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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 하이웨이 (4) (61/449)


61. 하이웨이 (4)
2021.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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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쉿!”

유빈은 스패너를 고쳐 잡으며 반투명 유리문에 바짝 붙어 섰다.

분명히 조금 전 이 안쪽에서 사람 그림자가 어른거리다가 사라지는 걸 봤다. 어쩌면 자신이 제니에게 홀려 주의를 빼앗기고 있는 동안 문이 살짝 열렸을지도 모르겠다.

유빈은 조심스럽게 문의 손잡이를 돌려봤다. 움직이지 않는다. 안쪽에서 잠겨 있다.

“제니야.”

유빈은 목소리를 낮춰 제니를 불러 피하라는 손짓을 했다. 제니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고 유빈의 뒤에 와 섰다. 아직 계단에는 아무도 없다.

유빈은 근처에 있던 커다란 화분을 재빨리 끌어와 문 앞에 막아 세운 뒤, 손잡이를 꽉 잡은 채 버티고 섰다. 좋지 않은 예감이 든다.

“어? 어어? 이거 안 열어?”

잠시 후, 발소리도 내지 않고 다가와 손잡이를 돌리던 누군가가 문이 밀리지 않자 짜증스러운 목소리를 낸다. 유빈은 다급하게 큰 소리로 말했다.

“안 나오셔도 됩니다. 금방 지나갈 거니까.”

“아니, 뭔 소리야? 남의 집 옥상에 멋대로 기어 들어온 도둑놈이 누구더러 나와라 나오지 마라야?”

“놀라게 해드려서 죄송해요. 조용히 한다고 했는데, 제 친구들이 워낙 여럿이라 소리가 났나 봅니다.”

“큭큭큭…….”

대화를 나누는 상대가 아닌 다른 목소리가 웃는다.

“큭큭, 씨발. 친구가 여럿이란다. 어이, 학생. 자꾸 그렇게 거짓말을 하니까 우리가 너를 못 믿잖아.”

바라는 게 설마…….

유빈은 몸을 바짝 붙인 채 윤곽만 어른거리는 문 안쪽을 살폈다. 현재 보이는 건 두 사람, 그리고 둘 다 손에 반짝이는 쇠붙이를 들고 있다.

“이러지 맙시다. 서로 자기 한 몸 챙기기도 벅찬 상황인데, 싸울 필요 있습니까?”

“말 잘했어. 그래, 힘들지? 우리가 도와줄게. 어서 네 한 몸 챙겨서 가. 여자는 놔두고.”

그러는 동안에도 계속 문을 밀치려 든다. 가뜩이나 아픈 다리로 버티고 있으려니 온몸에서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음식 떨어졌죠? 얌전히 있어주면 오는 길에 먹을 걸 가져다줄게요. 그 정도로 타협 봅시다.”

통하지 않을 걸 알면서도 유빈은 제안을 해봤다. 정말 싸우고 싶지 않았다. 지금 이 상황에서는 일단 시작되면 그 후론 비기는 것도 없고, 항복도 없는, 잔인한 싸움이 될 수밖에 없다는 걸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정말? 정말이야?”

“네, 약속합니다.”

“그럼 뭔가 성의를 보여야지. 그 옆에 여자는 놔두고 갔다가 음식 가져와서 데려가.”

“큭큭큭, 그래그래. 우리가 손끝 하나 안 대고 잘 데리고 있다가 돌려줄게.”

잠시 사라져 있던 두 번째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슬슬 대화가 끝나갈 시점이 온 것이다. 유빈은 안쪽의 움직임에만 주목하면서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두 번째 놈이 다시 물어왔다.

“야, 이 새끼야! 놓고 가라고. 그럼 보내줄게. 어때? 싫어?”

“거절한다, 존만아.”

“어라? 이런 씨발 놈 봐라? 살려준다는데도 싫다네? 너 왜 그러냐? 미쳤냐?”

문을 밀던 놈이 몸을 웅크리고 한쪽으로 비켜서는 게 보인다. 그리고 다른 녀석이 소리를 죽여 다가온다. 유빈은 곧 있을 공격에 대비하면서 대화에 정신이 팔린 척을 했다.

“이 세상에 어떤 새끼가 자기 여자를 남한테 맡겨? 이 개새끼들아!”

“어? 진짜? 네 여자야? 우린 그런 건 몰랐어.”

“그래, 그런 거면 그냥 보내줄게. 우리가 그런 파렴치한…….”

놈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진다. 훗, 귀를 가까이 대라, 이 말이냐? 낌새를 눈치챈 유빈은 재빨리 반대쪽으로 뛰었다.

와장창!

윗부분의 유리창을 산산조각내면서 커다란 아령이 날아온다. 그리고 곧바로 문이 열렸다.

받쳐 두었던 화분이 약간의 시간을 벌어주는 사이, 대비하고 있던 유빈은 놈의 손목을 사정없이 스패너로 내려쳤다.

빠각!

“으아악―!”

놈이 박살 난 손을 부여잡고 허물어지는 틈에 유빈은 발로 차서 문을 다시 닫았다.

쾅―!

깨어진 유리 사이로 서로가 빤히 보이지만 문이 가로막고 있는, 묘한 대치 상황이 되었다. 두 번째 놈이 유빈에게 칼을 겨누고 선 채 아래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

“야! 야! 너희 다 올라와! 이 씨발 새끼! 말로 곱게 해주려니까 안 되겠어. 아주 그냥 가죽을 홀랑 벗겨가지고…….”

유빈은 반응하지 않았다. 동료가 더 있다는 말이 허세라는 것을 알고 있다. 자신이 썼던 수법을 고스란히 따라 할 만큼 이놈들도 긴장하고 있다는 의미다.

아니, 그게 설혹 사실일지라도 지금 당장은 허세라고 믿어야 한다. 저따위 소리에 기가 눌리거나 뒤로 물러나면 안 된다.

“끄으으~! 이 씨발 놈이!”

스포츠머리에 덩치가 좋은 첫 번째 놈이 작살난 손목을 움켜쥐고 일어나면서 울음이 섞인 목소리로 욕설을 늘어놓았다.

놈은 왼손에 칼을 옮겨 들고 있다. 이제 저놈이 왼손에 든 칼을 던져 시간을 벌고, 뒤의 장발이 문을 열며 달려들겠지…….

유빈은 스포츠머리의 왼손에 집중했다.

“야, 너 이제 보니 다리도 완전히 작살난 새끼가 어쩌려고 까분 거야, 엉? 아우~ 저 피 좀 봐.”

장발이 주의를 돌려보려 애를 쓴다. 유빈은 자기가 가진 무기와 약점에 대해 생각했다.

자신이 가진 무기는 저놈들의 칼에 비해 훨씬 무겁고 느리다. 살짝 긋는 것만으로 상대를 움찔하게 만들 수 없고, 찌른다고 해서 치명상을 주는 무기도 아니다.

따라서 스윙을 크게 하기보다는 가속이 붙는 백핸드로 짧게 쳐야 그나마 맞힐 가능성이 올라간다.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불리한 무기라는 말이다.

하지만 저놈들은 케블라 장갑에 대해 모른다. 그게 그가 가진 장점이다. 여차하면 칼날을 잡아도 큰 부상을 입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게 해서 기회가 오면 망설이지 말고 머리통을 갈겨야 한다.

예전의 자신이었다면 차마 못할 일이지만, 수많은 괴물들의 대갈통을 부숴본 지금은 그렇게 할 수 있다.

물리면 죽는 좀비들에 비한다면 칼 든 상대는 자비롭기까지 하다. 문제는 자신의 다리가 얼마나 빠르게 생각대로 움직여 줄까 하는 점이었다.

휙―

예상했던 대로 팔목이 부러진 스포츠머리가 칼을 든 왼팔을 들어 올렸다. 유빈은 뒤로 물러나지 않고 옆으로 뛰었다.

“죽어! 이 새끼야!”

고함 소리와 함께 식칼이 허공을 가르며 날았고, 장발이 문을 발로 차면서 뛰어나온다. 식칼을 두 손으로 잡고 배를 향해 내지르는 꼴을 보니 대단한 싸움꾼은 아니다.

스패너를 든 오른팔이 앞으로 오도록 몸을 튼 채 기다리고 있던 유빈은 비스듬히 내려치는 백핸드로 놈의 칼 든 손을 후려갈겼다.

챙강!

칼과 스패너가 부딪치며 날카로운 쇳소리가 난다. 놈의 팔이 아래로 처지는 것을 확인한 유빈은 오른발을 크게 내디디며, 스냅을 이용해서 놈의 얼굴을 스패너로 후려쳤다.

우직!

코뼈와 이빨이 한꺼번에 부러지는 둔중한 소리가 들렸다.

으아악, 장발이 얼굴을 부여잡고 쓰러진다. 기회가 왔다. 유빈은 스패너를 쳐들었다가 힘차게 휘둘렀다.

머리를…….

그런데 그게 역시 쉽지가 않다. 자신도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유빈의 무의식은 급소를 피해 가운데보다 약간 위쪽을 때렸다.

콰악!

쇠뭉치가 할퀴고 지나간 자리의 가죽이 찢어지고 실처럼 피가 솟아올랐다.

“아으윽!”

장발은 본능적으로 아무렇게나 식칼을 휘둘렀다. 유빈은 발을 빼며 뒤로 물러났다.

그가 다리를 위협하는 칼날에 정신이 팔린 사이, 문 안쪽에 도사리고 있던 스포츠머리가 유빈의 허벅지를 향해 몸을 날리며 달려들었다.

“이야아아아~!”

쿵!

찢어져 있는 오른 다리의 상처가 더 크게 벌어지며 인두로 지지는 것 같은 고통을 준다.

유빈의 입에서도 신음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다행히 스패너를 놓치지는 않았다. 유빈은 스패너로 놈의 등짝을 후려갈겼다.

“놔주지 마! 꽉 잡아!”

장발이 터진 머리통을 움켜쥐고 일어나 칼을 고쳐 잡으며 소리를 질렀다. 그 명령을 따르려는 것인지, 허벅지에 매달린 스포츠머리는 아무리 때려봐도 허리띠를 꽉 잡은 손을 놓으려 들지 않았다.

장발이 방향을 바꿔 왼쪽 뒤로 돈다. 발이 묶여 있는 사이에 등 뒤를 노려보겠다는 심산이다. 유빈은 몸을 돌리며 제니와 연결된 빨랫줄을 들어 스포츠머리의 목을 감고 당겼다.

커컥! 비명도 지를 수 없을 만큼 숨통이 조여졌는데도 여전히 놈은 유빈을 놓아주지 않는다. 그러는 사이에 왼편에서 장발이 칼을 내질러 왔다.

푸욱!

칼끝은 분명히 유빈의 옆구리를 파고들었다. 금세 번져 나온 뜨거운 피가 흰 면 티를 붉게 물들인다. 하지만 유빈은 그 날카로운 쇠붙이가 가죽을 뚫고 더 깊숙이 쑤셔지기 전에 칼날을 꽉 잡는 데 성공했다.

“으으윽―!”

유빈은 얼굴을 찌푸리면서 칼날을 움켜쥐고 얕게 찔린 옆구리를 뺐다. 그러는 동안 스포츠머리의 목을 감은 빨랫줄을 당기던 오른손의 힘은 자연히 느슨해졌다.

“이 씨발 놈이!”

목이 조금 자유로워진 스포츠머리가 고개를 들고 물러나며 뒷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냈다. 짧은 주머니칼이 햇빛을 받아 위협적으로 번뜩였다.

왼손으로 칼날을 잡고 씨름을 하느라 거의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는 유빈의 오른쪽을 향해 주머니칼을 찔러 넣으려던 순간, 스포츠머리는 목을 움켜쥐고 뒤로 끌려갔다.

제니다. 제니는 빨랫줄을 있는 힘껏 당겨 놈의 숨통을 조였다.

“웨엑, 커컥!”

눈알이 터질 것처럼 충혈된 놈의 얼굴 전체에 핏줄이 잔뜩 도드라져 나오기 시작했다.

당황한 스포츠머리가 주머니칼을 떨어뜨리고 어떻게든 줄을 풀어보려 안간힘을 쓰는 동안, 유빈은 스패너로 칼 든 장발의 팔을 후려갈겼다.

“으아악!”

칼을 놓친 장발은 비명을 지르면서 곧바로 유빈을 향해 몸을 날렸다.

이익! 안간힘을 써봤지만, 유빈의 오른 다리에는 더 이상 놈의 체중을 버텨낼 만한 기운이 남아 있지 않았다. 유빈은 놈의 기세를 이기지 못하고 옥상 난간 너머로 밀려났다.

캑! 뒤로 밀린 유빈의 체중만큼 목에 감긴 줄이 더 당겨지자 스포츠머리의 입에서 쇳소리 같은 비명이 터졌다.

“죽어! 이 개새끼야! 죽으라고!”

장발은 유빈의 목을 치받치며 밀어 댔다. 유빈은 허리가 난간에 꺾인 상태여서 도무지 힘을 쓰기가 어려웠다.

게다가 조금 전, 날을 붙잡고 있던 칼과 스패너도 모두 떨어뜨렸기 때문에 반격할 만한 무기가 남아 있지 않았다.

스포츠머리는 목에 감겨진 빨랫줄 틈으로 손가락을 집어넣고 버티며 떨어진 칼을 집어 들기 위해 천천히 허리를 굽히는 중이었다.

제니가 줄을 당기면서 어떻게든 방해해 보려고 하지만, 그 정도 체중으로는 성인 남자의 힘을 못 당했다.

“제니야, 앉아!”

그렇게 외치는 것과 동시에 유빈은 팔을 뻗어 장발의 허리를 꽉 끌어안았다. 그러고는 다리를 들어 올리면서 아래쪽으로 몸을 던졌다.

“어어어! 으아아악!”

얼결에 허공에 떠버린 녀석은 엄청나게 큰 소리로 비명을 지르면서 함께 떨어지는 유빈의 옷을 꽉 움켜쥐었다.

촤라라락―!

남자 두 명의 체중을 버텨야 하는 빨랫줄이 난간을 훑으며 팽팽하게 당겨졌다.

그롸아아아악!

난데없이 하늘에서 먹이가 떨어질 상황을 맞은 괴물들이 잔뜩 흥분해서 울부짖는다. 벌써부터 펄쩍펄쩍 뛰어오르는, 참을성 없는 놈들도 있다.

드르륵, 드르륵.

줄이 끌리는 소리. 유빈과 장발은 조금씩 더 아래로 미끄러져 내려갔다.

“오빠아―!”

날카로운 제니의 비명이 들려온다. 거꾸로 걸린 유빈은 자신의 멱살을 잡고 아래쪽에 매달려 있는 장발의 손가락을 하나씩 반대로 꺾었다.

“아아악! 제발! 살려줘! 제발! 으아아악! 하, 하지 마!”

정말 간절한 목소리지만, 이제는 되돌릴 수가 없다. 이 상태대로라면 결국 빨랫줄이 끊어져 둘 다 떨어져 죽게 될 것이다. 유빈은 공포에 질린 놈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계속 손가락을 꺾었다.

뚜둑! 한 손만 남은 상황에서도 끈질기게 버티던 장발은 엄지손가락이 부러지는 순간,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으아아아악―!”

놈의 처절한 비명, 좀비들의 포효.

쿠웅―!

그리고 땅에 부딪히며 뼈가 부러지는 육중한 소리가 차례로 이어졌다. 3층 아래로 떨어진 장발은 불행하게도 즉사하지 못했고, 좀비들은 곧바로 달려들어 놈을 조각내기 시작했다.

너무나 처참한 광경이었다. 그리고 그 광경을 만들어낸 것이 자신이라는 사실이 더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사람을…… 사람을 죽였다……. 돌이킬 수도 없다. 유빈은 죄책감을 갖거나 동정하지 않기 위해 눈을 질끈 감았다. 애초에 시작하는 순간부터 네 명 중 적어도 둘은 목숨을 잃을 것이 정해진 싸움이었다.

“오빠! 괜찮아요?”

멀리서 울음 섞인 목소리로 제니가 외치는 것이 들려왔다.

밧줄이 흔들리거나 느슨해지지 않는 것으로 보아, 아마 고맙게도 조금 전 유빈이 지시했던 그대로 앉아서 필사적으로 버티고 있는 모양이었다.

“응, 괜찮아! 너는? 너는 괜찮아?”

“네! 으흐흐으! 흑, 네! 빨리 올라와요!”

“그래! 지금 올라갈게!”

유빈은 배에 힘을 주어 몸을 끌어당긴 뒤, 밧줄을 잡고 발로 벽을 디뎠다.

아으으, 한 걸음을 옮길 때마다 오른 다리의 통증을 견딜 수가 없어서 유빈의 입에서는 신음이 절로 흘러나왔다.

바닥이 난 체력으로 겨우겨우 난간 위에 몸을 걸칠 때, 그가 걱정했던 것은 혹시나 있을지 모르는 스포츠머리의 기습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기우에 불과했다. 추락하는 두 사람분의 체중을 목에 고스란히 전달받은 스포츠머리는 빨랫줄에 친친 감겨 목이 부러진 채 숨져 있었다.

“후우우~!”

유빈이 난간을 넘어 옥상 위로 굴러 떨어지자, 중심을 뒤로한 채 줄을 잡고 앉아 있던 제니가 울먹이며 물었다.

“오빠, 저…… 이제 일어나도 돼요?”

“응…….”

유빈은 힘없이 바닥에 쓰러지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제니는 곧바로 그에게 달려와 안기며 눈물을 터뜨렸다.

“진짜…… 흐윽, 오빠가 죽는 줄 알고…….”

“괜찮아, 괜찮아……. 다시 올라왔잖아, 울지 마. 진정해.”

유빈은 제니의 머리를 쓸어주며 다독인 뒤 몸을 일으켰다. 아직 해야 할 일이 남아 있어서, 이렇게 마음 놓고 울음을 받아줄 수가 없다.

“흐으윽, 칼에도…… 찔렸잖아요?”

그건 유빈도 궁금했다. 대체 얼마나 깊이 찔린 걸까? 붉게 물든 면 티를 들춰봐도 워낙 피가 잔뜩 묻어 있어서 도무지 제대로 보이지를 않는다.

후우우, 한숨을 몰아쉰 유빈은 장갑을 벗고 맨손으로 상처를 더듬어봤다.

그렇게 피가 많이 흘렀는데 정작 찢어진 길이는 손가락 한 마디도 안 된다. 오히려 빨랫줄이 당겨지며 벗겨진 피부가 더 심한 고통을 주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하는 걸까……. 유빈은 다시 옷을 덮고 장갑을 끼면서 허탈하게 웃었다.

케블라 장갑이 잘리는 것을 막아주었다고는 해도, 칼날을 잡고 사투를 벌였던 왼손 역시 퍼렇게 멍이 들고 여기저기 상처를 입었다.

하나 이만하면 다 잘 끝난 일이다. 이제 큰 고비는 넘겼으니 한 가지만 더 하면 저놈들과의 싸움도 끝난다.

“뭐하려고요, 오빠? 어디 가요?”

천천히 일어나 스패너와 칼을 집어 들고 스포츠머리의 목에서 줄을 풀어낸 유빈이 옥상 문 쪽으로 절룩거리며 걸어가자, 제니가 물었다.

유빈은 허리에 묶어둔 빨랫줄을 풀며 대답 대신 계단 아래쪽을 가리켰다.

제니와 건너편 건물을 향해 위험한 공중 걷기를 시작하기 전에, 아까 장발이 불러올리려던 친구가 정말 완전히 허세였는지 눈으로 확인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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