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 빈집털이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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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 빈집털이 (4)
2021.11.24.
보아하니 다들 너무 성급하게 퍼부어 대서 곧 뻗을 것 같은 분위기라 유빈은 몇 잔만 더 받아주기로 했다. 물론 괴물 같은 삼식이는 그렇게 퍼마셔 놓고서도 아직 멀쩡하지만…….
세 남자의 첫사랑 이야기나 학창 시절 추억 같은, 별것 아닌 농담에도 다들 깔깔거리며 술잔이 서너 바퀴 돌고 나자, 탈락자 2호가 나왔다. 제니 대신 유빈의 어깨라도 꼭 끌어안고 짓눌러 대던 보안관이었다.
“제니야, 진짜…… 너무…… 좋아…….”
보안관은 그 말을 마지막으로 유빈의 무릎 위에 엎어져 잠이 들었다. 가뜩이나 큰 덩치가 축 늘어지니, 삼식이와 둘이 힘을 합해도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스티로폼 위까지 옮기는 게 최선이었다.
“이제 우리도 정리하자. 너도 꽤 취한 것 같고…….”
유빈의 말에 제니는 두 손을 어깨 위로 들어 올리며 단호하게 대꾸했다.
“난 하야도 안 취했지~”
‘하나도’의 발음이 ‘하야도’로 나올 만큼 혀가 꼬부라져 있는데도 고집을 피운다. 그 모습이 재미있는지 삼식이가 낄낄대며 제니의 말을 흉내냈다. 유빈도 헛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 안 취했네. 하지만 뭐, 오늘만 날이 아니니까…….”
“정말요? 정말 내일도 오늘처럼 좋아요?”
갑자기 제니가 정색을 하며 묻는다. 상투적인 말로 달래서 술자리를 마치려던 유빈은 그녀의 눈빛 때문에 순간 멈칫했다.
“그래…… 좋을 거야. 걱정하지 마.”
“그럼 어떻게 될 건지 얘기해 줘봐요. 내일이랑 모레랑…… 그리고 그다음까지.”
얘는 왜 나한테 미래에 대해 묻는 걸까? 이렇게 꽉 막히고 앞이 안 보이는 상황 속에서 나 까짓 게 대체 무슨 말을 할 수 있다는 건지…….
유빈은 잠시 제니의 얼굴을 빤히 보고만 있었다. 혹시 삼식이가 도와주지 않을까 싶어서 시선을 돌려봤더니, 삼식이는 잽싸게 자리를 피하며 담배에 불을 붙인다.
“내일도 오늘이랑 똑같아. 아주 좋은 하루가 될 수도 있고, 또 그렇지 않을 수도 있고…….”
유빈이 솔직히 말하자, 제니는 슬픈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 하루하루가 쌓이면 어떻게 되냐고요. 오빠는 머리가 좋으니까 무슨 계획이 있을 거잖아요.”
유빈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하루하루 먹을 걸 걱정하는 이 마당에 계획 따위 있을 턱이 없다는 걸 그 자신도, 제니도 잘 알고 있다. 결국 지금 술에 취한 그녀가 듣고 싶은 건 그냥 거짓말일 뿐이다.
귓가에 달콤하게 남아서 잠이 들도록 도와주는, 잘 꾸며진 이야기. 때론 그게 진실보다 더 간절하게 필요할 때도 있다.
쉰내 나는 남자들 틈바구니에 혼자만 던져진 채 온갖 심리적 압박을 몰래 참아왔던 제니가 지금 그런 것처럼…… 유빈은 거짓말을 하기 시작했다.
“……계획? 당연히 있지.”
“오, 정말요?”
제니가 반색을 한다.
“그래. 일단 좀비들이 사라진 곳 전부를 우리 요새로 만드는 거야.”
“요새? 요새를 어떻게?”
“응. 길을 다 막아서 좀비들이 몰려올 수 없게 해둘 거야. 엄청 강력한 함정도 파놓고, 또 파출소에 들어가서 무기도 확보하고, 우리만 알고 있는 미로들도 만들어놓고……. 그런 다음에 우리는 경전철 선로를 이용해서 자동차를 타고 멀리까지 정찰을 다니는 거지. 타이어만 벗겨내면 기차랑 비슷하게 달릴 수 있거든.”
“정찰은 뭣 때문에 하는 거예요?”
“어딘가에 우리들처럼 살아남은 사람들이 있을 거잖아. 그 사람들을 다 구해서 이 주변에 새로 도시를 만들 거야.”
“어머! 그런 사람들이 있다고?”
“그럼! 당연히 있지. 그 사람들이랑 힘을 합해서 매일 우리 요새를 1미터씩 늘려 나가는 거야. 무리하지 말고 안전하게, 아주 조금씩만.”
“그동안에 그 많은 사람들이 뭘 먹어요?”
“처음엔 가게에 있는 물건들을 먹으면서 지내지만, 저기 철책 너머 벌판에다가 씨앗을 심으면 금방 자랄 거야. 엄청 넓잖아.”
“근데 유빈아, 씨앗은 어디서 구해? 그리고 우리는 농사지을 줄도 모르는데.”
언제부터 유심히 듣고 있었는지, 삼식이가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끼어들며 묻는 바람에 유빈은 말문이 막혔다.
이 새빨간 구라를 너까지 믿으면 어쩌자는 거냐. 너는 술도 안 취한 놈이…….
유빈은 여러 가지 의미를 담아서 삼식이의 어깨를 두드린 다음 말을 이었다.
“웬만한 큰 슈퍼에 가면 다 있어. 토마토랑 감자, 오이, 고추 같은 거. 봉투 뒷면에는 어떻게 키워야 하는지도 다 적혀 있고. 그 정도만 있어도 앞으로 살아가는 데 걱정은 없지.”
“하하하, 강제 채식주의네.”
“그래. 그렇게 하다 보면 겨울이 올 거야. 우리는 옷을 두껍게 껴입을 수 있지만, 좀비들은 그게 안 되잖아. 몇 번 눈이나 비를 맞고 찬바람을 쐬고 나면 저절로 깡깡 얼어버릴 거라고. 얼었다 녹았다를 반복하다 보면 결국 썩어서 머리고 뭐고 다 떨어져 나갈 거야.”
“그때도 우리는 다 같이 있어요? 아무도 안 죽고?”
삼식이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 듣고 있던 제니가 묻는다. 유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물론이지. 아무도 다치지 않는 게 이 계획의 제일 좋은 점이야. 우린 그저 지금처럼 다 같이 맛있는 걸 먹고 따뜻하게 불을 쬐면서 기다리기만 하면 돼. 봄이 오면 좀비는 하나도 남김없이 사라져 버릴 테니까. 우린 그냥 나중에 청소만 좀 하면 돼. 꿈같은 이야기지만, 지금이 7월이잖아, 넉넉하게 계산해 봐도 채 8개월도 남지 않았어. 마음만 먹으면 정말 순식간에 지나가 버릴 만큼 짧아.”
“……거짓말이죠? 그렇게 쉬울 리가 없잖아.”
“거짓말 아니야. 물론 나 혼자였다면 도저히 무리겠지. 그렇지만 삼식이나 보안관, 그리고 무엇보다도 제니, 네가 있어서 그런 계획을 세울 엄두가 나는 거야. 아무리 괴로워도 네가 웃고 있는 걸 보면 절대 포기하고 싶지 않은 기분이 들거든. 앞으로 우리가 구조해 낼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일 거라고 생각해. 왜냐하면…….”
거기까지 말하고 유빈은 입을 다물었다. 어느새 제니는 안정적인 숨소리를 내뿜으며 잠 속에 푹 빠져든 채였다.
“왜냐하면 뭐?”
삼식이가 뒷이야기를 궁금해하며 입을 열려고 할 때, 유빈은 검지를 세워 입술에 가져다 대고 조용히 하라는 시늉을 했다. 자기 어깨에 기댄 채 잠이 든 제니를 뒤늦게 알아채고 삼식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보안관이 알면 날 죽일 거야.”
제니가 좀 더 깊이 잠이 들 때까지 기다렸다가 번쩍 안아 방에 뉘어주고 나서 삼식이가 소곤거렸다.
유빈은 피식 웃은 다음 신입을 굴려 스티로폼 위에 눕히고, 빈 술병들을 한군데 모았다. 후끈거리는 날씨 때문에 조금만 움직여도 땀이 솟는다.
“유빈아, 내일 당장 씨를 뿌려놓는 게 좋을 것 같아. 슈퍼에 가면 정말 감자 씨 있어?”
창가에 서서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삼식이가 물었다. 그 곁에서 무표정한 얼굴로 컴컴한 벌판을 한참 바라보고 있던 유빈은 대답 대신 조용히 중얼거렸다.
“되게 덥다. 바람이 하나도 없네.”
***
여자는 슬슬 불안해졌다. 무엇보다도 대우가 너무 좋다는 게 마음에 걸린다. 아무리 구조된 사람들을 위해준다고는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목욕에, 건강검진에, 새로 옷까지 지급해 준다는 게 가능한 일일까?
깨끗한 스테인리스 식판 위에 놓인 정갈한 음식들을 보면서도 불안감 때문에 좀처럼 식욕이 들지 않는다. 지금까지 구조받은 사람 전부가 이런 호사를 누린다고 생각해 보면, 대체 며칠 동안이나 버틸 수 있단 말인가.
- 이거, 뭔가 구려.
구조되던 날, 자신에게 충고해 주던 민구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리는 것 같아 간호사는 한숨을 내쉬며 수저를 내려놓았다.
“왜 그러세요? 입맛이 없어요?”
옆 식탁에 앉은 아이 엄마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묻는다. 간호사는 고개를 저었다.
“아~ 다른 식구들 생각나서 그러세요? 하긴…….”
다 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아이 엄마의 표정이 그녀를 열 받게 한다.
이상해! 이상하다는 걸 못 느껴?
하지만 그녀는 결코 그런 소리를 입 밖으로 내지는 못했다.
이 건물의 모든 방 천장에는 CCTV가 몇 개나 달려 있어서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한다. 여자 열 명이 식사를 하는 이 작은 식당도 사정은 마찬가지고, 여기에는 감시인도 둘이나 붙어 있다.
“그나저나 정말 놀랐어요. 서울 한복판에 이렇게 안전한 곳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었거든요.”
후식까지 싹싹 긁어 먹은 아이 엄마가 웃으며 말하자, 그 건너편의 중년 여자도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게요. 하느님이 도와주신 거지, 뭐.”
그녀들의 말처럼 놀라운 일이기는 했다. 어제 구조된 그들은 헬리콥터로 불과 30여 분을 날아가 어느 큰 건물 옥상 위에 내려앉았고, 거기에서 고속 엘리베이터를 타고 곧바로 지하에 위치한 이 보호 시설로 이동했다.
워낙 경황이 없어서 정확한 위치를 파악하지는 못했지만, 서울의 강북 중심 어딘가라는 것만은 분명하다.
“그러고 보니…… 아주머니네 애기는요?”
갑자기 생각이 난 간호사가 아이 엄마에게 물었다. 어제까지 함께 밥을 먹었었는데, 오늘은 종일 보이지 않았다.
“으응, 우리 애 검사 결과가 먼저 나와서 아이 아빠랑 같이 가족실로 옮기게 해준다고 그러더라고요. 내일 제 결과 나오면 저도 그쪽으로 가게 될 거예요. 후후후, 자기들도 나 보고 싶다고 섭섭해서 울고 그러면 안 돼요.”
“어머, 잘됐다! 축하해요. 가족실이면 또 얼마나 좋아. 에그, 우리 남편도 살아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네. 남이랑 좁은 2인실 같이 쓰는 것보다 훨씬 낫지. 가족실이면 널찍하겠죠? 여기는 다 좋은데, 산책을 못 하게 하니까 그게 좀 답답해.”
“그거야 어쩔 수 없지, 뭐. 안전 때문에 지하에 있어야 한다는데.”
여자들은 아무렇게나 지껄여 대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소리들이 전부 간호사에게는 불길하게만 여겨졌다. 자기 애를 남에게 내주고서도 저렇게 느긋할 수가 있다니,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이 시설은 너무도 폐쇄적이어서 언제나 사람들이 모일 수 없게 한다.
식사 시간을 제외하면 좁은 2인실을 나눠 쓰는 사람하고만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 그나마도 남자와 여자의 시설이 나뉘어 있어서, 함께 구조되어 온 의사의 얼굴은 첫날 이후로 다시 보지 못했다.
“시간 됐습니다.”
감시인이 시계를 흘끗거리며 일어나라고 은근한 압박을 준다. 식사를 마친 여자들은 일렬로 서서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한번 수상하다는 생각이 들고 나자 병원처럼 온통 하얀색으로 칠해놓은 복도까지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자신의 방으로 돌아간 뒤에도 간호사는 도무지 인상을 펴지 못하고 침대에 누워 숨을 쌔근거렸다.
아이 먼저 아빠와 함께 가족실로 갔다고? 그게 말이 되나?
초조한 마음이 든 그녀는 이불을 꼭 쥔 채 멍하니 벽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그러던 중 그녀의 눈에 또 하나의 미심쩍은 구석이 발견되었다.
- 밥 먹지 마.
그것은 하얀색 페인트 위에 손톱으로 눌러 써놓은 글씨였다. 평소에는 그저 흰 벽으로만 보였을 테지만, 누워 있는 위치와 조명의 각도가 맞은 순간에 은회색의 글씨가 눈에 띄게 된 것이다. 간호사의 가슴이 쿵쾅쿵쾅 뛰었다.
‘내가 오기 전 이 침대에 누군가 있었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소름이 끼치게 무서워졌다.
대체 누가 쓴 걸까? 그리고 지금 그 사람은 어디에 있는 걸까? 밥 먹지 마…… 라니, 대체 이게 무슨…….
간호사는 천천히 시선을 옮겨서 다른 글씨가 더 있는지 살펴봤다.
- 무서워.
무서워. 침대보다 조금 낮은 높이에 쓰인 그 세 음절의 글자가 정말로 무서워서 간호사를 떨리게 한다.
CCTV를 피할 수 있는 각도에서 같은 획을 몇 번이나 반복해 그어놓은 글씨만 봐도, 쓴 사람의 한이 느껴질 정도다.
이 여자는 무엇을 무서워했던 걸까? 그리고 왜 밥을 먹지 말라고 했던 걸까?
간호사는 몸을 웅크리고서 열심히 생각을 했다. 그러자 몇 개의 단어들이 떠오른다.
바륨…… 안정제……. 그런 건가?
간호사는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돌이켜보면 자신도 오늘 낮까지는 기분이 좋았고, 의심 따위 추호도 해보지 않았다.
그러던 것이 오늘 점심의 후식을 남긴 다음부터 달라졌고, 저녁을 제대로 먹지 않은 지금은 모든 것이 수상하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게 됐다.
그녀들이 먹는 음식에 꽤나 많은 양의 안정제가 들어 있었던 것이다. 자기 애를 데려가도 추호의 의심 따위 없이 밝게 웃고만 있는 여자가 이제 이해된다.
‘이런 젠장.’
간호사는 부들부들 떨며 지금부터 어찌해야 할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민구의 말이 맞았다. 여기는 너무 수상하고 뒤가 구린 곳이다. 간호사는 분명히 달아날 수 있는 방법이 있을 거라고 굳게 믿으며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어떻게든 엘리베이터를 타고 다시 지상으로 올라가야 한다. 식당에서 포크를 숨겨 오면 여차할 때 무기가 될 수 있을까? 다른 여자들에게도 밥을 먹지 말고 내 이야기를 들어달라고 해볼까?
별의별 궁리를 다 해보았다. 그러나 단 한 가지, 그녀가 인식하지 못하고 있던 것은 CCTV 너머 저편에서 이 방을 들여다보고 있던 감시자의 눈이었다.
그녀의 안면에 고정되어 있던 카메라는 근육의 움직임과 동공의 확장을 컴퓨터에 그대로 전달했고, 그것을 분석한 컴퓨터는 이상 징후를 인간 감시원들에게 전달했다.
“E914065에서 수상한 움직임이 감지되었습니다. 어떻게 조처할까요?”
감시원이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보고하자, 고급 양복을 입은 사내가 다가와 잠시 모니터 화면을 들여다보고 나서 말했다.
“지금은 그냥 내버려 둬. 어차피 요 며칠 내에 ‘검사’할 대상이었지?”
“그렇습니다. 사흘 뒤 저녁으로 예정되어 있었습니다.”
“내일 오전으로 바꿔. 아침을 안 먹으면 주사하는 것도 잊지 말고.”
“네, 알겠습니다.”
감시원의 손가락이 키보드 위에서 몇 번 바쁘게 움직이자, E914065의 칸에 서너 가지 주의 사항과 함께 붉은 줄이 들어갔다. 간호사의 운명은 그렇게 결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