소문만 들려와도 내가 가만히 안 있을 거야. 알아먹었지?”
“네, 회장님! 명심하겠습니다.”
기동이가 허리를 깊이 숙이려다가 멈칫한다. 육만배는 혀를 끌끌, 찼다.
“저런 물건을 손에 넣고 싶으면 가만히 기회가 오기를 기다려야지, 네가 먼저 지랄병이 나면 아무것도 안 돼. 그건 그렇고, 강 실장이 영 늦는구만.”
“혹시 난리 통에 무슨 일이라도 당하신 건…….”
“하하하, 민구가? 기동이, 너는 강 실장이 그렇게 만만하게 보였나? 하하하.”
확신에 찬 표정으로 기동이의 말을 비웃은 육만배가 다시 정색을 하며 물었다.
“여기로 온다는 편지, 확실히 써뒀지?”
“물론입니다, 회장님. 여부가 있겠습니까? 확실히 써서 강 실장님 방에 뒀습니다.”
기동이는 황송하다는 듯 대답했다. 편지를 써서 그 방 어딘가에 뒀다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
그롸아악―!
계단 아래로 몸을 날려 덮치려는 괴물을 피하면서 민구는 팔을 휘둘러 놈의 오금을 끊었다. 힘줄이 끊긴 괴물은 제대로 발을 내딛지 못하고 관절이 꺾인 채 계단 아래로 굴러떨어진다.
우드득!
요란한 소리와 함께 녀석의 목뼈가 부러졌다. 민구는 무표정한 얼굴로 평지에서 달려드는 두 번째 놈을 상대했다.
목에 칼을 가로로 박아 넣은 후, 잠시 손잡이를 놓았다가 놈의 뒤로 돌아가서 다시 반대 방향으로 손잡이를 잡았다. 그러고는 미처 방향을 바꾸지 못한 놈의 등짝을 있는 힘껏 걷어찼다.
몸뚱이가 붕 떠오르면서 중력에 의해 녀석의 목에 박힌 칼이 뼈와 근육을 자른다. 놈의 머리와 몸통이 따로따로 계단 아래로 데굴데굴 떨어져 내렸다.
민구는 왼손에 든 플래시를 비춰 더 이상 움직이지 못하는 괴물들의 모습을 잠시 지켜보다가 다음 층을 향해 오르기 시작했다. 빼앗은 나이프는 꽤나 요긴하게 버텨주고 있다. 계단 벽에 적힌 2/3이라는 숫자가 눈에 들어온다.
“젠장, 이렇게나 올라왔는데 아직도 또 남은 건가?”
민구는 뒤를 돌아보며 입을 비틀어 웃었다. 펜트하우스라는 게 이렇게나 불편한 것인지 몰랐다.
25층이나 되는 건물을 오로지 걸어서만 올라야 하는 것도 귀찮은데, 거기에 간간이 괴물들이 덮쳐들면서 힘을 뺀다. 이틀 동안 제대로 챙겨 먹지 못하고 먼 길을 돌아와야 했던 그에게는 어지간히 지치는 일이었다.
처음 오토바이를 타고 달리기 시작했을 때에는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았지만, 막상 거리로 나오자 피해야 할 것들이 너무 많았다.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좀비들의 무리가 거리를 누비고 다니는 꼴을 보면 뒤로 달아나야 했고, 대로를 막고 벽을 쌓아둔 군인들 때문에 가까운 거리를 빙글빙글 돌아왔다.
게다가 그 검은 헬기가 하늘에 떠 있을 때면 건물 틈에 들어가 가만히 숨어 지내야 했다. 덕분에 이 멀지 않은 만배파 건물까지 오는 데도 꼬박 이틀이 걸렸다.
“근데 어째, 아무도 없는 느낌이군.”
24층에 이르러 민구는 너무 조용하다는 걸 깨달았다. 괴물들이 활개를 치고 다니니까 로비를 비워놓을 수는 있지만, 펜트하우스 바로 아래층에까지도 경비 병력이 배치되어 있지 않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로비와 2, 3층에 엉망으로 널려 있던 시체들을 보면 전쟁이 없던 것 같지는 않다.
끼이익―!
25층의 방화문을 열고 펜트하우스로 진입한 민구는 푹신한 카펫이 깔려 있는 복도를 성큼성큼 걸어가며 보이는 문마다 열어젖혔다. 식당이고, 주방이고, 게스트 룸이고 간에 모두 텅텅 비어 있었다.
코너를 돌아 자신의 방까지 가보았지만, 역시 사람이라고는 보이지 않는다.
몇몇 방들이 정신없이 어지럽혀져 있는 것을 보면 분명히 누군가 최근까지 여기를 썼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문제는 그게 누구였고, 언제까지 머물렀냐 하는 사실이다.
“야! 아무도 없어?”
파티 룸 문을 열면서 민구는 언성을 높여봤다. 식량들이 박스째 쌓여 있는 파티 룸 역시 고요할 뿐이다. 민구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은 뒤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눈에 익은 널찍한 책상과 소파들이 그를 반긴다. 이 방은 사람의 손길이 닿은 흔적이 별로 눈에 띄지 않을 만큼 말끔하게 청소가 되어 있다.
“뭐하는 놈들이야? 어디로 가면 간다는 표시라도 할 것이지.”
민구는 먼지투성이 웃옷을 벗어 가방과 함께 바닥에 팽개친 후, 장식장에서 양주를 꺼내 입을 헹궜다. 지난 며칠 동안 싸구려 맥주만 마셨던 터라 그 향기가 더 각별하다.
민구는 안락의자에 기대앉은 뒤, 책상 위로 다리를 올렸다. 책상 위의 담배 케이스에서 담배를 꺼내 문 뒤, 양주를 마시며 생각에 잠겼다.
이제 이 25층에서 열어보지 않은 문은 하나뿐이다.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끈 그는 복도를 가로질러 회장실로 걸어갔다.
똑똑.
굳게 닫혀 있는 호두나무 문을 두드린 뒤, 민구는 잠시 기다렸다가 손잡이를 돌렸다. 역시 사람이라곤 없다. 하지만 텅 비어 있지는 않았다.
“후후, 나 혼자만은 아니었군. 큭.”
육만배가 사용하던 방의 벽에는 사지가 끊긴 괴물 한 마리가 못에 박힌 채 고개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눈도, 코도, 귀도, 심지어는 아래턱과 혀, 목의 일부분도 없는 놈이지만, 여전히 살아 있고 민구의 낌새를 알아챘는지 그의 움직임을 따라 고개를 돌린다.
모두 칼로 도려내진 것으로, 어지간히 끔찍한 몰골이었다. 이런 짓을 태연하게 할 수 있는 인간은 단 한 사람밖에 없다.
“참~ 노인네, 장난질은 여전하구만.”
잠시 더 방을 둘러보던 민구는 문을 닫고 회장실을 나왔다. 육만배는 괴물을 통해 그가 그곳에 머물렀다는 메시지를 민구에게 분명하게 전달해 준 것이다.
“흐음, 저 짓을 할 시간은 있었는데 쪽지 한 장 남길 시간은 없었다는 거야? 후후후.”
생각할수록 어처구니가 없어서 민구는 쓰게 웃었다. 주방에서 몇 가지 간단한 먹을거리를 챙긴 그는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다.
음식들을 책상 위에 던져 둔 민구는 벽장을 열었다. 고급 양복들이 걸린 랙 아래의 서랍을 열자 그가 사서 모아둔 날카로운 쇠붙이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민구가 골라 든 것은 길이가 80센티미터쯤 되는 묵직한 마세티였다.
바로 곁에 있던 쿠크리 마세티보다 날이 곧고 더 길다. 마세티를 든 민구는 서랍을 닫고 방에 붙어 있는 전용 욕실로 들어갔다.
조명이 들어오지 않아 대낮인데도 어둑하기는 하지만, 여전히 물은 나온다.
민구는 옷을 모두 벗고 샤워 부스에 들어가 미지근해진 물을 온몸에 맞았다. 샤워 부스는 열어둔 채였고, 깔개 옆에는 조금 전 집어 온 마세티를 놓아두었다.
“어쨌든 집에 오니까 좋군.”
비누칠을 하면서 민구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배를 채우고 나서 천천히 찾아보면 분명히 어딘가에는 육만배가 남겨둔 메시지가 더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