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 상처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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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상처 (2)
2021.10.22.
고개를 들어보니 흰 가운을 입은 사내가 담배를 물고 웃으며 서 있다. 아직 원망하는 감정의 앙금이 남은 진우는 대답도 하지 않고 사내를 외면했지만, 김 상병이 의외로 싹싹하게 웃어주었다.
“아, 예. 앉으십시오. 저희 의자도 아닌데요. 끄응~”
힘겹게 몸을 일으킨 김 상병이 능글맞게 빙글거린다.
“아, 근데 선생님, 필터가 노란색입니다? 저도 사회 있을 땐 독한 거 피웠었는데.”
“하하, 내가 아니라 사제 담배가 환영받은 거구만. 자, 말보로 레드도 괜찮으면 그냥 가지게. 나야 기숙사에 아직 여유가 있으니까.”
나이 차이가 꽤 많이 나 뵈는데도 사내는 사람 좋게 웃으며 담배를 갑째 건네고 지포라이터로 불까지 붙여주었다.
후우우~!
고개를 모로 돌린 채 잔뜩 연기를 내뿜는 김 상병의 얼굴은 작은 행복감으로 가득 찼다.
“오늘 새벽, 아주 대단했다면서? 자, 좀 들겠나? 누군가랑 같이 먹고 싶어서 일부러 여유 있게 받아 왔는데.”
사내는 종이봉투에서 도시락과 음료수들을 꺼낸 뒤, 진우와 김 상병 쪽으로 밀며 권했다.
스티로폼 용기에 몇 가지 반찬이 담긴 정갈한 도시락과 플라스틱 컵 표면에 물방울이 잔뜩 맺힌, 시원한 아이스커피였다. 비빔밥 전투식량과 맛스타만 먹던 군인들의 눈에는 호사스럽기 그지없다.
“저희가 이걸 먹으면 선생님은?”
김 상병이 넉살 좋게 빨대로 아이스커피를 빨며 묻는다. 사내는 고개를 저으며 커피만 하나 빼 들었다.
“아아, 저 안에서 밤을 새면 통 입맛이 없어서 말이지. 어제부터 젊은 친구들 커피라도 한잔 주고 싶었는데…….”
이걸 받아먹을까, 말까.
진우는 갈등하는 심정으로 커피를 쥐고 사내의 얼굴을 다시 쳐다봤다.
30대 후반이나 40대 초반의 남자. 군살이라고는 도무지 없는 신경질적인 몸매지만 표정만은 평화롭고, 잔주름이 자글자글한데도 어린애 같은 구석이 있다.
특히 곱슬머리가 제멋대로 길게 뻗어 있어서 어딘가 아인슈타인의 젊은 시절을 연상시킨다.
후우~! 사내는 담배 연기를 뱉으며 멀리 주차장의 시체 산을 바라보다가 다시 시선을 진우에게 돌렸다.
“자네는 내가 영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군.”
“별로…… 그런 건 아닙니다. 그저…… 저나 오늘 죽은 제 동기들에 비하면 너무 행복해 보이셔서…….”
“그런가……. 그럴지도 모르겠군.”
사내는 씁쓸하게 웃으며 지갑을 꺼내 가운데를 펴서 건넸다. 받아 보니 꽤나 고운 여자가 귀여운 꼬마 여자애를 안고 웃는 사진이 끼워져 있다.
따뜻하다…….
홀린 듯 그 사진을 바라보고 있는 진우와 김 상병에게 사내가 물었다.
“예쁘지?”
진우는 지갑을 돌려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미인이십니다. 아기도 예쁘고…… 가족이십니까?”
“가족이었지.”
굳이 과거형을 사용한 사내가 작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하지만 이런 세상에서 그렇게 여린 사람들이 어떻게 버티겠나? 그제 전해 들었어, 우리 동네는 이미 끝났다고. 하아, 겨우 육 년밖에 못 살았네, 그 아이는.”
여전히 평화로운 얼굴로 그런 이야기를 하는 사내를 보면서 진우는 잠시나마 질투를 했던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상처 입지 않은 채 살아남은 사람은 없는, 그런 세상이 된 것이다.
무거워진 분위기에 눌려 김 상병도 조용히 커피만 빨았다.
진우가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아니, 자네가 미안할 게 뭐가 있어. 자네도 내 딸보다 이제 고작 십수 년 더 살았을 텐데, 내가 오히려 미안하네. 이런 델 지키느라 젊은 사람들이 매일 지독한 꼴을 보게 해서.”
사내는 쓸쓸히 웃었다. 그렇지 않아도 그게 진우 역시 궁금했다. 왜 대민 지원을 나가지 않고 여길 지키고 있는 것일까?
“이렇게 하고 있는 건 확실히 이해가 안 가기는 합니다. 듣자 하니 서울, 경기는 말도 못 할 만큼 어렵다던데. 이왕 목숨을 걸 거라면 시설 경비보다는 훨씬 더 보람 있는 일을 하고 싶습니다. 사람들 목숨을 구한다거나…….”
진우의 이야기를 들은 사내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고생스럽겠지만 지금 자네가 하는 일이 보람도 있고, 여러 사람 목숨도 살리는 걸세. 마을 하나를 구조하는 건 비교도 안 돼. 여기가 무너지면 방사능 유출로 수천 배, 수만 배 더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을 테니까.”
“방사능 유출요?”
김 상병이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
사내가 머리를 끄덕인다.
“그래. 체르노빌 기억하나? 아…… 86년 일이었으니까 자네들이 태어나기 전이었겠군. 하여간 발단은 아주 작은 실수였지. 원자로의 터빈발전기가 전력 공급이 끊긴 이후에도 관성에 의해 계속 움직여 주지 않을까 하는 실험이었어. 소련은…… 아, 그때는 러시아가 아니고 소비에트 연방이었거든. 참 그동안 세월이 많이 가긴 했군……. 어쨌든 당시 소련은 비상용 디젤발전기에 드는 비용을 절약하고 싶었던 거야. 뭐, 그런 시도 자체는 나쁘지 않았지만, 엔지니어들이 멍청한 짓을 한 가지 저질렀다는 게 문제였지. 실험 시간을 단축시켜 보려고 비상 정지 시스템을 차단시켜 뒀던 거야. 끄고 재가동하는 시간이 아까워서 그랬던 거지.”
“어떻게 됐습니까?”
진우가 물었다.
“몇 분 만에 폭발하기 시작해서 그다음부턴 걷잡을 수가 없어졌다네. 즉사한 사람은 100명도 안 되지만, 방사능에 피폭된 사람이 50만이 넘어. 그중 5퍼센트는 죽었고, 나머지도 계속 고통받으며 죽어가고 있지. 인구 5만짜리 작은 변방 도시에서 일어난 일이지만, 일단 사고가 난 다음에는 그 도시만의 문제가 아니었네. 인근은 죽음의 땅으로 변했고, 스웨덴, 핀란드 같은 주변 국가들 전부가 그것으로 인해 피해를 받았지. 거긴 지금도 아무도 살지 못하는 곳이야. 땅도, 물도, 공기도…… 사람에게 치명적인 것들을 머금고 있거든. 어때? 끔찍한가? 하지만 후쿠시마에 비하면 체르노빌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보는 사람들도 있지. 그런데 이건…….”
사내는 뒤쪽의 거대한 원자로들을 가리켰다.
“이건 후쿠시마보다도 훨씬 더 출력이 센 모델들이네. 신형이니까 그렇게 만들었지. 그러니 여기를 지키는 건 생명을 살리는, 아주 중요한 일이야. 자네에게도, 나에게도.”
“그런…… 그렇게 무서운 거라면 꺼버리면 되지 않습니까? 이런 상황에서도 계속 가동해야 하는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어차피 이제 와서는 전기를 쓰는 사람도 얼마 없는데.”
진우가 답답해하며 묻자 사내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껐어. 자네들이 여기 도착하던 날, 벌써 가동은 중단되었지.”
“그럼 지금 여기서 쓰고 있는 전기는 어떻게?”
“뒤에 보이는 커다란 놈들 중에서 회색 시멘트에 덮여 있는 놈들 말고 붉은색 건물 보이나? 다른 네 개보다 훨씬 작은 거. 그건 디젤발전소일세. 거기에서 생산되는 전기를 쓰고 있는 걸세.”
“아…… 뭐가 뭔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이제 발전소도 껐으니 퇴각하면 되는 것 아닙니까?”
“으음…….”
사내는 곤란하다는 표정을 짓고 잠시 생각을 하더니, 김 상병에게 담배 한 대를 청해서 불을 붙였다.
진우가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제가 무식해서 귀찮게 해드린 겁니까? 그렇다면…….”
“아니, 아니야. 대체 뭘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있는 건지 당연히 자네들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네. 단지 어떻게 하면 설명을 좀 간단하게 할 수 있을까 하고……. 이제 생각이 났으니 들어주게.”
사내는 친절히 웃으며 담배를 계속 뻑뻑 빨아들였다. 후우~ 두어 번 잇달아 연기를 내뿜은 뒤, 사내는 불똥이 길어진 담배를 들어 보이며 말했다.
“핵발전소라는 건…… 끄고 나서도 수습이 좀 필요한 물건이거든. 자, 이 불붙은 담배를 연료봉이라고 하세. 여기에서 열이 나지?”
네, 진우와 김 상병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내는 커피가 조금 남아 있는 커피 컵 속에 담배를 담그는 시늉을 했다.
“만약 이게 엄청 뜨겁다면 이렇게 집어넣었을 때 커피가 끓어오르겠지? 그러면 그 열로 터빈을 돌려 발전을 하는 걸세. 하지만 계속 놔두면 물이 다 증발해 버릴 테니까 때맞춰서 식혀줄 물을 갈아야 하네. 그래서 저기 자네들이 마주 보고 있는 바닷물과 연한 곳에 이걸 지은 거지. 물을 마음대로 끌어다 쓸 수 있으니. 근데 말이야. 이 연료봉이라는 놈은 한번 불이 붙으면 몇 년이나 계속 타거든, 손댈 수도 없을 만큼 아주 뜨겁게. 우리가 스위치를 내려 버려도 이놈은 계속 열을 내는 거야.”
불똥의 크기가 줄어들자 그는 다시 한 번 깊이 담배를 빨았다.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은 이놈이 식어주기를 기다리며 달래는 걸세. 디젤발전기를 돌려 물을 갈아주면서. 디젤발전기와 연동된 시스템은 기본적으로 자동이니 사람이 없어도 가동이야 되겠지만, 1년 정도의 연료밖에는 없으니 그것도 관리해야 하고.”
“1년이라고 하셨습니까? 그럼 도대체 몇 년을 더 식혀야…….”
“짧게 잡아도 5년은 필요해. 5년…… 아이고, 길다.”
씁쓸하게 웃는 사내에게 진우가 한 가지를 더 물었다.
“그럼, 만약 저 디젤발전기가 그때까지 계속 가동되지 못하면 어떻게 됩니까?”
“이런 거지. 이 컵이 저 커다란 시멘트 건물이라고 쳐보세. 아까도 말했다시피 담배는 연료봉이고. 여기에서 물이 다 빠져나간 다음에 보충이 안 되면…….”
사내는 컵에 들었던 커피를 따라 버리고 잘 턴 다음, 거기에 불똥이 밑으로 가게 해서 담배를 집어넣었다.
플라스틱 컵의 바닥이 담뱃불로 인해 녹아 들어가다가 결국에는 구멍이 뻥 뚫리면서 담배가 아래로 빠져나왔다. 바닥에 떨어진 담배를 비벼 끈 후, 사내가 말했다.
“이렇게 뚫리면 그 순간부터 아무도 감당할 수 없어져. 나라 전체에 치사량의 방사능이 퍼지겠지. 아마 일본이나 중국에까지도. 휴우~ 말하고 나니 정말이지 끔찍한 이야기구만.”
사내의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열심히 수저를 놀리던 김 상병의 손이 멎었다. 씹던 음식이 드러날 만큼 입을 벌리고 멍해져 있던 김 상병이 분노한 표정으로 물었다.
“평시가 아니면 통제가 안 된다는 말이잖아요? 애초에, 이런 걸 대체 왜 만든 겁니까?”
“글쎄…….”
서글픈 눈으로 시체 더미들을 보고 있던 사내가 대답했다.
“아마 우리가 미쳤었던 게지.”
***
유빈은 복지 센터 식구들 중 가장 늦게 잠에서 깼다. 세차게 퍼붓던 비는 간데없고, 유리창 없는 창문마다 환한 햇살이 가득 비쳐 들고 있었다.
밤새 앓느라고 그랬던 것인지, 아니면 이른 아침부터 푹푹 쪄 대는 날씨 때문인지, 걸치고 있던 긴팔 작업복은 땀으로 흠뻑 젖어 있다.
“끄으응~!”
평소와 달리 온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유빈은 가벼운 신음 소리를 내면서 겨우겨우 몸을 돌려 누웠다.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좋은 소식은 눈을 뜨자마자 정말 아름다운 존재와 마주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잘 잤어요, 오빠?”
곁에 쪼그리고 앉아서 그가 깨기를 기다리고 있던 제니가 가볍게 웃으며 인사를 건넨다. 타이트한 흰 반팔 티셔츠, 무릎까지 올려 접은 힙합 바지, 그리고 햇살과 어우러진, 윤기 있는 머리카락과 그 미소.
잠이 아직 덕지덕지 붙어 있는 유빈이지만, 가슴이 두근거릴 만큼 예쁘다.
아, 맞다. 어제부터 우리는 제니와 함께 지내고 있었던 거지……. 그럼 이제 매일 아침 눈을 뜨면 이 얼굴을 볼 수 있단 말인가…….
“아, 안녕.”
유빈이 조금 부끄러워하며 눈곱을 떼고 일어나려 하자 제니가 음료수를 따서 내밀었다.
“드세요. 밤새 많이 앓으셨어요. 목마를 거예요.”
눈뜨자마자 대기하고 있던 천상의 아이돌이 음료수를 따서 바치다니, 이 무슨 황공한…….
유빈은 허둥대며 제니의 손을 피해 캔을 받아 들었다.
“근데…… 보안관이랑 삼식이는?”
음료수를 반 이상 들이켠 뒤, 새삼 깨달은 유빈이 물었다.
제니는 창에 두 팔을 짚고 서며 몸을 쭉 폈다.
“갔어요, 해가 뜨자마자.”
“가다니?”
“약을 구해 오겠다고, 역 쪽으로요.”
“뭐? 저희들끼리만? 아직 바닥이 미끄러워서…….”
당황해서 몸을 벌떡 일으키려던 유빈이 끄응~ 앓는 소리를 내며 다시 주저앉았다.
이제 나쁜 소식이다. 다친 종아리가 어젯밤보다 더 아프다.
“크으으~!”
몸 전체에서 동시에 식은땀이 뿜어져 나온다. 잠시 함부로 움직였던 것에 대한 벌치고는 너무 심하다. 유빈은 인상을 찌푸리며 상처를 움켜잡았다.
“어떡해…… 많이 아파요?”
제니가 몸을 숙이며 안타까운 표정을 짓는다.
유빈은 별거 아니라는 듯 손을 저었지만, 입을 열고 말을 하기도 어려울 만큼 괴로웠다. 한 팔을 굽혀 얼굴을 감싼 채 잠시 고통이 지나가 주기를 기다리던 유빈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게 언제쯤이야?”
“출발한 게 여섯 시가 안 됐었으니까, 벌써 두 시간은 지난 것 같은데요.”
제니가 손목에 찬 앙증맞은 시계를 들여다보며 말했다.
“좀…… 말려주지 그랬어. 네가 말했으면 들었을 텐데…….”
“피이, 제 말 듣기는요. 하나도 안 들어요.”
제니는 분하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가지 말라고 했는데도 갔어?”
“그건 아니고, 저도 도울 테니 같이 데려가 달라고 했었죠. 그랬더니 보안관 오빠가 펄쩍 뛰면서 안 된다고 하는 거예요. 너는 그런 일 하는 사람 아니라면서. 그런 일 하는 사람이 따로 있나요, 이런 상황에.”
좀 멍해진 유빈은 아랫입술을 내밀고 있는 제니의 옆모습을 봤다. 어제 겨우 빠져나온 좀비의 소굴로 다시 걸어 들어가겠다고 자처했다니…… 얘도 좀 별난 애인지 모르겠다.
“그럼 신입은?”
“처음엔 안 간다고 버텼는데, 보안관 오빠가 억지로 끌고 갔어요. 정 무서우면 역에서 기다리다가 가방이라도 들고 오라고 하면서.”
“그랬구나…….”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동안 유빈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셋이 함께 움직이고, 목숨을 걸고 뛰어다녔을 때에는 느끼지 못한 감정. 자신이 영 쓸모없는 존재가 되어 다른 사람의 발목을 잡고 있는 것만 같아 미안하고 죄스럽다.
“어, 일어나지 마요. 후딱 해치우고 올 테니까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하라고 보안관 오빠가 그랬어요. 오빠가 깨면 걱정할 거라면서…….”
유빈이 땅을 짚으며 몸을 일으키자 제니가 만류하며 팔을 잡는다.
아니, 그게 아닌데……. 나 지금 굉장히 급한데…….
유빈이 우물쭈물하자 눈치를 챈 제니가 한 발짝 물러나며 멋쩍게 웃었다.
“아! 하하하…… 그거군요. 다녀오세요.”
얼굴이 좀 빨개진 유빈은 절뚝이며 삼 층으로 올라갔다. 유빈에게 있어 또래의 여자와 단둘이서만 아침을 맞이한다는 건 굉장히 드문 경험이다.
게다가 이건 뭐랄까…… 애초에 평생 만날 일이 없던 클래스라는 걸 의식하면 더 쑥스러워진다.
혹시나 오줌 줄기가 플라스틱 통을 때려서 소리가 날까 봐 조심스럽게 겨냥을 하던 유빈은 갑자기 깨달음을 얻고 자기 이마를 툭툭, 두들겼다.
‘뭐하는 거야, 미친놈아. 네가 만든 화장실이잖아. 부끄러워하지 마. 잘 보여서 어쩌려고 그래? 쟤는 너랑 사귀고 싶어서 여기 있는 게 아니야. 살아남기 위해 잠시 같이 머무는 것뿐이라고. 게다가 너는 테라파잖아. 일편단심 제니 사랑만 외쳤던 보안관이 같이 있는데, 네가 왜 괜히 오버하고 지랄이야!’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모든 게 갑자기 평온해졌다.
그래, 제니를 여자로 의식할 사람은 내가 아니라 보안관이었어.
깨달음을 얻은 유빈은 남은 오줌을 모래와 플라스틱 사이를 향해 마음껏 갈겨 버렸다.
투루루루, 플라스틱 통이 울리지만, 뭐 어떤가. 그런 걸 의식하면 할수록 서로 힘들어질 뿐이다.
“아! 시원하다!”
애써 과장되게 큰 소리로 말하며 계단을 내려왔는데, 제니는 2층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