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 하이웨이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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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하이웨이 (7)
2021.11.03.
지금껏 괴물과 일대일로 근접전을 벌여본 적은 없었다. 1미터 길이의 삽을 들고 맞서거나 무방비로 노출된 뒤통수를 후려친 경험은 있지만, 그것과 이건 완전히 다른 싸움이다.
그리고 유빈은 자신이 보안관이 아니라는 것도 잘 알고 있다.
짧은 스패너만 가지고 정면으로 붙어서는 이긴다는 보장이 없다. 이 지형을 잘 활용해야 한다. 그리고 저놈의 멍청한 머리가 가지고 있는 한계를 잘 써먹어야 한다.
다리를 걸어서 놈을 아래로 밀쳐 낼 수 있다면 좋겠지만, 이미 피투성이가 되어 있는 자신의 부상당한 다리로 그 정도의 힘을 쓰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롸아아!
괴물이 아가리를 벌리고 전속력으로 달려들자 철책이 철렁거리며 흔들렸다. 유빈은 허리를 숙이고 몸을 잔뜩 움츠린 채 기다리다가 괴물의 무릎을 향해 몸을 날렸다.
콰직!
차올린 괴물의 왼쪽 무릎이 자신의 코를 때리고 지나치는 바로 그 순간, 콧속 가득 피 냄새를 맡으며 유빈은 뻗었던 두 팔을 당겨 괴물의 오른쪽 오금을 잡아챘다.
태클이 제대로 들어가자 놈의 몸이 휘청댄다. 괴물의 몸이 기우뚱 흔들리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유빈은 놈의 무릎에 바짝 붙인 어깨를 왼쪽으로 밀어 쳤다.
“이이익!”
이를 악물고 용을 쓴 보람이 있었다. 무릎이 꺾인 괴물의 몸은 왼쪽으로 빙글 돌며 중심을 잃고 뒤로 넘어간다. 유빈은 놈이 허우적거리는 손에 걸리지 않으려고 철망에 바짝 달라붙었다.
그와악―!
고통이나 공포를 느끼는 것도 아니면서 허공에 뜬 괴물은 처절한 울부짖음을 남기고 3층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콰당탕―!
허리가 반대로 꺾인 채 건물 벽과 콘크리트 바닥 사이에 부딪혀 버린 괴물의 옆구리를 뚫고 부러진 갈비뼈가 튀어나왔다. 물론 그렇게 되었어도 놈은 여전히 꿈틀거리며 시선을 유빈에게 고정시켜두고 있다.
“오빠…… 안 다쳤어요?”
건너편 창가에 붙어 선 제니가 물었다.
유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허억, 허억~ 으응, 괜찮아!”
결코 긴 싸움이었다고는 할 수 없을 찰나의 교전이지만, 철망을 움켜쥐고 엎드린 유빈의 입에서는 가쁜 숨소리가 울려 나왔다. 그만큼 순간에 모든 것을 건 전략이었다.
가뜩이나 숨이 가쁜데 괴물의 무릎에 맞은 코에서는 뜨거운 피가 계속 뚝뚝 흘러내리며 호흡을 방해했다.
‘젠장, 피 좀 그만 흘리고 싶다.’
유빈은 코를 움켜쥔 채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매듭의 끝을 다시 잡았다.
그래도 이제는 정말 다 왔다. 유빈이 철책을 건너오자 기다리고 있던 제니가 어디서 찾아냈는지 티슈를 들고 와 코에 가져다 대준다.
남의 사무실 캐비닛을 자연스럽게 막 열어젖히는 모습을 보면, 제니도 이젠 어엿한 도둑이 다 됐다.
피를 닦아내고 양쪽 콧구멍을 티슈로 꽉 틀어막은 유빈은 잠시 책상 위에 몸을 누인 채 입을 벌리고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그런 유빈에게 사무실 이곳저곳을 뒤지고 다니던 제니가 말했다.
“오빠, 힘들었죠? 이제 상을 줄게요.”
“상? 무슨 상?”
“아주 좋은 상.”
제니는 반대편 창문을 활짝 열었다.
쉬이잉―
맞바람이 치자 온몸을 흠뻑 적셨던 땀이 금세 식는다. 이 바람이 그렇게 좋은 상인가 싶은 유빈에게 제니가 창문 너머를 가리키며 기쁨에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저기 봐요, 오빠.”
유빈은 고개를 돌렸다. 열려 있는 창문 사이로 저 멀리 보안관과 삼식이의 얼굴이 보인다.
젠장, 저 모습을 도대체 몇 시간 만에 보는 건지 모르겠네…….
유빈은 미소를 지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시큼한 땀 냄새가 날 게 분명하지만, 1초라도 빨리 저 녀석들의 곁으로 가서 꽉 끌어안아주고 싶어 견딜 수가 없다.
“끄응차…….”
엔도르핀의 힘을 빌린 유빈은 지친 몸을 억지로 일으켜 제니가 서 있는 창가로 걸어갔다.
유빈이 옆에 서자 제니는 두 손을 입에 가져다 대고 창밖을 향해 크게 외쳤다. 가수답게 풍부한 성량이어서, 저쪽까지 목소리가 닿을 것인지에 대해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보안관 오빠아~! 삼식이 오빠아~!”
건물 세 개 너머의 보안관과 삼식이도 양팔을 휘저으며 감격에 찬 목소리로 우렁차게 대답했다.
특히 계속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던 보안관은 제니의 얼굴을 보자 잔뜩 흥분해서 당장에라도 건너편을 향해 뛸 기세였다.
“제니야! 유빈아!”
“오빠아, 조금만 더 기다려요~! 금방 갈게요오~!”
“그래! 제니야! 조심해!”
삼식이가 두 손으로 머리 위에 하트를 그려 보인다. 해를 피할 곳도 없었는지, 보안관과 삼식이는 한여름 뙤약볕으로부터 얼굴을 보호하기 위해서 웃옷을 벗어 아랍 사람처럼 머리에 싸매고 있었다.
하루 만에 새빨갛게 익어버린 친구들의 어깨를 보고 있자니, 그게 자신의 상처보다 더 아픈 것 같아서 유빈은 가슴 한구석이 뭉클해졌다.
***
철책을 대고 하나씩, 하나씩 건물을 옮겨 오던 유빈과 제니가 맞은편 옥상 위에 도착해서 볼트를 풀어 앵커와 철책을 분리시키는 광경이 보인다.
“아하, 저렇게 건너왔구나. 역시 유빈이.”
앵커와 철책을 엇갈리게 연결해 다리의 길이를 늘이는 것을 보면서 삼식이는 만족한 얼굴로 후우~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감탄했다.
제니가 혼자서 중심을 잡으며 철책 위를 걸을 때마다 조마조마해서 어쩔 줄을 몰라 하던 보안관은 이미 진이 쪽 빠졌다.
“끄응차!”
유빈과 제니는 조립을 끝낸 철책의 양 끝을 잡고 들어 올려 난간에 걸친 다음, 조금씩 다리를 밀었다.
앵커가 닿을 수 있는 거리로 다가오자 보안관과 삼식이는 서둘러 손을 뻗쳐 넷 사이를 연결해 줄 소중한 다리를 끌어당겼다.
“잘 잡았어?”
유빈이 물었다.
보안관과 삼식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걱정 마!”
유빈이 시키는 대로 앵커 끝에 연결된 줄을 난간에 묶고 나자 제니가 철책 위에 한 발을 올려놓았다.
약국 앞에서 보안관과 삼식이만 기다리고 있던 괴물들은 난데없이 머리 위에 나타난 제니를 향해 크게 울부짖으며 풀쩍풀쩍 뛰어올랐다.
수십 마리가 한꺼번에 괴성을 질러 대는 통에 골목 안은 금방 전쟁터 같은 위기감으로 가득 찼다.
“어휴~ 저, 저거! 너무 멀지 않아? 제니야, 조심해.”
제니가 철책 위에서 한 발씩을 뗄 때마다 보안관은 숨넘어가는 소리를 냈다.
삼식이가 어이없다는 투로 말했다.
“하하, 보안관, 너 나보고는 저기까지 그냥 뛰어 넘어가라면서? 걱정하지 마. 쟤 허리에 유빈이랑 끈으로 묶어놓은 거 안 보이냐?”
“그, 그래도 위험해 보여.”
오버하는 보안관의 우려와 달리, 오늘 하루 동안 이미 여러 번 서커스 줄타기를 경험했던 제니는 가끔 두 사람을 향해 손까지 작게 흔들어줘 가면서 차근차근 앞으로 나아갔다.
철책 구간이 끝나고 쇠기둥이 나타나자 제니는 가볍게 두 걸음을 뛴 다음 보안관과 삼식이가 기다리고 있는 약국 건물 옥상 위에 사뿐히 내려앉았다.
“오빠들! 오래 기다렸죠! 구하러 왔습니닷!”
제니는 곧바로 몸을 빨딱 일으키며 경쾌하게 경례까지 한다.
“잘 왔다! 제니 일병! 열렬히 환영한다.”
쇠기둥을 꽉 잡고 있던 삼식이는 근엄한 표정으로 마주 경례를 해줬고, 가슴이 찡해진 보안관은 좋기도 하고 애처롭기도 해서 어쩔 줄을 모른다.
“괜찮아? 오는 동안 다치지 않았어?”
“네, 저는 괜찮아요. 다친 건 오히려…….”
제니는 뒤따라 건너오는 유빈을 가리켰다. 쌍코피가 터져 콧구멍 양쪽에 휴지를 꽂은 유빈이 조심조심 철책을 건너오고 있다.
쇠기둥 바로 앞에서 잠시 머뭇거리던 유빈이 절룩거리며 세 걸음을 점프해 옥상 이편으로 뛰어내리자, 기다리고 있던 세 사람은 가벼운 환호성을 올리며 기뻐했다.
“예이~!”
삼식이가 감격스러운 얼굴로 달려들어 유빈을 끌어안았다. 유빈도 삼식이를 꽉 부둥켜안았다.
목숨을 걸고 달려왔던 노력이 조금도 아깝지 않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보안관은 대견하다는 표정으로 유빈의 등짝을 쫙! 때렸다.
“으억!”
보안관의 손이 얼마나 매운지는 맞아본 사람만이 안다. 유빈은 등을 움츠리면서 울상을 지었다.
“아휴, 아파. 뭐야!”
유빈의 입에서 아프다는 소리가 나오자 삼식이는 기다렸다는 듯이 반색을 하며 가방을 가지고 뛰어왔다.
“아하! 아파요? 어디가 아파서 오셨어요, 환자분?”
말과 동시에 삼식이는 손가락으로 유빈의 눈꺼풀을 뒤집어 까보고, 입을 벌려 안쪽을 살폈다. 삼식이가 꽤나 좋아하는 의사 놀이가 시작된 것이다.
멋대로 유빈의 웃옷을 끌어 올린 다음, 한 손가락을 귀에 가져다 대고 다른 손가락은 청진기처럼 배와 가슴 이곳저곳을 짚고 통통, 두드려 댔다.
“자, 숨 쉬어보세요. 이제 내쉬어보세요.”
삼식이의 의사 놀이를 처음 구경해 보는 제니는 재미있는지 깔깔거리며 웃었다. 하지만 가뜩이나 온몸이 아파 죽겠고, 코로 숨도 제대로 못 쉬는 상황인 유빈은 달랐다.
게다가 이것들은 왜 이렇게 내 옷을 위아래로 벗기지 못해서 안달이 난 건지……. 그렇게 보고 싶었던 마음은 어디로 사라져 버리고, 10초 만에 귀찮아진 유빈이 옷을 끌어내리며 짜증을 부렸다.
“야이, 미친놈아! 다리가 찢어졌는데 배를 왜 까냐고?”
“어허! 남 간호사, 이 환자 붙잡아요. 약 먹인 다음 빤쓰 벗기고 주사 놔야 합니다. 보니까 옆구리에 빵꾸도 났네요.”
잔뜩 신이 난 삼식이는 아직 의사 놀이를 그만둘 생각이 없다. 가방에서 박카스와 수상한 알약을 꺼낸 삼식이는 보안관에게 붙잡혀 꼼짝도 못 하는 유빈이의 입을 벌리고 억지로 쏟아부어 삼키게 했다.
“컥! 뭐, 뭐야? 내가 지금 먹은 게?”
“항생제니까 하루 세 번, 식후 30분에 두 알씩 드세요.”
“뭐? 진짜 항생제 맞아? 보안관, 네가 잘 확인했어?”
뜨끔한 표정의 보안관이 살짝 고개를 젓는다.
“아니…… 내가 약에 대해서 뭘 아나? 그…… 삼식이가 그러는데…… 확실하대.”
“이런 씨! 믿을 놈이 따로 있지, 삼식이 말을 믿어? 그것도 약을 고르는 걸?”
유빈이 펄펄 뛰자 삼식이가 자신 있다는 표정으로 약병을 흔들었다.
“아냐, 유빈아! 내가 이런 거 많이 먹어봐서 잘 알아! 이거 확실히 항생제 맞아.”
“네가 그런 걸 언제 먹어봤어? 어휴~ 나 미치겠다, 진짜! 이 새끼야! 너 항생제가 뭔지나 알아? 그거 피부가 썩지 말라고 주는 약이란 말이야.”
“그래, 맞아. 내가 그걸 어떻게 아느냐면, 예전에 이태원에서 일할 때…… 읍! 으읍!”
삼식이가 온 동네 여자애들을 상대로 성병 배달부로 활약하던 그 난잡한 사연을 끄집어내려고 들자 당황한 보안관이 달려들어 입을 틀어막았고, 그렇게 병원 놀이는 일단락을 맺었다.
보안관은 구석으로 삼식이를 끌고 가 목소리를 낮춘 채 뭐라고 한참 주의를 준다.
“아, 하여간 미친놈들이야. 자, 제니야. 박카스 마셔봐. 오랜만에 마시니까, 이거 완전 신세계다.”
유빈은 제니에게 박카스를 건네주고는 찜찜한 표정으로 자신이 먹은 약병의 라벨을 읽었다.
이건 뭐…… 온통 한글로 깨알같이 적혀 있지만 의미를 모르는 말들과 숫자뿐이고, 어떤 때 먹으라는 지시조차 없다.
감정이 과잉된 탓인지, 너무 열심히 웃다가 눈물까지 찔끔거리게 된 제니는 웃음기가 가시지 않은 얼굴로 붉은 석양과 세 친구의 얼굴을 번갈아 보면서 말했다.
“정말 다행이에요. 무사히 다시 만나게 돼서…….”
보안관에게 온갖 협박을 당하고 돌아온 뒤에도 전혀 기가 죽지 않은 삼식이가 감격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와, 엄청 신기해. 몇 시간 만에 만나는 건데 한 며칠 못 본 것 같은 기분이야.”
“말도 마. 난 정말로 한 열흘 정도 아주 빡세게 구른 것 같아.”
유빈이 손사래를 치면서 아직도 열기가 식지 않아 뜨끈뜨끈한 바닥에 주저앉은 다음, 코에 박아뒀던 휴지를 빼 던졌다.
다리가 너무 아파서 정신이 다 아득해진다. 지금껏 여기까지 어떻게 걸어왔는지 자기 자신도 믿을 수 없을 정도다.
“너희, 하루 종일 아무것도 못 먹었지?”
유빈은 3층집에서 가져온 음식 몇 가지를 배낭에서 꺼내 보안관과 삼식이에게 던졌다. 요 며칠 보지 못했던 종류의 과자들을 본 보안관이 놀라며 묻는다.
“이거, 어디서 났어?”
“아아…… 그거, 오다가 어떤 사람 만났는데, 나 불쌍하다고 주더라.”
되도 않을 소리이지만, 보안관은 더 묻지 않고 일단 봉지를 뜯어 과자를 우적우적 씹었다. 하루 종일 고형물이라고는 어린이용 키 크는 영양제와 비타민 C 사탕만 먹었던 터라 짭짤한 맛이 간절했다.
아마 오던 도중에 빈집이라도 있었던 모양이지, 보안관은 그렇게 생각했다.
햄스터처럼 입에다가 잔뜩 과자를 집어넣고 열심히 씹어 대는 두 사람을, 제니와 유빈은 어머니의 미소를 지으면서 바라보고 있었다.
“어? 그런데 제니랑 유빈이, 너희 옷이 바뀌었다? 못 보던 옷인데?”
작은 과자 두 봉지를 다 먹어 치우고 박카스로 입가심까지 하고 난 뒤에야 보안관이 깜짝 놀라며 수상하다는 듯 물었다.
참 빨리도 알아챈다…….
그 곰 같은 모습에 유빈과 제니는 새삼 웃음이 났다.
“어때요? 이거 입어도 예뻐요?”
제니가 모델처럼 포즈를 취하며 새 옷을 보여준다. 보안관은 바보처럼 입을 헤 벌리고 있고, 삼식이는 별로 관심이 없다.
“예뻐, 예쁘긴 한데…….”
“왜 둘 다 옷을 갈아입었는지 궁금하다고요?”
제니가 도와주자 보안관은 고개를 끄덕였다.
제니가 갑자기 고개를 숙이면서 부끄럽다는 듯 말했다.
“있죠, 유빈 오빠가…… 저를 오늘 자기 여자로 만들었거든요. 옷은 그때…….”
띠잉~!
정말 간만에 주어진 평화로움을 즐기며 콧속에서 마른 피딱지들을 후벼내고 있던 유빈은 난데없는 제니의 말에 깜짝 놀라서 그녀를 돌아보았다.
“야! 내…… 내가 언제…….”
“그 옥상 문 붙잡고 그랬잖아요. 자기 여자라는 말도 하고 막 욕도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