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새로운 날 (6)
(38/449)
38. 새로운 날 (6)
(38/449)
38. 새로운 날 (6)
2021.10.08.
“괜찮아. 중요한 건 안쪽이 안 보이면 되는 거잖아. 너 선택해 봐. 거적문에 배부르고 편한 거, 쇠문에 배고프고 눈치 보이는 거. 어느 쪽이 좋겠어? 그걸로 화장실 문도 쉽게 만들어줄 수 있고.”
“끄으응, 난 아무래도 그런 거 말 못하겠는데. 큰소리 탁 쳐놓고서.”
“그럼 내가 얘기할게. 빨리 달아주고 끝내자. 쟤 좀 봐. 우리 때문에 또 불안해하고 있잖아.”
설마 하며 보안관은 힐끔 뒤를 돌아봤다. 유빈의 말처럼 제니는 초조해 보였다. 불안함을 달래기 위해서인지, 양손의 검지로 엄지손톱 위쪽을 꾹꾹 누르며 이쪽의 눈치를 살핀다.
젠장, 저러라고 문 이야기를 꺼낸 게 아닌데……. 속이 상한 보안관은 머리를 긁적이며 제니에게 다가갔다.
“저기, 문은 지금 당장은 어렵겠어. 그냥 아무 천으로라도 덮어두는 수밖에 없을 것 같아. 미안해, 괜히 큰소리쳐서.”
“아, 아니에요. 미안하시긴요. 제가 죄송해요. 오빠, 저 문 같은 거 필요 없어요. 그냥 오빠들이 안전하게 같이 있어주는 게 훨씬 좋아요.”
제니가 그렇게 말해주어서 문 사건은 일단락되었다. 잠시 아찔했던 유빈은 아무도 기분이 상하지 않은 채 일이 마무리되는 것을 보며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제니의 방에 침대로 쓸 스티로폼 패널, 베개로 쓸 낡은 수건을 넣어주고, 자재 포장을 걷어 와 커튼처럼 걸어주는 것으로 이사 준비도 마쳤다.
보안관은 문 위 벽에 콘크리트 못을 박아 커튼을 고정시키면서, 이건 정말 어울리지 않는다는 말을 계속해서 중얼거렸다.
다음은 생필품이다. 생필품이라고 말할 만큼 대단한 것도 없지만, 보안관은 공구 가방을 열고 안에 든 물건들을 꺼내 죽 늘어놓으며 제니에게 혹시 필요한 게 있으면 가져가라고 말했다. 황 씨 아저씨 가방부터 시작했다.
“아, 플래시네. 이건 하나 방에 가져다 두고 써. 그리고 이거는 수건, 이건 면 티, 그리고 이건…….”
아뿔싸, 박스를 집어 올린 순간 보안관은 자신이 미친 짓을 했다는 걸 깨달았다. 잊고 있었다, 황 씨 아저씨의 가방 속에 엄청난 수의 콘돔이 들어 있다는 것을.
보안관의 얼굴이 순식간에 벌겋게 달아오른다. 아아, 신이시여, 지금 이 순간 제발 제니가 다른 곳을 보고 있게 해주세요……. 하지만 보안관의 기도는 통하지 않았다.
곁에 쪼그리고 앉아서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뭐가 나올까를 지켜보고 있던 제니가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어, 아…… 하하하, 건강하시네요.”
보안관이 미친 사람처럼 얼굴을 흔들었다.
“아, 아니야! 이건 내 가방이 아니라, 황 씨 아저씨라고 있어! 그, 우리랑 같이 일하던…….”
“아…… 네에.”
너무도 민망한 순간이지만, 더 변명을 해봐야 사람만 우스워질 것 같아서 보안관은 잽싸게 콘돔 박스를 안쪽으로 집어넣고 다른 물건들을 꺼냈다. 물건을 소개하는 보안관의 목소리가 더 커졌다.
“이! 이건 칫솔이고! 이건 양말!”
여러 가지 물건 중에서 처음으로 제니가 관심을 보이는 게 등장했다.
말로 표현은 하지 않았지만, 제니의 시선은 칫솔에 꽂혀 있다. 누가 봐도 새것은 아닌 칫솔이지만, 무척이나 양치가 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걸 눈치챈 보안관이 칫솔을 내밀며 말했다.
“혹시 이거라도 쓰겠어?”
“하지만 이거…… 오빠 거잖아요. 저를 주시고 나면 오빠는 어떻게 해요?”
“아니, 이거 내 가방 아니라고! 정말이야! 이거 봐! 이 티셔츠 나한테 작잖아!”
다급해진 보안관이 황 씨 아저씨의 미디엄 사이즈 면 티를 꺼내 어깨에 대며 열변을 토했다. 제니가 방긋 웃더니 머리를 귀 뒤로 쓸어 넘기며 묻는다.
“그럼 이거, 정말 제가 가져요?”
“그래. 남자들끼리는 아까 내가 이 닦은 걸로 같이 쓰면 돼.”
“고맙습니다.”
제니가 두 손으로 칫솔을 집어 들었을 때, 담배를 물고 지나가던 삼식이가 쓸데없는 이야기를 보태준다.
“참고로 말하면 그거 쓰던 주인은 마흔 살 된 아저씨였는데, 팔과 가슴에 털이 엄청 많았고, 개고기를 좋아해서…… 읍!”
보안관이 커다란 손으로 우악스럽게 삼식이의 입을 틀어막았다. 하지만 이미 중요한 정보는 다 전달된 이후다.
“으으으으∼!”
제니는 혐오스러운 것을 봤을 때처럼 이를 드러내며 잔뜩 얼굴을 찡그린 채 손에 든 칫솔을 빤히 쳐다보았다. 심적인 갈등이 엄청난 모양이다. 한참 동안 고민을 하던 제니가 마침내 결정을 내렸다.
“괜찮아요! 치약으로 깨끗하게 닦아서 쓰면 돼요.”
“응? 뭐가 괜찮아? 어, 그거 황 씨 아저씨 칫솔…….”
3층 화장실에 거적으로 문을 만들어 달고 온 유빈은 아무 생각 없이 한마디를 던지려다가 보안관의 헤드록을 당하며 끌려갔다. 어쨌거나 제니는 플래시와 비누, 수건, 면 티, 휴지, 그리고 칫솔을 받았다.
“이제 좀 자둬.”
1층에서 양치를 하고 돌아온 제니에게 유빈이 말했다.
“아니에요. 청소라도 할게요.”
“그런 건 내일 해도 돼. 너, 지난 3일 동안 거의 못 잤잖아.”
“네, 하지만…….”
“그래, 좀 자둬. 그동안 우리는 바깥에서 일을 좀 할 테니까 망치 소리가 나더라도 신경 쓰지 말고.”
보안관까지 나서서 적극적으로 권하자 그제야 제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귀가 웅웅 울리는 것 같긴 했어요. 그럼 저 몇 시간만 자고 일어날게요.”
제니가 방에 들어간 다음, 세 친구는 더 많은 함정을 만들어두기 위해 1층으로 내려갔다.
신입은 너무 오랜만에 음식을 먹어서 그런지 배가 아프다며 누워 있기에 그냥 내버려 두었다. 그 녀석이 빠진다고 해도 보안관이 워낙 기운이 넘쳐서 일손이 부족할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4차선 도로를 따라 5분 정도 걸어간 뒤, 그들은 벌판의 철책과 건너편 도롯가의 나무를 레이저 와이어로 연결하고, 못이 박힌 각목 쪼가리를 군데군데 뿌려두었다. 일전에 각목을 밟고 다니던 딸깍이를 보고 착안한 함정이다.
놈들은 발바닥에 나무판자가 박혀도 그걸 빼낼 줄 모른다. 그리고 그 나무판자의 길이가 발바닥보다 길면 제대로 뛸 수 없을 것이다. 괴물들에게서 기동력만 제거해도 상대하는 일은 몇 배나 수월해진다.
지금 당장은 이곳까지 괴물들이 오지 않지만, 미리 대비를 해둬서 나쁠 건 없다. 지켜야 할 소중한 것이 하나 더 늘어난 지금은 방어의 중요성이 훨씬 더 크고 절실하게 느껴졌다.
“보안관, 그게 뭐야?”
쪼그리고 앉아 망치로 각목 조각에 못을 박던 삼식이가 잠시 쉬려고 일어나 담뱃갑을 꺼내며 물었다.
보안관은 나무에 레이저 와이어를 고정하다 말고 길가에 피어난 들꽃을 뿌리째 파내보려고 땀을 흘리는 중이었다.
“응? 아아, 이거? 예뻐 보여서……. 페트병에 심으면 키울 수 있지 않을까?”
누구에게 주려고 그러는지야 물어보지 않아도 뻔히 알 수 있는 일이다. 삼식이는 허리를 쭉 펴고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후후, 여자애 하나가 끼니까 여러 가지로 바쁘고 정신이 없구나. 보안관 저놈도 아주 신이 났고. 그래, 이런 게 사는 거지. 야, 유빈아. 생각해 보니까 우리 꼭 일곱 난쟁이 같다. 그치?”
“그것참 무지하게 큰 난쟁이인걸?”
유빈은 자기보다 머리 반 개는 위에 있는 삼식이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큰 난쟁이! 어라, 담배가 다 떨어졌잖아? 나 담배 좀 가지고 올게.”
“그래라. 올 때 물도 좀 떠다 줘.”
삼식이가 콧노래를 부르며 복지 센터 2층에 올라왔을 때, 신입은 제니의 방 앞에 서서 커튼을 살짝 들추고 그 사이에 바짝 눈을 대고 있었다.
얼마나 열중하고 있는지 삼식이가 가까이 다가올 때까지도 전혀 낌새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바지에 양손을 넣어 긁적거리던 삼식이가 그 꼴을 가만히 보고 있다가 어처구니없다는 말투로 불렀다.
“야! 너 뭐하냐?”
“엇, 어, 으응. 삼식이구나. 일한다더니?”
신입은 화들짝 놀라 뒤로 물러나며 얼버무렸다.
“거기서 뭐하고 있느냐고.”
“응. 그게…… 제니가 자면서 자꾸 끙끙 앓는 소리를 내잖아. 걱정이 돼서 괜찮은가 좀 보려고…….”
삼식이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말했다.
“후우∼ 그래, 괜찮디?”
“모, 모르겠어. 아무것도 안 보이네. 그, 그건 그렇고…….”
신입은 삼식이에게 다가와서 은근히 물었다.
“야, 저 방에 그럼 오늘 밤에는 보안관이 들어가냐?”
삼식이의 이마가 찡그려졌다.
“저긴 보안관이 아니라 제니 방인데?”
“에이, 삼식아. 왜 이러냐? 나도 다 눈치가 있다. 문을 만든 게 그것 때문이잖아. 설마 나만 쏙 빼놓으려는 건 아니지? 같이하자, 좀! 콘돔도 아직 잔뜩 있으면서.”
“너, 왜 그래?”
“뭘 왜 그래야, 뻔한 이야기를. 보호를 받고 싶으면 뭔가 대가를 지불해야 하는 거 아니냐. 어차피 쟤도 다 각오하고 있는 눈치던데, 뭐.”
“신입, 넌 참 좋겠다.”
긴 검지를 뻗어 신입의 눈 사이를 천천히 밀어내며 삼식이가 말했다.
“왜? 뭔 소리야?”
“좀비가 돼도 지금보다 더 징그러워지지는 않을 것 같아서.”
“야, 그럼 진짜 그냥 안 한다고? 등신아, 쟤는 어차피 누구한테 하소연도 못 해. 그냥 이제 우리 거야. 우리도 언제 죽을지 모르는데, 재미나 실컷 보자.”
잔뜩 열이 오른 신입이 좀처럼 포기하지 않자 삼식이가 차갑게 말했다.
“되도 않는 소리 하지 말고 똑바로 행동해. 애초부터 너에 대해서 아무 기대도 없었지만, 보안관이 너를 죽이는 모습도 보고 싶지 않아. 알겠어?”
드물게 보는 삼식이의 진지한 태도에 그제야 정신을 차린 신입이 거짓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아하하하…… 야, 너 농담을 좀 이해해라. 그냥 너 놀려본 거야. 설마 내가 그런 짓을 하겠니? 하하하.”
“그랬어? 있지, 신입아. 다음에 또 그런 농담을 하게 되면 말이야, 말 끝나자마자 곧바로 뛰어서 번화가 쪽으로 가. 가서 좀비에게 물려. 그게 너를 위해서 훨씬 좋을 거야.”
신입이 발끈해서 물었다.
“지랄! 내가 왜 그래야 하는데?”
여전히 눈빛에서 웃음기를 지운 채 삼식이가 나지막이 말했다.
“적어도 좀비는 일부러 너를 천천히 죽이지는 않을 테니까.”
***
“허억! 컥, 컥!”
임수정이 신음을 토하며 눈을 떴을 때, 사방은 그야말로 완전한 암흑이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심지어 보이지 않는 것이 어둠 때문인지, 아니면 시력을 잃었기 때문인지조차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모든 것이 칠흑같이 어두웠다.
그것은 대단히 무서운 경험이었다. 도시에서 태어나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오는 동안 그녀는 이처럼 완벽한 어둠 속에서 눈을 떠본 일이 단 한 번도 없었다.
희미한 달빛만이 유일한 조명이었던 강원도의 산속도 이보다는 몇 배나 환했다. 임수정은 시력이 회복되기를 기도하며 몇 번이나 눈을 꾹 감았다가 뜨기를 반복했다. 하지만 그래봐야 여전히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하아, 하아.”
두려움 때문에 심장박동이 빨라진다. 머리가 너무 아프다. 누군가 그녀의 이마를 뭉뚝한 몽둥이로 꽉 눌러 대고 있는 것 같다. 어디가 앞이고, 어디가 뒤인지도 모르겠다.
전후좌우가 구분되지 않는다는 걸 깨닫자 갑자기 세상이 아무렇게나 빙글빙글 도는 것처럼 어지럽다. 임수정은 바닥을 짚어보려 두 팔을 벌렸다.
“어?”
두 팔도 부자연스럽다는 것을 뒤늦게 알았다. 아무리 애를 써봐도 뭔가에 꽉 조여진 어깨는 도무지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이익! 이익! 임수정은 필사적으로 몸부림을 쳤다.
몸을 데굴데굴 굴리다가 어딘가에 부딪히고 나서야 사지가 조금 자유로워졌다. 꽁꽁 싸매져 있던 팔을 빼내서 손으로 얼굴을 짚었다.
손가락이 입과 코를 스치자 그 기관의 감각이 되살아나는 것 같다. 자신의 몸을 만질 수 있게 된 것만으로도 임수정은 훨씬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 들었다.
“콜록, 콜록! 하아.”
몸 전체를 압박하며 둘러져 있던 여러 겹의 천을 걷어내고 나서 임수정은 네 발로 바닥을 짚고 엎드렸다. 그러고는 오른손을 들어 천천히 사방을 휘저었다. 아무것도 걸리지 않으면 한 걸음을 나간다.
그 단순한 동작을 반복하는 것뿐인데도 그녀의 온몸은 식은땀으로 흠뻑 젖었다. 멀리 뻗은 손바닥이 금방이라도 날카로운 것에 걸리지는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등골을 타고 흐른다.
“여기가…… 여기가 어디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