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7. 새로운 날 (5) (37/449)


37. 새로운 날 (5)
2021.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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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앉아 있어. 정말 누추하긴 하지만, 맨바닥보다는 나을 거야.”

유빈이 끌어와 깔아준 스티로폼 패널에 제니가 앉자 네 명의 남자는 자연스럽게 그 주변을 빙 둘러앉았다.

“자, 이제 인사도 나눴으니 우리도 아침을 먹어야지?”

삼식이와 유빈이 공구 가방과 음식물 가방에서 오늘 가지고 온 음료수와 먹을 것을 꺼내 정리했다.

보안관이 담은 것은 주로 햄이나 참치 같은 통조림이었고, 유빈이 담은 것은 빵이나 삼각김밥, 봉지 라면 따위였다.

목숨을 걸고 가서 겨우 쟁취해 온 것들인데, 막상 늘어놓고 보니 그 양이 너무나 보잘것없었다. 아무리 아껴 먹어도 사흘을 넘기기 어려울 게 분명하다.

“저, 저는 아직 배가 안 고파요. 아무것도 한 게 없는데, 이따가 오빠들 저녁 드실 때 같이…….”

각자의 몫인 빵 두 개와 음료수 두 병을 내밀자 제니가 사양을 한다. 그녀 역시 남은 음식의 양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걸 눈치챈 것이다. 유빈이 쓴웃음을 지었다.

“친동생처럼 여겨 달라면서? 그러니까 너도 눈치 보지 마. 어차피 음식은 또 구하러 가야 돼.”

제니도 수긍했는지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하나씩만. 저 정말로 많이는 못 먹어요.”

그렇게 말한 뒤, 제니는 빵을 뜯어 입에 넣었다. 그리고 그것을 신호로 삼아 네 남자도 열심히 먹기 시작했다.

이야기 소리에 섞여 간간이 웃음도 터졌다. 물론 과잉된 감정과 어색한 분위기를 숨겨보려는 의도가 다분한, 그런 웃음이기는 했다.

보잘것없는 식탁이지만, 그것은 며칠 만에 처음으로 가져 보는, 아주 즐거운 아침 식사 시간이었다.

***

같은 시각, 세 친구로부터 서쪽으로 25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도 한 남자가 테이블에 앉아 조금 늦은 아침 식사를 하고 있었다.

메뉴는 데우지 않은 즉석 전복죽과 병에 담긴 오렌지 주스가 전부다. 남자는 포장 안에 들어 있던 조그만 수저로 천천히 죽을 퍼서 입에 가져가고, 가끔 주스를 마셨다.

남자가 앉은 테이블의 오른쪽에는 이 식당에서 구한, 긴 식칼이 하나 올려져 있었다.

조그만 죽 두 그릇을 다 먹고 나서 반쯤 남아 있던 음료를 한 번에 비운 뒤, 그는 식탁에서 일어나 칼을 쥐고 식당 끝에 붙어 있는 매점을 향해 걸어갔다.

카운터에 걸려 있던 비닐봉지 하나를 뜯어 거기에 대충 되는대로 음식과 음료수를 담은 남자는 한쪽 벽에 걸려 있던 거울을 보고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돈했다.

머리 모양을 어떻게 해봐도 인상이 그리 좋아지지는 않는다. 그의 얼굴을 가로질러 길게 자리하고 있는, 해묵은 흉터가 워낙 강렬하기 때문이다.

쯧, 미남 소리는 듣기 어렵겠군. 그 남자가 한쪽 입만으로 쓰게 웃자 거울 속의 민구도 따라 웃는다.

찰칵.

담배에 불을 붙인 민구는 주머니에 담배 한 갑을 새로 집어넣었다. 후우우∼! 상처 회복이 더뎌지니 어쩌니 해도 담배는 참기 어렵다.

텅 빈 카운터에 걸터앉아 담배 한 대를 느긋하게 다 피운 뒤, 민구는 천천히 일어나 음식이 든 봉지를 들고 매점 밖으로 걸어 나왔다.

휙∼! 담배꽁초를 아무렇게나 내던졌다. 아직 불이 붙어 있는 꽁초가 바닥에 뒹굴고 있던, 목 없는 시체에 맞아 튄다. 일부러 그 시체를 맞추려고 한 것은 아니었다.

워낙 자빠져 있는 것들이 많아 아무 데라도 던지면 바닥에 맞을 확률과 시체에 맞을 확률이 비슷비슷했을 뿐이다.

민구는 식당 여기저기에 가득 널브러져 있는 시체들 사이를 빠져나가 병원 1층으로 올라갔다. 거기 잠시 멈춰 서서 셔터가 내려진 현관 유리를 통해 주차장 너머, 바깥의 상황을 살폈다.

쾅! 콰릉!

그롸아악!

굳게 잠긴 병원의 정문 앞에는 예닐곱의 놈들이 얼굴을 바짝 붙이고 철문을 밀어 대며 소란을 피운다.

어차피 저 두꺼운 문을 뚫고 들어올 수도 없는 놈들이란 걸 알고 있기 때문에 신경도 쓰지 않았다. 정 귀찮으면 그때 가서 죽여 버리면 그만이다. 여기 병원 로비에 목을 잃은 채 뻗어 있는 이놈들처럼.

잠시 더 바깥을 살피던 그는 계단을 올라 2층으로 갔다. 군데군데 나자빠진 시체들을 밟지 않고 피해가며 계단을 오르는 게 조금 귀찮다.

소독약을 잔뜩 뿌려두긴 했지만, 냄새도 만만치 않다. 대기실 카운터에 허리가 걸린 채 죽어 있는 간호사의 시체를 지나 복도 세 번째 방의 문을 열었다.

교통사고 환자들만을 전문으로 유치하던 이 정형외과의 간이 수술실이다.

“히엑!”

수술실 안쪽에서 불안해하고 있던 중년 의사와 여간호사가 문 열리는 소리에 기함을 하다가 민구의 얼굴을 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첫날 아침, 민구는 경찰차를 몰고 가장 가까운 병원으로 돌진했고, 그게 이곳이었다.

담배를 피우러 나온 환자의 전화기를 빼앗아 육만배에게 간단한 자초지종을 알린 뒤, 당직 의사와 간호사에게 어깨의 상처와 주방에서 훔쳐 온 식칼을 보여주었다.

그로부터 며칠이나 지났는데 이것들은 도무지 상황에 익숙해지지를 못한다. 민구는 한심하다는 눈으로 둘을 쳐다보며 탁자 위에 음식이 든 봉지를 탁, 던졌다.

“같이 내려가서 좀 먹자니까, 다 죽어서 움직이지도 못하는 새끼들이 뭐가 그렇게 무섭다고. 그러면서 용케 의사는 됐군……. 뭐, 나도 신세를 진 게 있으니 이 정도 심부름은 해주긴 하겠지만.”

잔뜩 기가 죽어 있는 의사와 간호사는 몇 번이나 고개를 숙여 보인 뒤, 봉지에서 음식을 꺼내 입에 넣었다. 그들이 아침 식사를 끝낼 때까지 회전의자에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던 민구가 셔츠를 벗었다.

살을 째서 썩은 피를 빼고 수술을 한 덕에, 탈골되어 있던 그의 어깨는 어느새 부기도 상당히 빠지고 피부도 제 색깔을 찾아가는 중이다.

끄응, 어깨를 살살 회전시켜 보던 민구의 인상이 일순 찌푸려진다. 걸리는 부분이 있다. 사흘 전에 비하면 훨씬 나아진 건 분명하지만, 아직은 온전하지 못하다.

“그거 먹고 치료하던 거 마저 끝냅시다.”

천천히 목 근육을 풀며 민구가 말했다. 의사와 간호사가 고개를 끄덕인다. 4층 건물 전체를 사용하는 이 병원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세 사람의 하루가 그렇게 시작되고 있었다.

***

아침 식사를 마치고 나서 제니와 네 남자는 각자가 할 일을 했다. 삼식이는 창가에 기대 느긋하게 담배를 피웠고, 급하게 세수를 하고 작업반장의 칫솔로 이까지 박박 닦은 보안관은 제니에게 복지 센터를 안내해 줬다.

신입은 그 옆에서 빙빙 돌며 끼어들 찬스를 노렸고, 유빈은 옥상으로 올라가 물탱크의 뚜껑을 열어봤다.

어제 그 속옷 가게 2층 집에서 물이 끊겼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그렇다면 여기 역시 그리 다르지 않은 형편일 거라 예상했었다. 그동안 세 친구가 아무 생각 없이 썼던 물도 옥상의 거대한 물탱크에서 끌어 쓴 것이 분명하다.

“아, 아직 꽤 들었구나.”

다행히 탱크의 반 이상은 차 있다. 이 정도면 당장 물이 딱 끊어지는 일은 없겠지만, 혹시 모르니 아껴 써야 한다.

물탱크의 뚜껑을 닫은 유빈은 방수액이 들어 있던 빈 플라스틱 양동이를 두 개 겹쳐 들고 1층으로 내려왔다. 그리고 삽으로 모래를 퍼 그 양동이의 바닥을 채웠다.

“어, 그건 뭐냐?”

유빈이 모래를 채운 양동이들을 가지고 2층으로 올라가자 마침 계단 구멍 주변에서 제니에게 좀비 사냥용 가시방석에 대해 설명해 주고 있던 보안관이 물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자신한테 확 쏠리자 유빈이 부끄러워하며 말했다.

“이거, 급한 대로 화장실인데…… 남자용 하나, 여자용 하나. 모래가 들어서 비우기도 편하고. 이제 남자끼리만 있는 게 아니니까…….”

아무 데서나 꺼내놓고 창문 밖으로 갈기면 안 돼, 라는 뒷말은 삼켜 버렸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흐른다. 제니의 얼굴은 조금 빨개졌다.

“오오, 그래! 화장실 필요해! 이제 우리도 밥을 먹었으니 똥을 만들어낼 수 있어.”

삼식이가 적극적으로 환영했다.

“이거 어디다가 놓을까? 내 생각엔 옥상보단 3층 화장실 자리에 놔두는 게 편할 것 같긴 한데. 밤에 계단 오르내리는 게 조금 위험할 수도 있지만, 그거야 난간을 만들어 달면 되고. 플래시도 있으니까 크게 문제는 없을 거야. 옥상은 비를 막아주지 못하니까 아무래도…….”

한숨 돌린 유빈이 제안을 하자 보안관이 제니의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근데 한 층 위라고 해봐야 이 건물엔 아직 방마다 문도 안 달려 있잖아? 그럼 그…… 소리 때문에 민망하지 않을까?”

“나한테 아이디어가 있어.”

어느새 양동이 위에 철퍼덕 앉은 삼식이가 자신 있게 말했다.

“눌 때마다 이 양동이 옆을 두드리는 거야, 이렇게! 그러면 이 소리에 묻혀서 그 소리는 안 들리지.”

삼식이가 양손으로 양동이를 신나게 두드린다.

통통통토토토통∼!

짜증이 난 보안관이 소리를 질렀다.

“야이, 미친놈아! 그럼 나 똥 쌉니다∼ 하고 자랑하라는 말이야?”

“응? 아니지∼ 그냥 가끔은 안 쌀 때도 올라가서 두드리면 어떤 게 진짜인지 분간할 수가 없잖아.”

“너나 실컷 두드려라! 이 바보 새끼야! 얘 입장도 좀 생각을…….”

보안관이 화를 버럭 내려 할 때, 제니가 ‘풋∼!’ 하고 웃음을 터뜨리더니, 비어 있는 양동이에 털썩 앉아서 삼식이의 리듬에 맞춰 옆면을 두드렸다.

“이렇게요? 까르르.”

한동안 즐겁게 리듬을 타던 제니는, 의외의 반응에 조금 놀라 멍해져 있는 유빈과 보안관을 향해 웃음을 잃지 않으며 말했다.

“네, 저도 이런 거 필요해요. 아이돌도 먹으면 나오거든요. 고맙습니다, 오빠.”

3층 남녀 화장실 구석에 양동이를 하나씩 가져다 두었다. 보충용 모래통도 따로 비치했다.

비록 문은 없지만, 벽이 막고 있어서 만약의 사태가 되더라도 서로 얼굴을 마주 볼 일은 없다. 화장실이 해결됐으니, 이제 방을 만들어줄 차례이다.

“2층에서는 이 방이 제일 좋아. 애초에 복지 센터 원장실로 설계된 거라서 가장 크거든. 벽마다 창문이 나 있어서 볕도 들고 바람도 잘 통할 거야.”

보안관이 건물 뒤편의 왼쪽 코너에 있는 방을 보여주며 말했다. 방이라고 해봐야 아무것도 없이 텅 빈 상태로 창문도, 문도 달려 있지 않았다. 그저 벽이 가로막아 주는 정도다.

“우와, 여기선 새소리가 잘 들리네요. 뒷산도 보이고. 네, 좋아요.”

제니가 조금 과장되게 호감을 표하자 기분이 좋아진 보안관이 눈 주위를 긁적이며 말했다.

“문도 금방 구해서 달아줄게. 조금만 참아.”

유빈이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문은커녕 경첩도 없다.

“문? 문을 어디서 구해?”

“응? 아, 그 폐역 사무실에서 떼어오려고 하는데…….”

“그거 쇠문이잖아. 암만 안 나가도 50킬로는 될 텐데, 그 크고 무거운 걸 여기까지 끌고 온다고? 그건 무리야.”

“너한테는 무리지. 나는 가지고 올 수 있어.”

유빈과 보안관이 의견 차이를 보이자 제니가 다급하게 끼어들었다.

“저기, 저기…… 오빠, 그렇게까지 안 하셔도 돼요. 문 없어도 괜찮아요.”

“하지만 아무래도 불편할 거 아니야. 잠잘 때만이라도 편하게 지내게 해주고 싶다고.”

보안관은 자기 의견을 굽히지 않았다. 그런 보안관의 심정을 유빈이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다. 예전부터 보안관은 여자애들을 사귈 때 아낌없이 주는 성격이었다.

게다가 지금은 꿈에서만 만나왔던 짝사랑을 직접 코앞에서 보고 있으니, 제니에게 얼마나 더 잘해주고 싶을지는 두말할 필요도 없다.

하지만 이런 문제는 현실적으로 생각해야 한다. 쇠문을 끌고 올 수도 없지만, 만약 그걸 어찌어찌 죽을힘을 다 써서 가져와 달아준다고 해도 그걸로 끝이 아니다.

죽을힘을 다한 걸 알고 있기에 제니는 억지로라도 기뻐해 줄 것이고, 보안관은 그 웃는 얼굴을 보고 나면 그다음에는 역에 있는 세면기와 변기도 떼어 와서 수도에 연결을 해줄 녀석이다. 침대를 구해 오겠다고 난리를 칠지도 모른다.

음료수 몇 개, 빵 몇 개를 손에 넣기 위해 매일 목숨을 건 질주를 해야 하는 이 상황 속에서 그런 건 아무리 생각해도 아니다.

“잠깐만. 보안관, 잠깐만.”

유빈은 보안관의 어깨를 끌어당기고 한쪽으로 걸어가서 목소리를 낮춰 이야기를 했다.

“네가 그렇게 특별 대우를 해주려 들면 결국 불편해지는 건 쟤야. 아까 봤잖아, 빵 하나 먹는 것도 눈치를 보는 애라고.”

“제니가 왜 눈치를 봐? 신입 같은 새끼도 저렇게 당당하게 큰소리를 치면서 처먹을 거 다 처먹는데.”

“내 말은 제니 때문에 우리가 힘들어하면 그만큼 쟤가 더 미안해할 거라는 말이야. 너, 쟤랑 가능하면 조금이라도 더 오래 같이 있고 싶잖아.”

“아주 살고 싶지.”

“그래. 그러니까 앞으로도 잘해줄 수 있는 기회가 많을 거야. 지금 목숨을 걸고 문을 구해 와서 그걸 달아주고 네가 턱 쓰러져 버리면 쟤 밥은 누가 챙겨 올 거냐고. 누가 해? 신입? 내가? 우리 힘만으론 못 해. 제니에게 지금 가장 필요한 건 튼튼한 방문이 아니라 너야. 건강한 상태의 너!”

“너 이 새끼…… 그 말 다시 한 번 해봐.”

“뭐, 무슨 말?”

“제니에게 필요한 게 나라는 말. 굉장히 듣기 좋은데?”

“아, 그래. 백번이라도 해줄 테니까, 한 가지만 명심해 줘. 쟤 때문에 네가 무리하면 결국 쟤가 가장 힘들어져. 알아? 할 수 있는 것들 중에서 최선을 다하는 정도로 참아야 돼, 지금은.”

“으음, 할 수 있는 게 뭔데? 문을 각목으로 만들어? 4x4잖아. 굉장히 두껍고 무거울 텐데.”

“그래, 무거워서 안 돼. 그리고 멀쩡한 각목은 아껴야 해. 앞으로도 뭐가 필요해질지 모르니까. 그냥 이렇게 하자. 자재 덮을 때 쓰던 포장, 그걸 좀 잘라서 커튼처럼 문에 걸어주면…….”

“야이 씨, 그건 그냥 넝마잖아. 거지처럼 문에다가 거적을 걸어두고 살라고? 제니더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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