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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 하이웨이 (5) (62/449)


62. 하이웨이 (5)
2021.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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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한 놈이라도 숨어 있다면 또 원하지 않는 싸움을 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실내에 들어가 방과 방 사이로 돌아다니려면 아무래도 줄이 없는 편이 낫다. 망설이던 제니도 땅에 떨어진 주머니칼을 주워 들고 유빈의 뒤를 따랐다.

“같이 가요.”

목소리를 낮춰 말하는 제니에게 고개를 끄덕여 준 뒤, 유빈은 계단을 걸어 내려갔다. 2층 계단으로 이어진 곳에는 스테인리스 창살로 된 방범 문이 굳게 닫혀 있고, 3층의 현관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유빈은 칼을 든 왼손을 앞세우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방범 문의 빗장은 자물쇠가 단단히 걸려 있다.

최소한 아래쪽에서 올라올 공격은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문제는 3층 집이다. 유빈은 슬쩍 고개만 내밀어 안쪽을 살폈다.

꽤 넓은 거실은 엉망으로 어지럽혀져 있지만 사람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귀를 기울여 봐도 인기척은 없다. 유빈은 발소리를 죽이며 집 안으로 들어갔다.

보이는 문은 모두 네 개. 세 개는 열려 있고, 하나는 닫혀 있다. 그리고 베란다로 통하는 유리문 역시 반쯤 열린 채였다.

‘가장 가까운 쪽부터…… 그리고 열려 있는 문부터.’

유빈은 마음속으로 순서를 정했다. 만약 누군가 숨어 있다면 열려 있는 문 쪽이 더 위험하다.

손잡이 돌아가는 소리도 내지 않고 달려들 수 있으니까 이쪽에서 대비할 기회가 하나 적은 셈이다. 첫 번째 방으로 들어가기 전에 유빈은 제니에게 귀엣말을 했다.

“내가 방에 들어가면 문 앞에 서서 망을 봐줘. 그리고 혹시나 다른 방에서 누가 튀어나오면 곧바로 따라 들어와. 알았지?”

“네.”

제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유빈은 열려 있는 첫 번째 문을 슬쩍 밀었다.

끼이이이―

고요한 집 안에 경첩이 움직이는 소리가 울리며 긴장감을 높인다. 문이 벽에 닿을 만큼 완전히 열린 것을 확인한 유빈은 다섯을 센 다음에 재빠르게 뛰어들었다.

아무도 없다. 어린 학생이 썼던 것으로 보이는 방에는 사람이 숨어들 만한 곳도 보이지 않는다.

다음은 베란다다. 긴 유리문을 통해 안을 들여다본 후에 유빈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박스와 살림살이가 쌓여 있고, 구석에 세탁기가 보인다. 전부 둘러봤지만, 역시 아무도 숨어 있지 않았다.

“아까 그 사람들 집이 아니었네요.”

다시 거실로 돌아왔을 때, 현관문 쪽에 이어진 벽을 보고 난 제니가 귀엣말을 한다. 유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벽에 걸려 있는 여러 장의 커다란 가족사진들. 그중 어디에도 스포츠머리와 장발의 모습은 없다.

사진들은 대부분 함께 웃고 있는 세 사람으로 채워져 있었다. 평범해 보이는 30대 아저씨, 웨딩 사진에서는 꽤나 귀여웠던 아줌마, 그리고 아주 밝게 웃고 있는 아이…….

아마 유빈이 가장 처음 수색을 했던 방의 주인이었을 것이다.

끼이익―

안방을 마지막으로 열려 있는 문들은 모두 수색을 마쳤다.

조마조마해하면서 벽장과 똥 무더기가 널린 안방 화장실까지 모두 열어봤지만, 아무것도 없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칼을 보고 놀랐던 것이 이 집 안에서 겪은 가장 큰 위협이었다.

이제 남은 것은 단 하나, 닫혀 있는 문뿐이다. 그건 아마도 거실에 으레 붙어 있는 욕실일 것이다.

유빈이라면 절대 욕실 안에 문까지 닫고 숨지 않는다. 바닥이 미끄러워 발을 움직이기가 불리한 데다가, 이용할 만한 지형지물도 전혀 없기 때문이다.

사방을 도깨비 소굴처럼 잔뜩 어지럽혀 놓은 놈들이 유독 여기만 문을 꼭 닫아놨다는 건…… 짚이는 것이 떠오른 유빈은 제니에게 사선으로 물러서라고 말했다.

달칵!

손잡이를 잡고 천천히 돌리자 문이 안쪽으로 열렸다. 유빈은 벽까지 닿도록 문을 민 뒤, 옆으로 걸음을 옮겨 섰다.

텅!

욕실 벽에 닿은 문손잡이가 가벼운 쇳소리를 냈다. 열린 창문을 통해 비쳐 드는 빛 때문에 직사각형의 욕실 내부는 전부 훤히 들여다보였다.

유빈은 조심스럽게 안으로 한 걸음을 내디뎠다. 움직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지만, 유빈이 예상했던 대로 끔찍한 광경이 그를 기다리고 있다가 맞이해 준다.

발가벗겨진 채 혀를 빼물고 죽어 있는 여자의 시신이 욕조 안에 아무렇게나 처박혀 있다.

반쯤 잘린 혀 때문에 얼굴이 온통 피투성이기는 해도 조금 전 벽에 걸린 가족사진에서 보았던 그 여자라는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윽―! 유빈은 구역질을 참으며 팔을 들어 코를 막았다. 여자의 얼굴과 몸은 여기저기 보라색 멍이 심하게 들어 있지만, 잘린 혀 외에는 치명적인 외상이 있는 것 같아 보이진 않았다.

창문을 열어뒀는데도 악취가 진동을 하는 걸로 미루어, 이미 죽은 지 며칠이나 지난 모양이었다.

‘자살을 한 건가.’

오죽했으면…….

유빈은 눈살을 찌푸리며 뒷걸음질을 쳐 나오려는데 어느새 문가로 와 기웃거리던 제니가 풀 죽은 목소리로 물었다.

“불쌍해라. 아까 그 사진 속 아줌마죠……?”

“응.”

유빈은 짧게 대답했다.

“아무거로라도 좀 덮어주세요. 응, 오빠?”

제니가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부탁을 한다.

“저렇게 있는 거…… 너무 싫을 거예요.”

죽은 사람이 그런 걸 알 리 없겠지만, 특별히 어려운 일도 아니어서 유빈은 알겠다고 했다. 안방에서 커튼 한쪽을 잡아 뜯어 와 욕조 내부 전체를 감싸 덮어준 뒤, 문을 잠근 채 닫아버렸다.

이걸로 집안 수색은 모두 끝났다. 예상했던 대로 장발의 협박은 그냥 허세에 불과했지만, 그걸 확인하기 위해 꽤나 긴장하면서 긴 시간을 허비해야 했다.

“후우우~”

유빈은 절룩거리며 주방으로 걸어가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온몸이…… 그리고 마음까지도 너무 아프다. 제니는 거실의 장식장부터 시작해서 싱크대 찬장까지 다급하게 뒤지고 있다.

“뭘 찾아?”

“약! 가정집이니까 분명히 비상약이 있을 거예요!”

빨랫줄을 아직도 허리에 감은 채 꼬리처럼 길게 끌고 다니며 바쁘게 움직이던 제니가 대답했다. 유빈은 의자에 기대며 엉망으로 엉클어진 머릿속을 정리했다.

이제 뭘 해야 하지? 가장 급한 일이 뭐지? 지금 바로 건너편 건물로 넘어가는 건 무리다.

철책을 받칠 힘도 없지만, 만에 하나 또 아까 같은 녀석들을 만나게 될 경우까지도 대비해야 하니, 어느 정도 체력을 회복하기 전까지는 섣불리 움직여선 안 된다.

그런 개새끼들을 만나게 될 줄이야……. 머릿속이 온통 좀비에 대한 걱정뿐이어서 사람을 계산에 넣지 않았던 게 실수다.

이제 고립된 지 불과 닷새째이니 건물들 어딘가에 살아남은 사람들이 꽤나 많을 것이란 건 충분히 예측할 수 있던 일이다.

체력을 회복한다……. 쉰다……. 시간이 필요한 일이다. 그런 경우 신경 써야 하는 건…… 보안관과 삼식이!

“아차차!”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유빈은 다시 몸을 일으켜 안방으로 갔다. 구급상자를 찾아 들고 오던 제니가 물었다.

“오빠, 왜 그래요? 가만히 있어봐요. 치료부터 하게…….”

“아니, 잠깐만. 애들이 걱정하고 있을 거야.”

보안관과 삼식이, 둘 다 자신이 제니와 함께 골목으로 뛰어 들어오는 모습을 분명히 보았을 것이다. 그 건물 앞을 지키고 섰던 괴물들 중 한 무리가 이쪽으로 달려왔으니, 그건 확실하다.

그런데 그들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4층 건물 때문에 유빈과 제니가 지붕을 타고 오는 상황은 볼 수 없다.

다시 말해 유빈과 제니가 이곳에 온 이유를 보안관과 삼식이는 전혀 모른다. 어쩌면 그들 역시 고립되어 버렸다고 여겨 오히려 구조를 하려 들 수도 있다.

삼식이는 느긋하니까 괜찮겠지만, 보안관은 제니를 위해서라면 온갖 무리수를 다 던질 놈이다. 시간이 이렇게 흘렀으니 이쯤에서 뭔가 안심하고 기다리라는 신호를 보내야 할 필요가 있다.

우두둑!

유빈은 한쪽만 남은 커튼을 봉과 함께 뜯어냈다. 연한 분홍색 커튼이어서 글씨를 쓸 배경으로 삼을 만했다. 그리고 학생 방으로 가서 그림물감을 찾아냈다.

제니가 주방에서 찾아다 준 커다란 대야에 물감을 전부 다 짜 넣고, 역에서 챙겨 온 음료수를 부어 빗자루로 풀었다.

찐득한 물감이 듬뿍 묻은 빗자루를 쥔 채 커튼 위에서 인상을 쓰고 고민하는 유빈에게 제니가 물었다.

“오빠, 뭐……해요? 대체.”

“아, 저기 보안관이랑 삼식이한테 우리 안전하니까 거기서 기다리라고 신호를 보내려는데, 그게 막상 붓을 잡고 나니까 뭐라고 써야 할지를 모르겠어서……. 너무 길면 못 읽을 것 같기도 하고, 그렇다고 짧게 쓰려니까 할 말이 많고.”

유빈이 곤란하다는 표정으로 입을 쫑긋거리자 그 얼굴을 가만히 보고 있던 제니가 미소를 짓는다.

“오빠, 머리 좋다는 말 취소할 거야.”

“응?”

“그렇게 간단한 걸 왜 못한다고 해요? 자, 줘봐요. 내가 할게. 이 방향으로 걸 거죠?”

제니는 자신 있는 표정으로 빗자루를 건네받고 큼직하게 딱 세 글자만 썼다. 아니, 보다 정확하게는 글자 두 개와 마크 하나라고 해야 하겠지만, 하여간 의미 전달만큼은 확실히 될 것 같았다.

유빈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물감이 대강 흡수되기를 기다리며 제니가 쓴 글자를 바라봤다.

W8♡

세 친구도 게임에서 한타를 벌이기 직전, 기다려 달라는 뜻으로 많이들 쓰던 표현이지만, 하트가 붙으니 평화롭게 보인다.

커튼 봉을 깃대 삼아 베란다 밖에 깃발을 내걸고 문과 물건들로 고정을 시켜둔 뒤에야 유빈은 비로소 소파에 기대앉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이 집에서 찾아낸 간식거리들을 뜯어 우물거렸다.

어린아이가 있던 집이어서 그런지 젤리니 초콜릿, 과자, 라면 따위가 아직도 꽤나 남아 있었고, 그건 아침도 거른 채 피를 한 컵 가까이나 쏟은 유빈에게 정말 고마운 일이었다.

역에서 챙겨 온 음료수를 꺼내 제니에게 주고 자신도 마셨다. 벽에 걸린 시계가 정확한 거라면 벌써 5시 20분이나 됐다. 3시 38분에 맞춰 이 골목 안으로 뛰어 들어왔으니, 두 시간 가까이나 지나버린 것이다.

더위에 찐득해진 초콜릿을 입에 넣고 녹이고 있노라니, 저절로 잠이 들 것 같은 기분이다.

“이제 바지 벗어요, 오빠.”

금방 음료수 하나를 다 비운 제니가 발밑에 앉으며 말했다. 유빈은 반쯤 감겼던 눈을 뜨며 질색을 했다. 아득하던 정신이 확 깬다.

“엉? 왜…… 왜?”

“치료하고 붕대도 감아야 하니까. 지금 오빠 다리, 눈 뜨고 못 볼 지경이에요.”

유빈은 자신의 오른쪽 종아리를 내려다봤다. 너덜거리는 청바지 사이로 역시 너덜거리는 피투성이 살이 보인다. 기껏 감아두었던 수건은 벌써 풀려 어딘가로 사라져 버렸다.

아까부터 워낙 계속 아파왔기 때문에 이제 익숙해졌는지, 특별히 고통이 더 심하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쓰으으~ 자기 상처를 보고 있자니 유빈의 얼굴도 찌푸려졌다. 그래도 바지는 벗을 수 없다.

“보안관도 그러더니, 어제부터 너희 왜 이렇게 내 바지를 못 벗겨서 난리야? 저기…… 그냥 바지를 잘라내면 되잖아. 무릎 이 부분을 가위로.”

유빈이 더듬거리자 제니는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한숨을 짓더니 가위로 바지를 잘라내기 시작했다.

서걱서걱!

그리 잘 드는 가위 같지 않지만, 워낙 나긋하게 닳아 있던 청바지는 힘없이 잘려 나갔다. 한쪽은 5부, 한쪽은 긴바지. 유빈은 순식간에 최신 패션의 멋쟁이 거지가 되었다.

“아으~ 어떡해…… 일단 씻어낼게요. 따가울 거예요.”

집에서 찾아낸 생수병을 뜯은 제니는 울상을 지으며 상처 주위에 조금씩 물을 부었다.

“아! 아야야! 쓰으읍!”

유빈은 깨방정을 떨며 비명을 지른다. 시원해져야 하는 게 이치에 맞는데, 상처에 물이 닿을 때마다 담배로 지지는 것 같이 뜨겁다. 제니가 왼쪽 허벅지를 탁, 때리며 나무란다.

“가만히 좀 있어요! 사람이 어떻게 자기 몸이 이렇게 되는 것도 모르고…… 어휴! 이씨!”

유빈은 맥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제니를 유심히 쳐다봤다.

지금 자신의 옆구리가 벗겨진 것만큼이나 이 아이의 옆구리도 빨랫줄에 쓸려 상처를 입었을 것이다. 그나마 옷을 두 겹으로 입어 피가 내비치지 않을 뿐이다.

혹시 블라우스 위로 핏자국이 보이진 않는지 살피던 유빈은 그제야 그녀의 바지가 흠뻑 젖어 있다는 걸 깨달았다.

“야…… 너, 저기…….”

유빈이 자기 바지 주변을 손으로 가리키며 걱정스럽게 쳐다보자 제니는 깜짝 놀라며 손으로 바지를 가렸다.

“어, 어머!”

하긴…… 유빈은 상황이 충분히 이해가 됐다.

지난 한 시간 동안 목숨을 걸고 싸움을 한 데다가 사람 시체를 셋이나 봤으니 오줌을 지리는 건, 그리고 그 사실조차 깨닫지 못하는 건 그리 놀라울 일도, 창피할 일도 아니긴 하다.

하지만 이제 겨우 안면을 튼 지 이틀밖에 안 된 사이인 만큼 그 민망함도 훨씬 더 클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미지로 죽고 사는 아이돌이 아닌가.

“어후~ 이게 뭐야……. 나 오줌 쌌었구나……. 왜 몰랐지?”

잠시 머리를 푹 숙이고 있던 제니가 다시 고개를 들며 말했다.

“후~ 이건 진짜 비밀이에요. 알았죠?”

“응, 그래. 약속할게……. 그…… 안방에 가서 거기 있는 아줌마 옷 중에 아무거로나 갈아입고 와.”

“……오빠 치료 먼저 하고요. 이건 그냥 창피한 거지, 아픈 건 아니니까.”

“사실 창피한 것도 아니야. 너 엄청 침착하게 잘 싸웠어. 네 덕분에 살았으니까.”

유빈은 진심을 담아 말했다.

“하, 그런가요?”

제니는 이내 평상시의 얼굴로 돌아가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굴며 물기가 걷힌 유빈의 다리에 빨간 약과 연고를 발라주었다.

“미안하다…….”

그녀의 옆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던 유빈이 조용히 중얼거렸다.

“네? 뭐가요? 참내, 죽을 뻔한 건 오빠예요. 이렇게 많이 다치고…….”

제니가 어이없다는 듯 대꾸하며 붕대를 감는다.

유빈은 마음속으로만 대답했다.

미안하다, 내가 힘이 없어서 이런 일들을 겪게 했어…….

만약 오늘 그녀와 함께 있는 게 보안관이었다면 그깟 식칼 들고 설치는 양아치 두 놈쯤, 제니가 비명을 지르기도 전에 쫙쫙 뻗게 만들었을 테지. 진우였어도 별로 애먹지 않고 후딱 해치워 버렸을 것이고…….

제니의 젖어 있는 바지와 엉망으로 긁혔을 허리는 자신이 힘이 부족한 남자라는 증거라고 유빈은 생각했다. 그러니까 더욱 신중하게 움직일 수밖에 없다.

“아파요? 혹시 지금 너무 꽉 조여진 거?”

붕대를 묶으면서 제니가 묻는다. 유빈이 괜찮다고 하자 제니가 다시 명령을 내렸다.

“자, 이제 웃옷 걷으세요.”

유빈은 순순히 옆구리를 내보여 줬다. 등에 가까운 왼쪽이라 혼자서는 약 바르기도 힘들다.

크으~ 피와 먼지가 잔뜩 묻어 엉긴 상처를 보며 제니가 또 눈살을 찌푸렸다.

“참아요…….”

경고와 거의 동시에 수건을 받쳐 주며 물을 붓는다. 물기를 닦은 상처에 빨간 약을 바른 뒤에는 입김까지 호~ 하고 불어줬다.

아, 이것참. 유빈은 갑자기 민망해져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반창고까지 꼼꼼하게 붙여주고 난 다음, 제니는 연고를 건넸다. 상처 치료제는 그리 많이 남아 있지 않았다.

“자요, 이거 빨랫줄에 쓸린 자리에 바르세요.”

“아니, 아니…… 그건 너 먼저. 이제 옷 갈아입고 치료해. 너도 아마 꽤나 긁혔을 거야.”

유빈의 제안을 받아들인 제니는 거실을 가로질러 있는 안방으로 들어갔다.

탁, 문이 닫히는가 싶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서 곧바로 문을 열고 나온 제니가 말했다.

“오빠, 저 무서워요.”

무슨 말인지 이해를 못 한 유빈은 그냥 대답 없이 멍하니 앉아 있었다. 뭐, 무섭겠지. 남자인 나도 그런데…….

제니가 다시 같은 말을 반복한다.

“저 무섭다고요~”

“응?”

유빈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제니가 답답하다는 듯 안방 문 앞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 앞에 와서 앉아 있어달라고요, 무서우니까. 어휴~ 참.”

“아아, 그 말이었구나. 그래, 그럴게.”

유빈은 절룩이며 안방을 향해 걸어갔다. 제니는 유빈이 안방을 등지게 한 뒤 앉혔다. 그리고…….

끼이익, 문이 열리는구나.

끼이익, 다시 문이 닫히는가 보다.

어? 그런데…… 달칵, 하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아직 열려 있는 문을 통해 안방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소리로 고스란히 유빈에게 전해졌다.

장롱 문을 열고 옷들을 뒤지는 소리, 다시 서랍을 여는 소리…… 의식하지 않으려고 무척 애를 쓰고는 있지만, 상황이 진행될수록 심장박동도 점점 빨라지는 것을 유빈은 막을 수 없었다.

그리고 마침내…… 스르륵, 두꺼운 청바지가 매끄러운 다리를 타고 내려가는 소리.

아, 제니야……. 도대체 나한테 왜 이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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