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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 천국과 지옥 (5) (91/449)


91. 천국과 지옥 (5)
2021.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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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우와 이 병장이 이불보를 연결해 만든 엉성한 밧줄을 타고 겨우 땅에 내려선 분대원들은 경사로를 따라 걸었다.

조금 전, 엄청난 규모의 좀비들과 맞닥뜨렸었기 때문에 꽤나 긴장한 채로 한 걸음씩을 떼었지만, 다행히 더 이상은 놈들과 만나지 않고 무사히 시청 앞까지 도착할 수 있었다.

“하아~ 이제 밥 먹고 돌아가기만 하면 되겠다.”

시청 정문 앞에 멈춰 서 있는 장갑차와 병사들을 확인하고 마음을 놓은 김 상병이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오늘 그들이 짊어지고 온 메뉴는 쇠고기 콩가미가 들어 있는 3형 2식단 햄 볶음밥.

물론 지난 며칠 동안 질릴 만큼 먹어온 음식이라 설레는 마음 따위는 전혀 없지만, 평안하게 수다를 떨며 씹고 삼키는 정도가 그들에게 허락된 가장 큰 쾌락이다.

비록 허접한 초코볼 후식이나마 맛보고 불평을 하는 동안 살아 있다는 것을 다시 감사하게 된다.

“가만있어 봐라. 어째 분위기가 영 이상하다.”

이 병장이 들뜨려는 분대원들의 마음을 가라앉혔다. 정문 앞에서 웅성거리는 병사들은 아무리 봐도 점심을 먹고 돌아가기 직전의 들뜬 얼굴들이 아니다.

“야, 뭔 일 있냐? 왜 그래?”

후방에 처져 있던 다른 분대 병사들을 붙잡고 이 병장이 물었다. 상병 하나가 대답한다.

“점심도 안 먹고 곧바로 새 작전에 투입된답니다.”

“새 작전? 그게 무슨 소리야? 민간인이랑 방어 부대 구하라고 해서 구했잖아?”

“그게 다가 아니랍니다. 홈플러스에도 또 뭐가 있다고 하지 말입니다.”

“응? 난데없이 또 웬 홈플러스야? 그건 어딘데?”

“저기 보이는 홈플러스 말입니다.”

상병이 주차장 너머의 대로를 가리켰다. 손가락이 지시하는 방향의 끝부분에 낯익은 파란색 모서리의 건물이 보인다. 그리고 동시에 그 주변을 배회하는 좀비들의 무리도 시야에 들어왔다.

거리는 1킬로미터도 채 떨어지지 않았지만, 도로를 꽉 메우며 버려진 자동차들과 블록마다 연결되어 있는 대여섯 개의 교차로를 생각하면 현기증이 나는 것 같다.

만일 사거리에서 양쪽으로부터 밀어닥치는 좀비들을 만난다면 꼼짝없이 전멸당할 게 분명하다.

“아니, 진짜……. 그럼 처음부터 저쪽에서 밀고 왔으면 되는 거였잖아. 왜 꼭 일을 두 번씩 시켜? 와…… 근데 이건 무슨 총알인데 사람 몸이 이렇게 되냐?”

투덜대던 김 상병이 근처에 쓰러져 있던 좀비의 시체를 보고 감탄한다.

모로 누워 죽은 좀비의 몸뚱이는 크고 작은 여러 개의 구멍이 숭숭 뚫린 채 박살이 나 있다. 특이한 것은 원형으로 뚫린 여러 개의 작은 상처들이다. 사출구라고 하기에는 너무 작다.

“완전 걸레가 됐네. 어휴~ 등판도 그러네.”

사체에 가까이 다가가 관찰하던 김 상병은 몸을 가볍게 부르르 떨었다. 정 상병이 대수롭지 않게 대꾸한다.

“산탄총에 맞았으니까 그렇겠지.”

“에이, 내가 산탄총을 모르겠냐? 네가 앞쪽을 못 봐서 그런데, 여기에 뚫린 곳은 세 개뿐이야. 들어온 구멍은 세 갠데, 나간 구멍은 장난 아니게 많다고. 어라, 이놈도 그러네?”

호기심을 느낀 병사들은 작전에 재투입되어야 하는 신세도 잊고 좀비의 시체 주변에 모여 서서 웅성거렸다.

정말 김 상병이 말한 것처럼 사입구보다 사출구가 몇 배나 많다. 몇몇 사출구에는 금색의 금속 조각이 박혀서 반짝거린다.

“신형 RIP탄인 것 같습니다. 특임대에서 MP5에 이걸 쓰나 봅니다.”

안경도 없는 눈으로 바짝 다가와서 인상을 찌푸리며 보고 있던 강 일병이 결론을 내렸다.

“RIP? 그게 뭔데 사람 몸뚱이가 이렇게 송곳으로 마구 쑤셔놓은 것처럼 되냐?”

“총알 상표입니다. 탄두가 둥근 게 아니라 여덟 조각으로 쪼개지는 구리 화살같이 생겨서, 목표물에 박히면 쫙 확산됩니다. 내장 파괴 총알이라고 해서 미국에서는 인기가 좋았습니다만, 구형은 96그래인짜리여서 이만한 파괴력은 안 나올 겁니다. 테플론 코팅을 한 황동인가?”

“총알 하나만 맞추면 그게 여덟 방향으로 퍼진다고? 우와~ 덤덤탄보다 더 악질이잖아. 얼굴 근처 아무 데에나 맞추기만 하면 알아서 대갈통을 작살내겠는데?”

이 병장이 감탄을 한다.

“탄자 본체도 있으니까 아홉 방향입니다. 그나저나 이 병장님, 저 안경 이제 어떻게 합니까?”

강 일병이 애원하듯 이 병장을 바라본다. 정말 큰일이기는 했다. 이대로 발전소로 돌아간다고 해도 그곳에서 강 일병에게 맞는 안경을 구한다는 건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걱정이 가득한 얼굴로 이 병장이 한숨을 내쉬자, 잠시 고민하던 김 상병이 아하, 하며 말했다.

“가는 길에 안경 가게가 있을 거 아냐? 홈플러스 안에도 있을 거고. 거기에 수색하는 척 들어갔다가 빼 오자.”

“제 도수에 맞는 안경이 없을 것 같습니다. 그…… 진열되어 있는 안경들은 죄다 진짜 안경 렌즈가 끼어진 게 아니지 말입니다.”

“답답한 새끼. 누가 진열된 걸 집으래? 좀비 세상이 오기 전에 누군가가 맞춰놓고 아직 안 찾아간 안경들이 있을 거 아냐. 그걸 집어 오면 되지.”

“그런 걸 고르고 있을 시간은 없을 것 같은데.”

이 병장이 걱정하자, 김 상병이 안심을 시킨다.

“아, 고르는 게 아니고 말입니다. 그냥 카운터 뒤쪽에 영수증이랑 같이 붙어 있는 안경은 싸그리 다 집어 온 다음, 얘한테 얼추 맞는 걸 끼면 됩니다. 다 누가 맞춰놓은 것 아닙니까? 우리 부대에 안경 쓴 애가 얘만 있는 게 아니니까 들고 가도 다 쓸모가 있을 것 같습니다.”

“그 많은 걸 다 어디다가 담아?”

정 상병이 물었다.

“전투식량을 버리면 되지.”

김 상병이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어차피 맛대가리도 없는 밥, 한 끼 안 먹는다고 큰일이 나는 것도 아니고.”

***

“오빠~ 그러지 말고 같이 가요.”

배낭을 멘 제니가 유빈의 손을 잡아끌며 애교 섞인 애원을 한다. 유빈은 얼른 손을 빼고 고개를 저었다.

“아니, 너희끼리 다녀와. 난 그냥 여기 있을게. 다리도 아직 다 낫지도 않았고…….”

사실 그건 그냥 핑계였다. 유빈이 이렇게 완강하게 번화가로 놀러 나가는 것을 거부하는 진짜 이유는 아무 근거 없는 불안감 때문이었다.

너무 행복하게 놀러 다니기만 하면 벌을 받게 될까 두려워서, 그 혼자만이라도 복지 센터에 남아 뭔가 부지런하게 몸을 놀려 일을 해야 할 것만 같았다.

어렸을 때부터 몸에 붙은 특유의 가난뱅이 근성이라는 생각도 들지만, 갑자기 찾아온 자유와 풍요는 어쩐지 유빈을 자꾸 두렵게 만든다.

“에이, 그러면 재미없다구요. 다 같이 가서 어제 빼먹은 물건들도 챙겨 오고, 옷도 쇼핑하고 그래요. 오빠는 좀비 없는 거 한 번도 못 봤잖아요.”

제니가 치대는 모습은 뭐랄까…… 아찔하다. 그녀가 허리를 숙인 채 얼굴을 바짝 들이밀면 의식적으로 그러지 않으려고 해도 자꾸만 그 커다란 가슴에 눈길이 가게 돼서 유빈은 얼른 고개를 돌렸다.

비록 삼선 트레이닝복에 꽁꽁 감싸고 있다고는 해도 온 나라를 들었다 놨다 했던 볼륨과 곡선은 숨겨지지 않는다.

유빈이 굳이 함께 움직이지 않으려 하는 이유에는 제니의 치명적인 매력도 커다란 한몫을 하고 있다.

젠장, 아침마다 똥통을 비우기 위해 사다리를 내려가는 모습까지 다 봤는데도 여전히 매력적이라는 게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녀와 함께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유빈은 마음이 무거워진다. 너무 예쁘고 사랑스러워서 반할 것만 같은데, 그러면 안 된다는 걸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애초에 맺어질 수 없는 사이이기도 했지만, 그런 마음을 먹는 게 보안관을 배신하는 것 같아서 양심의 가책을 견디기가 어렵다.

차라리 제니가 빨리 보안관과 진짜로 맺어져서 아예 포기하게 해줬으면 하는 바람이 들기도 한다.

며칠 전, 키스해도 된다고 입술을 내밀었던 그녀의 얼굴을 보고 두근거린 이후 그런 결심을 했고, 어젯밤에 술에 취해 어리광을 부릴 때 가슴이 뜨거워지면서도 그 결심은 더 확고해졌다.

이 아이는 사람의 마음을 너무 흔든다.

“아, 진짜 못 봐주겠네. 제니야, 이 새끼 손 잡아달라고 일부러 이러는 거야. 이거, 진짜 질이 안 좋은 새끼네.”

제니와 유빈의 승강이가 길어지자 담배 연기를 뻑뻑 뿜고 있던 신입이 짜증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보안관은 아무 말 없이 다가와서 두 팔로 유빈을 번쩍 안아 일으켰다.

“그냥 가자, 유빈아. 제니가 저렇게 부탁하는데 고집 피울 필요 없잖아. 다리가 정 힘들면 내가 업고 갈게.”

“아니, 난…….”

뭐라고 더 핑계를 대보려는데 보안관의 손가락이 유빈의 양 옆구리를 간질인다. 유빈은 참지 못하고 웃음이 터졌다.

“보안관, 꽉 잡고 있어!”

신이 난 삼식이가 달려와서 허공에 떠 있는 유빈의 가랑이를 주무르며 참전한다. 얇은 몸빼 바지라서 만지기 딱 좋다.

“아! 아하하! 크~ 아…… 알았어! 알았어, 갈게, 그만해. 야! 삼식아!”

결국 고문에 못 이긴 유빈이 항복을 선언하자 제니는 기세가 등등해졌고, 삼식이는 유빈을 위한 배낭을 챙겨 들고 왔다.

그사이 유빈은 2층에 걸쳐 둔 사다리를 내려서 1층 바닥에 눕혀놓고, 사다리 맨 위 칸과 아래 칸에 작은 볼트 하나씩을 올려놓는 것으로 집을 비우기 위한 준비를 마쳤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혹시라도 그들이 복지 센터를 비웠을 때 누군가 이곳을 찾아와 2층에서 숨어 있는 상황을 미리 알기 위해서이다.

만약 볼트가 제자리에 없다면 그건 사다리를 움직였다는 이야기고, 그때부터는 조심해서 운신해야 할 것이다.

예전부터 생각해 왔던 방식이지만, 지금까지는 복지 센터에 한 사람도 남겨두지 않고 이동했던 적이 없었으므로 실행에 옮긴 건 오늘이 처음이다.

돌아왔을 때 부디 볼트와 사다리가 제자리에 있기를 바라며, 다섯 사람은 번화가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제가 오늘 계획을 말해볼게요. 먼저 옷을 쇼핑한다. 그다음에 슈퍼에 들러서 재료를 가져다가 2층 커피 전문점에 올라가서 밥도 해 먹고 커피도 마시고. 에, 또…… 저는 화장품 가게에도 가볼 거예요.”

벌판을 가로질러 걸어가던 중 제니가 조그만 쪽지를 하나 꺼내 들고 보며 읽는다. 안전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여전히 해머를 어깨에 걸쳐 멘 보안관이 웃는다.

“하하, 뭐야? 계획표까지 있어? 언제 그런 걸 다 써놨어?”

“아침 먹고 나서요. 제 계획 괜찮아요?”

“좋지. 전형적인 데이트 코스네. 근데 이 동네에는 고급 메이커는 없을 거야.”

“그런 건 괜찮아요. 그냥 오빠들 옷이 너무 낡아서 새 옷을 입었으면 좋겠어요.”

“우리 옷?”

보안관은 자신의 위아래를 새삼 훑어보았다. 다 찢어진 청바지에 온갖 더러운 얼룩들이 묻어 있는 면 티.

그나마 면 티는 제니가 한번 세탁을 해준 것이지만, 청바지는 이 더운 여름에 목욕도 하지 못하고 일주일이 넘도록 계속 입어왔다. 익숙해져서 미처 모르고 있었지만, 아마 장난 아니게 지독한 땀 냄새가 날 것이다.

“새 옷 입기 전에 생수로라도 목욕을 해야겠다…….”

갑자기 부끄러워진 보안관이 중얼거린다. 유빈과 신입도 그 말에 뜨끔해서 자기 겨드랑이 냄새를 맡아보고는 진저리를 쳤다.

정신이 번쩍 들 만큼 강렬한 남자의 향기다. 그때, 하늘 저편에서 오랜만에 들어보는 소리가 귀를 울리며 다가왔다. 헬리콥터의 프로펠러였다. 다섯 사람은 당황해서 서로의 얼굴을 마주 봤다.

헬리콥터! 군인! 구조! 안전 지역! 생존자들과의 만남!

서로의 눈빛은 그런 메시지들을 주고받으며 빠르게 반짝인다. 유빈은 소리가 나는 방향을 향해 돌아섰다. 저 멀리, 꽤나 높은 위치에서 헬리콥터 두 대가 다가온다.

“여기요! 사람 있어요! 여기요!”

유빈은 두 팔을 크게 휘저으며 하늘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보안관도, 제니도, 신입도 펄쩍펄쩍 뛰며 외친다. 삼식이는 웃옷을 벗어 흔들면서 가장 적극적으로 구조를 요청했다.

투투투투― 위이잉―

하지만 헬리콥터는 북쪽을 향해 속도를 유지하며 날아가 버렸다. 열심히 구조를 요청하던 다섯 사람은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잠시 허망하게 멈춰 서 있었다.

작업반장님이 사라진 그날 질리도록 봤던 이후, 일주일이 넘어서야 처음 보는 헬리콥터여서 아쉬움이 더욱 컸다.

“아, 젠장…… 안 보였나 봐. 하긴 보였대도 일부러 구조하려고 와주는 건 또 다른 문제지.”

유빈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여기 제니가 있는 걸 알았으면 군바리 놈들 무슨 일이 있어도 기를 쓰고 내렸을 텐데……. 흥, 바보들.”

그렇게 말한 삼식이가 입맛을 다지며 담배에 불을 붙였다. 흥분해서 무거운 것도 잊고 해머를 흔들어 대던 보안관은 숨을 헐떡였다.

“하아…… 하아…… 또 와줄까? 하아…….”

“헥, 헥, 그럴 리가 없지. 씨발, 인생에 세 번 온다는 기회 중에 하나였을 텐데…… 아, 썅, 그걸 놓쳤네…….”

신입도 욕설을 퍼부으며 헐떡였다. 쇼핑과 피크닉을 겸해서 떠나온 들뜬 나들이 길의 분위기는 순식간에 상실감으로 무겁게 가라앉아 버렸다. 잠시 이어지던 어두운 침묵을 깬 것은 제니의 맑은 목소리였다.

“근데요…….”

제니가 낙담한 네 남자를 돌아보며 웃는 얼굴로 입을 뗐다.

“생각해 보니까 굳이 구조해 달라고 할 필요가 없었나 봐요. 어제부터 음식도 마음껏 먹을 수 있고, 어엿하게 집도 있고……. 전 벌써 필요한 건 다 있는데요.”

“정말? 진심이야?”

보안관이 감격스럽게 물었다.

음…… 천천히 고개를 돌려 번화가 쪽과 복지 센터, 보안관, 삼식이, 신입을 차례로 훑어보던 제니는 유빈의 얼굴에 이르러 시선을 멈추며 대답했다.

“네, 그렇다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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