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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상처 (3) (53/449)


53. 상처 (3)
2021.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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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깜짝 놀란 유빈이 이름을 부르자, 1층에서 목소리가 들려온다.

“여기에 있어요!”

내려다보니 그녀는 어제 남자들이 입었던 긴팔 작업복과 쉰내 나는 수건, 자신의 후드 재킷까지를 한데 모아 대야에 담그고 있다. 창밖으로 얼굴을 내민 유빈에게 제니가 손을 흔들며 외쳤다.

“오빠도 그 옷 벗어서 던지세요.”

빨래를 하려는 모양이다. 아, 이거 괜찮을까 싶어진 유빈은 머리를 긁적였다.

아기 피부처럼 부드럽고 쪽쪽 곧게 뻗은 저 손으로 빨래를 한다고? 그것도 풍물시장에서 5천 원에 사 온 중고 작업복을? 그건 안 되겠어. 내가 한다고 해야지…….

땀에 찌든 작업복을 벗고 아무 면티나 하나 주워 입은 후, 천천히 사다리를 타고 내려가면서 유빈은 그렇게 생각했다.

“에이, 오빠. 던지셔도 되는데 뭐하러.”

다가오는 유빈을 보고 제니는 일부러 밝은 목소리를 내면서 수건에 비누를 박박 문질렀다.

제니라는 걸 모르고 본다면 손빨래만 한 10년 한 사람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연기력이 좋다. 하지만 저 손은 육체노동을 해본 손이 아니다. 그런 모습에 더 속이 상한 유빈은 쭈뼛거리며 입을 열었다.

“저기…… 제니야, 아무래도 빨래는…….”

비누를 내려놓은 제니가 유빈을 올려다보면서 쓸쓸하게 물었다.

“왜요? 오빠도 저한테 너는 그런 일 하는 사람 아니라고 하시게요?”

응, 이라고 말할 뻔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유빈은 조금 전 친구들이 사라졌다는 걸 알고 나서 느꼈던 그 미안함과 죄스러움이 기억났다.

다들 나를 위해서 뭔가를 해주는데, 나는 그들을 위해서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가만히 손 놓고 기다리고만 있어야 할 때의 그 감정.

그건 사람을 주눅 들게 하고 비참하게 만든다. 누구나 역할을 가질 때 무리 안에서 당당해질 수 있다.

그렇구나……. 이 아이도 자기 자리가 있어야겠어.

생각이 정리된 유빈은 ‘응’을 발음하기 위해 모아졌던 입술을 급하게 벌리며 말했다.

“아니, 빨래는 같이해야 제맛이라고.”

긴장한 채 바라보고 있던 제니가 미소를 짓는다. 아, 젠장. 안 돼…….

유빈은 마음속으로 모질게 고개를 저었다. 조금 전, 오줌 누면서 깨달음을 얻고 겨우 마음을 비웠는데, 붉은 입술 사이로 빛나는 하얀 이와 초승달처럼 웃는 눈을 보고 있으려니 또 가슴이 두근거린다.

다친 다리를 편 채 철퍼덕, 바닥에 주저앉은 유빈은 쑥스럽게 마주 웃으며 물에 젖은 빨랫감들을 조물거리기 시작했다.

“노래해 주세요.”

10여 분쯤 아무 말 없이 작업복들을 비비고 있던 제니가 말했다.

“노래?”

“네. 이런 거 할 때 기운 나라고 노래하잖아요.”

“아니…… 그렇지만 보통 가수를 앞에 두고는 안 하지.”

“가수 아니라고 생각하면 되죠. 뭐, 어때요. 나 까짓거, 사랑하던 테라도 아니잖아요.”

“너 은근히 뒤끝 있다……. 어젯밤에 그렇게 놀려놓고서 아직도 그러기냐?”

“네, 후후후. 오빠는 얼굴이 빨개질 때 귀엽거든요.”

이런 젠장, 이런 빤한 수법에! 놀리는 거라는 걸 빤히 알면서도 그런 말을 듣는 순간, 유빈은 얼굴이 또 붉게 달아올랐다. 귀까지 빨개진 유빈이 더듬대며 큰 소리로 말했다.

“노…… 놀리지 좀 마! 네가 놀리는 거에 이젠 안 당할 거야!”

“와아~ 오빠, 용기 있으신데요?”

“그, 그건 또 뭔 소리야? 웬 용기?”

“이도 아직 안 닦았으면서 저한테 그렇게 입을 크게 벌리고 숨을 내뿜는 용기!”

윽, 그러고 보니……. 이제는 목까지 빨개진 유빈은 입을 탁, 막고 일어나서 비틀거리며 수돗가로 걸어갔다.

이건 좀 충격이 크다. 그 모습을 보며 제니는 뭐가 그렇게 재밌는지 깔깔거리며 기분 좋게 웃었다.

그리고 유빈이 이를 닦고 있는 동안 등 뒤에서는 웃음소리가 그치고 아주 조그맣게 흥얼거리는 핑크 펀치의 라이브가 시작되었다.

***

“암만 봐도 간격이 더 벌어졌어. 무슨 의미지?”

경전철역 옥상에서 망원경으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던 삼식이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물었다.

놈들의 행동 패턴이 바뀌었다. 덕분에 불안감에 발이 묶인 보안관 일행은 꼬박 두 시간 동안 관찰을 계속해야 했다.

좀비들이 다섯 개 뭉텅이로 나뉜 채 배회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그제나 어제와 같다.

다만, 각 그룹 간의 시간 간격이 훨씬 늘어났다. 어제 새벽 속옷가게 2층에서 탈출할 때의 여유 시간이 15분 정도였는데, 지금은 25분이나 된다. 그제와 비교해 봐도 5분 이상 늘어난 것이다.

좋은 소식이긴 하지만, 그 이유를 알 수 없으니 불안하고 궁금하다. 혹시 규칙성 따위는 애초에 있지도 않았던 게 아닐까 하는 걱정이 든다. 보안관이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한 바퀴만 더 지켜보고, 그때도 시간이 비슷하게 걸리면 그다음에 내려가자.”

“그냥 빨리 갔다 와, 씨발. 뭐한다고 시간을 끌어? 25분이라며? 그럼 충분하잖아!”

음료수를 마시고 앉아 있던 신입이 투덜거렸다.

“그럴까? 그럼 신입, 나랑 같이 뛰는 거다?”

삼식이가 빙글거리면서 놀렸다. 신입은 일부러 시선을 외면하며 말했다.

“내가 올 때부터 분명히 말했을 텐데, 나는 여기서 감시만 하다가 짐이나 들어줄 거라고. 난 위험한 건 안 해!”

“그럼 좀 닥치고나 있어. 잔소리하지 말고.”

보안관이 콱 내지르자 신입은 또 혼잣말로 투덜대며 음료수 캔을 기울였다. 벌써 일곱 개째다.

힘들게 일을 하는 만큼 보상을 받아야 한다면서 자판기에 든 음료수를 잔뜩 꺼내 오더니, 두 시간 동안 그 많은 걸 혼자서 거의 바닥을 내고 있다.

“시간은 둘째치고, 문제는 저놈들인데…….”

상주하고 있는 좀비들의 수를 헤아리면서 삼식이가 말했다.

지하 통로에서부터 약국까지는 70미터가 족히 될 만큼 떨어져 있어서, 거리에서 서성대는 놈들을 모두 처치해야만 저기까지 다다를 수 있다. 20여 걸음 만에 뛰어들 수 있었던 편의점 때와는 이야기가 완전히 다르다.

“하~ 저기가 약국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제 생존자들에게 약탈을 당해 지금은 엉망진창으로 부서지고 텅 빈 편의점을 가리키며 삼식이는 아쉬워했다.

“열다섯 마리라……. 아까부터 그대로네. 좀 줄어들어 주면 좋으련만.”

셋이서 일곱 마리를 처치할 때도 쉽지만은 않았다. 이번엔 그 두 배가 넘는데, 우리 편은 오히려 하나가 줄었다.

초조한 듯 손가락으로 난간을 두드리고 있는 삼식이의 어깨에 보안관이 팔을 턱 둘렀다.

“그건 걱정 마. 내가 해치울 수 있어.”

“하하하, 너 전에는 한 번에 다섯까지 상대할 수 있다며? 왜 갑자기 그렇게 양이 많이 늘었냐, 이 뻥쟁아?”

“아니, 그때만 해도 저 새끼들이랑 싸우는 법을 잘 몰라서 그런 거고, 이제는 달라. 나도 전법을 개발했거든.”

해머를 들고 천천히 스윙하는 흉내를 내면서 보안관이 자신 있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 전법이 뭔데? 나도 좀 들어보자.”

삼식이가 반신반의하는 얼굴로 묻자 보안관이 아래를 가리키며 말했다.

“지금까지는 저 새끼들이 달려들 때 항상 직선에서 머리를 까려고 했었거든. 그래야 죽으니까. 근데 꼭 죽이려고 애쓸 필요가 없겠더라고.”

“안 죽이면 뭘 어떻게 하는데? 데리고 살아?”

“미친놈, 하여간에…… 쯧! 요는 발을 묶어놓는 게 먼저라는 거지. 그래서 생각한 건데, 일단 저것들이 달려올 때 상점 방향으로 유도해. 그런 다음에 골반이나 허벅지를 갈겨서 날리는 거야, 상점을 향해서. 저기 상점가에 삐죽삐죽하게 깨져 있는 유리창 보이지? 저런 데 박히거나 유리창을 깨고 날아가면, 위에서 떨어지는 유리 파편들이 알아서 저놈들을 끝장내 줄 거라고.”

그렇게 말하면서 보안관은 유리창 조각이 떨어져 목을 자르는 시늉을 했다.

아으~ 징그럽겠다……. 삼식이는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만약에 그렇게 안 되면 어떡해? 괜히 팔만 잘려 나간다거나…….”

“그래도 괜찮아. 골반을 작살내면 뛰어다니지를 못할 테니까. 훨씬 상대하기가 쉽지.”

“그럴까? 그럼 너는 그렇게 한다고 치고, 난 그동안 뭘 해?”

불안한 표정으로 삽자루를 조몰락거리면서 삼식이가 물었다.

이 무기는 거리가 확보되지만 살상력이 너무 낮다. 보안관처럼 해머를 휘두를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목숨이 걸려 있는 상황에서 그렇게 힘에 부치는 걸 억지로 쓰는 건 무리다.

보안관은 자신의 발목을 가리켰다.

“넌 내 뒤에 붙어 있다가 내가 날리는 새끼들마다 쫓아가서 삽을 세워서 여길 때려. 똑바로 자빠져 있는 새끼는 발목을 때리고, 앞으로 엎어진 놈들은 아킬레스건을 노리면 될 거야. 그러면 너도 멀리에서 때릴 수 있으니까 비교적 안전하고, 저 새끼들이 혹시 다시 일어나더라도 뛰어다니지는 못할 테니까. 할 수 있겠어?”

“이렇게…… 말이지?”

삼식이가 신입의 발목을 겨누고 연습 삼아 천천히 삽을 갖다 대보자, 깜짝 놀란 신입이 발광을 하며 소리를 질렀다.

“야이 개새끼야! 왜 이래, 재수 없게!”

“하하하, 네가 하필 딱 다리를 쫙 펴고 앉아 있으니까 그렇지. 신입, 그러지 말고 다리 한 번 더 펴봐. 연습 좀 더 하게.”

“지랄하지 마. 네 발목에다가나 실컷 해라.”

흥! 삼식이는 어깨를 으쓱한 뒤에 바닥에 그어진 선을 향해 몇 번 더 삽을 휘둘러 봤다.

보고 있던 보안관이 말했다.

“너무 정확하게 하려고 할 필요도 없고, 꼭 발목을 끊을 만큼 세게 치지 않아도 돼. 무릎이든 어디든 날만 세워서 가볍게 때리면 반드시 무리가 가게 되어 있어. 사람 몸이란 게 워낙에 강하면서도 약하거든. 그리고 만약에 한 번에 명중시키지 못하면, 또 휘두를 생각 말고 빨리 물러나. 일단 약국까지 가는 게 목적이니까 시간 끌고 위험을 무릅쓸 필요 없어.”

“알았어. 근데 어째 이 계획, 영 허술하다? 유빈이가 있었으면 분명히 뭐가 부족한지를 딱 꼬집어서 말해줬을 것 같은데, 나는 그게 뭔지를 모르겠네.”

“그렇더라도 어쩔 수 없지, 뭐. 끙끙 앓고 있는 놈을 여기까지 끌고 올 수는 없잖아. 지금은 그냥 너랑 나랑 몸으로 때워야 해. 어? 야, 저기 골목 끝에 또 한 그룹 들어온다. 시간 적어두자. 어휴, 씨발. 많기도 하다. 이번엔 누구네 차례지?”

“음, 영숙이네인데……. 허, 시간 격차가 더 늘었어. 이번엔 아까보다 6분이나 더 늦게 오네. 6분이면 저놈들 걷는 것처럼 지그재그로 다녀도 이 번화가 끝에서 끝까지 다 걸어갈 시간이야. 얘들, 오늘 왜 이러지?”

망원경과 시계, 그리고 종이에 기입해 둔 시간표를 번갈아 보고 나서 삼식이가 푸념을 했다.

보안관도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는지 초조하게 해머 끝을 두들겼다. 그렇다고 해서 놈들이 걷는 속도가 현저히 느려지는 것도 아니다.

며칠 동안 얼굴이 많이 부패하긴 했지만, 여전히 빨간색 원피스가 터질 듯 탱탱한 가슴을 휘두르면서 골목에 들어선 영숙이는 6분여 만에 주변의 무리들과 함께 시야 바깥으로 빠져나가 버렸다.

이틀 전에 봤던 때와 거의 똑같은 타이밍이다. 놈들의 꼬리 부분까지 다 빠져나가자 번화가 골목은 또다시 한산해졌다.

열댓 마리의 좀비들만이 목적을 잃은 망자처럼 반쯤 꺾여 나간 몸뚱이를 이끌고 이 상점, 저 상점 사이를 천천히 배회할 뿐이다.

손톱 끝을 물어뜯으며 초조하게 지켜보고 있던 삼식이가 입을 열었다.

“음…… 불안한걸. 이렇게 시간이 늘어나는 이유가 도대체 뭐지? 어차피 동네 한 바퀴를 삥 도는 걸 텐데 말이야. 야, 신입! 너 만약에 우리한테 무슨 일 생기면 어떻게 할래?”

신입이 뭔가를 감추는 얼굴로 대답했다.

“야, 새끼들아. 나도 의리라는 게 있어. 여기서 지켜보고 있다가 너희가 정 위험해지면 도와주러 갈 테니까, 너무 걱정 말고 어서 갔다 와.”

어라, 이놈 봐라?

말하는 동안 미세하게 흔들리는 신입의 눈동자를 빤히 들여다보고 있던 삼식이는, 갑자기 신입의 어깨를 확 끌어안고 귀엣말을 건넸다.

“너…… 유빈이가 늘 순하게 구니까 만만해 보여? 그렇다면 잘못 생각했어. 우리 넷 중에서 걔가 보안관 다음으로 유치장에서 가장 많이 자본 애야. 게다가 쟤나 나랑은 비교도 안 될 만큼 머리가 좋아서, 네까짓 게 잔꾀 써봐야 안 통해. 우리가 없어지면 뭘 어째 보겠다는 생각은 아예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알아?”

“뭐…… 뭔 소리야, 미친 새끼!”

신입이 기겁을 하고 팔을 뿌리치자 삼식이는 과장되게 큰 소리로 웃었다.

“하하하! 이것 봐, 속마음을 들키니까 화를 낸다. 하하하! 야, 신입. 그러니까 애초에 이상한 생각을 하지 마.”

조금 떨어진 곳에 서 있던 보안관이 물었다.

“뭔 이상한 생각? 속마음이란 게 뭔데? 뭐하냐, 너희? 갑자기 귓속말을 하고…….”

신입이 경직된 표정으로 보안관과 삼식이의 눈치를 번갈아 본다. 그가 충분히 불안해할 시간을 준 뒤, 삼식이는 별거 아니라는 듯 말했다.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얘를 놀리는 게 재미있어서.”

보안관의 목소리에 짜증이 더해졌다.

“야, 지금 굉장히 심각한 상황이니까 쓸데없는 짓 좀 그만해. 오늘 꼭 가져와야 할 게 붕대랑 소독약, 반창고…….”

“이왕 가는 건데 다른 약들도 좀 챙겨 오자. 씹어 먹는 어린이 영양제 같은 것도 맛있어. 음, 파스랑 모기약도?”

“그런 것보다 삼식이 너, 정말로 항생제가 어떻게 생겼는지 알아? 그거 아스피린이나 소화제처럼 내놓고 파는 게 아니라서 직접 이름이랑 모양 보고 찾아야 하는데…….”

신입의 어깨를 꽉 누른 손을 여전히 떼지 않으면서 삼식이가 대답했다.

“잘 알지. 많이 먹어봤는데.”

“네가 그런 걸 언제 먹어봤다는 거야? 뭣 땜에?”

“아, 그거? 벌써 한 반년 지난 일인데……. 보안관, 너 이태원에서 일하던 때 기억나?”

“그래. 거기서 건물 공사 많이 했지. 그 동네가 까페 붐이라고 해서.”

“그때 내가 그…… 여기가…… 좀 그랬었거든. 에이, 알잖아.”

삼식이는 왼손을 사타구니 주변에 대고 빙빙 돌렸다. 어째 한심한 이야기가 나올 것 같은 예감에 보안관의 눈 주변으로 주름이 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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