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 유령의 도시 (1)2021.10.09.
나는 왜 이런 곳에 있게 되었을까? 이해할 수가 없다. 임수정은 필사적으로 기억을 더듬어봤다. 잠이 들었었다, 숙직실에서. 그리고 새벽의 경보……. 아! 임수정은 가벼운 탄성을 내질렀다. 그제야 자신이 쓰러지기 직전의 일들이 섬광처럼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다. 그 남자, 얼굴에 흉터가 번뜩이던 칼잡이. 그리고 그조차도 두려워하던…… 괴물. 괴물! 자신에게 덤벼들던 괴물에게 몽둥이를 휘둘렀다. 그리고 괴물이 다시 덤벼들어 중심을 잃었는데……. 더 이상은 생각나지 않는다. 그녀의 기억은 거기에서 깨끗하게 끊어져 있었다. 하아아∼! 임수정은 얼굴을 감싸 쥐며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식당 복도에서 싸우고 있던 자신이 왜 이런 곳에 꽁꽁 싸매진 채 누워 있는지 짐작도 되지 않는다. 도대체 얼마나 정신을 잃고 있었던 것일까? 그리고 그 괴물들과 민구라는 사내는 어떻게 된 것일까? 혹시 이 주변에 아직도 그녀와 함께 있는 것은 아닐까? 소리를 질러 물어보려던 임수정은 곧 생각을 바꾸고 입을 다물어 버렸다. 그 괴물들이 근처에 있다면 그녀의 목소리를 듣고 달려들는지도 모른다. 기억이 되살아나자 한 발, 한 발을 내딛기 위해 끄집어내야 하는 용기의 양이 늘어버렸다. 임수정은 울상을 지으며 천천히 팔을 내젓고 기었다. “허억…… 허억…… 하아…….” 그렇게 조심스러운 동작의 반복을 얼마나 계속했는지 모르겠다. 완전한 암흑 속에서 시간이라는 개념은 절대적인 효력을 잃는다. 하여간 두렵고도 괴로운 시도를 여러 번 거친 끝에 그녀는 마침내 벽에 닿았다. 이 암흑 공간에도 경계가 존재하는 것이다. 임수정은 두 손으로 조심조심 벽을 더듬었다. 바닥과 마찬가지로 싸늘하고 단단한 금속 벽의 감각이 반갑다. 이곳이 인간이 만들어낸 장소라는 걸 확신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이, 이건…….” 조심하고 있던 임수정의 입에서 작은 탄성이 저절로 흘러나왔다. 손잡이가 만져진다. 안쪽의 버튼을 누르고 돌리도록 되어 있는 손잡이. 이곳은 문이다! ‘그런데…… 어디로 통하는 문이지?’ 그 생각이 들자 손잡이를 잡고 있는 손이 가볍게 떨리기 시작했다. 이 문을 열고 나가서 마주하게 될 것이 무엇일지 몰라 두렵다. 만약 이 너머에 괴물들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다면……. 긴장한 임수정의 목젖이 반사적으로 마른침을 삼키기 위해 움직였다. “캑! 쿨럭! 콜록!” 바짝 말라 있던 구강 때문에 마른기침이 터져 나왔다. 지독하게 목이 마르다. 입술은 다 터져 갈라진 채고, 입안에는 모래를 한 줌 물고 있는 것 같다. 소리가 새어 나갈까 두려워진 그녀는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구역질이 나올 만큼 한참 동안 기침을 한 뒤에야 임수정은 겨우 제대로 숨을 쉴 수 있었다. ‘어쩌지?’ 두근거리는 가슴을 한 손으로 짚어 진정시키며 임수정은 문에 귀를 대봤다. 바깥쪽에서 뭔가 희망적인 소리가 들려오기를 기대하면서……. 하지만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 그녀는 빛과 외부의 소리로부터 철저히 고립되어 있었다. 그 상태로 또 꽤나 긴 시간을 보내야 했다. 문을 여는 것은 간단하다. 엄지로 버튼을 누르고 손목을 살짝 비틀기만 하면 된다. 하지만…… 쿨럭! 극도로 건조해진 목에서 또다시 기침이 터져 나온다. 그것이 그녀의 결심을 서두르게 만들었다. 당장 죽더라도 물을 시원하게 마시고 싶어진 임수정은 용기를 내 손잡이를 돌렸다. “하아∼ 하아∼” 어두운 조명이지만, 암흑 속에서 갓 기어 나온 그녀에게는 충분히 밝다. 주방의 타일과 스테인리스 프레임을 보자마자 임수정은 자신이 갇혀 있던 곳이 대형 냉장창고 속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눈을 들어 주변을 살폈다. 사람 허리 높이의 큼직한 싱크대에 막혀 시야는 매우 한정적이지만, 적어도 괴물의 울부짖음은 들리지 않는다. 그것만으로도 50%는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그녀는 필사적으로 기어서 주방의 수도꼭지를 잡고 몸을 일으켰다. 뻣뻣한 두 다리로 서자 몸이 후들거렸지만, 그런 것에 개의치 않고 수도꼭지를 꽉 잡은 채 돌렸다. 물, 물! 물! 하지만 물이 나오지 않는다. 정수장에 물이 나오지 않는다니…… 어떻게 된 거지? 절망적인 표정으로 고개를 돌리던 그녀의 시야에 서빙용으로 따로 준비해 둔 물병들이 보인다. 맑고 깨끗한 물이 가득 차 있는 물병들. 임수정은 그것을 꽉 잡고 끌어내려 입가에 부었다. 콸콸콸, 흘러내린 물이 입과 얼굴, 그리고 가슴을 적신다. 너무 급하게 물을 마시느라 몇 번 구역질을 하긴 했어도 수분이 들어가자 사는 것 같다. 급한 갈증을 푼 그녀는 물병이 올려진 카트에 기댄 채 천천히 물을 음미했다. 그러다가 바닥에 널브러진 뚱뚱한 남자의 시체에 눈길이 닿았다. “헉!” 시체 근처에는 잘려 나간 목이 있고, 거기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도 두 구의 시체가 더 누워 있다. 끔찍한 몰골이지만, 적어도 위험하지는 않다는 것을 한참 만에야 깨달은 임수정은 좀처럼 힘이 들어가지 않는 다리를 억지로 끌어 올려 천천히 움직였다. 온몸이 부들부들 떨린다. 식당 안을 밝히던 형광등은 모두 꺼져 있고, 노란 비상 조명만이 간신히 시야를 확보해 주는 기능을 하고 있다. 그건 곧 현재 이 건물에 비상 전원이 가동되고 있다는 의미였다. “아직 출근 시간이 안 됐나?” 어쨌든 시체들이 가득한 이곳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아직도 두통은 가시지 않는다. 코를 찌르는 악취에서 벗어나 맑은 공기를 쐬어야 한다. 냉장창고 옆을 지나던 임수정은 열려 있는 문 사이로 내부를 들여다봤다. 넓다고 해봐야 세 평 남짓할 뿐인 저 공간이 암흑 속에서는 무한한 것처럼 느껴졌다는 게 새삼 우습다. 냉장고 바닥에는 식탁보들이 잔뜩 흐트러져 있다. 그녀가 깼을 때, 몸을 감싸고 있던 것들이다. “설마…… 그 남자가?” 날카롭게 찢겨 나간 냉장고 문의 패킹, 냉기라고는 일절 느껴지지 않던 내부. 그제야 자신이 냉장고 속에 갇혀 있었으면서도 얼어 죽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민구라는 사내가 자신을 그 안에 피신시키며 여러 가지 조처를 해둔 덕이었다. “그럼, 그 사람은?” 자신이 걸치고 있는 양복 재킷의 주인을 떠올리며 임수정은 혼잣말을 했다. 왜 자신만 놔두고 사라져 버린 걸까……. 고민을 해봐야 알 수 없다고 판단한 그녀는 한 손에 물병을 쥔 채 싱크대를 짚은 팔에 의지해서 식당 문까지 나왔다. 거기에도 어김없이 시체가 기다리고 있었다. “꺄아악!” 문을 열자마자 뒤통수가 완전히 박살 난 괴물을 본 임수정은 비명을 지르며 병을 떨어뜨려 버렸다. 퍼억! 쨍강! 물병이 깨지며 파편이 임수정의 종아리를 긋고 지나간다. 주르륵, 피가 흘러내렸지만, 아픈 것을 의식할 여유조차도 없었다. 복도와 계단을 차지한 채 널브러져 있는 시체들과 마주칠 때마다 진저리를 치면서도 임수정은 용케 로비까지 올라왔다. 그리고 어둠과 시각적인 두려움으로부터 완전히 탈피한 그때, 처음으로 건물 바깥쪽에서 소리가 들려오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아직도 비가 그치지 않았네…….” 열려 있는 로비의 유리문을 두드리며 많은 양의 소나기가 쏟아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빗소리를 뚫고 간간이 울리는 커다란 소리. 쿵! 쿵! 크고 단단한 돌이 울릴 때 나는 소리는 정문 바깥쪽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경비실에 걸려 있는 시계가 가리키는 시간은 3시 50분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12시간 가까이나 의식을 잃고 있었다는 것에 놀랐고, 그때까지도 정수장에 출근한 사람이 없다는 것에 다시 놀랐다. 하지만 임수정은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괴물들과 격투를 벌인 그 새벽으로부터 벌써 사흘이나 지났다는 것을. “어떻게 된 거지? 왜 아무도 없어? 그리고 저 소리는 뭐야?” 쿠웅∼! 쿠웅∼! 커다란 소리는 유혹하듯 계속 울려 퍼진다. 임수정은 홀린 것처럼 걸음을 옮겨 소리가 나는 곳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어쨌든 저기엔 사람이 있다……. 빗방울이 튀어 시야가 흐려지자 그녀는 민구의 재킷을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신고 있던 슬리퍼가 벗겨진 채였지만, 고여 있는 빗물을 밟으면서도 임수정은 자신이 맨발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 “이건…… 예상 못 했네.” 갑자기 쏟아지기 시작한 폭우를 피해 복지 센터 안으로 뛰어 들어온 보안관이 씁쓸한 표정으로 바깥을 보며 중얼거렸다. 시원하다고 할 수준을 넘어설 만큼 많은 양의 비다. 흠뻑 젖은 웃옷을 벗어 물기를 짜내던 삼식이와 유빈도 걱정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게. 여름에는 비가 잦은 게 당연한데…… 막연히 계속 맑을 거라고만 생각했어. 아, 이거, 곤란한데.” 반쯤 빨래가 돼서 얼룩졌던 핏자국이 희미해진 면 티를 다시 걸쳐 입으며 유빈이 말했다. 비가 오면 음식을 구하러 나가기 어려워진다. 시야가 짧아지는 것도 문제지만, 기동력이 급격하게 떨어진다는 점이 가장 심각하다. 빗물이 들어가기 때문에 코로 숨을 쉬기도 어렵고, 바닥이 미끄러워서 언제 넘어질지 모른다. 좀비들도 비가 오면 더 느려질까? 그걸 알 수가 없는 상황에서 모험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장마는 이미 지나갔지만, 만약 이 비가 사나흘 이상만 계속된다 해도 그들에게는 치명적일 것이다. 비가 그치기 전까지는 조금 아껴 먹으면서 버티는 수밖에 없다. 뚱한 표정의 신입은 젖은 담배에 불을 붙이기 위해 애를 쓰고 있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아까 삼식이가 억지로 끌고 나와 일을 시킬 때부터 녀석은 잔뜩 기가 죽은 모습이었다. “물탱크 어떻게 해? 비 올 때 열어서 채워둬야 하지 않아?” 삼식이가 물었다. 유빈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답했다. “어떻게 하는 게 더 좋을지 모르겠어. 지금 있는 깨끗한 물과 빗물을 섞어도 되는 건지…….” 유빈이 밖으로 팔을 뻗어 손바닥에 빗물을 받은 다음, 그걸 코에 가져다 댔다. 흙냄새가 난다. “좀 미심쩍은데……. 이걸 그냥 마셔도 될까?” “허, 여기가 무슨 남태평양 무인도인 줄 아냐? 공기 중에 떠다니는 먼지랑 매연이 얼마나 많을 텐데. 못 마셔, 그거. 배탈 나.” 보안관이 생각도 하지 말라는 듯 고개를 젓는다. 어느새 두 손 가득 빗물을 받아 할짝거리던 삼식이가 인상을 찌푸리며 침을 퉤퉤, 뱉어냈다. “그러면 지금 받아놓은 물을 다 마실 때까지는 빗물과 섞지 말아야겠다. 그냥 큰 통에라도 좀 받아두고 물일 할 때나 쓰자.” 세 친구가 건물 주차장으로 나가 물통들을 늘어놓는 동안, 깊은 잠에 빠져 있던 제니도 눈을 떴다. “엇, 차가워.” 뚫려 있던 창문 안으로 들이친 빗물이 얼굴을 적신다. 바닥을 때리고 산산이 부서져 튀어 오르는 빗방울들을 잠시 멍한 눈으로 바라보던 제니는 급하게 몸을 일으켰다. 꿈이 아니었다. 테라의 죽음도, 사장의 죽음도, 그리고 괴물들이 가득한 세상까지도……. 먼지가 꼬질꼬질한 스티로폼 패널 침대가 그녀에게 자신이 처한 상황을 확실하게 각인시켜 준다. 지난해 연말, 가요 대상을 받자마자 공항으로 달려가 NHK 사장이 보내준 전용기를 타고 일본으로 건너갔던 일이 기억난다. 홍백가합전에 출연을 했던 그날 밤, 기다란 리무진 속에서 테라와 함께 바라보던, 붉은 도쿄 타워의 불빛……. 이제 그렇게 화려한 날은 다시 오지 않을 것이다. 젠장, 그 힘든 날들을 겪으면서 겨우 여기까지 올라왔는데……. 하아아∼ 가벼운 한숨과 함께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쓸어 올린 제니는 문에 걸려 있는 거적을 들추고 암울한 현실을 향해 몸을 내밀었다. “어, 깼어?” 건너편 창가에 앉아 깡통에 불을 피우고 있던 보안관이 화색을 띠며 벌떡 몸을 일으킨다. 그리고 뭔가를 손에 쥐고 뛰어왔다. “아, 저…… 이거, 예뻐서 가져왔어. 혹시 마음에 들면 방에 두고 키우라고.” 그가 내민 것은 자른 페트병에 심겨진 노란 들꽃 한 다발이었다. 여러 송이의 들꽃을 정성껏 캐서 한데 심은 게 분명하다. 나를 위해서……. 한없이 가라앉아 있던 제니의 마음이 울컥 흔들렸다. 꽃과 정말 무관해 보이는 투박한 손의 보안관, 평온한 눈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유빈, 벽에 기대앉아 미소를 보내는 삼식이. 아아, 맞아. 나 운 좋게도 이렇게 고마운 사람들과 만났지……. 그리고 살아 있지……. 눈물이 고여 버려서 이미 어떻게 생긴 꽃인지도 잘 보이지 않지만, 지금껏 받아온 그 어떤 꽃다발보다도 아름답게 느껴졌다. “어, 제니야. 있지…… 싫으면 안 키워도 괜찮아. 하하, 하긴 이건 너무 촌스럽다. 그치?” 제니가 감정을 주체하지 못해 잠시 말없이 서 있자 반응을 오해한 보안관이 멋쩍어하며 페트병 화분을 등 뒤로 감추려 했다. “그것 봐∼ 보안관. 깨자마자 네 얼굴을 보니까 울잖아∼!” 무심한 듯 보고 있던 삼식이가 보안관을 놀려 댔다. “그런 거 아니에요. 정말 예뻐요.” 소매를 들어 눈물을 찍어낸 제니는 감정을 추스르고 밝게 웃었다. 보안관이 이마에서 진땀을 닦아내며 물었다. “정말?” “네, 행복해요.” 그 순간, 그 단어만큼은 진심이었다. 두 손으로 화분을 받아 든 제니는 꽃에 코를 대고 깊이 숨을 들이쉬었다. 이들과 만나지 않았더라면 다시는 맡아보지 못했을, 이름 모를 들꽃의 냄새가 제니의 가슴속을 가득 채웠다. 거칠게 쏟아붓는 빗속에서도 선명하게 느껴지는 생명의 향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