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 천국과 지옥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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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 천국과 지옥 (3)
2021.11.28.
귀를 찢을 것 같은 기관총 소리가 사납게 울리며 건물 전체를 뒤흔든다.
좁은 계단은 순식간에 화약 냄새와 연기로 자욱해졌다. 거기에 더해 좀비들의 괴성과 악취, 사방으로 튀는 뼈와 체액이 섞여 병사들의 정신을 빼놓았다.
“옥상! 전투 준비해!”
3층 복도에서 좀비들을 모두 저지할 수 없다는 걸 절감한 이 병장은 탄창을 비우자마자 옥상으로 뛰어 올라갔다. 진우는 정 상병의 곁에 서서 무표정한 얼굴로 방아쇠를 당겼다.
파파파파파! 파바박― 파박―
쓰러뜨리고 또 쓰러뜨려도 놈들은 일말의 두려움도 없이 동료들의 시체를 밀치며 열심히 계단을 뛰어 올라왔다.
***
“어후~ 머리 너무 아파요.”
해가 중천에 떠오른 뒤에도 한참을 더 잠들어 있다가 일어난 제니가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고 엄살을 떤다.
그 모습이 어찌나 귀여운지, 보안관은 자신의 머리도 깨질 것 같다는 걸 잊은 채 마냥 웃어준다. 너무 오랜만에 마신 술이어서 평소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큰 숙취가 느껴졌다.
“자, 이거 먹고 나서 진통제 먹으면 돼.”
유빈은 제대로 몸을 가누지 못하고 있는 보안관과 제니, 신입에게 종이컵에 담긴 죽을 내밀었다.
즉석밥에 물을 붓고 참치 통조림을 조금 넣어 끓인 보잘것없는 죽이지만, 좀비 세상에서는 이만하면 더없이 호사스러운 해장 음식이다.
“진통제 먼저 먹으면 안 돼요?”
제니가 어리광을 부린다. 삼식이는 고개를 저었다.
“에이, 안 돼. 빈속에 그랬다가는 속이 더 뒤집힐 거야. 그러게 왜 할 줄도 모르는 술을 그렇게 마셨어?”
“……그거야 기분이 너무 좋았으니까.”
제니는 후후, 불어 식힌 뒤, 조금씩 떠서 죽을 입에 가져갔다. 벌써 두 컵째 맛있게 들이켜는 보안관과 달리, 신입은 조용히 툴툴거렸다.
“에이, 이런 게 무슨 해장이 돼? 북엇국 같은 걸 좀 끓이지.”
“정 먹고 싶으면 이따가 네가 재료를 가져와. 끓여줄 수는 있으니까.”
유빈은 담담한 말투로 대꾸했다.
“아, 맞다. 오늘 우리 이제 뭐해요?”
제니가 조금 부어 있는 눈을 억지로 뜨면서 유빈에게 물었다.
“특별히 바쁜 건 없는데……. 물은 너희 자는 동안 삼식이랑 나랑 길어 왔으니까.”
아침에 산에 올라서 살펴봤을 때에도 산 뒤쪽의 좀비들은 별다른 변화 없이 여전히 아파트 앞을 지키고 있었다. 유빈의 대꾸에 제니는 손뼉을 치며 기뻐한다.
“그럼 우리 오늘은 다 같이 쇼핑 가요. 어제 빼먹고 안 가져왔던 것들도 다 가져오고, 그리고 옷도 새로 갈아입어요, 네? 유빈 오빠는 어제 그런 재미 하나도 못 봤잖아요.”
“그러자. 나도 너 몸빼 입은 거 더 안 보고 싶었어.”
보안관이 제니의 편을 들며 마주 보고 웃는다.
이상해. 이렇게 행복한 상태로 살아도 되는 걸까?
유빈은 고개를 끄덕여 동의하면서도 갑자기 찾아온 풍요에 불안감을 털어내지 못했다.
“이제 커피 마셔요, 우리!”
죽 한 컵을 마시고 조금 기운을 차린 제니가 냄비에 물을 부어 끓이며 커피 믹스를 뜯었다.
제니가 나에게 커피를…….
보안관이 커다란 덩치로 제자리에서 빙그르 돌며 무용을 한다. 환상이 연거푸 이루어지는 통에 도무지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모양이다.
“어제 우유도 가져왔거든요. 이거랑 설탕도 조금 넣으면 더 맛있어져요. 유빈 오빠, 이것 좀 뜯어줘요.”
제니가 멸균 우유팩을 내밀고 설탕 봉지를 찾아온다. 잠시 후, 끓어오르는 물을 종이컵으로 떠서 커피 믹스를 부어놓은 종이컵에 붓고, 우유 조금과 설탕을 더한 뒤 나무젓가락으로 살살 저어 다섯 잔을 만들었다.
“자아, 커피 드세요. 제니표 커피입니다~ 헤헤.”
종이컵을 받아 든 보안관은 감격을 숨기지 못하고 금방이라도 와락 껴안을 것 같은 표정으로 제니를 바라보다가 콧노래를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 난 그대 잘 알죠. 뭘 좋아하는지.
아침마다 타줄 수 있는데~ 부드러운 밀크 커피 ~♪
♪ ~ 한 번만 내게 웃어준다면, 손 내밀어준다면~
I’m yours~ 달려갈 텐데, 아주 깊은 밤에라도 ~♪
일주일 전만 해도 귀가 닳도록 들었던 노래이지만, 까맣게 잊고 있던 핑크 펀치의 신곡, ‘두근두근’이다. 보안관이 덩치에 어울리지 않는 가성으로 흥얼거리자, 제니는 유쾌하게 웃으며 보안관의 등짝을 때렸다.
“하하하! 보안관 오빠, 엄청 못 불러. 내가 언제 그렇게 불렀어요?”
타박을 받은 후에도 일단 필이 올라온 보안관은 멈추지 않고 계속 흥얼거리며 커피 향기를 음미했다.
“미친놈, 신났네…….”
신입이 나지막하게 중얼거리며 커피 잔을 들더니, 다시 제니에게 내밀었다.
“제니야, 난 설탕 좀 더 넣어줘.”
“엑, 아직 마시지도 않아놓고서…….”
종이컵을 받아 든 제니가 어이없어 하자, 신입이 한쪽 눈을 찡긋하며 웃어 보였다.
“훗, 기억해 둬. 난 달게 마시는 걸 좋아하니까.”
“미친놈아! 네 손으로 타서 처마셔!”
보안관이 발끈해서 소리를 지르자, 신입은 곧바로 저항했다.
“아니, 어차피 타 주는 건데 가장 맛있게 마시고 싶은 것도 안 돼? 다 공평하게 한 잔씩 타 주는 거잖아!”
제니가 얼른 끼어들어서 티격대는 두 사람을 만류했다.
“자자, 싸우지 마요. 얼마 만에 마시는 커피인데……. 알았어요. 신입 오빠는 설탕 더 넣어주고…….”
“그럼 난 한 잔 더 타 줘!”
보안관이 어린애처럼 유치하게 굴어도 제니는 환한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여 준다.
유빈과 삼식이도 실로 오랜만에 따뜻한 커피를 음미하며 만족한 웃음을 지었다. 식후의 따뜻한 커피 한 잔이 이렇게나 좋은 거였나 하는 생각이 든다.
“오빠, 나 진통제랑 따뜻한 물 주세요.”
제니가 창가로 걸어가며 유빈에게 부탁을 한다. 삼식이와 보안관 덕에 진통제는 정말 무지하게 많다. 유빈은 아스피린 두 알과 따뜻한 물이 담긴 종이컵을 가지고 걸어갔다.
“으아아~”
햇살이 가득한 창가에 기대 커피를 마시던 제니가 크게 기지개를 켜며 유빈에게 말했다.
“정말 평화롭네요.”
***
“올라와! 올라와!”
옥상에서 아무리 악다구니를 써봐도 3층의 정 상병과 진우는 도무지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 좁은 복도 속에서 계속 기관총의 소음에 노출되어 있었으니, 듣지 못하는 것도 무리도 아니다.
파파파파파바바― 투투툭―
3층으로 통하는 계단은 좀비들의 파편으로 엉망이 되어 있었다. 아무리 머리가 터지고 내장이 다 날아가도록 총을 난사해 대도 놈들은 순서를 기다려 미친 듯이 달려든다.
“정 상병! 올라가!”
답답해진 이 병장이 뛰어 내려와 정 상병의 어깨를 두드렸다.
“네에~?”
정 상병이 깜짝 놀라 돌아보며 고함을 질렀다. 아마 귀가 윙윙 울려서 소리가 제대로 들리지 않는 모양이다.
“올라가라고!”
이 병장은 그보다 더 크게 소리를 지른 후, 시간을 벌어주기 위해 K―2를 연사했다. 정 상병이 철컥거리며 기관총과 탄약통을 챙겨 일어나자, 진우도 낌새를 알아차리고 후퇴할 준비를 마쳤다.
“가자!”
이 병장과 진우는 서른 발을 고스란히 쏟아부은 후에 곧바로 몸을 돌려 계단을 뛰어올랐다.
“쏘지 마! 쏘지 마!”
혹시나 기다리고 있던 병사들이 오인 사격을 할까 봐 소리를 지르며 옥상 문밖으로 뛰어나갔다.
진우까지 계단의 저지조가 모두 빠져나온 것을 확인한 병사들은 곧바로 쇠문을 닫고 에어컨 실외기를 끌어다가 막아 세웠다.
“간격 유지해! 너! 너! 오른쪽으로 이동!”
이 병장이 병사들의 위치를 조정해 주며 전투 지시를 내렸다. 문부터 옥상 반대쪽 끝까지는 불과 10여 미터. 병사들은 부채꼴처럼 벌려 섰다.
쿵쾅!
잠기지 않은 문이 흔들리며 요란한 소리를 낸다.
타타타타―
저 아래쪽에서는 K21의 기관총이 쉼 없이 총알을 퍼부어 대고 있었다.
“박 이병!”
“네!”
“너까지 다섯 명이 먼저 쏜다. 절대 총알 낭비하지 말고, 문이 완전히 열린 뒤에까지 기다려. 알았지!”
진우는 정 상병과 김 상병이 포함된 자기 팀을 돌아보고 크게 대답했다. 이 병장은 좌측의 나머지 세 명에게 명령했다.
“우리 넷은 쟤들이 탄창 갈아 끼우는 동안에만 사격한다. 알겠어? 절대 동시에 쏘지 마라!”
“넷!”
병사들의 목소리가 긴장감으로 흔들린다. 이 병장은 그런 그들을 달랬다.
“침착하게 쏴! 그럼 돼! 50마리도 안 남았다! 충분히 다 잡을 수 있어!”
아니…….
진우는 그 숫자에는 동의할 수 없었다. 계단에서 요란하게 쏴대긴 했지만, 실제로 잡은 건 서른 놈에도 못 미친다.
추격해 오는 속도를 줄여보려고 난사를 해서, 한 마리를 잡는 데에도 대여섯 발씩의 총알이 필요했다.
덜컥! 덜컥!
문이 흔들리며 실외기를 밀어낸다.
“야, 박 이병. 이거 챙겨라.”
김 상병이 진우에게 탄창 두 벌을 건네며 말했다.
“넌 올라오면서 계속 쐈잖아.”
진우는 고개를 꾸벅하고 탄창을 받아 주머니에 꽂았다.
콰장창!
옥상 문이 밀리면서 좀비들이 뛰어나온다.
그롸아아악―
괴성이 울리자마자 온몸에 소름이 돋는다.
타타타타타― 타타타타타―
정 상병의 K―3가 가장 먼저 스타트를 끊었다. 그리고 김 상병이 하늘을 향해 서너 발을 쏘아 올린다.
가장 앞서 있던 좀비의 몸통과 머리가 산산조각 나면서 사방으로 흩어지고, 그 체액이 땅에 떨어지기도 전에 뒤에 서 있던 놈들이 박살이 난 동료의 몸을 뚫고 달려들었다.
투투투둑! 투둑!
진우도 부지런히 방아쇠를 당기고, 또 표적을 옮겼다.
좀비의 뇌가 터져 나가며 회색의 단백질 조각들이 뒤이어 달려오는 좀비들의 옷 위로 튄다. 다행히 놈들이 달려 나올 수 있는 유일한 출구는 사람 두 명이 겨우 빠져나올 수 있을 만큼 좁은 문뿐이다.
“탄창!”
김 상병이 가장 먼저 소리를 치면서 탄창을 갈았다. 그에 해당하는 화력을 보충하기 위해 이 병장이 곧바로 방아쇠를 당겼다.
“아무 데나 쏘지 말고 다리라도 날려!”
이 병장이 김 상병에게 충고를 한다. 김 상병은 갑자기 깨달았다는 듯 납작 엎드려서 사격을 시작했다.
이 정도 거리에 이 각도라면 아무리 위로 날아가는 그의 총알이라도 가슴팍 정도는 맞출 수 있을 것이다.
그롸아아악―
좀비들은 곤죽이 돼버린 다른 좀비들의 시체를 걷어차며 겁 없이 달려든다.
진우는 열심히 놈들의 머리통을 날렸다. 그의 총구가 한 번씩 방향을 바꿀 때마다 10여 미터 전방에서는 머리 반쪽이 터져 나간 좀비의 시체가 땅바닥에 뒹군다.
“탄창!”
진우가 탄창을 교체하는 동안 두 명의 지원 병력이 그의 자리를 채우기 위해 쉬지 않고 방아쇠를 당겼다.
파바바바바박―
대번에 머리를 날리지는 못해도, 옆구리를 직격당한 좀비들은 총알의 힘에 의해 뒤로 고꾸라져 버린다.
그와아악―
달려들던 좀비들이 질척한 피와 뇌수를 밟고 미끄러진다. 일시에 다섯 개의 총구가 모두 바닥 쪽으로 향하면서 화력에 구멍이 생기자, 이 병장이 곧바로 K―2를 난사하며 소리를 질렀다.
“입구 비었잖아, 이 새끼들아!”
진우는 얼른 총구를 돌려 이 병장을 도왔다.
투두둑― 투둑―!
어깨와 머리가 날아간 좀비들이 맥없이 고꾸라진다. 얼마나 죽였을까.
마침내 옥상 입구가 가로막힐 만큼 좀비들의 시체가 높이 쌓이고 더 이상 움직이는 것이 없자, 이 병장은 손을 들어 발포 중지 명령을 내렸다.
“하아…… 하아…….”
병사들은 숨을 고르면서 탄창을 점검했다. 정 상병의 K―3는 이미 가지고 왔던 200발 탄띠 두 개를 다 쏟아부은 상태다.
“끝난 거 아니야! 조용히 기다려!”
이 병장이 병사들의 긴장을 유지시키기 위해 소리를 지른다. 하지만 굳이 그런 말을 하지 않아도 눈앞에 좀비들의 동강난 시체가 산처럼 쌓여 있는데, 총구를 내릴 만큼 배짱이 좋은 사람은 없었다.
들썩들썩, 시체 뭉치가 흔들릴 때마다 병사들은 자기도 모르게 뒤로 반 발짝씩 물러났다.
툭, 워커 뒤축에 옥상 난간이 닿으면서 더 이상 달아날 공간이 없다는 것을 일러준다.
그롸아악―
시체들이 들썩거리는 안쪽에서 괴성이 울려온다. 언제 어느 방향으로 튀어나올지 모르기 때문에 모든 좀비들이 문 한 곳에만 집중되어 있던 조금 전과는 긴장감이 다르다.
툭, 데구르르르―!
흔들리던 시체 더미에서 윗부분이 반쯤 잘려 나간 대갈통이 떨어지며 병사들이 선 방향으로 굴러온다. 하필이면 엎드려 있던 자신의 코앞에 멈춰 선 대갈통을 보고 김 상병은 질겁하며 욕설을 내뱉었다.
젠장, 좀비도 무섭지만, 목이 잘린 대머리 아저씨의 머리가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는 것도 어지간히 소름이 돋는 상황이다.
“뭐야! 이 씨발, 재수 없게!”
더 참지 못한 김 상병은 벌떡 몸을 일으키며 머리통을 앞으로 걷어찼다. 그와 동시에 시체 더미가 무너져 내리고, 네 방향에서 좀비들이 달려 나온다.
그와아아아―!
“쏴!”
이 병장이 명령과 함께 가장 오른쪽의 놈들을 향해 총알을 날렸다.
투투투― 투투둑!
진우는 중앙부터 시작해 좌측으로 방향을 옮기며 머리만 조준해서 쏘았다. 김 상병이 뒤로 물러나며 정신없이 연사를 한다.
팅티팅―
총알이 옥상 문 위의 콘크리트를 쪼개며 어지러이 튄다.
겁에 질린 병사들 전부가 사격 순서에 관계없이 모두 연사로 마구 갈겨 댔지만, 명중률은 높지 않았다. 비처럼 쏟아지는 총알 사이를 뚫고, 살아남은 좀비 한 마리가 정 상병을 덮치기 위해 날았다.
“으아아!”
병사들이 모두 비명을 지르는 순간, 진우의 개머리판이 좀비의 머리통을 때려 달려드는 방향을 바꿨다.
그롸아―
옆으로 나가떨어진 좀비는 곧바로 벌떡 몸을 일으킨다.
타타타―
병사들은 일제히 방아쇠를 당겼다. 놈은 사방으로 체액과 내장을 날리며 너덜너덜해져 허물어졌다.
“끄…… 끝난 건가?”
상체가 거의 남아 있지 않은 놈의 시체를 살피던 김 상병이 숨을 몰아쉬며 혼잣말처럼 묻는다. 진우는 여전히 어깨에서 개머리판을 떼지 않은 채 천천히 옥상 문 주변을 훑었다.
엉망으로 널브러진 시체들 중에는 더 이상 움직이는 놈이 보이지 않는다. 아마도 지금 해치운 예닐곱 마리가 남아 있던 녀석들의 가장 마지막 전력이었던 모양이다.
조금 전, 시체 더미를 쉽게 밀쳐내고 나오지 못했던 것만 봐도 움직이는 놈들이 그리 많지는 않았다는 걸 추측할 수 있었다.
아직도 완전히 긴장이 풀리지 않은 병사들은 겁에 질린 눈으로 총을 꽉 움켜쥔 채 전방을 노려보았다.
“씨발, 저기를 이제 어떻게 내려가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