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 열화지옥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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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 열화지옥 (2)
2021.11.09.
고개를 들어 소리가 나는 방향을 돌아보니 20여 미터 떨어진 곳에 누워 있던 젊은이들 그룹이 시끄럽다. 뭔가 시비가 붙은 모양이다.
화를 내고 있는 것은 반바지를 입은 아가씨 두 명. 능글맞게 웃으면서 받아치는 것은 역시 그 또래의 사내들 서너 명이다.
“만지기는 누가 만졌다는 거야? 너 웃긴다. 사람을 이상한 놈 취급하네?”
“지금 내 엉덩이 만졌잖아요? 왜 가만히 자고 있는 사람 이불 속에 손을 집어넣는 건데요?”
“말했잖아! 자다가 돌아누운 거라고. 돌아누웠는데 거기 네가 있은 거지, 누가 너처럼 돼지 같은 걸 일부러 만지냐? 아, 씨발. 하필이면 옆자리에 이런 또라이 같은 게 걸려 가지고.”
“뭘 옆자리에 걸려? 우리가 자고 있는데 너희가 바로 옆에 자리를 깔았잖아!”
화가 잔뜩 난 여자가 소리를 질러도 성추행 용의자는 당황하는 기색 하나 없이 빙글빙글 웃으며 오히려 여자를 놀렸다.
“아무나 쓰라는 시설에서 그냥 눕는 사람이 임자인데, 별걸로 다 지랄을 하네. 네 주변에 금테라도 두른 줄 아나? 야, 그리고 막말로 증거 있어? 내가 네 궁둥이 만졌다는 증거 있냐고? 없으면 괜히 시끄럽게 땍땍거리지 말고 그냥 조용히 처자. 미친년, 나이도 처먹은 게 쪽팔린 걸 몰라요.”
“크크크, 야, 쟤가 너한테 신호 보내는 것 아니냐? 어떻게 좀 해달라고? 킥킥킥, 까짓거 해줘라. 어지간히 굶었나 본데.”
당사자뿐 아니라 일행으로 보이는 사내들 역시 한마디씩 거들며 망신을 준다. 머리 스타일이며 옷 입은 꼴까지, 다들 여간 불량해 보이지 않는다. 딱 보기에도 사내들이 잘못한 것 같았다.
하지만 주변의 사람들은 공연히 남의 일에 끼어들고 싶지 않은지, 오히려 시선을 마주치지 않으려 애쓰고 있다.
아무도 도와주는 사람이 없자 처음 소리를 질렀던 여자 일행은 결국 사과는커녕 실컷 조롱만 받다가 짐을 챙겨 다른 곳으로 가버렸다.
“하아~ 웬일이야? 이 상황에서도 저러고들 싶나?”
임수정은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서로 의지하고만 살아도 버티기 힘든 상황인데, 약자를 찾아 괴롭히는 놈들은 도무지 쉬려고 들지를 않는다.
군인들이 순찰을 부지런히 돌고는 있지만, 빈틈이 있게 마련이다.
저 정도의 사소한 양아치 짓까지 모두 적발하고 일일이 제재를 가하기에는 절대적으로 인력이 부족한 것이다. 조금 전 양아치의 말마따나 증거가 없으니 처벌을 요청하기도 어렵다.
처벌이라……. 애초에 이곳에서 경범죄를 처벌하기는 하는 걸까? 여기에 별다른 수용 시설이 있는 것도 아니고…….
“언니, 걱정하지 말고 자요. 여기는 괜찮아요.”
조금 전의 양아치들을 경계의 눈초리로 바라보고 있는 임수정에게 테라가 속삭였다. 그 말은 사실일 것이다. 테라와 임수정의 주변에는 어린아이를 동반한 아줌마들이 두 겹으로 벽을 쌓아두고 있다.
만일 누군가 다가와 집적대려 했다가는 이들로부터 호된 반격을 당하고 쫓겨날 게 분명하다. 뭉쳐 있는 애 엄마들보다 강한 전투력을 가진 무리는 정말 드물 테니까.
그건 마치 아프리카의 초원에서 둥글게 원을 이뤄 어리고 약한 새끼들을 보호하는 영양 무리의 한가운데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고, 사자와 맞설 능력이 없는 초식동물에게 있어 최상의 포지션이었다.
물론 어미 영양들의 동의를 얻어내지 못하면 아무도 그 안전한 위치에 자신의 자리를 잡을 수는 없다.
임수정은 그제야 왜 테라가 하필 이 시끄럽고 번잡스러운 아줌마 그룹의 중앙에 자리를 잡았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자리를 무난히 얻어내기 위해 그녀가 기울였을 노력의 크기도 어렴풋이나마 짐작할 수 있었다.
불과 하루 만에 얼마나 아이들을 홀려놨는지, 아직 기저귀를 찬 꼬마 하나는 제 엄마 곁을 마다하고 테라의 옆에 누워 곤히 잠들어 있다.
임수정은 아이의 등을 살살 토닥여 주는 테라의 꿈같이 아름다운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이를 향해 지어주고 있는 그녀의 미소는 전혀 가식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그러나 이곳에 자리를 잡은 게 단지 아이들이 좋아서 생긴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상황이 지나치게 공교로운 것도 사실이다.
‘어쩌면 얘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겁이 많고 영악한지도 모르겠는걸…….’
***
꼼짝없이 갇혀 있는 날들이 하루하루 지나갈수록 사람은 불안해지게 마련이다.
평생 동안 아수라장 속에서 피바람을 헤치며 살아온 육만배라 하더라도 예외는 아니다. 더구나 바깥이 온통 정체를 알 수 없는 괴물들로 가득 찬 상황이라면 말할 것도 없다.
어느덧 그의 나이도 예순에 가까워졌고, 늘 혀처럼 부리던 최성호도, 오른팔인 민구도 곁에 없는 상황이어서 육만배의 조바심은 더욱 커졌다.
요 이틀 사이 그는 그 어느 때보다도 자주 한숨을 쉬었고, 초조한 마음에 줄담배를 피우는 일도 늘었다.
마지막으로 통화를 했을 때 민구가 돌아오겠다고 말했던 날짜는 내일이지만, 도로 주변을 꽉 메우고 있는 괴물들을 생각하면 그 약속은 지켜질 것 같지 않았다.
“이 모든 게 다 작은 회장, 그 망나니 새끼 때문이야. 정신 나간 놈.”
육만배는 문제의 7월 14일, 그 새벽을 떠올리며 담배에 불을 붙였다.
괴물들이 담긴 상자를 싣고 약속 장소인 인천공항 화물 터미널로 갔을 때, 그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황 회장도, 황 회장의 비서도 아니었다.
“하이고, 뭐 이렇게 한참 걸려? 하여간 노인네들이랑 일하면 아예 시계를 차고 오지 말아야 한다니까.”
과장된 몸짓을 하며 다가온 30대 중후반의 남자는 황 회장의 아들, 일명 작은 회장이었다.
태양 그룹의 후계자가 곱상한 이미지와 달리 실은 천하의 개망나니라는 것은 이미 소문이 자자했고, 육만배 역시 부리는 식구들을 통해 직접 전해 들은 바가 있었다.
한데 그 망나니가 중간에서 뭔가 장난을 친 것이다. 나라를 홀딱 뒤집어놓을 만큼 크고 악질인 장난이었다.
돈이 어른인 세상이라, 그저 아비의 후광만 믿고 미쳐 날뛰는 애송이에게 속았다는 걸 알고 나서도 육만배는 마음을 숨기는 미소를 보이며 공손히 허리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 뭐가 들었습디까?”
짐을 카고 안으로 들이는 동안 작은 회장이 물었었다.
물론 육만배는 억울하다는 듯 두 손을 들어 손사래를 쳤다.
“하, 하하, 저야 그저 심부름이나 하는 놈인데, 어디 감히 회장님 물건에 손을 대겠습니까? 믿어주십시오. 그냥 얌전히 가지고만 와서 아무것도 모릅니다.”
“캬하하하! 지금 그걸 믿으라고? 시발, 사람을 무슨 코찔찔이 중학생으로 아나? 크크크큭! 아, 뭐, 됐수다. 열어봤어도 뭐, 일개 양아치새끼들이 어쩔 수 있는 물건도 아니고. 어이, 준비한 거 드려라.”
그렇게 돈 가방 두 개를 받아 들고 돌아왔지만, 지금 돌이켜 보니 너무 헐값이었다. 아비 이름을 팔아 사람을 속인 그 애송이만 생각하면 벌써 며칠이 지났는데도 이가 바득바득 갈린다.
‘그놈은 외국으로 떴으려나?’
담뱃재를 털며 육만배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커다란 상업용 카고 안에 비치되어 있던 컨테이너들, 불길하게 등 뒤에서 울리던 비행기의 이륙 소리.
이제는 그 작은 회장 놈조차도 어디까지 알고서 이렇게 큰일을 저지른 건지 잘 모르겠다.
타앙! 타앙!
아래층에서 엽총 소리가 울려왔다.
또인가……. 젠장, 밤낮을 가리지 않고 건물을 향해 달려드는 괴물들을 아무리 열심히 죽이고 또 죽여도 도무지 끝이 없다.
육만배는 담배에 불을 붙인 뒤, 시계로 눈을 돌렸다.
새벽 1시.
이놈들은 낮밤을 가리지 않는군…….
처음엔 공고하게만 여겨지던 1층의 방어선이 괴물들의 물량 공세를 이기지 못해서 무너진 것은 어제 아침이었다.
한꺼번에 너무 많은 괴물들이 몰아닥치자 방화벽이고 셔터 문이고 간에 도무지 견뎌내지를 못했고, 한 층씩, 두 층씩 위로 도망쳐 올라온 것이 이제는 10층 방화벽과 계단에 집기를 쌓아두고 대치 중일 만큼 빠르게 밀려 버렸다.
이런 식이라면 여기까지 뚫리는 것도 시간문제일 뿐이다. 물린 애들이 늘어나면서 심각한 수준까지 병력도 줄었다.
“으아악―! 이런 씨발 놈이!”
누구의 목소리인지 모르겠지만, 저런 비명 소리가 났다는 건 곧 졸이 하나 또 잡혔다는 의미다. 이 염병할 놈의 싸움은 살짝 스치기만 해도 고쳐서 쓸 수 없어진다는 게 아주 더럽다.
대체 무슨 조화인지, 지랄 맞은 괴물들은 눈, 코, 입이 다 없어져도 사람이 숨은 곳을 기가 막히게 찾아내서 달려들었다.
“기동아.”
육만배는 손가락을 까딱여서 그의 경호실장을 가까이 오게 했다. 민구에 댈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현재 그가 데리고 있는 애들 중에서는 이놈이 제일 솜씨가 있다.
“네, 회장님.”
기동이는 육만배의 곁으로 다가와 90도로 허리를 굽혔다.
“지금, 우리 애들 몇이나 남았나?”
“저까지 포함해서 싸울 수 있는 건 스물이 답니다, 회장님.”
으음, 분노한 육만배의 눈꼬리가 경련하듯 떨렸다. 아직 일주일도 지나지 않았는데 첫날 데리고 들어왔던 애들의 육 할 이상을 잃었다. 게다가 거기에서 조금 전 비명을 질렀던 놈도 빼야 할 것이다.
탕― 탕―
계속해서 울려 대는 엽총 소리가 가뜩이나 기분이 상한 그의 신경을 긁어댄다. 병력을 쉽게 보충할 수 없는 상황인 것을 감안하면 애들을 아껴둬야 할 필요가 있다.
“아무래도 보험을 써먹어야 할 때가 온 것 같다.”
육만배의 말에 경호실장이 물었다.
“그러시면…… 민구 형님은 어떻게……?”
“강 실장 방에다가 편지라도 써놓든가 해라. 와서 보겠지. 기다려서 같이 움직이려고 했더니, 손실이 너무 커서 안 되겠어. 어이, 휴대폰 가져와라.”
덩치가 커다란 경호원이 웃옷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공손히 건넨다. 안테나가 세 개나 떠 있는 것을 확인하고 육만배는 의자에서 일어나 방을 나섰다.
강남 일대의 휴대전화 통신망이 회복된 것은 벌써 사흘 전의 일이었고, 그가 직접 몇 군데 전화를 걸어 성능을 확인해 보기도 했다.
나름의 이유가 있어서 아직 보험을 고이 모셔만 두고 있었지만, 돌아가는 상황은 그가 여유를 부릴 수 있을 만큼 한가롭지가 않아졌다.
똑똑―!
푹신한 카펫이 깔린 복도를 지나 코너의 방문을 두드린 육만배는 사나운 표정을 지우고 직업적인 미소로 위장한 채 기다렸다.
“누구야?”
안쪽에서 중년 사내가 묻는다. 육만배는 공손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저 육만배입니다, 의원님. 혹시 주무시는데 깨웠나요?”
안쪽에서 뭐라 대화를 나누는 소리가 들리더니, 잠시 후 육중한 나무 문을 열고 가운을 걸친 중년 사내가 얼굴을 내밀었다.
“오, 육 회장! 어서 와요! 그렇지 않아도 내가 육 회장을 부를까 했는데 잘 왔어. 우리 한잔하고 있었거든. 야, 이년들아. 내가 뭐 좀 걸치라고 했지?”
중년 사내가 나무라는 대상은 육만배가 관리하던 여자 탤런트들이다.
얼마나 술에 절어 있는지, 둘 다 도무지 제대로 몸을 가누지 못하다가 뒹굴고 있는 술병에 걸려 나자빠진다. 아마 자신이 지금 발가벗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을 것이다.
아직 주연급은 아니어도 몇 편이나 드라마에 얼굴을 내밀었고, 공짜로 광고도 두어 개쯤 뛰었던 터라 나름 유명한 애들이었다. 덕분에 이런 놈들을 접대할 때는 아주 효과가 좋다.
첫날, 이 보험을 잡아두기 위해서 방에 같이 넣어뒀더니, 덕분에 근 일주일을 갇혀 있는 동안에도 별다른 군소리 없이 지내주었다.
“하하하, 의원님, 놔두십시오. 저맘때 애들이 다 그렇죠, 뭐. 저는 오히려 보기가 좋습니다.”
“뭐, 그렇긴 해. 고년들 탱글탱글한 게 아주……. 그건 그렇고, 육 회장, 이거 가져왔나?”
중년 사내는 진땀을 흘리면서 자기 팔꿈치 안쪽을 가리키며 혀 꼬부라진 소리를 낸다. 마약을 달라는 소리다.
이 자식, 아직도 약 기운이 다 안 빠졌나……. 하도 불안해해서 자살이라도 할까 봐 약을 놓았더니, 이젠 아주 약쟁이가 다 돼버렸군…….
구조 요청 전화를 할 때, 이런 상태여선 곤란하다. 육만배는 부글거리는 속을 달래면서 억지로 가짜웃음을 지었다.
“그보다 더 좋은 소식이 있어서 이렇게 실례를 무릅쓰고 달려왔습니다, 의원님! 방금 막 휴대전화가 복구됐습니다! 이제 구조 헬기를 부를 수 있게 됐습니다! 의원님, 어서 돌아가셔서 국가를 위해 힘을 쓰셔야죠.”
“아니, 그런 건 됐고…….”
중년 사내는 육만배가 내민 휴대폰을 바닥에 집어 던져 버리고 한 손에 쥐고 있던 발렌타인 양주를 병째 나발 불었다.
“약 가져오라고! 응? 약!”
“아이고, 알겠습니다, 의원님. 지금 곧바로 가져오지요.”
웃는 낯으로 인사를 하고 자신의 방으로 돌아온 육만배는 경호원들에게 명령했다.
“욕조에 찬물 받아서 저놈 집어넣고, 약 기운이랑 알코올 싹 다 빠지는 대로 나한테 알려라.”
“반항하면 어떻게 할까요, 회장님?”
“어차피 기억도 못 할 테니까 적당히 물도 먹여가면서 말을 듣게 해. 남의 눈이 있으니까 목 위로는 때리지 말고.”
“넵! 알겠습니다, 회장님.”
덩치들은 곧바로 달려가 방문을 열고 중년 사내를 반짝 들어서 욕실로 끌고 갔다. 여자들의 비명과 ‘내가 누군지 알아?’를 외치는 중년 사내의 목소리가 듣기 싫어서 육만배는 방문을 닫아버렸다.
타앙―
아직도 깊은 밤의 습격이 끝나지 않았음을 알리는 엽총 소리가 후텁지근하고 고요한 밤공기를 뒤흔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