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 빈집털이 (2)
(83/449)
83. 빈집털이 (2)
(83/449)
83. 빈집털이 (2)
2021.11.22.
“다니시면서 혹시 최근에 저희 부대도 보셨습니까?”
김 상병이 그립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너희 부대가 어디였는데?”
“그…… 화천 15사 38연대…….”
“화천이면 그 부근은 포병들 중심으로 재편돼서 나머지 부대들은 싹 다 폐쇄됐어.”
“엑! 그럼 경계를 어떻게 합니까?”
“지뢰라도 박아뒀겠지, 뭐. 하긴 경계가 뭐에 필요해? 좀비들이 사방에서 보초처럼 돌아다니는데.”
“그럼 저희 부대 병력은…….”
“뭐, 그거야 다들 어디로 차출돼서 갔겠지. 인근 포병 부대로 지원을 가든가……. 화력집중을 위해서 지금 비어 있는 부대 많아. 안 그러면 다 좀비들한테 각개격파당하게 생겼으니까 어쩔 수 없지.”
무심한 듯 담배 연기를 내뿜는 조종사와 달리, 김 상병과 진우의 얼굴에는 당혹감이 스치고 지난다.
전역하고 나면 다시는 강원도를 향해서 오줌도 안 싸겠다고 다짐을 했지만, 막상 자대가 없어졌다는 말을 들으니 돌아갈 집을 잃은 것 같은 상실감이 든다.
“짐은 대강 다 옮겼나……. 야, 아부꾼. 살아서 또 보자, 새끼야.”
헬기를 돌아본 조종사가 담배를 비벼 끄고 떠나며 안전모를 탁, 치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한다.
“넵! 소령님, 안전 운항하시길 빌겠습니다.”
경례를 마치고 난 김 상병이 고개를 돌리며 한숨을 내쉰다.
“야, 박 이병. 우리 어떡하냐, 이제? 씨발, 자대가 없어졌다는 걸로 이렇게 막막해질 줄은 몰랐네.”
“저도 기분이 이상하지 말입니다.”
진우도 씁쓸한 얼굴로 대꾸했다. 돌아갈 곳마저 없다는 생각이 좀처럼 머리에서 떠나지를 않는다.
“어이, 근무 마치고 돌아오나?”
오후 12시 30분. 직원 기숙사 2층 창가에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던 발전소 직원 하나가 생활관으로 돌아가는 진우와 김 상병을 알아보고 인사를 건넨다. 일전에 대화를 나눴던, 그 아인슈타인 닮은 연구원이다.
쉬는 날인가 보네. 이런 시간부터…….
가볍게 목례로 답을 하자 아인슈타인은 잠시 기다리라는 손짓을 하더니, 곧바로 돌아와 김 상병에게 담배 한 갑을 던졌다.
“자, 독한 거 좋아하는 친구.”
“감사합니다.”
빨간 말보로를 받아 든 김 상병은 웃으며 손까지 흔들어준 뒤, 분대장인 이 병장의 눈치를 살핀다. 이 병장이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말했다.
“괜찮아. 어차피 내무반 전체가 나눠 피울 거니까.”
“어? 이 병장님, 이건 제가 개인적으로 받은 거지 말입니…….”
“압수할까?”
“아닙니다. 전우들과 꼭 나눠 피우고 싶습니다.”
“나도 그렇단다.”
이 병장이 능청맞은 얼굴로 김 상병의 어깨를 두드린다. 두 고참의 만담을 들으며 진우는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만난 지 며칠 되지는 않았지만 이 새로운 분대장은 꽤 괜찮은 사람이어서, 그나마 지옥 같은 하루하루를 버텨 나가는 데 적지 않은 도움을 준다.
물론 가뜩이나 힘든 병사들을 더 한계로 내모는 일도 있다. 새로 도입된 점호 방식이 그중 하나다.
어제 그 좀비 난동이 있고 나서 부대 전체에는 새로운 생활 수칙이 내려졌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지휘 본부 회의에서 한 시간 만에 결정했다고 하는데, 어지간히 좃같아서 모두들 내심 이를 바득바득 갈고 있었다.
철책 외부로 나갔다 돌아오는 병사는 무조건 새로운 방식의 점호를 받아야 한다.
그리고 그 새로운 방식이란, 바로 알몸 검사다. 어떤 미친 새끼 대가리에서 나온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지랄을 할 생각만 하면 진우도 분노 때문에 머리가 끓어오르는 것 같다.
“자, 자, 빨리 개인화기 거치시키고 점호 준비해라.”
그날 밤 뜯어 온 핑크 펀치 포스터가 깃발처럼 자랑스럽게 붙어 있는 생활관에 들어서자마자, 이 병장은 총기거치대의 자물쇠를 걸게 하고 늘어지는 분대원들을 다독였다.
“예에~”
힘없이 대답한 병사들은 군화와 하이바를 벗고 침상 위에 올라가 군복 위아래, 심지어 속옷까지 모두 탈의해서 옆자리에 차곡차곡 쌓아둔 다음, 벌거벗은 채 차렷 자세를 하고 섰다.
그렇게 하고 있으면 잠시 후, 당직사관이 무장한 병사 셋을 거느리고 들어와 병사들의 몸을 찬찬히 훑으며 지나간다. 맨 뒤에 선 병사가 메고 있는 커다란 배낭에 눈길이 간다. 소문에는 저 속에 헬멧이 들어 있다고들 했다.
당직사관이 생활관 끝까지 걸어간 다음, 뒤로 돌아 명령을 내렸다. 지친 표정의 병사들은 구령 소리까지 붙이면서 몸을 돌렸다. 당연히 아무도 물린 사람은 없지만, 긴장한 병사들의 몸에서는 땀이 줄줄 흘러내린다.
“씨발, 룸싸롱 초이스도 이렇게는 안 하겠다. 좃같아서…….”
검사를 마친 당직사관이 나가자마자 급하게 팬티를 집어 입으면서 김 상병이 투덜거렸다.
“시끄럽고. 얼른 바지나 입어, 인마.”
이 병장도 못마땅한 얼굴로 다시 주섬주섬 옷을 걸친다. 그의 옆자리 다른 상병도 불만이 많다.
“후우, 우리가 무슨 죄지은 것도 아니고, 왜 이런 꼴을 당해야 합니까? 좋아서 물리는 새끼도 있습니까?”
“어허!”
이 병장이 눈을 위아래로 부라리자 투덜대던 병사들은 어쩔 수 없이 입을 다물었지만, 분한 마음은 감출 길이 없다.
밑에서 아무리 불평하고 화를 내봐도 한 번 내려진 명령은 거둬들여지지 않는다. 어디 하소연할 곳도 없다는 게 더 지랄맞다.
“그냥 목욕탕에 왔다고 생각하자. 응? 그렇게 생각해 버리면 별것도 아니야.”
상병 둘과 진우를 끌고 나와 담배를 피우면서 이 병장이 말했다. 진우는 흡연을 하지 않지만, 김 상병이 옆에 서 있기라도 하라며 억지로 데리고 왔다.
“하지만 말입니다.”
김 상병이 갑자기 목소리를 낮췄다.
“만약에 우리 중에 누구 하날 지목하면 어떻게 합니까? 당직사관이 ‘너 물렸네, 데리고 가’, 이러면 그냥 인생 끝나는 거지 말입니다.”
이 병장이 귀찮다는 얼굴로 대꾸한다.
“야, 이 새끼야. 물리면 어차피 끝장이야.”
“제가 말씀드린 건 다른 상처인데 저쪽에서 물렸다고 해버리는 경웁니다. 그러면 억울하게 그냥 뒈지는 거 아닙니까? 듣자 하니까 점호에서 걸리면 헬멧 씌운 다음 의무대로 데려가서 주사 한 방으로 죽여 버린다던데.”
“이 새끼…… 어디서 이상한 헛소문을 듣고 와서…….”
이 병장이 말 같지도 않다는 반응을 보이자 김 상병은 정색을 하고 대학원 기숙사 건물 최상층을 흘겨보며 더욱 작게 속삭였다.
“어제 그 꼴을 보시고도 저 새끼들이 안 그럴 거라고 확신하십니까? 끌려간 다음에 어떤 처분을 받는지도 이야기 안 해주지 말입니다.”
모두들 김 상병의 눈길을 따라 임시 본부를 돌아보았다.
흠, 흠, 헛기침을 하며 목소리를 가다듬은 이 병장이 분위기를 가라앉힌다.
“저기도 다 사람들이야. 그렇게까지는 안 하니까 다시는 그런 소리 입에 담지 마라. 알았어? 후우~ 이건 씨발, 독하기만 하고 맛대가리도 없네. 나머지는 네가 다 피워라.”
이 병장은 말보로 레드를 김 상병의 군복 주머니에 넣어주고 가슴을 탁, 쳤다. 경고와 위로의 의미가 모두 담겨 있는 행동이었다.
***
보안관과 삼식이는 먼저 일전에 철책을 두고 왔던 3층 건물 위로 기어 올라가서 철책부터 아래로 내렸다. 이게 있으면 최악의 상황이 닥쳐 건물 옥상으로 도망친다고 해도 옆 건물로 이동할 수는 있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창문에서 뛰어내릴 수도 있으니까 길 가운데로 가자. 제니, 넌 우리 뒤에 바짝 붙어.”
보안관이 완전히 긴장을 풀지 않은 채 오른손으로는 해머를, 왼손으로는 철책의 한쪽 끝을 꽉 잡고 뻥 뚫린 거리를 앞장서서 걷는다. 제니와 삼식이, 신입도 상기된 얼굴로 그 뒤를 따랐다.
신중한 말과는 달리 모두들 가슴이 두근거려서 한시라도 빨리 슈퍼를 향해 달려 나가고만 싶다. 하지만 아직은 자제해야 할 필요가 있기에 그들은 애써 욕망을 억누르며 펄쩍펄쩍 뛰어오르려는 다리를 달랬다.
“문이 열려 있네……. 저놈들은 어떻게 됐을까?”
처음 제니와 제비가 숨어 있던 속옷 가게 2층을 바라보면서 삼식이가 중얼거렸다. 보안관과 제니도 저절로 그쪽으로 눈길이 향한다. 보안관이 해머로 내려쳤던 철제문이 환하게 열려 있다.
음침한 눈으로 자신들을 노려보던 4인조. 당시만 해도 아직 먹을 것이 없지는 않아 보였는데, 지난 닷새 동안 무슨 일을 겪었기에 스스로 문을 열고 이 좀비들이 가득한 거리로 발을 내디뎠던 것일까.
그러고 보니 그날 보안관 일행을 구조대라 부르며 길거리에 뛰어나왔던 그 많은 사람들 역시 모두 어딘가로 사라졌거나, 좀비가 되거나, 죽어버렸다는 이야기다.
새삼 끔찍한 기분이 들지만, 그 정도로 기가 죽기에는 슈퍼에서 기다리고 있을 물건들의 유혹이 너무 강렬하다.
“내일은 아침 일찍 와서 시…… 청소 좀 해야겠다. 다닐 때마다 영 찜찜해서 불편할 것 같아.”
자신이 머리를 박살 내 죽여 버린 좀비의 시체들을 피해 걷던 보안관이 말했다.
다른 좀비들이 줄곧 그 위를 밟고 아무렇지도 않게 걸어 다녔기 때문에, 가뜩이나 흉측한 시체들은 고깃덩어리처럼 너덜너덜해져 있었다. 그런 꼴이 도로 끝 약국 앞까지 드문드문 이어져 있다.
절대 움직이지 못하리라는 걸 잘 알고 있지만, 그래도 곁을 스쳐 걸을 때면 확 달려들어서 다리를 움켜잡을 것만 같다.
“괜찮아, 제니야?”
보안관이 제니의 안색을 살피며 물었다.
제니는 애써 웃음을 지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네…… 괜찮아요. 다 죽었잖아요. 그쵸?”
“응. 그래도 신경이 쓰일 테니까 다른 방향을 보면서 걸어.”
“그렇게 할게요.”
가끔 헛구역질을 하기는 했지만, 신입은 생각보다 잘 버텼다.
아마 셋째 날, 좀비들의 시체를 실컷 구경해서 어느 정도 면역이 된 모양이다. 그래도 여전히 이놈들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지독한 악취는 적응이 되질 않는다.
“이런 젠장. 어휴, 아까워.”
약국 앞에서 두 동강이 난 야구 배트를 발견한 보안관이 아쉬움에 혀를 찼다. 생각해 보면 그날 해머만 던져 버렸어도 되는 일이었다. 다행히 잃어버렸던 해머 자루는 멀쩡히 버텨줘서 삼식이가 챙겼다.
주변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않으며 그렇게 1분을 더 걸어가자, 드디어 슈퍼의 활짝 열린 문이 그들을 반겼다.
“자! 왔다!”
보안관과 삼식이가 철책을 바닥에 내려놓으며 주위를 살폈다. 바람 소리만 간간이 울리는 고요한 거리는 그들에게 안심하고 마음껏 쇼핑을 하시라 권하는 것 같지만, 일단 퇴각할 루트부터 정해야 한다.
단층 창고형 건물인 데다가 주변의 다른 건물들과 조금 거리를 두고 지어진 터라 슈퍼의 옥상으로는 피신할 수 없다.
“여차하면 저기에 올라가는 걸로 하자.”
보안관이 가리킨 것은 좁은 사거리 맞은편의 2층 건물 옥상이었다. 도시가스관이 외부로 노출되어 있어 밟고 올라가기가 편하고, 옆 건물들과의 거리도 가깝다.
철책을 건물 벽에 세우고 거기에 연결된 줄을 파이프에 묶어두는 것으로 준비는 대강 마쳤다. 이제 보물찾기를 시작해도 될 시간이다.
“잠시 여기에서 대기.”
일행들을 모두 슈퍼 문 앞에 세워둔 뒤, 보안관은 몇 발짝 걸어 들어가 안쪽의 상황을 살폈다.
썩은 고기와 생선, 야채에서 풍겨 나와 고여 있던 악취가 그를 반긴다. 하지만 좀비들의 시궁창 냄새보다는 참아줄 만했다.
창문이 없는 구조여서 대낮이어도 건물의 깊숙한 안쪽은 컴컴하다.
나란히 늘어선 높은 진열대가 빛을 차단하기 때문에 플래시가 없으면 앞을 제대로 볼 수 없을 정도다. 플래시를 켜고 잠시 안쪽을 살피던 보안관이 몸을 돌려 나왔다.
“삼식아, 너는 여기에서 망을 봐. 괜히 안에 갇히기는 싫으니까.”
“엑? 나도 쇼핑하고 싶은데?”
삼식이는 너무 아쉽다는 표정을 지으며 신입을 돌아봤다. 하지만 신입은 삼식이의 시선을 외면하며 제니의 등 뒤로 숨었다.
“갖고 싶은 거 있으면 말해. 가져올 테니까. 그리고 내일은 내가 망볼게. 오늘은 첫날이니까 내가 앞장서서 가야 돼. 혹시 안에서 뭐가 나올지도 모르잖아.”
“끄응…… 뭐, 어쩔 수 없나. 알았어. 그러면 김치랑 담배 사다 줘. 담배는 여러 가지 담으면 돼. 골라서 피우고 싶으니까.”
“그래그래, 알았으니까 이 앞에서 잘 살펴. 혹시라도 뭐가 온다 싶으면 곧바로 알려줘야 해. 알았지?”
“넵! 그럽죠.”
삼식이와 딜을 마친 보안관은 철제 쇼핑 카트를 잡고 제니와 함께 슈퍼 안으로 들어갔다. 해머와 가방은 카트 안에 던져 넣고 플래시만 꺼내 챙겼다.
“이게 필요할 것 같아. 신입, 너도 하나 밀고 와.”
끼리릭― 끼리릭―
철제 바퀴가 고요한 적막을 깨며 구른다. 신입이 말을 듣지 않고 빈손으로 따라오자 보안관이 다시 한 번 말했다.
“카트 끌고 오라니까?”
“아, 귀찮게 왜? 네 거에만 담아도 충분하잖아?”
“어휴, 이 답답아. 저 진열대 사이에서 만약에 뭐가 갑자기 튀어나오면 이걸 앞세우고 있다가 막으라는 말이야.”
보안관의 설명을 들은 신입은 어두컴컴한 슈퍼 안쪽을 새삼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더니, 곧바로 돌아가 카트를 끌고 들어왔다.
“나랑 제니는 이쪽으로 갈게. 신입, 넌 뭐 가져올래?”
“따, 따로 가자고? 같이 가지?”
“그렇게 하면 앞뒤로 길이 막혀서 안 돼. 두 방향에서 움직이면 시간도 절약되고 겸사겸사 수색도 되는 거니까.”
“좀비가 나오면 어떻게 해?”
“99.99퍼센트는 안 나와. 만약 나온다고 해도 카트를 밀어 친 다음에 곧바로 돌아서서 뛰면 괜찮아. 정 무서우면 너도 삼식이랑 같이 망을 봐도 되고.”
“으음, 어쩌지? 그럴까……. 무서운 건 아니지만, 삼식이 혼자서 두기도 영 마음에 걸리고…….”
망설이며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신입이 고개를 돌리다가 계산대 옆에 잔뜩 쌓여 있는 안주류들을 발견했다.
그 순간, 욕망이 폭발해 두려움을 날려 버린 신입은 ‘먼저 간다!’라는 말을 남기고 기세 좋게 카트를 밀면서 계산대를 향해 뛰었다.
“하하, 신입 오빠 엄청 흥분했네요.”
오징어 구이와 땅콩 과자 따위를 닥치는 대로 카트 안에 쑤셔 넣고 있는 신입을 보며 제니가 웃었다. 보안관도 고개를 끄덕이며 마주 웃어줬다.
‘후후, 사실 엄청 흥분한 사람은 따로 있단다, 제니야…….’
마치 신혼부부처럼 나란히 카트를 끌며 장을 보게 된다는 사실이 보안관의 심장을 미친 듯이 흔든다.
‘오빠, 나 이거 사도 돼요?’, ‘그럼! 우리 제니가 그게 먹고 싶었구나, 하하하!’, ‘어머, 오늘은 꽁치 통조림이 싸네? 오빠, 저녁 때 꽁치김치찌개 끓여주면 소주 한잔할래요?’…….
머릿속에서 망상이 제멋대로 춤을 춘다. 이건 그야말로 늘 그려오던 꿈이 현실이 되어버린, 그런 상황이 아닌가.
“오빠, 무슨 생각 해요?”
보안관이 자기도 모르게 흐뭇한 미소를 지으면서 초점 없는 눈으로 먼 곳을 보고 있자 제니가 묻는다.
“응? 응! 아냐, 아무것도.”
황급히 정신을 차린 보안관은 카트를 밀고 걷기 시작했다.
“냄비는 꼭 가져가야 해요. 한 두어 개 정도는 있었으면 좋겠어요.”
제니가 메모를 꺼내서 플래시 불빛에 비춰보며 중얼거린다. 보안관은 행복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러자.”
“그다음에…… 라면이랑 즉석밥이랑 즉석 카레 같은 것도 챙겨야 하고……. 아, 맞다. 휴대용 가스레인지랑 가스! 그것도 있으면 좋을 것 같아요.”
“응, 그러자.”
“우와, 우유다!”
진열대 중간에서 멸균 팩에 들어 있는 우유를 발견한 제니가 가볍게 탄성을 내지르고는 카트에 담았다.
후후, 어린아이가 따로 없군…….
밀려오는 행복감을 만끽하면서 보안관은 그저 흐뭇한 미소만 지었다.
커피 믹스, 햄부터 과일까지. 그리고 여러 가지 통조림, 고추장 한 통, 커다란 냄비와 일회용 그릇과 식기, 라면, 간식용 과자, 초코바, 껌과 휴지, 치약, 칫솔, 비누, 샴푸, 로션까지…… 쇼핑한 물건들이 카트에 차곡차곡 쌓인다.
그 어마어마한 양은 이미 가져갈 수 있는 한계에 아슬아슬하게 근접해 있다.
“이제 삼식이 오빠가 부탁한 김치랑 담배만 사 가지고 돌아가요, 돈은 안 내지만. 헤헤.”
휴대용 가스레인지와 가스를 담은 뒤, 제니가 떠나기 아쉽다는 표정을 짓기에 보안관이 말했다.
“더 필요한 거 있으면 다 가지고 가자.”
“아니, 안 될 것 같아요. 어차피 다 못 가져가니까. 내일 또 같이 와요.”
김치는 지독한 냄새가 나는 냉장 칸 중에서도 가장 안쪽에 있었다.
썩어서 물컹거리며 줄줄 흘러내리는 생선 섹션을 지나, 썩은 야채를 넘어가 만난 김치는 발효하면서 생겨난 가스 때문에 완전히 공처럼 빵빵하게 부풀어 있었다.
“으아, 이거 먹을 수는 있는 걸까?”
보안관이 찝찝하다는 듯 두 손가락만으로 김치 봉지를 들어 올리며 혼잣말을 했다. 제니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인다.
“오히려 아주 맛있을 수도 있어요. 아! 오늘 제가 김치찌개 해드릴까요?”
제니가 나를 위해서 김치찌개를?
조금 전, 보안관이 망상 속에서 들었던 말이 거의 그대로 반복되었다.
이것은 꿈의 실현이 아닌가. 그러고 보니 소주 마셔본 지도 오래됐군…….
침이 가득 흘러나온 보안관의 입에서는 자동적으로 다음 대사가 나왔다.
“그, 그러자, 제니야. 우리 같이 소주도 한잔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