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 유령의 도시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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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유령의 도시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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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유령의 도시 (4)
2021.10.12.
임수정의 입을 막고 싶어진 소위는 일부러 차갑게 내뱉었다. 자신의 소대가 위험한 임무를 맡고 있다는 것은 소위 자신이 가장 잘 안다.
하지만 그건 그가 운이 지독하게 나쁘거나, 누군가의 눈 밖에 나서 빚어진 일이 아니다. 그의 소대와 유사한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 분산 배치된 병력이 서울 시내에만 사단 규모였다.
더 넓고 인구도 많은 경기를 포함하면 적어도 3만 이상의 군인들이 수뇌부가 정해둔 교전 수칙에 따라 실은 그리 중요하지도 않은 주요 시설을 확보하기 위해 내던져져 있는 것이다.
문제는 그 교전 수칙이 인간과의 싸움을 당연한 전제로 하고 만들어진, 과거의 것이라는 데 있었다.
바로 옆에서 한패의 머리가 날아가는데도 조금의 동요조차 없이 철조망을 이빨로 물어뜯는 괴물들과 싸워야 하는 현재의 상황은 전혀 이야기가 다르다는 걸 위쪽에서는 모르고 있다. 아마 알고 싶어 하지도 않을 테지만.
“미안합니다……. 제가 주제넘었네요.”
임수정은 슬픈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며 사과를 했다. 소위는 그녀의 사과에 대해서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은 채 한쪽 구석에 놓여 있던 종이 박스를 뒤져 뭔가를 꺼냈다.
“자!”
임수정이 앉은 간이침대 한쪽에 비누와 수건, 조그만 스테인리스 거울을 내려놓으며 소위가 말했다.
“당신은 거울을 안 봐서 모르겠지만, 지금 당장 좀비로 변한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꼴이오. 내가 헬리콥터 조종사라면 당신을 태울 것 같지 않아요. 세수하고 머리라도 좀 빗어요. 물은 막사 왼편에 쌓아둔 생수를 쓰면 됩니다. 그 주스도 마시고.”
그렇게 이야기한 뒤, 소위는 막사 바깥으로 사라져 버렸다. 멍해진 임수정은 스테인리스 거울을 들어 자신의 얼굴을 비춰 봤다. 헉! 가벼운 탄성이 절로 나온다.
퀭해진 눈, 움푹 팬 볼, 바짝 말라 갈라진 입술 주변에는 침과 눈물 자국이 허옇게 말라붙어 있고, 냉장고 바닥을 기어 다니느라 시커먼 먼지가 잔뜩 묻어 있는 얼굴 위로 미친년처럼 흐트러진 머리카락이 제멋대로 엉켜 있다.
먼발치서 자신을 보자마자 방아쇠를 당겼던 군인이 이제야 이해가 간다.
죽더라도 이런 꼴로는 죽고 싶지 않다. 임수정은 비누와 수건을 집어 들고 후들거리는 걸음으로 물이 있다는 곳으로 나갔다.
예정 시간보다 조금 늦게 헬리콥터가 도착했다. 바리케이드가 쳐진 도로 위에 내려앉은 헬리콥터에서 보급품들을 바쁘게 끌어내린 다음, 서명한 물품 인수증을 조종사에게 건네면서 소위가 물었다.
“소령님, 보고드릴 게 하나 더 있습니다. 민간인 생존자를 구조했습니다. 여기 이분, 돌아가시는 길에 쉘터에 좀 내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생존자? 허, 이런 데에서 살아남은 사람을 다 만나네? 아가씨, 운이 굉장하십니다. 아, 그런데 혹시 외상자야?”
조종사가 임수정을 위아래로 훑으며 물었다. 소위가 곤란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네, 외상자입니다. 물린 상처는 아닌 모양이지만…….”
소위가 변명처럼 덧붙이는 뒷이야기는 듣지 않고 조종사는 임수정에게 직접 물었다.
“어디입니까, 상처?”
임수정은 다리를 약간 틀어 실처럼 가느다란 딱지가 앉은, 베인 상처를 보여줬다.
“흐음…….”
조종사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뭐, 별거 아닌 것 같긴 한데, 규정은 규정이니까. 어이, 그거 가져와.”
조종사의 명령을 받은 승무원이 헬기 안에서 뭔가를 가져와 내민다. 앞쪽이 철망으로 된 헬멧과 구속복이었다.
“우리도 명령받은 대로 하는 거니까 기분 나쁘게 받아들이지 마시고, 협조 부탁드립니다.”
조종사는 짧게 경례를 한 뒤에 헬기 조종석으로 돌아가 앉았다. 임수정에게 귀마개가 달린 헬멧을 씌워주며 소위가 말했다.
“첫날 구조된 사람들이 비행 도중 변해 버린 일이 몇 차례나 있어서 이러는 겁니다. 그것 때문에 추락한 헬기도 손에 다 못 꼽아요. 소령님께서도 자기 안전을 많이 양보하시는 거니까, 아가씨도 존엄권을 잠시만 포기하십쇼. 여기에서 쉘터까지 20분도 안 걸립니다. 서로 살자고 하는 짓입니다.”
그 말에 임수정은 더 저항하지 못하고 순순히 헬멧을 쓰고 구속복 안에 몸을 넣었다. 팔짱을 낀 형태로 조인 구속복을 헬기 좌석에 단단히 고정시킨 다음, 로터의 회전이 빨라지며 헬리콥터는 서서히 떠올랐다.
그녀에게 눈으로 인사를 보낸 소위의 모습이 순식간에 손가락만큼 작아지고, 마침내 시야 밖으로 사라져 버렸다.
임수정은 빗방울이 튀어 있는 창에 헬멧을 기대고 아래쪽의 경치를 바라봤다. 도심의 건물들 사이로 검은 점들이 뭉쳐 작고 커다란 원을 이루며 꼬물거린다.
한강 상공을 따라 동쪽으로 날아가던 헬기가 여의도를 지날 때, 지금까지 스쳐 지났던 그 어떤 군집들보다 커다란 괴물들의 무리가 눈에 들어왔다.
커다란 원 모양을 중심으로 여러 개의 작은 원들이 위성처럼 주위를 돌고, 그 작은 원의 주변에는 또 더 작은 원들이 나선형을 이루며 회전한다.
자잘한 점들이 모두 수십만의 괴물들이라는 사실만 제외한다면, 그 운동이 이루는 질서는 아름다워 보이기까지 했다.
“저거 봐. 규모 여섯짜리다, 저거.”
임수정이 보고 있던 거대한 원을 가리키며 조종사가 말했다. 부조종사는 질린다는 말투로 대답했다.
“정말 징글징글합니다. 저렇게 모여 있는 데에다가 네이팜탄이라도 몇 발 날리면 속이 다 시원하겠습니다.”
“용기 있으면 해봐, 아마 본보기로다가 바로 다음 날 군법 재판소에서 사형 판결 때릴걸?”
“적을 죽였는데 훈장은 못 줄망정, 처벌을 받아야 합니까?”
“교전 수칙 위반이니까. 좀비들은 죽여도 되지만, 저 건물들은 건드릴 수 없다고. 그건 잘나신 대기업들 소유거든.”
“하지만 그래봐야 자기들도 지금 저기 들어가서 사용하지도 못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추이를 보자고 하면서 질질 시간을 끄는 거 아니야. 아마 몇 달 지나고 나면 좀비들도 제풀에 죽어 자빠지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하는 것 같던데?”
“몇 달이면 저 건물들 속에 숨어 있는 생존자들도 다 굶어 죽을 시간 아닙니까?”
“그런 거 상관없다는 거지. 돈밖에 모르는 개새끼들.”
“저거…… 놔두면 저절로 죽기는 죽습니까?”
“나도 몰라. 하지만 입에 들어가는 게 없는데, 계속 저렇게 버티기야 하겠어?”
그렇게 말한 조종사는 저주하는 눈빛으로 아래쪽을 한 번 더 노려봤다.
헬기 내부의 소음 때문에, 뒷자리에 앉은 임수정은 조종석에서 나누는 대화를 거의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녀는 그저 아래에서 벌어지는 점들의 움직임에 시선을 집중하고 있었다.
대학원 시절, 실험실 배양액에서 기르던 세균들의 형태와 운동 방식이 떠오른다.
마더(Mother)라고 불리던 중앙의 덩어리에 집중적으로 모여들면서도 동시에 사방으로 포자를 확산시켜 또 다른 균 집단을 만들던 세균들.
원형으로 회전하며 점차 반경을 넓히는 세균의 운동을 방치하면, 작은 점이었던 세균은 마침내 면으로까지 확장되어 배양 샬레 전체를 뒤덮곤 했다.
“저것들…… 머리가 나쁘다고 하지만, 저렇게 질서 정연하게 움직이는 걸 보면 그런 것도 아닌 모양입니다.”
부조종사가 규모 여섯 주변의 원들을 가리키며 말하자 조종사는 진저리를 치며 소리쳤다.
“왜 저 지랄로 뭉쳐서 빙글빙글 돌아다니는 건지 모르겠어! 아흐, 징그러워!”
워낙 큰 소리여서 이번 말은 임수정에게도 들렸다. 임수정은 창에 기대며 작고 힘없이 중얼거렸다.
“번식을 위한 그 운동성이 세균의 본능이니까요.”
아무도 그녀의 말을 듣지는 못했다. 임수정의 헬멧에는 마이크가 달려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만약 들었다고 해도 그들은 산발을 하고 있는 맨발 여자의 넋두리에 귀를 기울일 만큼 한가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투투투투― 쓰와아아앙―
헬리콥터는 고도를 약간 높이며 똑바로 순항했다. 저 멀리 잠실야구장이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헬리콥터가 잠실야구장의 외야에 착륙한 다음, 조종사는 임수정의 구속복과 헬멧을 벗긴 뒤 2루 베이스에 위치한 접수 담당 막사로 데려갔다. 역시 군복을 입은 접수 담당이 조종사를 알아보고 반가워한다.
“와, 또 생존자입니까? 이걸로 다섯 명째입니다. 소령님, 훈장 받으시겠습니다.”
“쓰잘머리 없는 소리 하지 말고, 서류 작업이나 빨리 끝내. 지금 곧바로 영천으로 가서 탄약 싣고 와야 하니까. 오늘 수행해야 하는 총 비행 거리가 2천 킬로미터도 넘어. 피곤해서 죽을 것 같다. 정비도 거의 못하고 있고……. 젠장, 이러다가 좀비들 대가리 위로 떨어져 버리는 거 아니냐?”
“에이, 소령님처럼 베테랑 파일럿이 무슨 말씀이십니까?”
두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임수정은 주변을 둘러봤다. 외야 양 사이드에 가득 쌓여 있는 각종 물자들, 그 주변을 배회하며 지키고 있는 총을 든 군인들.
홈베이스 부근에는 지프 차량들이 나란히 서 있다. 비가 들이치는 관중석에 드문드문 앉아 운동장을 내려다보는 민간인들의 시선은 경계심이 가득하고 지쳐 있다.
“이름이 뭡니까?”
접수 담당자가 볼펜과 종이를 주며 물었다.
“임수정요.”
“에, 임수정 씨. 여기 여기에다가 이름 쓰시고, 주민번호랑 주소 기입하세요.”
임수정이 책상에 기대 서류의 빈칸을 채우는 동안 헬리콥터로 뒤돌아가던 소령이 말했다.
“아, 그 사람. 일단 격리해. 외상이 있더라고.”
“예, 명심하겠습니다. 소령님, 충성!”
격리라니, 또 외상이 문제가 되는 건가……. 임수정은 조그만 상처 하나 때문에 오늘 하루 겪은 수모를 떠올리며 한숨을 지었다. 그녀의 마음을 알아채기라도 한 듯 경례를 끝마친 군인이 말했다.
“여기 들어온 사람들 다 격리가 기본이에요. 눈에 보이는 상처가 없으면 24시간, 있으면 48시간. 시간 차이만 있다뿐이지, 누구나 다 거치는 일이니까 무서워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래도 그렇게 조금 귀찮은 게 가만히 잠들어 있는데 좀비들이 내 모가지를 콱 깨무는 것보다야 낫잖아요.”
“네, 그렇군요.”
서류를 채워 내밀자 눈으로 검토하던 군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책상 아래에서 밀봉된 은색 비닐 봉투를 꺼내 주었다.
“다 됐고…… 자, 이건 기본 지급품입니다. 이 안에 담요랑 물, 건빵, 휴지가 들어 있으니까 당장 아쉬운 대로 버틸 만은 할 겁니다. 에, 또…… 그리고 이건 임수정 씨가 여기 들어온 날짜와 시간입니다. 혹시 이쪽에서 착오가 있더라도 이게 있으면 48시간이 지난 걸 확인할 수 있으니까 버리지 마세요. 어이쿠!”
몸을 앞으로 기울여 봉투와 작은 종이 카드를 전달하던 군인이 임수정의 맨발을 보고 깜짝 놀란다.
“신발이 없으시네. 으음, 신발은 보급품이 아닌데…… 여자 병사들에게 남는 게 있나 물어는 보죠. 발 사이즈 얼맙니까?”
“235요.”
“네, 여기 적었습니다. 어이, 윤 상병, 김 일병. 이분 외상자 격리실로 안내해 드려. 자, 저 사람들 따라가면 됩니다.”
두 명의 총을 든 군인은 임수정을 앞세운 채 말로 방향을 제시하며 걸었다.
1루 측 내야석에 설치된 계단을 타고 관중석을 통해 야구장 건물 내부로 들어갔다. 총 든 군인이 나타나자 서성이던 사람들이 뒤로 물러서며 길을 텄다.
외야석이 닿은 곳에 이르렀을 때, 간이로 만들어놓은 벽이 보였다. 문을 두드리자 안쪽에서 누군가 물어왔다.
“고영민!”
임수정과 함께 온 병사가 곧 무표정한 얼굴로 답한다.
“동무!”
암호의 확인 후, 내부를 경계하고 있던 보초 둘이 문을 연다. 그 내부에는 콘크리트 벽을 등지고 죽 늘어서 있는 수십 개의 조그만 철창이 있었다.
“들어가십시오.”
철창 중 하나를 열며 군인이 말했다. 격리라고 해서 막연히 독방 같은 것을 예상하고 있던 임수정은 흠칫 놀랐다. 가로, 세로, 높이, 모두 1.8미터 정도의 철창. 이건 그야말로 원숭이 우리 수준이다.
“여기요? 화장실은 그럼?”
“저걸 쓰면 됩니다.”
군인이 가리킨 곳에는 덮개가 달린 휴대용 변기와 골판지 상자를 ㄷ자 모양으로 잘라 만든 허술한 칸막이가 서 있었다.
군인의 무뚝뚝하고 강경한 어조에서는 항의나 질문을 받지 않겠다는 단호한 의지가 드러났다. 저항해 봐야 소용이 없다는 걸 깨달은 임수정은 얼빠진 표정으로 철창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철컥! 뒤쪽에서 문을 잠근 군인들이 충성이라는 구호와 함께 경례를 하고 사라져 버렸다.
“흐으으으∼ 으으으.”
가뜩이나 차가운 비에 젖어 있던 몸이 여러 가지 감정으로 흔들리며 와들와들 떨렸다.
핫팬츠만 입고 있는 다리는 파랗게 질려 있다. 임수정은 급하게 비닐봉지를 뜯고 담요를 꺼내 몸을 감쌌다. 지급된 담요는 짧고 얄팍해서 체온을 유지하는 데 거의 도움이 되지 못했다.
‘도대체, 왜!’
임수정은 마음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아무 잘못도 저지르지 않은 자신이 이런 꼴을 당해야만 한다는 걸 도저히 납득할 수가 없었다.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민다. 하지만 누구에게 화를 낸다는 말인가.
자기 부모의 생사도 모르면서 생판 남인 그녀를 도와준 그 소위? 경로를 벗어나 여기까지 태워다 준 조종사?
차가운 비를 맞고 그라운드에 서 있는 저 군인들? 내일이라도 괴물들에게 목숨을 잃을지 모르는 상황 속에서 용감히 싸우는 이름 없는 병사들?
그들은 모두 최선을 다하고 있다. 답답해진 임수정은 차가운 무릎 사이에 얼굴을 박고 한숨을 토해냈다. 몇 시간 만에 또다시 암흑으로 돌아간 기분이다. 그리고 이번엔 희망마저도 보이지 않았다.
“언니도 맨발이시네요.”
한참 동안 고개를 숙인 채 바닥을 노려보고 있던 임수정에게 누군가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