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 천국과 지옥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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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 천국과 지옥 (4)
2021.11.29.
10여 분쯤 뒤, 마침내 이 병장이 총구를 내리면서 한숨을 내쉰다.
그의 말처럼 옥상 문 주변에는 엄청난 수의 시체들이 수북하게 쌓여 있고, 바닥에는 정체를 분간할 수 없는 찐득한 액체들이 고이다 못해 흐를 지경이었다.
물론 그 너머의 계단도 온통 조각난 시체들로 뒤덮여 있다. 가슴 위만 살아서 꿈틀거리는 놈들이 있다 해도 이상할 게 없어 보일 만큼 끔찍한 상황이어서, 도무지 저 안으로는 걸어 들어갈 엄두가 나지 않는다.
“두 명씩 5분 교대로 전방 감시하고, 나머지는 쉬어. 박 이병, 윤 일병.”
이 병장이 수통을 열고 물을 들이켜면서 부른다.
“네!”
“너희가 첫 번째 조다. 교대하기 전까지 긴장 풀지 마.”
이 병장은 난간에 기대 후들거리는 다리를 주무르며 크게 심호흡을 했다.
다른 병사들도 이마에서 진땀을 닦아내고 제자리에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담배를 꺼내 물고 고개를 돌리던 김 상병이 언덕 아래를 보며 중얼거렸다.
“어, 저기도 진입 시작했습니다.”
그 말에 병사들이 모두 고개를 돌린다. 707특임대가 장갑차를 넘어 좀비가 드문드문 모여 있는 시청 주차장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시청 건물은 엉망으로 파손되어 있고, 옥상 위에까지 좀비들에 의해 점령된 상태였다.
“저래서 헬기 레펠을 안 하고 땅개처럼 걸어갔구나.”
시청 옥상의 좀비들을 보면서 김 상병이 중얼거렸다.
파방― 파방―
네 대의 샷건을 앞세운 특임대가 진을 유지하며 천천히 전진하자, 사방에 흩어져 있던 좀비들이 차량 사이를 누비며 달려들었다.
파방― 파방, 파방―
샷건이 발사될 때마다 A4 사이즈만큼씩 좀비의 얼굴 살점이 떨어져 나간다. 앞서서 달려들던 열 마리 남짓의 좀비들은 순식간에 정리됐다. 김 상병이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감탄했다.
“헤에~ 저것만 있으면 나도 진우만큼 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런데 저건 그냥 막 연발로 나가네. 샷건이란 게 펌프질을 하면서 쏘는 거 아냐?”
“베넬리 M4 슈퍼 90, M1014입니다. 12게이지, 세미 오토, 튜브 매거진에 일곱 발, 플러스 한 발. 미 해병도 저걸 사용합니다.”
곁에서 함께 구경하며 침을 삼키던 강 일병이 사뭇 진지하게 설명을 시작해서 모두들 그를 돌아보며 놀랐다. 시선이 집중되자 강 일병은 평소의 수줍은 안경잡이로 돌아가서 얼굴을 붉히며 귀를 긁는다.
“베넬…… 뭐? 호오, 이 오타쿠 놈 봐라? 저 좀 아는 거 나왔다고 고참한테 막 잘난 척을 하네?”
김 상병이 강 일병을 놀리면서 어깨를 끌어안았다. 다시 유약한 모드가 된 강 일병은 그저 배시시 웃는다.
파바바바바바― 투투투투투둑―
한가한 옥상의 풍경과 달리, 아래쪽 시청 마당에서는 MP5를 든 특임대원들이 정신없이 9㎜ 파라블럼 탄을 날려서 달려드는 좀비들을 정리하고 있다.
사선으로 선 두 대의 K21 장갑차에서 기총 지원사격을 통해 우측을 정리하는 동안, 특임대원들은 12시와 9시 방향의 좀비들을 주로 처리하며 천천히 건물 내부를 향해 전진한다.
비교적 원거리는 MP5가, 근거리는 샷건이 각각 나눠서 담당하고, 두 명의 대원은 커다란 방패를 이용해 혹시 모를 근접전에도 대비하고 있다.
“확실히 능숙하네. 좀비 소굴로 들어가는데 겁내는 기미가 없어.”
한동안 707과 좀비 간의 싸움을 보고 있던 정 상병이 감탄하며 중얼거린다.
쐐기꼴로 진을 이룬 채 이동하는 주변에는 좀비의 시체들이 선을 그은 듯 뻗어 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특임대원들이 모두 건물 내부로 진입해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그런데 어째…… 우리가 더 많이 죽인 것 같습니다? 그럼 우리는 708인가?”
김 상병이 시청 마당의 좀비 시체들과 옥상 문 주변의 시체들을 번갈아 보면서 실없는 소리를 한다. 이 병장이 김 상병의 머리통을 탁, 쳤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박 이병이랑 경계 근무나 교대해. 그리고 우리도 어떻게 슬슬 내려갈 방법을 생각해야지. 여기서 살 것도 아니고.”
진우는 물을 마시면서 좀비들의 시체 토막으로 엉망이 되어 있는 옥상 문을 바라보았다. 확실히…… 피와 기름, 내장으로 미끄러울 저 계단으로는 내려갈 수 없다.
혐오스러운 것도 문제지만, 혹시나 시체 틈바구니에 몸이 동강 난 채 살아 있는 녀석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더 크다.
타타타타― 타타타―
시청 마당에서는 여전히 총성이 시끄럽게 울리면서 꾸역꾸역 몰려드는 좀비들을 처리하고 있었다. 특임대가 돌파하고 난 이후의 뒤처리는 보병들에게 맡겨진 모양이다.
“난간을 잡고 3층으로 들어간 다음, 거기에서 커튼이나 침대보 같은 걸로 끈을 만들어서 내려가면 되지 않겠습니까?”
정 상병의 제안에 이 병장이 고개를 끄덕인다.
“뭐, 지금 같아서는 그 수밖에 안 보이네. 누가 내려갈래?”
그런 일은 돌고 돌다가 결국 졸병에게 맡겨지기 마련이다. 진우는 지목당하기 전에 먼저 손을 드는 편을 택했다.
“그래, 박 이병이 똘똘하니까 나도 네가 하는 게 마음 편해. 그리고 또 한 명 따라가라.”
“그럼 제가 함께 가겠습니다.”
강 일병이 손을 들었다.
내려가는 일 자체는 간단하다. 난간을 넘어가 몸을 늘어뜨려 내린 다음, 3층의 거실에 딸린 조그만 발코니로 뛰어내리기만 하면 된다.
하지만 그건 3층에 아무도 없을 때의 이야기다. 혹시나 착지하는 순간에 유리창을 깨고 달려드는 좀비가 있다면 이쪽에서는 변변하게 저항을 할 방법이 없다.
다리를 늘어뜨린 채 잠시 뜸을 들이던 진우는 눈치를 봐서 휙 몸을 날렸다. 그러고는 곧바로 몸을 일으켜 총을 겨눴다. 다행히 안쪽에서 달려드는 좀비는 보이지 않는다.
“후우~”
잠시 가볍게 한숨을 쉰 진우는 위에서 기다리고 있는 강 일병에게 신호를 보냈다.
“내려오십시오. 괜찮습니다.”
진우의 도움을 받으면서 겨우 내려선 강 일병은 상기된 표정으로 총을 고쳐 잡은 뒤, 거실 내부를 살핀다.
“이런 젠장, 커튼이 아니고 다 버티컬이네.”
강 일병의 말대로 빌라에는 직물로 된 커튼이 아니라 레일에 붙은 세로 방향의 블라인드가 설치되어 있었다. 이런 걸 잡고서 아래로 내려갈 수는 없다.
투투투투둑― 파파파파파방―
시청에서는 잠시의 틈도 없이 계속 K―2의 사격음이 들려와 귀를 먹먹하게 만들고 있다.
“뭐…… 괜찮아. 안방에 가면 침대 시트랑 이불은 있을 테지.”
강 일병이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거실 베란다 문을 연다.
생각 없이 너무 빨리 움직이는 것 같아 불안했지만, 말릴 틈도 없다. 성큼성큼 거실을 가로질러 걸어간 강 일병이 두 개의 닫혀 있는 문 앞에서 진우를 향해 돌아서며 말했다.
“야, 박 이병. 이 집 있지, 대전 우리 집이랑 구조가 완전히 똑같아 보인다? 웃기지 않냐? 어떻게 이런 일이 있지? 여기가 안방이야.”
그리고 그 순간, 말을 다 마치기도 전에 좌측의 문손잡이를 잡고서 돌린다. 진우는 그의 뒤에서 엄호하기 위해 다급하게 뛰었다.
“강 일병님, 2인 1조로 움직여야 하지 말입…….”
순식간의 일이었다. 강 일병의 얼굴이 파랗게 질리더니, 손잡이를 놓치고 뒤로 넘어진다. 무엇 때문에 그러는지는 굳이 생각을 해야 알 수 있는 일도 아니다.
“으아아!”
강 일병의 비명이 어지럽게 울린다. 진우는 재빨리 달려가 그의 뒤에 서며 외쳤다.
“일어나십쇼! 빨리!”
그러고는 비스듬히 열리는 문 안쪽을 향해 K―2를 난사했다.
투투투투둑― 투투투투둑―
엉망으로 박살이 난 나무문의 틈 사이로 좀비의 몸통이 스쳐 보인다. 적어도 둘 이상이다.
“으흐으~”
강 일병도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구르다시피 일어나 총을 고쳐 쥐었다.
“뭐야? 왜 발포했어?”
위쪽에서 이 병장이 깜짝 놀라 묻는 소리가 들려온다. 진우는 반쯤 열린 안방 문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외쳤다.
“좀비가 있습니다!”
그롸아아아악―!
“지원 내려간다!”
“오지 마십쇼! 사선과 겹칩니다!”
문이 활짝 당겨지면서 좀비들이 튀어나온다.
투두둑―
첫 번째 놈의 머리통이 터져 나가고 방 안쪽의 화장대가 박살이 나서 튄다.
두 번째 놈의 어깨와 가슴에 세 발을 연달아 박아 넣는 동안, 총격을 받아 허리가 끊겨 있던 세 번째 좀비가 바닥에서 빠르게 기어온다.
“으아아아아~!”
강 일병이 비명을 지르면서 난사를 한다. 사방으로 흩뿌려진 총알은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안방 유리창을 산산조각 냈고, 좀비의 머리통도 그 소란 속에 엉망으로 터져 나갔다.
강 일병은 탄창을 모두 비운 다음에도 방아쇠에서 손가락을 떼지 못했다. 진우는 깨끗하게 해치우지 못했던 두 번째 좀비의 이마 한가운데를 노려 단발에 정리했다.
하아~ 하아~ 한차례 광풍이 휩쓸고 간 빌라 내부에는 두 병사의 헐떡이는 숨소리만이 크게 울렸다.
“……미안하다. 우리 집 생각이 나서 들떴나 봐.”
강 일병이 이마의 땀을 훔치며 조용히 사과를 한다. 진우는 다 안다는 표정으로 고개만 끄덕였다.
“강 일병! 박 이병! 대답해!”
옥상에서 이 병장의 애타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강 일병은 갈라진 목소리로 외쳤다.
“정리했습니다! 상황 종료입니다!”
“둘 다 괜찮아?”
“네, 그렇습니다!”
“내려간다!”
잠시 후, 뒤따라 내려온 이 병장이 엉망으로 부서진 안방과 거실을 보며 한숨을 쉰다.
“아이구, 이놈들 봐라. 야! 조준 사격을 했어야지, 이게 뭐야?”
그 말대로 바닥과 벽 전체에 걸쳐 어지러이 총구멍이 나 있고, 이미 안방 커튼은 갈기갈기 찢긴 채 유리 조각과 한데 엉켜 있다.
“이상하게 갑자기 아무것도 보이지를 않았습니다…….”
강 일병이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 병장은 그런 강 일병을 한동안 바라보고 있다가 허리를 굽혀 거실 바닥에서 뭔가를 주워 건넸다.
“이 새끼야, 안경 간수 똑바로 안 할래? 다 빠개졌잖아.”
알이 다 쪼개진 안경을 받아 들고 강 일병은 좀비를 봤을 때만큼이나 두려운 표정을 지었다.
“저…… 이제 2미터 앞도 제대로 안 보이지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 자식아! 왜…… 후우~”
이 병장이 성질을 내려다가 삼킨다. 안경 쓴 병사에게 임무를 맡긴 건 그 자신이라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 병장은 불안해하는 강 일병의 어깨를 두드리며 달랬다.
“음, 큰일이긴 한데, 일단 여기서 나간 다음에 어떻게 할지 생각 좀 해보자.”
강 일병은 조금이라도 더 또렷하게 보려는 듯 이마에 주름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그 시각, 열네 명의 707특임대는 목표물이 있는 2층의 소강당 문 앞에 도착해 있었다.
굳게 잠긴 문 안쪽에 얼마나 많은 집기들을 쌓아뒀는지, 구조대가 왔다는 것을 알린 뒤에도 안에서는 한참 동안 문을 열지 못하고 덜컥거리기만 했다.
“가지 마십쇼! 열고 있습니다!”
다급한 군인들의 목소리가 두꺼운 문을 타고 전해진다.
그롸아아악!
두 개의 계단에서는 잊을 만하면 한 무리씩 좀비들이 뛰어 내려왔다가 쏟아지는 총알에 엉망으로 꿰뚫려 쓰러져 갔다. 두 개의 방패를 가장 앞에 세워두고 샷건과 기관단총이 나란히 서서 다가오는 놈들을 정리했다.
“이상한데? 너무 적어.”
특임대의 지휘관이 주변을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지금까지 그들이 정리한 좀비를 모두 더해봐도 채 70여 마리에 미치지 못한다. 이 정도라면 규모 셋이라는 보고가 허위이거나, 놈들의 주된 무리가 다른 곳에 있다는 말이다.
덜컥!
마침내 소강당의 문이 열리자, 진을 친 대원들을 문밖에 그대로 둔 채 두 명의 대원만 대동한 지휘관이 방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초췌한 표정의 병사들이 일제히 그를 향해 경례를 한다. 방의 구석에는 중년의 남자들이 역시 겁에 질린 얼굴로 그를 맞이했다.
“소령님, 정말 감사합니다! 얼마나 기다렸는지…….”
소위 하나가 반갑게 맞으려고 호들갑을 떤다. 소령은 손을 들어 제지했다.
“왜 병력이 이것뿐이야? 2개 소대였잖아? 아, 그보다, 그거 어디 있어?”
뭐라고 설명을 하려던 소위는 소령을 이끌고 소강당의 끝으로 갔다.
거기에는 검은 천으로 덮인, 관 하나 정도 크기의 물건이 있었다. 소위가 덮고 있던 두꺼운 천을 확 들추자, 합금으로 주조된 국방색 상자가 모습을 드러낸다.
추락의 여파 때문인지 여기저기 긁혀 있는 곳은 많지만, 특별히 크게 파손된 부분은 없어 보인다. 그래도 회수하기 전에 먼저 내용물을 확인해야 했다.
‘US AIR FORCE’라는 글자가 또렷한 상자의 앞에 쪼그려 앉은 소령은 한쪽 끝에 달린 컨트롤 패널을 열고, 소위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암호 해제했다고 했지? 열쇠!”
소위는 머뭇거리면서 말했다.
“저 그게…… 중위님이 가지고 가셨습니다.”
“뭐?”
소령은 눈을 부라리며 돌아섰다.
“그게 무슨 말이야? 열쇠를 가지고 어디로 갔다는 건가?”
“보급이 늦어서 식량을 구하러 가신다고…….”
너무 어처구니없는 소리여서 소령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럴 리가 있나. 여기가 최우선일 텐데 보급이 안 오다니?”
“정말입니다. 발견하자마자 이동 수단을 요청했었는데, 이틀째 아무 답도 없고 보급도 끊긴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현지 조달을 하러 나갔다고? 열쇠를 걸고? 이런 미친! 이 물건이 어떤 것인 줄 몰라서 그런 말을 하나?”
소위의 멱살을 쥐고 흔드는 소령의 눈에서는 불이 뿜어져 나올 것 같았다. 하지만 애초부터 미심쩍은 구석이 있기는 했다.
“큭, 그게! 당시에는…… 이렇게 좀비들이 많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쉽게 다녀오실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갑자기…….”
“어디로 갔냐고! 그것만 말해!”
“홈플러스입니다. 여기에서 1킬로미터 정도밖에는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소령은 소위를 내팽개치며 한숨을 내쉬었다. 좀비들이 유난히 몰려 있던 파란색 건물. 그도 이곳으로 헬기를 타고 오는 동안 직접 목격했다. 저곳이 작전 지역이 아니라 다행이라는 농담까지 내뱉었는데…….
빠드득! 소령은 이를 갈았다. 성질 같아서는 이 멍청한 놈들을 그냥 내버려 두고 가고 싶지만, 열쇠는 필요하다. 열쇠가 어느 좀비의 위장 속에 들어가 버리기 전에 한심한 중위를 구하러 삼척 시내를 가로질러 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