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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유령의 도시 (6) (44/449)


44. 유령의 도시 (6)
2021.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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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니가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머리를 쓸어 올리며 물었다.

“어머? 진짜예요, 유빈 오빠? 실망이다. 왜요? 왜 테라가 더 좋다고 했어요? 제가 테라보다 못해요?”

제니를 따라 모두의 시선이 유빈의 얼굴에 고정되었다.

“그래! 왜 그랬어?”

신이 난 삼식이가 제니를 거들었다. 어어어, 아무 말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아진 유빈이 입을 벌리긴 했지만, 곤란해서 말이 잘 나오지 않는다.

친구들끼리 이야기하는 거라면 ‘가슴만 크면 다냐? 청순한 테라가 최고지, 이 등신들아!’라고 할 테지만, 그 비교 대상 중 하나가 직접 얼굴을 마주 보고 물으니…… 이건 등골에 식은땀이 솟는다.

“그, 그게…….”

“테라는 청순하니까?”

제니가 단어를 골라준다. 유빈은 얼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어, 어…… 응, 그래.”

“어머? 그럼 저는 안 청순하고 아주 싼 티 난다는 말이네요? 그런 거죠?”

제니가 빙글빙글 웃으며 허점을 콕콕 찔렀다. 유빈은 좌우로 시선을 돌려 도움 줄 사람을 찾았다.

하지만 누가 도와주겠는가. 배신자 보안관과 신입은 애초에 기대도 할 수 없는 새끼인 데다 삼식이는 이 상황이 재미나서 죽으려고 하는데. 유빈은 철저히 고립되었다는 걸 깨달았다.

“아니, 그런 의미는 아니고…… 뭐랄까, 너는 그…… 성숙해 보인달까?”

섹시하다는 단어 대신 성숙을 골랐다. 제니는 그 틈을 파고들었다.

“나이 들어 보인다고요? 보안관 오빠, 제가 아줌마 같아요?”

“아니, 무슨 소리야? 너 엄청 앳돼 보여. 그냥 유빈이 저 새끼가 미친 거야.”

보안관이 기세등등해서 제니를 두둔했다. 그래, 개새끼야. 같이 죽어보자. 더 이상은 참을 수 없어진 유빈은 동귀어진하기로 마음먹었다.

“아니야! 제니야! 진짜 미친 건 보안관, 이 새끼야! 얘는 완전히 변태라서 너랑 같이 살면 아무것도 안 입히고 자기 와이셔츠만 입힌다고 맨날 노래를 불렀었어! 그러면 불쌍해서 안 된다고 내가 몇 번이나 말했는데도 도무지 말을 들어 처먹지도 않고! 노가다라서 와이셔츠도 없는 새끼가! 삼식아, 너도 들었지? 보안관이 그런 말 하는 거. 그치?”

벌떡 일어난 유빈이 열변을 토했다. 중간에 거짓말도 조금 섞였지만, 이편이 더 재미있겠다고 판단한 삼식이가 힘을 보태주었다.

“하하하! 듣다뿐인가, 그대로 외울 수도 있겠다. 하도 노래를 해 대서……. 아유, 보안관은 징그러워.”

공격은 제대로 들어갔다. 보안관은 뇌가 폭발해 버린 사람처럼 입을 쩍 벌린 채 멍하니 유빈을 바라봤고, 제니는 두 손으로 어깨를 감싸면서 보안관에게서 조금 떨어져 앉는 척을 했다.

“정말요? 보안관 오빠, 정말 그런 말을?”

제니가 과장된 표정으로 큰 눈을 더 크게 뜨며 묻자 얼굴이 빨개진 보안관은 버퍼링에 걸린 것처럼 아니…… 그, 아니…… 그, 아니…… 그, 만 반복해서 내뱉는다.

잠시 보안관의 얼굴을 빤히 보고 있던 제니가 뒤로 몸을 젖히면서 까르르 웃었다.

“하하하하, 뭘 아니에요, 오빠! 솔직히 그랬잖아요?”

장난기를 걷어낸 제니가 팔꿈치로 툭, 건드리며 상냥한 말투로 묻자 보안관은 입을 꾹 다물고 고개만 끄덕였다.

“화보 사진 찍을 때요…….”

제니가 팔을 뒤로 짚으며 말했다.

“콘셉트랑 작가님에 따라 수백 벌을 갈아입지만, 늘 공통적으로 요구하는 컷이 있어요, 테라에게는 꽃으로 만든 왕관을 쓰라고 하고, 저는 뭐일 거 같아요?”

보안관이 눈만 껌뻑이고 있자 제니가 웃었다.

“남자 와이셔츠요. 그게 빠지면 섭섭해서 안 된대요. 저도 제가 어떤 이미지로 소비되고 있었는지는 잘 알아요. 그러니까 보안관 오빠도 창피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그리고 오빠의 환상, 그거 어쩌면 저희 기획사 쪽에서 팬들에게 강요한 거일지도 모르겠어요. 현실의 저랑은 조금 달라요.”

TV 화면 속에서 맨날 윙크만 하고 붉은 입술을 모아 키스를 날리던 제니가 하는 말 같지가 않다. 막연히 그리던 것과 조금 다른 사람을 만난 기분이 들어 세 친구는 조금 멍해졌다.

“그, 그럼 나…… 용서받은 건가?”

보안관이 묻자 제니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저를 사랑한다고 천만 번도 넘게 말해줬다는 사람을 그깟 일로 미워할 수 있나요?”

그렇게 말하며 일어난 제니는 후드 재킷을 벗어서 보안관의 머리와 어깨에 걸쳐 줬다.

아기 옷을 빼앗아 입은 것 같은 모양이다. 과거가 들통나는 바람에 안 그래도 달아올랐던 보안관의 얼굴은 제니의 향기가 나는 후드를 덮고 나자 터질 듯 빨개졌다.

“이걸 왜? 난 안 추워.”

“잠깐만 맡아서 덥혀주세요. 전 좀 두드리고 올게요.”

그렇게 말한 제니는 플래시를 들고 3층으로 올라갔다. 빗소리가 워낙 커서 실제로 양동이를 두드릴 필요는 없을 것이다.

갑자기 계단 부근으로 걸어가 서성거리던 신입이 내려오는 제니에게 슬쩍 다가가 조그만 목소리로 말했다.

“……제니야, 쟤네들이랑 대화가 잘 안 되지? 이해해라. 대학 문턱에도 못 가보고 그저 막노동만 하던 애들이 다 그렇지 뭐. 그러니까 앞으로 고민 있으면 나한테 얘기해.”

제니는 신입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며 대답했다.

“에? 저도 대학에는 안 갔어요. 전 고등학교도 이름만 걸어두고 다닌걸요.”

뭔가 특별하다는 걸 어필하고 싶었던 신입은 제니의 차가운 반응에 막히자 잔뜩 풀이 죽어 구석으로 돌아간 다음, 어두운 창밖을 보며 혼잣말을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보안관으로부터 옷을 돌려받은 다음에도 잠시 더 이야기를 나누던 제니는 네 남자가 하품을 하기 시작하자 잘 자라는 인사를 남기고 방으로 돌아갔다. 제니 방의 거적문이 닫히자 등을 돌리고 있던 신입이 입을 열었다.

“우리도 자는 자리를 지정하자. 여자애도 하나 들어왔는데 아무 데나 자기 편한 자리에 대충 눕는 건 좀 보기에 그래. 똥개 새끼들도 아니고, 질서라는 게 있어야 하지 않겠냐?”

“오, 신입. 말 잘했어. 나도 그 말 막 하려 했는데.”

삼식이가 반기며 찬성하자 우쭐해진 신입이 자리를 지정했다.

“삼식이 너 저기, 보안관이 그다음, 그리고 여기 유빈이. 이렇게 나란히 누우면 될 것 같다.”

그가 가리킨 위치는 건물 앞쪽의 오른편 구석, 3층으로 이어진 계단에 가려 제니의 방이 보이지 않는 사각이었다. 삼식이가 빙글거리며 물었다.

“이야, 점점 흥미진진해지네. 그럼 너는 어디서 잘 건데? 1층?”

“난 저기서 잘까 하는데. 제니가 혹시라도 자다 깨서 우릴 부를 때 고개만 딱 돌려서 봐줄 사람이 있어야지. 뭐, 좀 귀찮겠지만, 당번 비슷한 거지.”

제니의 방문에서 세 발짝 떨어진 자리를 가리키며 신입이 일어나려 하자 하하하, 웃고 있던 삼식이가 긴 다리를 들어 길을 막았다.

“뭐야, 왜 그래?”

“신입, 네 배치 영 구려. 내가 다시 자리를 정할게. 너랑 나는 담배를 피우니까 여기 끝에서 자는 거야. 그게 다른 사람들한테 피해가 덜 가고 우리도 편하게 사는 길이지.”

삼식이는 건물 앞쪽 왼편 구석을 가리켰다.

“그리고 네 말도 일리는 있어. 제니도 불안하니까 너무 동떨어지게 하면 안 되겠지. 눈에 보이는 자리쯤에 누군가 한 사람이 자는 게 좋아. 거긴 유빈이 자리야.”

신입이 발끈했다.

“왜 하필 저 새끼여야 하는데?”

“너랑 나는 담배를 피우니까 안 되고, 보안관은 너무 가까이 가면 도리어 본인 심장에 무리가 갈 것 같고, 그러니까 남은 게 유빈이밖에 없잖아.”

묘하게 설득력이 있는 말이라서 다수결로 그렇게 결정되었다. 삼식이, 신입, 보안관, 유빈, 그리고 제니의 방. 이런 순서가 되도록 스티로폼 침대를 배치하고 누웠다.

유빈은 고개를 똑바로 하고 누워 옆으로 돌리지 않으려 애를 썼다.

불과 몇 미터 떨어지지 않은 곳에 제니가 있다는 생각을 하니까 묘하게 들뜨는 기분이었다. 어차피 거적으로 막혀 있지만, 자꾸 그쪽을 곁눈질하고 싶어진다.

나는 테라파였는데! 아직 페인트 통 속에서 타고 있는 모닥불이 건물 천장에 반사돼서 그의 마음처럼 어지럽게 일렁인다.

아, 이거 피곤한데도 좀처럼 잠을 이루기 어렵겠는걸…… 하는 걱정이 든 순간, 유빈은 완전히 곯아떨어져 버렸다.

딸랑∼! 딸랑!

딸랑거리는 알루미늄 캔의 소리가 귓가를 울려 유빈은 번쩍 눈을 떴다. 얼마나 잠이 들었던 걸까? 모닥불은 여전히 타오르는 중이고, 세차게 내리던 비는 어느새 꽤 잦아들어 있었다.

설마, 잘못 들은 거겠지. 유빈은 꿈이었길 바라며 잠시 귀를 기울였다. 정적 속에서 잠시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을 때, 또다시 음료수 캔이 흔들리는 소리가 들린다.

딸그락! 딸그락∼!

잘못 들은 게 아니었다. 젠장, 유빈은 얼굴을 훑어 아직 붙어 있는 잠을 떨어내고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이미 옆자리에 누워 있던 보안관도 눈을 뜬 상태였다.

“너도 들었지?”

보안관이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유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바람 때문인지도 몰라. 쥐나 그런 걸 수도 있고…… 일단 다른 애들은 깨우지 말자.”

그렇게 속삭인 뒤, 유빈은 천천히 창 쪽으로 걸어가 소리가 나는 방향을 찾았다.

그러는 동안에도 여전히 깡통은 조금씩 더 잦은 빈도로 울려 댔고, 이제는 그르렁대는 소리도 섞여 들렸다. 유빈의 반대 방향에서 한 손을 귀에 대고 있던 보안관이 다가와 말했다.

“뒤쪽이야.”

그렇다면 산 쪽에서 들려오는 소리다. 아직 저 너머에 뭐가 있는지도 모르는데…… 유빈과 보안관의 얼굴에 두려움이 스친다.

플래시를 가져와 창문 밖을 훑었다. 바깥이 완전한 암흑 속이어서 겨우 2미터 남짓의 원밖에 안 되는 플래시 불빛은 너무나 작고 무의미해 보였다.

저 넓은 산속을 언제 다 뒤지지?

딸랑∼ 떨그렁! 그롸아악!

그사이에도 또 소리가 들려온다. 이제 그 간격은 더욱 짧아졌다. 뭐지? 점점 더 많은 괴물들이 쳐들어온다는 말인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엄청난 좀비들이 달려오고 있다는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꽉 막혀온다.

“저기다!”

여기저기 바쁘게 플래시를 훑던 보안관이 말했다. 꽤 멀어서 불빛이 분산되는 바람에 그리 훤히 보이지는 않지만, 검은 그림자가 움직이는 것은 분간할 수 있었다.

조금 전 방에서 나와 불안한 얼굴로 곁에 바짝 붙어 서 있던 제니가 두 번째 플래시를 같은 방향으로 비추자 상황이 약간은 더 명확해졌다. 괴물 한 마리가 나무 사이에 끼인 채 움찔거리고 있었다.

“젠장, 왜 하필 이런 밤중에.”

말을 하고 난 다음에야 유빈은 자신이 바보 같은 소리를 했다는 걸 깨달았다. 저 괴물들은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돌아다닌다.

“어쩌지? 너무 깜깜한데. 나조차도 잘 안 보여.”

잠에서 깬 삼식이도 실눈을 뜨고 산 쪽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선택의 순간이다. 괴물을 잡기 위해 지금 나갈 것인가, 아니면 아침까지 얌전히 기다릴 것인가.

“저렇게 울어 대면 다른 놈들도 이리로 몰려들지 않을까? 뒷산에 괴물들이 얼마나 있는지 모르잖아.”

보안관이 장갑과 해머를 집어 들며 말했다. 유빈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일단 하나가 나타났으니, 열 마리가 더 나타난다 해도 놀랄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저놈들과 야간에 싸워본 적은 아직 한 번도 없다. 다른 놈의 울음소리가 들리지는 않지만, 성대와 입이 뜯겨 나가 소리를 내지 못하는 괴물도 보았다. 어둠 속에 발을 내딛는 것은 역시 두려운 일이었다.

“후딱 해치우고 와서 자자.”

신입과 제니에게 플래시를 계속 비추게 하고 세 친구는 조심해서 사다리를 내려갔다.

삼식이가 두 번째 플래시를 들고, 유빈과 보안관이 그 양옆에 섰다. 괴물이 서 있는 곳까지는 30여 미터. 나무가 제멋대로 자라난 완만한 비탈길을 올라가야 한다.

물에 젖은 흙바닥은 꽤 미끄러웠다. 세 친구의 숨소리가 조금씩 커진다. 작은 플래시 불빛에 의지해 그들이 다가가자 움찔거리던 괴물은 더 크게 소리를 지르며 몸을 거세게 흔들어 댔다.

그롸아악! 그라아아악!

조용한 산속에 굵은 울부짖음이 울려 퍼진다. 비가 와서 메아리가 치지 않는다는 것에 그나마 감사했다.

마음이 급해진 세 친구는 걸음을 서둘렀다. 그러는 동안 두어 번 젖은 흙에 미끄러져 바닥을 짚기도 했다. 괴물에게 거의 다 다가섰을 때, 유빈이 갑자기 비명을 지르며 고꾸라졌다.

땡그렁!

깡통이 또 울린다.

“뭐야? 왜 그래?”

보안관과 삼식이가 깜짝 놀라 플래시를 비춘다. 유빈은 흙바닥에 뒹굴며 무릎을 움켜쥐고 있다. 무릎을 감싸 쥔 손가락 사이로 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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