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 빈집털이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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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 빈집털이 (1)
2021.11.21.
새로운 하루.
태양은 하늘 높이 올라서 뜨겁게 내리쬐고 있고, 가끔씩 적당히 부는 바람은 땀을 식혀주고 사라진다. 모험을 하기에는 더없이 기분 좋은 날이었다. 잊을 만하면 한 번씩 들려오는 저 울부짖음만 빼면…….
다친 유빈을 제외하고 보안관, 삼식이, 신입, 그리고 제니까지 네 사람은 부지런히 벌판을 가로질러 걸어갔다. 오늘 그들이 계획하고 있는 것은 빈집털이다.
철책을 하나 더 가지고 가서 유빈이 올려놓은 철책과 합친 다음, 그걸 타고 옥상을 돌면서 빈집들만 골라 들어가 필요한 것들을 훔쳐 오는 것이다.
이제 편의점에서 가져온 먹을 것들은 거의 다 떨어져서 오늘 아침엔 제니와 유빈이 구해 왔던 마른 멸치와 설탕물을 먹었다.
모두가 배낭 속에 먹을 것을 가득 담아 가지고 유빈이 기다리고 있는 복지 센터로 돌아갈 수 있기를 바라고 있다.
“삼식이 오빠는 뭘 찾으면 제일 좋을 것 같아요?”
역 건물로 들어가며 제니가 물었다. 그녀가 메고 있는 등산 배낭에는 어제 유빈이 만들어준 볼라 두 개가 달랑거리며 걸려 있다.
산에서 길어 온 물로 간단하게나마 목욕을 해서 그런지, 제니는 평소보다 더 기분이 좋아 보인다.
겨우 페트병 세 개 분량의 물이 사람을 이렇게 행복하게 해줄 수 있다니, 그녀와 함께 물을 길어 왔던 보안관은 제니의 미소를 보면서 뿌듯한 보람을 느꼈다.
“으음, 글쎄…… 뭐, 먹는 거겠지. 김치? 김치가 있으면 라면 먹을 때 좋을 것 같아. 너는?”
소박한 희망을 밝힌 삼식이가 되물었다.
“저는 커피! 커피 못 마신 지 일주일도 넘었네요. 후우~ 한 1년은 못 마신 것 같아요. 보안관 오빠는 뭐 먹고 싶어요?”
“나는 이제 소원을 이뤄서 먹는 걸로는 더 바라는 거 없고, 약국 앞에 떨어뜨리고 온 야구 배트나 다시 주워 올 수 있으면 좋겠어.”
플래시를 밝히며 앞장서서 걷던 보안관이 진심 어린 목소리로 대답한다. 제니가 의외라는 표정으로 물었다.
“소원을 이뤘다고요? 무슨 소원?”
“제니가 끓여주는 라면 먹는 거.”
“하하하! 아, 뭐야……. 어떻게 그런 말을 표정 하나 안 변하고 해요?”
제니가 보안관의 등짝을 치며 웃는다. 보안관은 여전히 아주 진지한 얼굴이다.
“아니, 정말이야. 너랑 테라 나오는 라면 광고 볼 때마다 생각했었는데, 제니가 끓여주는 라면 맛은 어떨까…… 하고.”
“생각만 한 게 아니라 만날 혼자서 중얼거렸지. ‘제니가 끓여주는 라면 먹고 싶다’ 그러면서…….”
삼식이가 끼어들어서 폭로하자, 제니는 더 기분이 유쾌해졌다.
“그럼 오늘은 냄비랑 젓가락도 훔쳐 가서 정식으로 라면 끓여줄게요. 어제 그거는 그냥 미지근한 물만 부은 거였잖아. 알았죠, 오빠? 라면 꼭 찾아야 돼요.”
제니가 바짝 달라붙어서 말을 걸자, 보안관은 수줍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 이제 신입 오빠 차례네요. 오빠는 뭐 먹고 싶어요?”
“으, 응? 나? 뭐 먹고 싶냐, 이런 말이지? 으음, 나는…… 팥빙수. 날씨도 이렇게 덥고 하니까.”
한참이나 고민을 하던 신입이 겨우 내놓은 대답은 굉장히 사치스러웠다. 다른 세 사람은 잠시 팥빙수를 상상하고는 아득한 꿈처럼 멀어진 그 음식 때문에 풀이 죽어버렸다.
얼음을 얼려서, 곱게 갈아서, 신선한 우유와 연유, 과일, 팥을 올린다…….
전기가 끊긴 지금은 도저히 무리다. 며칠 전만 해도 그런 게 고작 칠팔천 원이면 먹을 수 있는 음식이었다니, 믿어지지 않을 지경이다.
휴우우우~ 네 사람은 나란히 한숨을 쉬면서 역의 옥상 문을 열고 나섰다.
“뭐…… 겨울에 먹으면 되겠네.”
여전히 팥빙수를 떨쳐 내지 못한 삼식이가 혼잣말을 하면서 망원경을 꺼냈다. 때마침 번화가 도로에는 좀비들의 행진이 한창 진행 중이었다. 다른 방향에서 온 놈들과 합쳐진 것인지, 그 규모가 전에 없이 크다.
“현재 시각 1시 27분!”
시계를 확인한 삼식이는 재빨리 망원경을 좌우로 움직이며 그 무리를 특징지을 수 있는 특이한 놈을 찾았다. 그사이에 제니는 가방에서 볼펜과 수첩을 꺼내 시간을 적어 넣었다.
놈들 전부가 비바람과 먼지를 잔뜩 뒤집어쓴 데다가 잿빛 피부는 온통 피범벅이 된 채 썩어가고 있어서, 이젠 얼핏 보기에는 다 똑같아 보인다.
“음, 쟤로 할까? 금발 머리, 형광 분홍색 폴로 티. 저런 놈은 흔하지 않겠지.”
삼식이가 엄청 뚱뚱한 좀비 하나를 지목해서 특징을 불러준다. 망원경을 건네받아 녀석의 모습을 확인한 다른 셋도 고개를 끄덕였다.
무리가 워낙 커서 골목을 지나는 시간도 예전의 몇 배나 걸렸다. 20분 가까이 좀비들이 걷는 걸 계속 보고 있자니 속이 매슥거리는 기분이 든다. 놈들이 지나가 버린 거리는 마치 밀걸레로 밀고 간 듯, 텅 빈 것처럼 보였다.
“자, 이제 몇 분 간격으로 다음 놈들이 오느냐…… 그게 문젠데…….”
좀비 네 마리만 서성거리는 텅 빈 거리를 보며 보안관이 초조하게 중얼거렸다.
제니와 처음으로 함께 나온 터라 느껴지는 책임감이 남다르다. 게다가 며칠 전 옥상에 갇혀본 적도 있어서 더 조심스러웠다.
“사람이 넷이니까 아무리 짧아도 20분은 있어야 돼. 안 그러면 저 건물로 올라가고 내려오고 할 때 시간이 부족해.”
삼식이가 담배에 불을 붙이면서 말했다. 신입과 두 사람이 나눠 피우고 있는 담배도 이제 바닥을 드러냈다. 담배 연기를 뿜던 신입이 놀라 캑캑거린다.
“캑! 쿨럭! 네 명? 나, 나도 저기로 가라고? 우리는 얌전히 여기서 망이나 보는 게 더 도와주는 거일 것 같은데. 그렇지, 제니야?”
“아뇨. 전 갈 건데요? 그러지 말고 오빠도 같이 가요. 하나라도 더 훔쳐서 담아 와야죠.”
당황한 신입은 아무 대답도 못 하고 제니의 얼굴과 철책이 올려진 건물만 번갈아 쳐다봤다.
체면 때문에 무서워서 싫다는 말은 못 하겠고, 그렇다고 따라가자니 좀비들과 마주칠 생각만 해도 다리가 후들거린다.
“저…… 저기 3층 건물이라서 나는 못 올라갈 것 같은데…….”
신입이 겨우 생각해 낸 핑계는 그거였다. 하지만 제니는 여전히 미소를 지으면서, 그러면서도 말투만은 엄청 단호하게 말했다.
“에이, 저도 유빈 오빠가 받쳐 줘서 올라갔어요. 오빠도 그렇게 하면 돼요.”
“저기를? 으으음…….”
식은땀을 뻘뻘 흘리는 신입의 어깨를 삼식이가 탁, 치며 달랬다.
“괜찮아. 다 올라갈 수 있어. 나랑 보안관이 당겨줄 테니까.”
결국 신입은 얼결에 함께 거리까지 가는 걸로 결정이 나버렸다.
이건 위험하다…….
신입은 마음속으로 오늘 좀비들이 엄청 빠른 간격으로 지나가 주기를 기도했다. 그러면 도저히 내려가기에는 무리라고 고집을 피우다가 일단 돌아가야지. 그리고 다시는 따라오지 말아야지…….
아까 삼식이가 20분은 필요하다고 했으니, 그전에만 좀비들이 나타나 주면 된다.
빨리 와라, 빨리!
신입은 피가 마르는 것 같은 심정으로 번화가 골목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런데…….
“하아암~ 이상해. 왜 안 오는 거지?”
아무리 기다려도 다음 좀비 무리가 모습을 드러내지 않자, 삼식이는 크게 하품을 하면서 기지개를 켰다.
시계가 가리키는 시간은 2시 38분. 아까 놈들이 골목 끝으로 사라져 버린 지 거의 50분이나 지났다. 제자리에서 어슬렁거리는 네 놈만 제외하면 좀비가 아예 눈에 띄지 않는다.
간격이 긴 건 마음에 들지만, 그다음 놈들이 언제 올지 모르면 움직일 수가 없다. 늘 보이던 놈들이 갑자기 눈에 띄지 않으니까 그것 역시 사람을 상당히 불안하게 만든다.
점점 말수가 줄어든 네 사람은 초조한 심정으로 기다리고,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그래도 여전히 새 좀비 떼는 나타나지 않는다.
“안 올 건가 봐. 아까 그놈들이 마지막이었던 거야.”
세 시가 넘어갔을 때, 삼식이가 판정을 내렸다. 보안관이 물었다.
“그게 뭔 소리야? 안 오다니? 그럼 어디로 갔는데?”
“그야, 사람들 많은 곳으로 갔을 테지. 여기는 이제 더 먹을 게 없어졌으니까.”
“먹을 게 없긴 왜 없어? 저 건물들에 들어 있던 사람들은 먹을 게 아니고 마실 거냐?”
“저걸 봐. 길에 아무도 없잖아.”
삼식이가 텅 비어 있는 거리를 가리킨다. 보안관이 여전히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자, 삼식이가 하는 말의 의미를 깨달은 제니가 보충 설명을 해준다.
“좀비가 한 시간 반이 넘게 한 마리도 안 나타나고 있는데 아무도 집 밖으로 나오지 않잖아요. 살아 있는 사람이 있다면 궁금해서라도 나와보겠죠. 아무 가게라도 들어가서 먹을 것도 가져올 테고요. 그 말이죠, 삼식이 오빠?”
“그, 그런가?”
보안관은 거리로 시선을 돌렸다. 제니의 설명을 듣고 보니 이상하기는 하다. 좀비가 몇 마리 안 되니 아무리 겁이 많은 사람들이라 해도 창문 밖으로 고개 정도는 내밀 것 같은데…….
어기적거리며 걷는 네 마리를 제외한다면, 번화가 거리 전체를 통틀어서 움직이는 것이라고는 일전에 제니가 걸어놓은 커튼 깃발이 바람에 펄럭이는 정도뿐이다.
“그럼 저 안에 있던 사람들은 다 죽었단 말이야? 왜? 굶어서?”
“일주일을 굶어도 죽지는 않을걸? 하지만 물은 이야기가 좀 다르지.”
“비가 왔었잖아? 빗물이라도…….”
‘빗물이라도 받아서 마시면 될 거 아냐?’라고 하려던 보안관은 말을 중간에 삼켜 버렸다.
하긴, 서울 빗물을 마시면 큰일 난다고 했던 건 자신이었다. 아마 물이 간절한 생존자들은 다급한 마음에 창문을 통해 빗물을 받아 마셨을 것이다.
하지만 그게 도시 사람들의 약한 장을 뒤흔들어 복통과 설사를 일으켰을 테고, 오히려 더 탈수증상이 심해져서 결국엔…… 저 건물들을 관으로 삼아 숨을 거두었을지도 모른다.
“자, 이제 어떻게 할래? 지금 내려가 볼까?”
삼식이가 물었다. 보안관이 대답하기 전에 신입이 다급하게 끼어든다.
“서, 성급하게 굴지 말고! 한 시간만 더 기다려 보자! 응? 한 시간만!”
“한 시간이라……. 뭐, 그래 봐야 네 시 조금 넘을 테니까 해는 충분하겠네. 어때, 다들 같은 생각이야?”
삼식이의 질문에 보안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지금으로서도 충분히 안전해 보이기는 하지만, 돌다리도 두들기라고 했으니까……. 이 정도로 희망적인 상황이니 한 시간을 기다리는 것도 즐거울 것 같다.
“오빠, 어디 먼저 갈 거예요? 한 시간 뒤에?”
햇빛을 막기 위해 후드를 푹 눌러쓰고 있는 제니가 잔뜩 들떠서 물었다. 보안관은 잠시 생각을 정리했다.
이제 남의 집을 노릴 필요도 없다. 번화가 가득 늘어선 가게들 전부 다 그들이 탈탈 털어주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당연히 저기지.”
보안관이 가리킨 것은 골목의 끝에 위치한 커다란 슈퍼였다. 삼식이도, 제니도 모두 동의한다는 의미로 비장한 표정을 지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슈퍼!
이미 한참 전에 약탈당해서 음식이라고는 거의 남아 있지 않은 편의점 따위와는 격이 다르다.
저 안에만 가면 정말 모든 것이 있다. 그들이 젖과 꿀이 흐르는 슈퍼를 상상하면서 신나게 수다를 떠는 동안 마침내 또 한 시간이 지나 버렸다.
네 사람은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면서 역 아래로 내려와 철책을 건너고 지하 통로를 달렸다.
뛰어오는 네 마리는 보안관이 해머 2호를 한바탕 휘두르는 것만으로 모두 쓰러뜨릴 수 있었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보안관은 여전히 해머를 꽉 쥐고 선봉에 섰지만, 더 이상 그들의 앞을 막아서는 위험은 아무것도 없었다.
휘이잉~
바람이 불어오는 텅 빈 거리를 감격에 찬 표정으로 몇 발짝 걸어가던 삼식이가 갑자기 두 손을 번쩍 들어 올리면서 외쳤다.
“만세! 자유다~!”
“만세! 하하하! 만세!”
제니도 펄쩍펄쩍 뛰며 기뻐했다. 보안관과 신입도 웃었다. 모든 것이 축복이라도 받은 듯 빛이 나는 것 같다.
아직도 사방에 시체가 뒹굴고 있는 거리가 그렇게 아름답게 보일 거라고는 생각도 해본 적 없었다.
***
“후우우~ 좃도.”
정문 도로 위 초소에서 경계 근무를 하는 동안 김 상병의 입에서는 계속 가벼운 욕설과 한숨이 흘러나왔다.
사수가 그렇게 하고 있으니 진우의 기분도 좋을 리 없다. 어제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했기 때문에 몸도 마음도 아주 지친 상태였다.
“씨발…….”
김 상병이 또 혼잣말을 한다.
“어떻게 그렇게 다 보는 데서 쏴 죽이냐? 어휴.”
어제의 기억이 다시 머릿속에 떠오르는지, 김 상병은 진저리를 치며 고개를 숙였다. 진우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찬란한 햇살마저 짜증스럽게 느껴진다.
생활관 내부에서 좀비와 육박전을 벌여야 했던 어제, 첫 감염자를 포함해서 전부 아홉 명이나 되는 병사들이 세상을 하직했다.
어차피 좀비들과 싸우면서 전우들이 픽픽 죽어 나가는 걸 일주일 내내 보았던 터라, 사망자가 나왔다는 사실 때문에 특별히 동요하는 병사는 없었다.
하지만 그중 다섯 명이 아직 살아 있던 상태에서 아군의 총에 의해 즉결 처분을 당했다는 게 문제였다.
게다가 언제 변해 버릴지 모른다는 조바심 때문에 두려웠던 보초병들은 모든 병사들이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울면서 끝까지 복도를 떠나지 않으려 버티던 외상자들을 사살해 버렸다.
‘정말 멍청한 결정이었어.’
진우는 그 명령을 내린 놈에게도 똑같은 짓을 해주고 싶었다. 아마 그 자리에 있던 모든 병사들의 생각도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아군 사살을 직접 목도하게 만든다는 건, 어깨를 나란히 하고 같은 방향을 향해 총을 겨누고 있는 동료들 간의 신뢰에 아주 커다란 균열을 일으키는 짓이다.
병사들은 더 이상 다른 분대의 병사들을 믿지 않게 되었고, 방향이 명확하지 않은 불만과 분노가 모두의 가슴속에서 부글부글 끓어오르고 있었다.
“보급 왔다! 애들 운반 작업 나오니까 신경 좀 더 써라!”
이 병장이 초소 주변을 돌며 병사들을 독려한다. 진우는 목청껏 대답했다. 다행히도 아직까지는 이 분대 내부에서의 반목이나 갈등은 없다.
위이이잉~
월남전에서도 활약했을 것 같은, 낡고 커다란 헬기 세 대가 정문 도로 위로 내려서고 프로펠러가 천천히 움직임을 멈추자, 미리 게이트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병사들은 열심히 달려 나와 빠르게 짐을 내리기 시작한다.
진우는 등 뒤의 헬기와 병사들을 힐끗 돌아보고 다시 전방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근처 주유소에서 유류를 자급하는 루트까지는 개척이 되었지만, 원자력발전소 방어 병력을 위한 보급은 거의 대부분 공중을 통해 이루어진다.
발전소 상공에서의 비행이 금지되어 있기 때문에 보급 헬기는 발전소 전방 500미터 떨어진 도로에 착륙하는 것이 원칙이다.
세 대의 헬기에서 탄약과 식량, 의약품 따위의 보급 물자들을 내리고 트럭에 실어 옮기는 것은 물론 진우나 김 상병 같은 사병들이 담당하고 있다.
보급품 운반 작업에 투입되면 가끔 조종사들로부터 바깥소식을 전해 들을 때도 있다. 바깥세상 소식에 목마른 병사들은 아주 사소하고 보잘것없어 보이는 정보에도 큰 관심을 기울였다.
“애기들아, 미안한데…… 조금 서두르자. 우리가 요새 스케줄이 워낙에 꽉 차서 그런다. 젠장, 무슨 한류 스타도 아닌데 기상해서 취침할 때까지 분 단위로 할 일이 정해져 있어.”
중년의 헬기 조종사가 기지개를 켜며 소대원들을 재촉한다. 정말 어지간히 바쁜지, 처음엔 매일 들르던 보급 헬기들이 오늘은 이틀 만에 찾아왔다. 조종사의 얼굴도 몰라볼 만큼 핼쑥해져 있다.
“네!”
병사들은 우렁찬 대답과 함께 작업의 속도를 높였다. 무거운 탄약 박스나 전투식량을 나르고 있노라면 이제 적어도 빈총으로 굶어가며 싸우지는 않아도 되겠구나 하는 안도감이 든다.
하지만 이 작업을 다 마친 뒤에 얼마 쉬지도 못하고 바로 또 경계 근무에 투입되어야 한다는 걸 알기에 미리부터 몸이 쑤셔온다.
이놈의 지휘부는 아마도 인간의 체력을 무한대로 상정해 두고 있는 모양이다.
하루하루 시간이 갈수록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한계까지 내몰리고 있는 병사들을 생각하면 넉넉한 인력 보충이 시급한데도, 그런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야, 아부꾼. 불 좀 붙여봐라.”
김 상병의 붙임성 덕에 그새 말을 튼 조종사가 담배를 문 채 다가와 전방을 엄호하고 있는 진우와 김 상병에게 말을 건다.
“후우~ 추웅성.”
평소답지 않은 김 상병의 맥 빠진 인사에 조종사가 의아해하며 묻는다.
“어라, 이 새끼 봐라? 아침에 꼬추가 안 서디? 만날 실실 웃던 놈이 기분이 왜 그래?”
“그럴 일이 있었습니다……. 소령님, 어젠 왜 안 오셨습니까? 담뱃불 붙여 드리고 싶어 미치는 줄 알았습니다.”
김 상병이 재빨리 라이터를 꺼내 불을 붙여주며 기운 없이 웃는다.
“후우~ 얀마, 힘내. 요새 신나는 사람 아무도 없어. 어제 왜 안 왔냐고? 뭐 그런 걸 알고 싶어 하냐? 들으나마나 우울한 이야기지.”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은 조종사는 다크 서클이 진하게 내려온 눈 주위를 문지르며 대답을 해준다.
“이 부근 탄약고들이 더 이상 재고를 안 내주려고 해서 이제 너희 줄 총알 가지러 영천까지 갔다 와야 해. 게다가 유류 창고도 점점 좀비들한테 털려서 밀리는 분위기고……. 이러다가 여섯 시간 비행할 기름 넣자고 왕복 두 시간 거리 오가는 거 아닌가 싶을 만큼 안 좋다. 게다가 위에서는 자꾸 같잖은 심부름…… 에이, 아니다. 지금 마지막 이야기는 그냥 못 들은 걸로 하고 잊어버려라. 하여간…… 너희도 힘들겠지만, 우리도 요새 아주 목숨 걸고 날아다니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