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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 천국과 지옥 (6) (92/449)


92. 천국과 지옥 (6)
2021.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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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화가는 정말로 텅 비어 있었다. 어제 이미 그 광경을 한 번 보았던 보안관 일행은 덤덤하게 걸어갔지만, 유빈에게는 적잖이 감격스러운 장면이다.

“우와…… 이거, 진짜…….”

뭐라 표현할 말을 찾지 못한 유빈이 감탄사만 내뱉어놓고 멍하니 서 있자, 제니가 뒤로 돌아와 팔을 잡아끌며 잘난 척을 한다.

“그것 봐요. 여기까지 올 가치가 있죠?”

“으, 응.”

유빈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일주일 내내 살아 움직이는 시체들의 것이었던 이 거리가 이제 그들에게 허락된 것이다. 그 이상한 기분은 직접 경험하지 않으면 모른다.

“저 가게가 괜찮을 것 같아요.”

몇 군데의 옷 가게를 지나친 뒤, 제니가 가리킨 것은 등산 의류 브랜드 대리점이었다.

어차피 움직이기 편하라고 만든 옷들일 테고, 배낭도 지금 메고 다니는 것보다는 조금 더 나은 물건이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고 있던 터여서 모두들 찬성했다.

“잠시 대기.”

가게 앞에 일행을 멈춰 세운 보안관이 해머를 가슴 높이로 들어 올린 채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옷들이 가득 걸린 진열대나, 카운터, 탈의실, 그 모든 것들이 잠재적인 위험 요소이다. 보안관이 위를 살피고 걸어가는 동안, 유빈은 바닥에 엎드려 발 아래쪽을 살폈다.

“이제 들어와도 돼. 안전하다.”

두 개의 탈의실을 모두 활짝 열어본 후, 보안관이 뒤를 돌아보며 손짓을 한다.

쇼핑이 시작되는 순간이다. 제니가 가볍게 환호하면서 분위기를 띄운다. 유빈은 망보기를 맡았다. 나머지는 다들 옷을 집어 몸에 대보고 거울에 비추기도 하면서 바쁘게 매장 안을 돌아다녔다.

“오빠, 이거 입어요. 이거 어울린다.”

제니가 옷을 들고 와서 그의 어깨에 대봐 주는 동안, 보안관은 헤벌쭉 입을 벌렸다.

비록 평소의 그라면 절대로 입을 것 같지 않은 알록달록한 컬러의 티셔츠였지만, 그런 게 무슨 상관인가. 제니가 나를 위해 옷을 골라주는데. 보안관은 연신 빙글거리며 그저 좋아했다.

“보안관, 그거 너한테 별로 안 어울려. 이왕이면 검은색을 사. 근데 여기 너무 비싸다. 우리 다른 데 갈까? 티셔츠 하나에 5만 원이 넘어.”

가격 태그를 주물럭거리기만 하고 옷은 하나도 고르지 않은 삼식이가 끼어들며 데이트 분위기를 깬다. 보안관은 발끈해서 삼식이에게 짜증을 냈다.

“더워 죽겠는데 무슨 검은색이야, 이 멍충아! 그리고 돈 받는 사람 없으니까 그냥 아무거나 집어. 비싸네 어쩌네 하는 소리 하지 말고. 그런 놈이 지금까지 음식은 어떻게 막 훔쳐 먹었는데?”

“에이, 그래도 찝찝하단 말이야. 혹시라도 나중에 다 갚으라고 하면 갚을 수 있는 만큼만 쓰고 싶어. 내가 먹은 음료수랑 음식값이라야 얼마나 하겠어?”

“그래, 알았으니까 싫으면 관둬. 넌 내가 입던 거 벗어서 줄게. 공짜로 준다, 우정을 생각해서.”

보안관과 삼식이가 바보 같은 주제로 티격태격하자 제니가 웃으면서 끼어들었다.

“삼식이 오빠, 걱정하지 마요. 만약에 정말로 그런 날이 오면 핑크 펀치의 제니가 다 계산해 드릴게요. 설마 우리 사이에 그 정도도 못 한다는 말은 안 할 거죠?”

“정말? 하…… 여자애들은 자꾸 이렇게 옷을 사 주려고 하더라. 그래도 부담 주긴 싫은데…….”

“하하하, 부담 하나도 안 돼요. 저 엄청 벌었거든요. 그 돈들, 지금은 휴지랑 별로 다를 것 같지도 않지만.”

결국 납득한 삼식이가 옷을 고르기 위해 순순히 물러났다.

보안관은 다시 제니와의 데이트 분위기에 빠져들었다. 티셔츠와 바지 몇 벌을 더 고르고 비가 내릴 때를 대비해서 돌돌 말면 조그만 백 속에 쏙 들어가는 바람막이도 챙겼다.

“이렇게 많이 가져갈 수 있을까?”

“배낭에 담아 가요. 이 정도는 있어야 번갈아가며 입고 빨래도 하죠.”

이미 그렇게 하는 놈이 있었다. 신입은 고가의 옷들만 닥치는 대로 커다란 배낭 속에 쑤셔 넣으며 매장을 바쁘게 돌아다녔다. 제니의 옷을 고르고 있을 때, 뒤에서 삼식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 이거 사 줘.”

보안관과 제니가 돌아보자, 플래시가 켜지며 그늘 속에 있던 두 사람의 눈을 따갑게 비춘다. 하하하, 둘이 반응을 보이자 머리에 헤드 랜턴을 쓰고 있던 삼식이가 신이 나서 웃으며 산신령 흉내를 낸다.

“네 이노옴~ 보안과안! 너는 사람을 너무 많이 때렸다아~!”

“야, 그거 어디서 났냐?”

싸구려 개그에는 반응을 보이지 않으며 보안관이 묻는다.

“저쪽에 진열되어 있던데?”

“좋아 보인다. 그거면 굳이 플래시 안 들어도 되겠는걸? 사람 수만큼 챙기자.”

보안관은 배낭을 집어서 골랐던 옷들과 헤드 랜턴을 집어넣었다. 쓸모가 있을 것 같아 램프형 랜턴도 하나 가져가기로 했다.

“유빈 오빠는 바지 사이즈 뭐 입어요?”

제니가 묻자 보안관과 삼식이가 얼굴을 마주 본다. 매일같이 붙어 다니지만 허리둘레 따위는 모른다.

“몰라.”

둘이 입을 맞춰 대답하자 제니는 깜짝 놀란다.

“엑! 무슨 친구가 그래?”

“친구 허리 사이즈 같은 걸 어떻게 알아? 여자들은 알아, 그런 거? 우리 다 가지고 나간 다음 직접 와서 고르라고 하지, 뭐.”

그래서 그들은 차례로 탈의실에 들어가 낡은 옷을 배낭에 넣고, 새 옷으로 갈아입고 나왔다.

비록 걸레와 크게 다르진 않았지만, 입고 있던 낡은 옷들을 버리지 않은 건 상당 부분 미신이 섞인 이유 때문이다. 이걸 입고 지금까지 무사히 살아남았으니까 왠지 푸대접을 해서는 안 될 것 같다.

“유빈아, 교대하자.”

삼식이가 헤드 랜턴을 껐다 켰다 하며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부른다. 알록달록한 등산 티셔츠를 입고 커다란 배낭을 메고 나온 보안관을 보며 유빈이 아무 생각 없이 충고한다.

“야, 보안관. 그거 안 어울린다. 검은색 입지?”

보안관은 대꾸하지 않고 유빈의 등을 밀어 가게 안으로 넣었다. 잠시 후, 유빈은 왜 보안관이 그렇게 평소에 입지 않던 스타일로 빼입었는지 알게 됐다. 문제는 제니의 취향이었다.

“에이, 이거 입으라니까요. 이게 훨씬 예뻐요.”

제니는 고집을 꺾지 않고 빨강과 파랑이 섞인 옷을 자꾸 강권한다. 물론 둘 다 원색이다. 저런 옷을 입어도 멋있는 사람은 바르셀로나 축구 선수들 정도밖에는 없을 거다.

유빈이 평범한 회색이나 푸른색을 집으면 제니는 얼른 달려와서 그걸 던져 버리고 자기가 고른 옷을 내민다.

이번에 그녀가 내민 바지는 올리브색이 주를 이루고 노랑과 갈색, 검정까지 네 가지 색이 정신없이 섞인 놈이다.

“제니야, 나…… 솔직히 좀 놀랐어. 너 패션 감각이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후진 패션 감각으로 어떻게 연예계에서 용케 버텼다고요? 지금 그런 말 하는 거예요?”

“음…… 뭐, 대충 비슷해.”

“훗, 그거야 간단해요. 알려줄까요?”

제니는 코웃음을 치더니 유빈이 대답도 하기 전에 얼굴을 가까이 대고 귓속말을 한다.

“난 뭘 입어도 예쁘거든요.”

입김이 간지러워서 유빈이 어깨와 목을 움츠리며 몸서리를 치자 제니는 또 개구쟁이처럼 깔깔 웃는다.

결국 하얀 면 티를 제외한 모든 옷은 그녀의 취향대로 골라졌다. 유빈까지 현란한 원색 셔츠와 올리브색 바지로 갈아입고 나서 그들 일행은 슈퍼로 향했다.

쇼핑을 마쳤으니 이제 식사를 할 차례다. 유빈이 양초나 건전지, 빨랫줄, 라이터 따위의 생필품을 꼼꼼히 챙기는 동안 보안관과 제니는 장을 봤다. 도란거리는 소리로 미루어 봐서 오늘 메뉴는 즉석 카레인 모양이다.

“보안관! 나 해머 좀 줘봐. 이거 좀 따게.”

제니와 나란히 슈퍼에서 나오는 보안관에게 삼식이가 가리킨 것은 슈퍼 입구의 기둥에 자전거를 고정시켜 둔 자물쇠였다.

“자전거네. 비켜봐, 내가 부숴줄게. 근데 뭘 하려고?”

보안관이 카트에서 해머를 들어 올리며 물었다.

“이거 타고 좀 멀리까지 가보고 싶어서. 혹시 중간에 좀비들을 만나도 자전거보다야 안 빠를 테지.”

“야, 자동차들이 막고 있는 쪽으로는 안 가는 게 좋을걸? 거기는 위험해.”

보안관과 삼식이, 신입이 자전거에 정신이 팔려 있는 동안 유빈의 카트 쪽으로 다가온 제니가 다정히 부른다.

“오빠, 부탁이 있어요.”

그 은밀함에 덜컥 걱정부터 든 유빈이 말을 더듬었다.

“뭐, 뭔데…….”

“하하하, 뭘 그렇게 겁을 먹어요? 뭐냐면요…….”

제니는 목소리를 낮춰 그들이 지나쳐 온 번화가 입구를 가리킨다. 예전에 제니가 숨어 있던 집의 아래층 속옷 가게다. 깨진 유리창 사이로 브래지어만 입은 마네킹이 넘어져 있다.

“저기 좀 같이 가줘요. 아까 들렀어야 하는데 입이 안 떨어지더라고요. 오빠들도 속옷 필요하잖아요.”

속옷이라고?

유빈은 잠시 제니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일부러 놀리려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들이나 그녀나 벌써 며칠이나 속옷을 계속 못 갈아입었다는 것도 사실이기는 하다. 위생적인 한계점을 이미 넘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제니가 브래지어와 팬티를 고르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으라는 말인가. 내가 무슨 세계 4대 성인도 아니고…….

그는 고개를 저었다.

“난 지금 다리가 아파서 여차하면 싸움도 못 하는데. 저기…… 보안관이랑 같이 가.”

“어우씨, 창피하다고요. 속옷 이야기 같은 거 하기 싫어요.”

제니가 아랫입술을 내민다.

나한테는 했으면서 뭘 그래…….

유빈은 목구멍까지 올라왔던 말을 삼켰다. 그런 선택은 그녀의 자유니까 거기에 대해 가치판단을 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더 이상 제니에게 감정적으로 휘둘리기도 싫다. 유빈은 그냥 냉정하게 굴기로 작정했다.

“하여튼 난 못…… 아니, 안 갈래. 상처가 욱신거려서 가만히 서 있는 것도 힘들어. 미안해.”

믿기지 않는 광경이라도 본 것처럼 제니의 눈동자가 잠시 흔들린다. 그러나 그녀는 이내 벌어졌던 입술을 다시 오므리고 표정을 바꾸며 웃었다.

“괜찮아요. 오빠 다친 걸 내가 금방 까먹었네요. 하하, 신경 쓰지 말고 밥 먹으러 가요.”

돌아서서 걸어가는 제니의 뒷모습 때문에 마음이 깨지는 것 같았지만, 유빈은 이 결정이 옳다고 믿었다. 그녀와 단둘이 뭔가를 더 하면 할수록, 자꾸 욕심이 생겨서 결국 괴로워지는 건 그 자신이다.

애초에 문제의 싹은 만들 필요가 없어…….

유빈은 마음속으로 중얼거리며 자신을 설득했다.

애초 계획을 세웠던 대로 2층 커피 전문점 발코니에서 점심을 먹었다. 즉석 카레와 햇반을 데운 뒤에 커다란 그릇에 부어놓고 비볐을 뿐이지만, 다들 오랜만에 맡아보는 향기에 만족스러운 반응을 보였다.

후끈한 한낮의 열기를 식혀주는 바람이 불어오는 점도 좋고, 제대로 된 의자와 테이블에 앉아 밥을 먹는 것도 마음에 들었지만, 거리의 풍경이 온통 짓뭉개진 시체들로 장식되어 있다는 점은 마이너스 요소였다.

카레를 입 안에 떠 넣고 아무 생각 없이 아래쪽으로 시선을 돌렸다가는 곧바로 욕지기가 올라올 수도 있다.

“위를 봐요. 하늘은 예전이랑 똑같아요.”

눈 둘 곳을 찾지 못해 불안하게 눈동자를 굴리는 신입에게 제니가 말한다.

“아니, 나는 너만 볼 건데.”

보안관이 굳은 의지를 담아 말하자 제니는 어처구니없다는 듯 웃는다.

“오빠가 그렇게 애교를 부려봤자 와이셔츠만 입는 일은 없어요.”

“큽! 그, 그거랑은 상관없잖아! 그리고 제발 그 이야기 좀 잊어버리면 안 돼?”

“어머, 어쩌지? 난 기억력이 엄청 좋은데……. 용서하되 잊지는 말라.”

보안관을 놀리는 제니의 표정에서 속옷 가게에 함께 가자는 제안을 거절당했을 때의 그 의기소침함은 찾아볼 수 없다. 덕분에 유빈도 자기가 내린 결정에 대해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을 수 있었다.

식탁의 분위기가 제니와 보안관 중심으로 흘러가는 것 같아 위기감을 느꼈는지, 신입이 거드름을 피우며 말했다.

“밥 먹고 나서 서점에 좀 갔으면 좋겠는데, 정말 너무 오랫동안 책을 못 읽었어.”

책?

이런 상황에서 그게 무슨 배부른 소리인가 싶어 모두가 신입을 향해 고개를 돌린다.

관심이 집중되자 신입은 만족스러운지 밉살스러운 미소를 짓는다. 아하, 이해했다는 표정으로 삼식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신입, 너도 똥 쌀 때 만화책 보는 타입이구나. 그런 애들 꽤 많더라.”

“만화책 같은 건 유치해서 안 봐. 칸트를 읽고 싶어. 이럴 때일수록 그런 걸 읽어줘야 마음의 평화가 생기니까.”

“칸트? 그건 소설이야?”

누가 봐도 허세인데 삼식이는 진지하게 반응한다. 신입은 고개를 저으며 거드름을 피웠다.

“나참, 책 제목이 아니라 철학자 이름이다. 세계적인 철학자 칸트를 모르냐? 크크크, 하여간…… 야! 겉으로 보이는 몸뚱이만 멀쩡하면 뭐해, 여기가 비었는데.”

집게손가락으로 머리를 가리키고 있는 신입에게 발끈한 보안관이 쏘아붙였다.

“아, 그 새끼, 진짜 말도 어지간히 밉살맞게 하네. 그래서 네가 읽으려는 책 제목이 뭔데?”

“응?”

예상치 못한 질문이었는지 신입이 갑자기 멈칫한다.

“그렇게 잘난 책 이름이 대체 뭐냐고?”

“카, 칸트는 다 좋아.”

후두득.

바람이 유난히 시원하게 분다 싶더니, 곧바로 굵은 빗방울들이 세차게 쏟아져 내린다.

아직 햇살은 그대로인데 갑자기 쏟아져 내린 여름 소나기가 차양을 두드리자, 관심은 금세 칸트에서 여우비로 옮겨갔다.

궁지에 몰려 있던 신입은 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빗방울이 섞인 바람이 불어 들어와 테이블 위에 쌓아두었던 커피 전문점 냅킨을 사방으로 날린다.

“태풍인가? 바람이 심상치 않네.”

유빈이 동쪽 하늘에서 밀려드는 먹구름을 보며 걱정스럽게 중얼거렸다. 일기예보를 들을 수 없으니 당장 내일 큰 규모의 태풍이 몰아치더라도 대비할 수조차 없을 것이다.

“우와, 저기 저것 좀 봐.”

삼식이가 대단한 걸 발견하기라도 한 사람처럼 손가락질을 한다. 모두의 눈동자가 그곳으로 쏠렸다.

“저거, 카레 색깔이랑 완전히 똑같아. 밥알도 보인다.”

터진 좀비의 머리통에서 썩어 탁해진 뇌수가 빗물에 쓸려 흘러나온다. 움직이는 놈들과 달리 죽어버린 좀비의 시체에서는 구더기가 들끓고 있었다.

탁, 삼식이를 제외한 네 사람이 동시에 수저를 내려놓았다. 이제 한동안 카레는 먹을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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