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 열화지옥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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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 열화지옥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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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 열화지옥 (5)
2021.11.12.
놈의 눈이 2번을 간청한다. 민구는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전에도 그가 같은 질문을 던졌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이 더 아프고 힘든 길을 택했다.
민구는 모래시계처럼 생명을 잃어가는 녀석을 내버려 두고, 계단을 통해 병실로 돌아와 이곳을 떠날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 한시라도 빨리 여기서 벗어나야 할 시간이 되었다. 놈의 동료들이 보복을 위해 되돌아올 가능성도 있다. 양아치들은 다 그렇게들 하니까.
며칠 동안 운동을 하면서 편하게 입었던 환자복을 벗어 던지고 자신의 와이셔츠와 바지로 갈아입은 민구는, 의사의 가방을 열고 거꾸로 털어 안을 다 비운 다음 매점으로 가서 필요한 물건들을 담았다.
담배 한 보루, 여분의 라이터, 작은 생수 세 병.
거기까지만 챙기고 나서 단호하게 지퍼를 닫고 그곳을 빠져나왔다. 가방을 사선으로 멨을 때 중심이 흐트러지지 않아야 하므로 더 이상의 욕심은 부리지 말아야 한다.
“흐으으…… 흐으으…… 끄으으…….”
민구가 다시 옥상으로 올라왔을 때, 인솔자 녀석은 아주 천천히, 그리고 힘겹게 마지막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이미 주변의 상황을 인지할 수 있는 능력은 상실된 것처럼 보였다. 녀석의 장비가 꼭 필요한 상황도 아니어서 다른 두 놈들의 장비들을 털어 가방에 던져 넣었다.
칼과 삼단봉을 한 자루씩 더 집어 들었고, 탄창, 플래시, D.E.M.이라는 빨간약이 든 독침 두 개까지 챙겼다. 그리고 기관단총.
철컥―!
아까 걷어차 놓았던 기관단총을 주워 든 민구는 탄창을 빼서 실탄이 제대로 들었는지를 확인한 뒤, 옥상 난간으로 걸어가 건너편의 주상 복합을 살폈다.
며칠째 눈독을 들이던 사냥감들을 갑자기 잃어버린 괴물들은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져 우왕좌왕하며 거리를 배회하는 중이었다. 놈들을 모두 쫓아다니며 죽일 게 아니라면, 길을 나서기에는 최적의 조건이라고도 할 만하다.
게다가 생각지도 않은 놈들이 제 발로 찾아와 준 덕에 싸구려 식칼 대신 제대로 날이 선 칼을 쥐고 싸우게 되었다는 점 역시 마음에 든다.
“좋아…….”
발아래를 굽어보며 낮게 중얼거린 민구는 일주일 만의 외출을 위해 천천히 계단을 내려갔다.
그롸아아아악―
그간 계속 병원 문 앞에서 서성이고 있던 괴물들이 다가오는 사람의 기척을 느끼고 또다시 거슬리는 소리를 내자, 민구는 새로 손에 넣은 칼을 가볍게 놀려보다가 다시 칼집에 꽂으며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좋아? 후후후, 나도 그렇다, 이 개새끼들아.”
민구는 열어젖힌 2층 창문 사이로 몸을 날렸다. 그의 발이 가볍게 땅을 딛고 내려서자, 정문 셔터 앞에서 울부짖어 대던 괴물 네 마리가 몸을 돌리고 정신없이 달려 들어온다.
그롸아아아―
저 과감하게 몸을 내던지는 용기 하나만은 몇 번을 봐도 맘에 든다.
“오랜만이니까 좀 놀아줄까?”
민구는 총을 바닥에 내려놓고 허리띠에 고정시켜 두었던 대검 두 자루를 뽑았다.
칼날이 바깥쪽으로 오도록 잡은 왼손으로 가장 앞서 오는 녀석의 손목을 쳐 흘리고, 몸을 빙글 돌리면서 오른쪽에 쥔 대검을 두 번째 녀석의 옆 목에 박아 넣었다.
푸슉―
오랜만에 손에 전해지는 안정적인 관통의 느낌!
민구는 그대로 오른팔을 쫙 밀어냈다.
촤악!
그의 칼이 근육과 피부를 끝까지 갈라 목이 반 이상 잘려 나간 괴물은 대가리를 덜렁거리며 나자빠졌다.
힘없이 겨우 붙어 있는 녀석의 머리를 걷어차 날려 버린 민구는 힘차게 앞으로 달려 나가며 양손으로 각각 하나씩 괴물의 목을 그었다.
크와아아아―
아직 성대가 남아 있는 첫 번째 괴물이 방향을 바꾸어 괴성과 함께 몸을 날린다. 민구는 몸을 젖히면서 왼 칼을 놈의 왼쪽 목에 찌르고 녀석의 관성을 역으로 타고 오르며 잘라냈다.
상대가 살아 있는 사람이었다면 피가 대책 없이 튀어 시야를 흐렸을 행동이지만, 바짝 말라붙은 괴물들의 몸을 토막 낼 때에는 그런 걱정을 할 필요가 없다.
“확실히…….”
엉망으로 나뒹굴었다가도 다시 벌떡벌떡 몸을 일으켜 뛰어오는 괴물들을 보며 민구가 말했다.
“너희, 재미있는 놈들이긴 하다.”
빙글― 칼을 돌려 날이 엄지 쪽으로 향하도록 고쳐 쥔 민구는 달려드는 순서대로 놈들을 끝장냈다.
이미 절반 이상 잘라놓았던 터라, 더욱 깊고 날카로운 두 번째 공격이 훑고 지나자 놈들의 머리통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어깨 아래로 굴렀다.
툭, 투둑.
무성하게 자라 있던 병원 잔디밭 위로 머리 없는 괴물들이 맥없이 고꾸라진다.
민구는 칼날에 묻은 피와 기름을 나무에 닦아내고서 다시 칼집에 꽂았다. 저 괴물들을 단번에 쓰러뜨리기엔 길이가 좀 짧고 무게도 부족하지만, 그래도 이만하면 나쁘지 않은 칼이다.
민구는 허세를 부리던 놈들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따위 실력으로 한 자루에 수십만 원짜리 칼을 잘도 들고 다녔군.
그롸아아아악―!
내려놓았던 기관총을 다시 집어 드는 동안, 병원 진입로를 배회하던 녀석들이 귀신같이 사람 냄새를 맡고 달려온다.
“마침 잘 왔어.”
호기심이 동한 민구는 기관단총을 연사로 맞추고 놈들을 향해 갈겼다.
드르르르륵― 드르르륵―
40발들이 탄창을 순식간에 비웠는데도 나란히 뛰어오던 여섯 마리 중 한 놈을 겨우 쓰러뜨렸을 뿐이다.
대부분의 탄알은 괴물의 몸이 아니라 4차선 도로에 세워진 자동차 유리들을 박살 냈다. 애초에 챙길 때부터 장난감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지는 않았지만, 이건 쓸모없는 정도가 심하다.
“더럽게 못 쏘는구만.”
총을 내던지며 자조적으로 웃은 민구는 배운 도둑질을 하기 위해 나이프를 다시 꺼내 들었다.
한 발을 왼쪽으로 내딛다가 곧바로 중심을 오른쪽으로 옮기자 가장 앞서 달려오던 놈이 급하게 방향을 바꾸면서 중심을 잃는다.
민구는 버둥거리는 녀석에게 별로 힘도 들이지 않고 칼 두 개를 차례로 찔러 넣고, 두 번째 놈도 같은 방법으로 처리했다.
‘설마…….’
뛰어난 운동 능력에 비한다면 정말 어처구니없는, 초보적인 실수를 계속해서 저지르는 놈들을 보고 있으면서, 민구는 새로운 특성을 발견했다.
이 강인한 괴물들의 가장 큰 단점은 속임수를 쓸 줄도, 눈치챌 줄도 모른다는 것이고, 그것은 신체적 강점을 상쇄하고도 남을 만큼 치명적이었다.
자신의 머릿속에 거짓말이라는 개념이 없으니 상대의 행동에서도 페이크를 읽어내지 못하는 것이다.
달리는 방향을 갑자기 트는 것만으로도 놈들은 발이 엉켜 나뒹굴기 일쑤였다. 어둠 속에 기척 없이 숨어 있다가 몰래 발목을 긋는 인간에 비하면, 이 괴물들은 오히려 정정당당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룰이 없는 싸움을 할 때 정직함을 고수하는 것은 곧 패배의 어둡고 깊은 구덩이 속으로 스스로 걸어 들어가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행위다.
“팔다리가 고생한다, 멍청한 새끼들.”
민구는 빠른 스텝으로 동선을 바꿔가면서 강아지를 다루듯 괴물들을 몰고 다녔다.
타― 타― 탁!
몸을 띄운 민구가 직각으로 놓인 담장 벽을 한쪽씩 타고 지나자, 전속력으로 뒤를 쫓던 괴물은 머리가 터져 나가는 소리를 내면서 벽을 들이받았다.
맥없이 쓰러지는 녀석을 내버려 두고, 민구는 다시 몸을 돌려 다른 놈들의 목부터 그었다. 몰렸는가 싶을 때에도 몸을 회전시켜 방향을 바꾸면 놈들은 어김없이 허공을 향해 뛰어들었다.
더 이상 상대해 봐야 재미도 없을 것 같아, 민구는 목 뒷부분만 노려 서둘러 싸움을 끝냈다. 힘줄에 연결된 근육만 끊어내 버리면 아무리 단단한 몸이라고 해도 힘을 쓰지 못하고 무너지게 되어 있다.
촤악―!
무기를 칼에서 거리가 확보되는 삼단봉으로 바꾼 민구는 멈춰 서 있는 자동차 위로 옮겨 다니며 빠르게 4차선 도로를 건넜다.
아직도 미련을 버리지 못한 채 주상 복합 빌딩 주변에서 서성이던 괴물들이 관심을 보이며 달려온다. 그러나 모래알처럼 흩어진 몇 마리쯤은 위협이 되지 않는다.
민구는 비교적 체고가 높은 4륜구동 차의 지붕 위로 올라가서 놈들이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그런 후, 자동차 보닛을 짚고 네 발로 뛰어오는 놈들의 관자놀이를 순서대로 호되게 갈겼다. 스피드가 실린 삼단봉이 채찍처럼 춤을 추며 단순한 진압 무기 이상의 위력을 발휘했다.
빠악!
꾸에엑―!
뼈마디가 부러지는 기분 나쁜 소리와 함께 괴물들의 시체가 자동차 아래로 떨어져 내린다.
민구는 서너 마리를 상대하고 나서 지그재그로 뛰어 다른 차 지붕으로 장소를 바꿨다. 이렇게 하면 그때마다 꽤 시간을 벌 수 있다.
유일하게 경계해야 하는 것은 자동차 아래에서 팔을 휘둘러 낚아채는 공격 정도뿐이지만, 그마저도 미리 소리를 내 자신의 위치를 알려주는 놈들의 정직한 특성 때문에 생각처럼 위협적이지는 않았다.
으직!
민구는 자신의 다리를 움켜쥐려 뻗어온 괴물의 손가락을 후려쳐서 박살을 내고, 딱 차기 좋은 높이에 위치한 놈의 관자놀이를 걷어찼다.
와장창!
빠르게 넘어지며 옆 차의 유리창에 머리를 박고 쓰러진 괴물의 척추를 밟자 으득, 하고 골반 아래가 내려앉는다. 이제 놈은 더 이상 몸을 똑바로 펼 수 없을 것이다.
“겨우 이 정도밖에 안 되냐?”
건너편 차 위로 올라간 민구는 쾌감이 가득한 얼굴로 삼단봉을 휘둘러 놈의 허리를 두드리며 기세 좋게 소리쳤다.
그러나 확실히…… 포기할 줄 모르는 상대와의 싸움은 일방적인 공격을 퍼붓는 민구에게서도 상당한 에너지를 빼앗아갔다.
자신의 동료들이 모두 가장 잔인한 방법으로 처형당할 때조차 감정이 조금도 담겨 있지 않은 표정으로 최후의 한 마리까지 달려드는 괴물들의 끔찍한 얼굴을 보고 있자니, 그 박력에 진저리가 쳐졌다.
스스로에 대한 확신이 없거나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크다면, 어느 정도 실력이 있어도 이런 놈들의 모습에 기가 질리고 위축될 것이다.
빡― 빠박― 빠가각!
4차선을 거의 다 건너간 시점에서 마지막으로 달려들던 녀석의 턱을 삼단봉으로 돌린 민구는 다시 일어서려는 놈의 뒤통수를 사정없이 계속 내려쳤다.
끄웨에에―
울부짖으며 발버둥을 치던 괴물이 마침내 사지를 쪽 뻗고 쓰러지자 순식간에 사방이 고요해졌다.
“후우, 후우…….”
목표로 삼았던 오토바이 가게까지 다다랐을 때, 조금 차오른 숨을 내쉬면서 자신이 지나온 길을 되돌아보았다.
움푹움푹 찌그러진 자동차 지붕마다 엉망으로 훼손된 괴물들의 시체가 발자국처럼 점점이 널려 있다.
대충 계산을 해보니 병원 앞에서 그었던 놈들까지 더해 열대여섯 마리 정도는 해치운 것 같다. 물론 그러는 동안 손바닥과 어깨가 뻐근해질 정도로 힘을 써야 했지만.
‘묵직한 마세티라도 있으면 모를까, 한 번에 이 이상은 어렵겠군…….’
매 순간 전력으로 깊숙하게 칼을 꽂아 넣어야만 괴물들이 쓰러지기 때문에 그 점이 낯설고 힘들다. 핏줄 지나는 자리만 적당히 그어놓으면 알아서 천천히 죽어주는 인간과의 싸움하고는 또 다른 차원인 것이다.
그로아아아아악!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이고 있을 때, 저 멀리에서 괴물들의 커다란 함성이 들려온다.
아차차, 놈들이 지나가던 게 이 시간대였나? 그놈의 검은 헬기에 홀려서 깜빡하고 있었군…….
민구는 자동차 위로 풀쩍 뛰어 올라가 눈을 가늘게 뜨고 소리가 나는 방향을 살폈다.
4차선 도로를 꽉 메우고 천천히 걸어오는 괴물들의 난폭한 기운이 여기까지 전해진다. 하루에 두어 번, 놈들이 지나갈 때 어렴풋이 본 것만으로도 그 수효가 천 단위를 훌쩍 넘어간다는 정도는 확실히 알고 있다.
‘여기까지 도달하는 데 얼마나 걸리려나…….’
대충 놈들의 속도와 거리를 계산해 본 민구는 승산이 있다고 판단하고 담배를 깊이 빨며 오토바이 가게로 뛰어가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중국제 스쿠터부터 꽤나 그럴듯한 레플리카까지, 다양한 모델들이 나란히 늘어서서 아직도 광택을 잃지 않고 반짝이며 누군가 타주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그중에서도 카나리아 색 스즈키 오프로드 모델이 유독 강렬하게 민구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카본과 커스텀 스티커로 잔뜩 멋을 부려놓은 오토바이 핸들 위에는 모델명과 가격이 붙어 있다.
이 정도면 엉망인 도로를 헤치고 나갈 수 있겠어…….
민구는 카운터 뒤에 걸려 있는 열쇠들 중에서 RMZ 450이라는 태그가 붙은 키를 집어 오면서 고글도 하나 챙겼다.
“배터리가 살아 있어야 하는데…….”
일주일이면 충분히 방전이 될 수도 있는 기간이라 키를 꽂으면서도 걱정이 들었다. 그러나 우려와 달리 스타트 버튼을 누르자 제법 힘찬 소리와 함께 시동이 걸렸다.
하하, 민구는 처음으로 오토바이를 훔친 십 대 아이처럼 웃으며 활짝 열려 있는 문을 통과해 달려 나갔다.
크와아아악―
어느새 꽤나 가까이 다가온 괴물들의 역겨운 냄새가 거리를 가득 메우고 가까워져 있다. 고글을 걸치며 비웃는 얼굴로 놈들의 모습을 슬쩍 바라보던 민구는 도로와 인도를 번갈아가며 장애물을 피해 내달렸다.
부우웅―
민구가 스피드를 올리자 요란한 엔진 소리가 울리면서 시원한 바람을 끌어와 앞섶을 헤집는다.
사이드 미러를 가득 메우던 괴물들의 행진은 순식간에 점처럼 작아졌고, 모든 것이 멈춰 있는 도시 속에서 오로지 그만이 천둥소리를 몰고 다니며 빠르게 움직였다.
온몸으로 느껴지는 진동이 마음에 든 민구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게이지의 중간을 가리키는 연료 탱크가 그의 자유를 보장해 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