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유령의 도시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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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유령의 도시 (5)
2021.10.13.
그녀는 그제야 이렇게 철창 안에 갇힌 사람이 자신 말고도 더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렇게 시설을 따로 준비해 두고 보초까지 둘 정도였으니 당연히 깨달을 수 있는 일이지만, 자신에게 닥친 상황에만 집중하다 보니 주변에 시선을 둘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것이다.
임수정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흙이 튀고 비에 젖은 자신의 맨발이 보인다.
“저도 반은 맨발이에요.”
목소리가 다시 말을 걸었다. 임수정은 시선을 조금만 옆으로 돌렸다. 목소리의 주인공이 신발을 신고 있지 않은 왼발을 까딱거린다.
단순히 맨발이 아니었다. 반창고로 싸맨 새끼발가락은 한 마디 이상이 없어졌는지 뭉툭했다.
너무도 희고 고운 발이라서 그 상실에 대해 느껴지는 안타까움은 더 컸다. 불쌍해라, 어쩌다가……. 임수정은 고개를 들고 옆으로 돌렸다.
“아, 이거요? 차가 깔고 지나가는 바람에 이렇게 됐어요. 빨간색 스포츠카였는데, 그렇게 하고 나서도 돌아보지도 않더라고요.”
임수정의 시선을 눈치챈 소녀가 발가락을 잃은 이유를 말해준다. 위장 무늬 정글모를 푹 눌러쓴 채 설명을 하는 모습을 보고 임수정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세상에! 임수정은 태어나서 지금까지 이렇게 아름다운 얼굴을 본 적이 없었다.
모든 소녀가 한 번쯤 기도할 때 가지고 싶었을 얼굴이 아마 이런 것일 테지 싶은 미모였다. 깊이 눌러쓴 커다란 모자도, 초췌한 얼굴 가득 흐트러진 검은 머리카락도 그 탁월한 아름다움을 감추지는 못했다.
“아아!”
임수정의 입에서 자기도 모르게 탄식이 터져 나왔다. 소녀는 그 한숨의 이유를 오해하고 상냥하게 말했다.
“너무 속상해하지 마세요. 저도 처음 48시간 동안 여기 있어야 한다고 들었을 때 엄청 긴 것 같았지만, 금방 하루가 지나가네요. 그러니까 언니도 힘내세요. 물하고 건빵도 드시고요. 이거, 의외로 맛있더라고요.”
소녀는 방긋 웃으며 건빵 봉지를 흔들어 보였다. 그 미소를 보는 순간, 그제야 임수정은 자신이 누구와 마주 보고 있는 건지 깨달을 수 있었다.
“저기 그쪽, 혹시…… 그 TV에 나오는…….”
“네, 맞아요. 테라예요. 핑크으∼ 펀치! 언니는요?”
소녀가 미소를 지으며 두 손을 얼굴 주변에서 귀엽게 흔들다가 위로 쭉 뻗었다.
끄으응∼! 보초를 서는 척하며 계속 이쪽을 주시하고 있던 군인들이 합창처럼 앓는 소리를 낸다. 임수정도 테라를 향해 고개를 꾸뻑 숙이며 인사를 했다.
“임수정이라고 해요. 세상에, 이렇게 예쁜 사람이 이게 웬일이야?”
“흐흐, 고맙습니다.”
“그 발가락, 그러면 치료는…….”
“이거요? 이대로 평생 살아야죠, 뭐. 아…… 빠른 춤은 이제 못 추겠네요. 조깅도 안 될 테고요.”
그렇게 말하고 나서도 테라는 또 후후, 웃었다. 발가락이 날아가 버린 아이돌이라고 하기에는 정말 의연하고 밝아 보인다.
스무 살도 안 된 아이조차 이렇게 초연한데 나는……. 임수정은 상황을 저주하고 불평했던 자신이 조금 부끄러워졌다.
“우린 수용소 동기네요, 후후, 우리 힘내요, 언니.”
그렇게 말하며 테라는 철창 틈으로 손을 내밀었다. 임수정도 팔을 뻗어 그녀의 손끝을 맞잡았다. 작고 여린 손이 닿자 그녀가 했던 말보다 더 많은 진실이 전해져 왔다.
테라 역시 사실은 불안함에 계속 떨고 있던 것이다. 조금 전까지 보여주었던 그 명랑함은 두려움을 감추기 위한 필사의 몸부림과 과장이었다는 것을, 임수정은 비로소 깨달았다.
잠시 서로의 눈을 마주 보고 있던 두 사람은 철창 사이로 맞잡은 손에 힘을 꽉 주었다.
***
같은 시각, 육만배는 자신이 소유한 강남의 한 주상 복합 건물 25층 펜트하우스에 숨어 있었다.
사흘 전 새벽, 민구가 전화를 걸어 일러주지 않았다면 꼼짝없이 길 위에서 죽었을지도 모르지만, 미리 애들을 모으고 대비를 해둔 덕에 그는 아주 편안하게 지낼 수 있었다.
셔터와 방화벽을 굳게 내린 로비에는 엽총을 든 애들이 경비를 서고 있고, 음식도 재빠르게 쟁여뒀다.
따로 피난을 가지 않더라도 당분간은 별문제가 없을 것이다. 민구가 돌아오겠다고 약속한 날까지 며칠 남지 않았다.
“회장님, 저녁 식사 준비시킬까요?”
주방에서 올라온 조직원이 물었을 때, 육만배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니. 지금 이게 막 재미있어지는 중이라서, 좀 이따가 먹자.”
“네, 그럼.”
90도로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한 뒤 조직원이 문을 닫고 나가자 육만배는 수술용 장갑을 끼고 테이블 위에서 다시 칼을 집었다.
“그것참 신기하단 말이지. 안 그러냐?”
“신기합니다, 회장님.”
그의 곁을 지키고 있던 경호원 네 명이 일제히 합창을 한다. 육만배는 호기심이 가득한 얼굴로 방의 중앙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어두운 실내를 밝히기 위해 잔뜩 켜둔 촛불들이 일렁일 때마다 주름진 육만배의 잔인한 인상이 더욱 과장되게 두드러졌다.
으으윽, 그르르∼!
육만배가 다가가자 맞은편에서 괴물이 그렁거린다. 아래턱이 잘려 나가 있는 데다가 플라스틱 커버까지 고정시켜 둬서 소리는 그리 크지 않지만, 여전히 소름이 끼칠 만큼 징그러운 음색이다.
육만배는 거듭 감탄하며 괴물의 모습을 지켜봤다. 이놈의 물건은 워낙 사나워서 사로잡는다는 게 보통 큰일이 아니었다. 처음엔 그저 단순하게 짐승처럼 목에 쇠고리를 채워두면 될 거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렇게 했더니 제 목이 끊어질 때까지 발버둥을 치며 달려들다가 정말로 모가지가 잘려져 나간 다음에야 얌전해졌다.
수갑을 채우면 팔이 끊어지고, 족쇄를 채우면 다리가 끊어진다. 육만배는 하는 수 없이 괴물의 팔다리를 모두 끊고 몸통과 머리만 가져오라고 했다. 그렇게 해도 살아 움직인다는 게 참 대단했다.
그르르∼!
갈비뼈와 골반의 빈틈마다 두꺼운 볼트를 박아 커다란 목제 판에 고정을 시켜둔 괴물이 육만배를 향해 다시 울부짖는다.
이만큼 신체가 훼손된 상황에서도 이놈들은 기가 죽지 않고 이를 드러낸다. 그 어떤 맹수가 이렇게 용맹할 수 있을까…….
육만배는 오른쪽으로 서너 걸음을 떼었다. 괴물의 고개도 그에 따라 돌아간다.
훗! 웃고 난 육만배는 이번엔 왼쪽으로 또 댓 걸음을 뗐다. 그러자 괴물도 같이 머리를 돌린다. 두툼한 카펫 바닥에 가죽 창 구두라서 걸음 소리는 전혀 나지 않는다.
“우하하하, 이것 좀 보란 말이야! 이것보다 신기한 게 또 있나?”
육만배는 큰 소리로 웃으며 괴물을 가리켰다.
“대체 어떻게 알고 내 걸음을 따라 고개를 계속 돌리는 거냐, 이놈? 눈깔도 없잖아!”
괴물의 두 눈 주변은 움푹 잘려 나가 있었다. 혹시 눈알이 없어도 사람의 낌새를 알아챌까 싶어진 육만배가 몇 분 전에 직접 칼로 후벼 도려낸 것이다.
“혹시 냄새로?”
육만배는 날카로운 칼을 들고 괴물에게 다가섰다. 바짝 말라 갈라져 있는 코의 점막을 보면 별로 기능이랄 게 없어 보였지만, 그래도 모르는 일이다.
“어디…….”
육만배는 괴물의 코와 볼 사이로 힘 있게 칼을 찔러 넣었다. 칼이 뼈와 근육을 가르고 들어가는데도 괴물은 움찔하는 기미조차 없다. 그저 사납게 소리를 지르며 육만배를 향해 윗니를 드러낼 뿐이었다.
“가만히 있어봐라, 이놈아.”
육만배는 천천히 칼을 돌려 괴물의 코를 뭉텅 잘라냈다. 툭, 연골과 살덩어리가 바닥에 구른다. 해골의 코뼈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이제 냄새를 맡는다는 건 불가능하다.
“자, 또 따라와. 내가 어디 있나.”
육만배는 뒤로 물러나서 잠시 시간을 두었다가 오른쪽으로 네 발짝을 떼었다.
이번에도 괴물의 고개는 그를 따라 돈다. 재미있어, 재미있어. 만족한 육만배는 악마 같은 웃음을 지었다. 이번에는 귀를 잘라내고 고막을 파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처음 비가 오기 시작했을 때 느꼈던 청량함은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오한으로 변해 체온을 앗아갔다.
세 친구와 신입은 공구 가방을 뒤져 아저씨들의 작업복을 꺼냈다. 너덜너덜하고 촌스러운 옷들이지만, 보송보송한 촉감과 소매를 덮어주는 길이만으로도 감사할 따름이었다.
그런데 긴소매 작업복은 세 벌뿐이어서, 한 사람은 목이 U자로 파인 아저씨 반팔 티를 택해야 했다.
“그냥 너희 입어라. 어차피 난 그거 걸쳐 봐야 단추도 안 잠기고…….”
보안관이 먼저 양보하고 작업반장님의 러닝 티를 집었다. 두 사이즈 정도 작은 옷이어서 보안관이 뒤집어쓰자 가슴과 팔뚝이 터질 것처럼 보였다.
“어때, 괜찮아?”
보안관이 물었다.
“바디 페인팅 한 것 같아. 차라리 네가 이거 입을래?”
삼식이가 자신이 입고 있는 황 씨 아저씨의 작업복을 가리켰다. 그 옷 역시 소매가 턱없이 짧다. 어쨌든 그 정도의 옷이라도 푹 젖어 있는 반팔 면 티를 계속 입고 있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
새 옷으로 갈아입은 김에 지난 며칠간 수없이 많은 괴물들의 피를 뒤집어쓴 옷들을 빗물에 빨아서 바닥에 늘어놓고 나니, 어느새 사방이 캄캄해져 있었다.
네 명의 남자와 여자 하나는 자연스럽게 불을 피워둔 페인트 통 주변으로 좀 더 바짝 다가앉았다.
“몇 시 정도나 됐어?”
황 씨 아저씨의 누런 작업복을 입은 유빈이 페인트 통에 피워둔 불을 뒤적거리며 물었다. 비가 내리는 여름 저녁은 시간개념이 혼란스러워진다.
“일곱 시 반, 딱 뮤직 타임 할 시간이네.”
곁에 앉은 삼식이가 시계를 보더니 그들이 즐겨보던 TV 프로그램 이름을 댔다.
“뮤직 타임이라……. 꿈같은 이야기다.”
유빈이 한숨을 내쉬자 보안관이 제니를 가리키며 말했다.
“뭔 소리야? 난 지금이 훨씬 더 꿈같은데. 뮤직 타임에서 보던 사람이 바로 여기 눈앞에 앉아 있잖아.”
“아, 하긴. 전개가 그렇게 되는 건가?”
“당연하지. 나중에 진우 만나거든 이 이야기를 해줘봐라. ‘야, 진우야, 우리 그때 공사장에서 제니랑 같이 숨어 있었다’라고 하면 걔가 뭐라고 그럴 것 같아?”
깊이 생각해 보지 않아도 유빈은 진우에게서 무슨 대답이 돌아올지 알 것 같았다.
“미친 새끼들 지랄한다고 하겠지.”
“그렇지? 나라도 안 믿을 거야. 그만큼 꿈같은 이야기라고.”
제니가 대화에 끼었다.
“진우라는 분은 누구예요?”
모닥불에 비친 그녀의 옆모습이 그림 같다고 생각하며 보안관이 대답했다.
“아아, 우리 친구. 지금 군대 가 있거든.”
“친한 친구예요?”
“뭐, 그렇지. 어릴 때부터 계속 붙어 다녔고, 일도 쭈욱 같이했으니까.”
“그러면 엄청 보고 싶겠네요. 하필이면 이런 때 헤어져 버려서.”
제니가 안됐다는 듯 아랫입술을 살짝 내밀었다. 삼식이가 말했다.
“나는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해. 그놈은 그래도 군대에 있으니까 우리보다는 안전하지 않을까? 밥도 주고, 총도 있고.”
“흠, 정말로 그러면 좋겠지만…….”
세 친구가 각자 진우에 대해 생각을 하는지, 모닥불 주변은 또다시 조용해졌다. 침묵보다는 대화가 이어지는 편이 덜 부담스럽다고 느낀 제니가 다시 화제를 살려냈다.
“진우 오빠라는 분은 어떤 스타일이에요? 음, 만약 여기 있는 오빠들을 예로 들면 누구랑 비슷해요?”
글쎄…… 세 친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삼식이가 먼저 대답했다.
“어딘가 보안관이랑 비슷하지 않을까? 운동도 잘하고, 주먹도 꽤 세고. 물론 보안관만큼은 아니지만.”
보안관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랑? 에이, 아니지. 덩치가 훨씬 작잖아. 난 오히려 유빈이랑 닮았다고 생각해. 머리가 꽤 좋았어. 가끔씩이지만 괜찮은 아이디어도 팍팍 튀어나오고.”
유빈이 의외라는 듯 말했다.
“나랑 비슷하다고 느낀 적은 없었는데……. 진우는 그냥 삼식이랑 비슷한 느낌이야. 물론 삼식이랑 비교하면 조금 딸리겠지만, 걔도 꽤 잘생긴 얼굴이었거든. 아, 키는 삼식이보다 작지만.”
듣고 있던 신입이 고개를 돌리며 투덜거렸다.
“좃도…… 듣고 보니 특별히 내세울 거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평범한 놈이구만. 뭐든지 다 고만고만하네.”
그 말에 보안관이 손을 저으며 말했다.
“아니, 아니, 좀 달라. 분명히 장점이 많은 애인데…… 그래! 군대 가더니 이제야 눈이 좀 제대로 뜨여서 제니파로 막 갈아탔…….”
신나게 떠들던 보안관이 아차 싶어 입을 다물어 버렸다.
제니파가 나오면 테라파 이야기도 나오게 될 거고, 그러면 제니에게는 또 파트너를 버려두고 달아났던 기억을 되살리게 할 테니까. 험, 험, 헛기침을 하면서 눈치를 보는 보안관에게 제니가 말했다.
“괜찮아요, 오빠. 그렇게 일부러 피할 필요 없어요. 제 얼굴을 보면 누구나 테라가 함께 떠오를 텐데요, 뭐. 그리고 저 때문에 일부러 테라 이야기를 안 하는 것도 싫어요. 그렇게 하면 꼭 제가 억지로 테라를 사라지게 만드는 것 같으니까. 그냥 편안하게 이야기하세요. 삼식이 오빠가 그랬잖아요, 기억하고 있으면 함께 사는 거라고.”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담담히 말하는 제니 덕에 용기를 얻은 보안관은 하려던 말을 마저 했다.
“진우는 군대 가더니 제니파로 전향했거든. 아마 지금 여기 있었으면 좋아서 미쳤을걸? 아, 근데 유빈이 저 새끼는 테라파였어. 내가 아무리 제니가 최고라고 해도 도무지 말을 들어 처먹지를 않은 놈이야.”
날벼락을 맞은 유빈은 눈이 똥그래져서 보안관을 쳐다봤다. 이런 가롯 유다 같은 새끼……. 팔아먹을 게 없어서 불알친구의 취향을 팔아먹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