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 열화지옥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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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 열화지옥 (6)
2021.11.13.
민구의 바이크가 미로처럼 막힌 도심을 달리고 있을 때, 킹메이커는 강정 해군 기지 내의 골프장 레스토랑에서 조금씩 노을이 깃들기 시작하는 제주의 하늘을 바라보는 중이었다.
골프장 코스 자체는 밋밋해서 도무지 도는 재미가 없었지만, 바닷가를 연해 높게 지어놓은 레스토랑의 경치만은 제법 봐줄 만했다.
특히 전면 창으로 시야를 확보해 놓은 덕에 바닷바람을 맞지 않으면서도 해가 지기까지의 풍광을 고스란히 즐길 수 있다는 게 좋았다.
하지만…… 며칠이 지났어도 이 세련된 맛이라고는 없는 스테이크에는 도무지 적응이 되질 않는다.
“으음.”
입맛이 떨어진 킹메이커는 포크와 나이프를 내려놓으며 짧게 헛기침을 했다. 아무리 경황이 없었다고는 해도 그날 가야호텔 셰프를 구해 오지 않았던 건 정말 큰 실수였다.
둥근 얼굴의 그가 웃으면서 내오던 샤토브리앙 스테이크를 이제 더 이상 먹을 수 없게 되었다니, 그것만으로도 기운이 빠진다.
헬기에 오르면서 곧바로 가야호텔에 인원을 파견하라는 명령을 내렸어야 하는 건데, 왜 그런 실수를 했을까…….
킹메이커는 넓어진 이마를 가볍게 두드리며 자신답지 않은 경솔함을 자책했다.
“입에…… 영 안 맞으시는가 봅니다.”
언제 들어왔는지 교수가 테이블 맞은편에 앉으며 인사를 건넨다. 킹메이커는 금세 주름진 얼굴을 펴며 가볍게 웃었다.
“아이구, 하하, 한 교수님, 거, 무슨 그런 말씀을. 지금 시국이 이런데 어디 음식이 넘어가겠나요? 그래도 아직 할 일이 산더미같이 남았으니까 약처럼 억지로라도 먹고 기운을 좀 낼까 했더니, 걱정이 많아서 그런지 꼭 모래를 씹는 것 같습니다. 휴우~”
“장관님, 그래도 뭘 좀 드셔야죠. 어이, 여기 그거 가져와라.”
교수가 손가락을 튕기자 흰 블라우스에 타이트한 정장 치마를 입은 직원이 포도주와 치즈를 담은 카트를 끌고 다가왔다.
그거라니, 뭘 가지고 저렇게 잘난 척을 하는 걸까…….
킹메이커는 별다른 기대 없이 교수의 행동을 무표정하게 지켜봤다. 다만, 서빙을 하는 여직원은 나름 훌륭하다.
반년 전에 찾았을 때 이곳에서 보았던, 수더분한 종업원들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피난 첫날부터 저렇게 오피스 룩을 깔끔하게 갖춘 여자들로 싹 물갈이가 된 것이 누구의 짓일까에 대해서는 킹메이커도 조금 흥미를 가지고 있었다.
외모도 외모지만, 술을 따르는 솜씨라든가 서빙하는 매너가 꽤나 능숙한 아이들이어서, 그것만으로도 조금은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다.
“96년산 로마네 콩티입니다.”
테이블 앞으로 다가와 허리 숙여 인사부터 한 종업원은 살짝 웃으며 라벨이 보이도록 와인 병을 들어 보인다.
병목에 붙어 있는 반달 모양의 라벨을 보자, 며칠 제대로 된 것을 먹지 못한 킹메이커의 입안에 침이 고였다.
“허허, 이런 게 아직 남았나요? 그저께부터는 싹 다 바닥이 났다고 생각했었는데…….”
킹메이커가 신기하다는 얼굴로 묻자 교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장관님 말씀이 맞습니다. 뭐, 여기 내려오자마자 다들 병째 나발을 불어 대는 통에 제주도 호텔에 있던 아까운 고급 와인들은 사흘 만에 작살이 났었죠. 하여간에 맛도 제대로 모르는 돼지 같은 것들까지도 달려들어서 꿀꺽꿀꺽 처먹는 꼴이라니…….”
“그럼 이건?”
“채 장군 솜씹니다. 애들을 보내서 서울 유명 호텔들과 고급 회원제 바만 털어 공수해 온다더군요. 이건 어젯밤 늦게 헬기를 타고 날아온 녀석일 겁니다.”
“애들이라면…….”
“뭐, 특전사 애들이겠지요. 채 장군이 당부하는 게, 몇 병을 마시든 그건 상관이 없지만, 우리끼리만 조용히 즐겨 달라고 하더군요. 어디서 근본도 없는 놈들까지 기웃거리는 꼴은 못 봐주겠다나요?”
“흐흠, 당부라…….”
기분이 상한 킹메이커는 내색을 하지 않은 채 조용히 입맛을 다셨다.
당부라니……. 제까짓 게 언제부터 나나 한 교수와 어깨를 마주하고 이야기를 했다는 건지, 세상이 어수선해지니 그 뚱뚱한 뱃속에도 바람이 잔뜩 들어간 모양이군…….
킹메이커의 기분을 아는지 모르는지 교수는 와인을 개봉하고 디켄팅을 하는 종업원의 엉덩이를 툭툭, 두들기며 가벼운 농담을 던졌다.
“그래, 어르신들 뵙고 눈도장 많이 찍었나?”
“아니요, 교수님만 계속 기다리고 있었는데요. 후후.”
여자는 별로 놀라는 기색도 없이 배시시 웃으며 대수롭지 않게 흘려 받는다. 둘이 하고 있는 꼴을 보니, 이 여종업원들을 누가 어디에서 데려왔는지 킹메이커는 대충 짐작이 갈 것 같았다.
“그럼,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디켄팅한 와인을 잔에 따라 주고 치즈까지 종류별로 먹기 좋은 사이즈로 잘라놓은 뒤, 여자는 공손히 고개를 숙이며 사라졌다. 팽팽한 스커트 뒷자락을 음미하듯 바라보던 교수가 소리를 낮춰 물었다.
“마음에 드십니까? 쟤들 전부 제가 즐겨 찾던 클럽에서 데려왔습니다.”
“허허, 그래요? 한 교수님, 역시 배짱이 대단하신데요? 그 와중에 저런 애들까지 챙기셨으니 말이에요.”
킹메이커가 가볍게 비꼬자 교수는 손사래를 치며 웃었다.
“어이쿠, 어디 일부러야 챙기겠습니까? 그날 새벽에 장관님이랑 헤어지고 나서 술이나 한잔할까 싶어서 쟤들이 있는 곳에 갔었습니다. 그러다가 어영부영 잠이 깜빡 들었는데, 그…… 난리가 나버리지 않았겠습니까. 그래서 에이, 까짓것 잘됐다 싶어 함께 타고 왔습니다. 어차피 초면인 애들 곁에 두고서야 은밀한 이야기도 제대로 못 할 것 같아서요. 자, 건배 한 번 하시죠.”
킹메이커와 교수는 엷은 미소를 지으며 와인글라스를 가볍게 부딪쳤다. 크리스털로 만들어진 잔에서는 챙, 하고 맑은 소리가 났다.
가볍게 잔을 흔든 킹메이커는 코로 향기를 음미하며 천천히 와인을 입안에 흘려 넣었다. 풍부하고 꽉 조여진 맛을 혀와 목구멍으로 만끽한 뒤, 킹메이커가 입을 열었다.
“그래, VIP께서는 무슨 별다른 말씀이 있었나요?”
“아닙니다. 뭐, 언제는 생각이 있던 양반도 아니고…… 그저 언제쯤 다시 올라갈 수 있느냐는 말씀만 계속하시고 있습니다.”
“뭐라고 대답하셨어요?”
“곧 된다고, 걱정 마시라고 했습니다. 참,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저렇게 사리분별이 안 돼서야……. 그건 그렇고 장관님, 혹시 요즘 위쪽이랑 연락이 잘 닿으십니까? 저도 계속 핫라인을 돌려보고는 있는데, 도통 통화를 해본 적이 없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그러게요. 참 희한하죠? 일이 이 지경쯤 됐으면 전시라 간주하고 끼어들 만도 한데, 미군 쪽에서도 전혀 콘택트가 없고……. 저 역시 아무래도 저쪽이 지금 뭔가 수상하다고 생각하는 중이에요.”
킹메이커는 교수에게 진심을 반 이상 털어놓았다. 뭉뚱그려 8인의 중요 인사라고 부르고는 있지만, 어차피 다들 출신 성분이 다르기 때문에 그와 교수를 제외하면 미국과 직접 연결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래서 지금까지 그들의 지위가 가장 위에 있던 것이고, 따라서 미국과의 연락이 두절된다는 것은 킹메이커와 교수에게 그만큼 심각한 위기인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같은 편에게까지 두 수, 세 수 앞을 속여둘 필요는 없다. 두 사람은 협력해야 한다.
“그럼, 이제…….”
교수가 뭐라고 더 말을 이으려 들었지만, 킹메이커가 손짓으로 제지했다. 입구에 서서 좌우를 두리번거리는 채 장군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아! 여기들 계셨군요! 안녕하십니까? 후우, 후우~”
급하게 뛰어온 것인지 채 장군이 거친 숨을 내뿜으며 커다란 목소리로 인사를 한다. 교수와 킹메이커는 가볍게 고개만 까딱거리고 자리를 권했다.
“하하, 어딜 그렇게 숨이 차게 다녀오세요, 채 장군님? 자자, 앉으세요. 술이라도 한잔하시고 숨 좀 돌리시죠. 이거, 보는 사람이 다 힘이 드네요.”
“후우, 감사합니다.”
의자에 앉은 채 장군은 와인 두 잔을 연거푸 급하게 들이켜고 나서야 조금 갈증이 가시는지, 이마의 땀을 닦아내며 숨을 골랐다.
“장관님!”
채 장군이 곧바로 얼굴을 바짝 들이대며 입을 뗐다.
“네, 말씀하세요.”
“오늘은 꼭 좀 폭격 허가를 받아주십시오.”
채 장군은 간절함 반, 협박조 반의 표정을 지으며 킹메이커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킹메이커에게는 적잖이 불쾌한 순간이었다.
“……폭격은 안 된다고 이미 말씀드렸을 텐데요.”
대답을 하는 킹메이커의 눈은 더 이상 웃지 않았다. 조금 기세가 죽은 채 장군이 다급하게 말을 이었다.
“장관님, 그…… 기반 시설이나 빌딩을 소중하게 여기시는 건 잘 알겠습니다. 하지만 암만 그래도 상황이 이러니까, 딱 세 군데만 때리겠습니다. 몰려 있는 곳에다가 네이팜을 써서 싹 쓸어버리고 거기에 임시 거점 시설들을 설치하면 됩니다. 지금 육지에 제대로 된 거점이 없다고 밑에서 아주 죽는소리를 하면서 치받치는 통에 피가 바짝바짝 마르는 것 같습니다. 미 합참에다가도 좀 말씀을…….”
킹메이커는 대답 대신 차가운 시선으로 채 장군을 빤히 쳐다보았다. 사실 좀비 무리가 아니라 살아 있는 사람들 머리 위로 네이팜탄을 퍼붓는다고 해도 그는 별 상관이 없다.
어차피 인구의 반 이상이 변종에 감염된 마당에 까짓 몇만이 더 죽는다고 해서 딱히 불쾌하거나 기분 상할 일도 아니다.
하지만 킹메이커가 참을 수 없는 것은 일단 내려간 명령에 대해 감히 반기를 들어보겠다는 불온한 시도와, 그를 직접 찾아와 저런 식으로 졸라대는 버르장머리다. 이런 것을 한번 넘어가주면 그다음부터는 영이 제대로 서질 않는다.
“채 장군님…….”
킹메이커가 나지막이 부르자 채 장군이 쭈뼛거렸다.
“지금, 밑에서 치받치고 올라오는 통에 피가 마르는 것 같다고 하셨나요?”
“네, 그, 그렇습니다, 장관님.”
“전 그 말씀이 꼭 장군님께서 더 이상 군을 제대로 장악하지 못하고 계시다는 의미로 들리네요. 그렇게 이해해도 될까요?”
“아, 아닙니다. 그런 건 절대로…….”
“그렇지 않다면 다행이네요. 아, 그건 그렇고, 저희는 지금 가볍게 와인 한잔하는 중이었는데요.”
킹메이커의 말뜻을 알아들은 채 장군은 서둘러 의자에서 몸을 일으키고 고개를 숙였다.
“실례했습니다. 장관님, 교수님. 저는 이만.”
황급히 사라지는 채 장군의 뒷모습을 보며 킹메이커는 곰곰이 생각했다.
저런 놈들이 슬슬 기어 올라와 건드려 보는 꼴을 보니, 아무래도 자신과 미국 간의 커넥션이 끊어져 버렸다는 소문이 슬슬 돌고 있는 모양이다.
이거, 이거, 미국 쪽에서 폭격을 금지시켰다는 거짓말이 어쩌면 더 이상 통하지 않을는지도 모르겠는걸…….
킹메이커는 쓸쓸한 표정으로 와인 잔을 기울였다.
자신의 지위를 지금처럼 안정적으로 계속 유지하기 위해서는 하루라도 빨리 미국의 정식 방문을 받아야 할 필요가 있다. 그게 정 어렵다면 본보기로 하나나 둘쯤 숙청을 해서 기강을 바로잡든지.
군이라……. 채 장군과 대립각을 세울 만한, 그러면서도 내 수족처럼 편하게 부릴 수 있는 인물이 누가 있었지?
슬슬 장밋빛이 널리 번져 가는 저녁 하늘을 등지고 앉아 손가락으로 의자 팔걸이를 두드리면서, 킹메이커는 머릿속에 떠오르는 인물들을 하나씩 정리해 보았다.
그러는 동안에도 여전히 마음 한구석에 남아 있는 강한 의혹은 가시질 않았다.
‘왜 미국이 이렇게까지 갑자기 연락을 끊어버린 걸까?’
***
같은 시각, 미 동부 시간으로 오전 여섯 시가 되었을 때, 플로리다 동쪽 해안에서 300마일 떨어진 대서양을 항해 중이던 니미츠 급 항공모함 CVN―77, 조지 H. W. 부시 호의 비행갑판에서는 여덟 대의 슈퍼 호넷 전투기가 차례로 발진했다.
모든 호넷의 양 날개와 몸체에는 육중한 공대지 무기가 달려 있었다. 한 발로 3,000평방 야드를 불태워 버릴 수 있는 네이팜탄들이다.
슈퍼 호넷 2개 편대는 시속 850마일의 속도를 유지하며 서쪽을 향해 비행을 계속했다.
편대장이 20분 뒤 쓰리 마일 브리지에 도착할 것임을 알려오자, 관제 센터 내부는 조용한 침묵 속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컴퓨터 화면에 설치된 카운트다운 시계가 작동을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넥타이를 맨 채 가죽점퍼를 입고 있는 사내가 바짝 말라붙은 입을 열었다. 대통령 존스 린드버그이다. 린드버그는 옆자리에 선 함장에게 말했다.
“마지막으로 한 번 더 펜사콜라 해변을 보고 싶군.”
린드버그의 얼굴에는 고뇌의 빛이 가득했다.
임기를 겨우 반년도 남겨두지 않은 그는 20분 후면 자국 내 영토에 대규모 폭격을 허락한 미국 역사상 첫 번째 대통령으로 기록될 터였다. 함장 역시 경직된 얼굴로 승조원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드론으로부터 영상을 받을 수 있나?”
“가능합니다, 함장님.”
“메인 스크린에 띄우게.”
“열화상과 DSA, M―DSA 중 어떤 걸 보시겠습니까?”
린드버그가 알아듣지 못해 함장을 돌아보자, 함장이 풀어서 이야기를 해준다.
“녹색 화면, 흑백 화면, 컬러 화면 중에서 고르시라는 말씀입니다, 대통령 각하.”
“컬러로 부탁하네. 청록색 바다와 흰 별장들을 보고 싶으니.”
“알겠습니다. M―DSA로.”
승조원이 자판을 두들기자 관제 센터 한쪽 벽면을 온통 채우고 있는 멀티스크린에 멕시코 만과 경계를 이루며 가느다란 줄처럼 길게 뻗은 펜사콜라 비치의 모습이 들어왔다.
한 시간 전부터 플로리다 해안을 돌며 정찰 영상을 보내던 드론의 카메라가 비추는 화면이다.
왕복 2차선 도로의 양옆에는 백사장 위에 지어진 3층짜리 고급 목조 주택들이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서 있다.
몇 년에 한 번씩 큰 태풍이 불어올 때면 깡그리 부서졌다가 새로 짓고 또 태풍을 맞아 부서지기를 반복하는 통에, 애초에 펜사콜라 비치에는 낡고 추한 집이란 없다.
이런 사태가 벌어지지 않았다면 뉴욕이나 필라델피아의 부유한 사업가가 저곳에서 여느 때처럼 휴가를 보내고, 막 대학생이 된 아이들은 광란의 맥주 파티를 열었을 것이다.
‘나도 저곳에서 주디를 만났었지…….’
린드버그는 지금의 아내를 처음 알게 된 78년 스프링 브레이크를 떠올렸다.
그가 스물두 살일 때 싸구려 노바의 창문을 열어젖히고 달리던, 걸프 블러바드 주변의 풍경은 지금도 거의 변한 것이 없었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단 한 가지, 지금은 수영복 차림의 좀비들이 길거리를 가득 메우고 있다는 사실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