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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새로운 날 (4) (36/449)

36. 새로운 날 (4)2021.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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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상맞게 굴고 싶지는 않지만, 처한 상황을 말로 정리하다 보니 또 눈물이 난다. 입을 꾹 다물고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는 제니에게 삼식이가 웃으며 말했다. “하하, 그건 여기 있는 우리 모두에게 하는 말인가?” “……네?” “우리 셋도 다 누군가를 잃었어. 그냥 눈으로 못 보거나 아직 확인하지 않은 것뿐이야. 같이 일하던 아저씨도, 작업반장님도…… 음, 우리 엄마도…… 아마 죽었을 거야.” “야, 인마! 재수 없게 그딴 말 하지 마! 너희 어머니가 왜…….” 보안관이 화를 내자 삼식이가 손을 들어 제지한 뒤 말을 계속했다. “아니야, 보안관. 난 알아. 우리 엄마는 늘 남보다 손해를 보는 여자였거든. 이런 세상에서 살아남았을 리가 없지. 그렇지만 난 오늘 맛있는 것도 먹을 거고, 농담도 하고 웃을 거야. 그래야 힘이 나서 내일도 또 살 수 있으니까……. 내가 내일 하루를 더 살면 내 기억 속에 살아 있는 우리 엄마도 그만큼 더 사는 거야. 제니야…….” “네…….” “나는 내가 죽은 다음에도 내 친구들이 나를 잊지 않고 오래오래 살아주길 바라. 그 기억이 아주 가끔이라도 상관없어. 그게 내가 더 오래 존재할 수 있는 방법이야. 테라나 그…… 제비 같은 아저씨도 마찬가지일 거라고 생각해. 그러니까…….” 삼식이는 음료수 병의 뚜껑을 열고 제니의 바짝 말라붙은 입술 사이에 댔다. “이걸 마시고 힘을 내서 사는 거야. 그게 살아남은 네 의무야.” “네…… 으흑, 맛있어요…… 흐윽.” 음료수를 입에 머금고 제니는 고개를 끄덕이며 울먹였다. 삼식이는 한동안 제니를 꼭 안고 등을 토닥여 주었다. 씨발, 저 개새끼는 진짜 선수다. 얼굴만 밑천 삼아 후리고 다니는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다. 가끔 저렇게 밑도 끝도 없는 소리로 사람의 얼을 쏙 빼놓는다. 꿈의 아이돌이 삼식이의 품에 안겨 울고 있는 꼴을 손 놓고 바라봐야만 하는 유빈과 보안관의 눈에서는 용광로처럼 뜨거운 불꽃이 뿜어져 나왔다. 특히 보안관은 이를 악물고 속으로 몇 번이나 같은 말을 중얼거렸다. 지금이라도 제니에게서 떨어지면 안 아프게 죽여줄게, 삼식이 이 개새끼야……. “고맙습니다. 덕분에 이제 좀 후련해졌어요.” 유빈과 보안관의 인내심이 바닥을 드러내고 난 뒤에도 조금 더 삼식이의 품에 안겨 있던 제니가 평소에 TV에서 보던 것처럼 밝은 얼굴로 인사를 한다. 계속 눈물을 흘린 탓에 눈 주위와 입술이 부어 있는데도 여전히 그림처럼 아름답다. 보안관이 삼식이를 한쪽으로 끌고 가 옆구리를 쥐어 팰 시간을 충분히 주기 위해서 유빈이 제니를 안내했다. “그, 그럼 이 정도 쉬었으니 이제 가볼까요? 이쪽이에요.” 제니가 고개를 끄덕이며 유빈의 한 걸음 뒤에서 걸어온다. 어제까지와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황량한 벌판이지만, 오늘은 사방에 꽃향기가 이는 것 같다. 테라 친위대를 자처해 왔던 유빈의 눈에도 제니는 정말 아찔하리만큼 아름다웠다. “저기 조그만 건물 보여요? 저기가 우리가 숨어 있는 데예요. 그냥 쭉 2, 3분 정도 걸어가면 되고…… 에, 또 뭘 이야기해야 하지? 아, 철책! 아까 지나왔던 철책 기억나죠? 그것처럼 몇 군데 철조망으로 함정을 만들어놓은 데가 있어요. 혹시 공중에 깡통이 대롱대롱 달려 있으면 그건 우리가 만들어놓은 함정이니까 꼭 조심해야 해요.” “저기…… 존댓말 안 하셔도 돼요. 저보다 오빠 맞으시죠? 아, 혹시 제 나이 모르시나요? 저 열아홉 살이에요.” 나이를 모를 리가 있냐, 얼마나 팬이었는데. 올해로 열아홉 살 동갑내기 핑크 펀치. 천칭자리 테라, 사자자리 제니. 실체는 결코 손에 넣을 수 없으니 복제된 정보를 하나라도 더 끌어모으는 것으로 대리 만족을 했다. 음반, 사진에 인터뷰 기사…… 그녀들의 출신지, 출신 학교, 키, 몸무게, 좋아하는 음식과 색깔까지, 모두 달달 외우고 있다. 오빠라는 말에 새삼 부끄러워진 유빈은 눈이 동그래져서 말을 더듬었다. “그…… 암만 그래도.” “친한 동생처럼 취급해 주시는 게 저도 더 편해요.” “그, 그럴까, 그럼?” “네, 오빠. 그럼 이제 가방 같이 들어요. 무거우실 텐데.” 그렇게 말하면서 제니가 손을 뻗어 유빈이 들고 있던 공구 가방의 손잡이 한쪽을 빼앗아 쥔다. 제니의 손이 스치자 유빈은 전기가 통한 것처럼 소스라치게 놀랐다. 일단 제니라는 걸 알고 나자 어제 그녀가 계단에서 자신의 낡아 빠진 옷자락을 쥐고 바들거리던 때와는 느낌이 완전히 달라져 버렸다. “풋!” 유빈이 하도 어색해하자 제니가 픽,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쑥스러움을 달래보려고 유빈도 마주 웃었다. “아쭈? 저 새끼도……. 자기는 테라파라고 그렇게 노래를 하더니 막상 제니 옆에 서니까 그냥 입이 귀에 걸리는구나. 익! 네가 대신 한 대 더 맞아라. 이씨!” 뒤에서 삼식이와 어깨동무를 하고 걸어오면서 생각이 날 때마다 한 대씩 옆구리를 쥐어박던 보안관이 그 꼴을 보고 툴툴거렸다. “하하하! 아파, 보안관. 그만 때려.” “아니, 너는 한참 더 맞아야 해. 제니를 그렇게 꼭 끌어안다니. 아마 내가 평생 때려도 모자랄 거다. 아아, 어쩌지? 제니가 혹시라도 이 일 때문에 너한테 끌리면?” “에이, 그럴 리가 있나? 아까 쟨 그냥 아무거라도 붙잡고 울고 싶었던 것뿐이야.” “정말? 그럼 나한테 미리 말을 해주지!” “아아, 너처럼 흥분해서 숨을 헐떡거리는 사람은 안 돼.” “끄응, 그러면 아무거나가 아니네. 아, 정말 예쁘다. 그치?” 아쉬워하던 보안관은 머리카락을 흩날리며 걸어가는 제니의 뒷모습을 보고 또 감탄했다. 이제 저 종아리를 가까이서 마음껏 볼 수 있다. 살아 있는 동안은. 흠, 삼식이가 콧방귀를 뀐다. “음, 난 잘 모르겠는데? 저렇게 다리가 가늘면 영∼ 보기에 안 좋아서……. 뭐, 하지만 너희 취향은 존중해 줄게. 하여간 여자 볼 줄을 몰라, 늬들은.” 지금 누가 할 말을 하는 거지, 이 새끼는? 보안관은 잠시 주먹을 들어 삼식이의 콧잔등을 칠까 말까 망설였다. 그러다가 아까 삼식이가 했던 이야기가 생각나서 물었다. “삼식아, 내 입에서 정말 똥 꾸렁내 나?” “너 마지막으로 이 닦은 게 언제야?” “기억도 안 나지.” “어젯밤에 뭐 먹었어?” “카레 빵이랑 쉰 삼각김밥이랑 또 뭐…….” “물을 못 마셔서 탈수 현상도 좀 있었지?” “……응.” “그럼 똥 꾸렁내 나겠지?” “……응.” “또 궁금한 거 있어?” “없다, 이 개새끼야.” 보안관이 계속 손을 가리고 자기 입 냄새를 맡아보며 킁킁거리는 동안 앞서 걷던 유빈과 제니는 네 번째 철책 근처에 도착했다. 멀리 시체 더미를 태웠던 곳에서 기분 나쁜 냄새가 바람을 타고 전해진다. 아마 아직도 다 타지는 않았을 것이다. 냄새를 맡고 기억이 새삼스러워진 유빈이 제니에게 말했다. “흙을 좀 뿌려두기는 했지만, 그래도 1층엔 아직 핏자국이 좀 남아 있을 거야, 좀비들 피니까 놀라지 마.” “여기에도 오나요?” “첫날 쫓아왔던 놈들인데, 그건 다 처리했어. 다행히 그 뒤로 이틀 동안은 좀비가 오진 않았고. 하지만 앞으로도 또 오지 말라는 법은 없겠지.” “네.” 제니는 주변을 살피며 조심해서 철조망을 넘었다. 유빈에게는 그 모습이 꽤 영리해 보였다. 무작정 남에게 의지해서 그 뒤만 따라오는 성격은 아닌 것 같다. “신입은 간이 크네.” 뒤따라온 삼식이가 복지 센터 건물을 바라보며 말했다. “우리가 살았는지 어떤지도 모르는데 자고 있나 봐. 걱정이 돼서 밤을 꼴딱 새고 때꾼한 눈으로 창밖만 내다보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오빠들만 있는 게 아니었어요?” 조금 불안한 목소리로 제니가 물었다. “아, 그걸 말 안 했었네. 한 사람 더 있어.” “그분도 오빠들처럼 좋은 사람?” “하하, 뭐, 직접 보고 어떤 애인지 판단해 봐.” 곤란해진 삼식이는 직접 대답하기를 회피했다. 아, 맞다. 그놈도 있었지. 어찌 됐든 함께 괴물들을 죽이며 살아남은 사이인데, 제니의 등장과 함께 신입을 까맣게 잊고 있었단 걸 깨달은 유빈은 조금 미안해졌다. 바닥에 눕혀둔 사다리를 들어 올리고 있을 때, 그들의 이야기 소리를 듣고 깨어난 신입이 창밖으로 고개를 내민 채 울부짖으며 욕설을 퍼부었다. “으허엉, 살아 있었네? 야이 개새끼들아! 이 씨발, 내가 혼자서 얼마나 무서웠는지 알아, 이 개새끼들아? 이 좃같은 새끼들! 뭐한다고 저희들끼리 밤을 새고! 말도 안 해주고! 뒈진 줄 알았잖아! 꺼져! 꺼지라고!” 반갑다고 울다가 돌연 화를 내며 저주를 하다가, 하여튼 난리도 아니다. 눈 밑이 새까만 걸 보니 날밤을 꼬박 새다가 새벽에야 지쳐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홀로 남겨진 어젯밤이 제 딴엔 어지간히 무서웠는지, 신입은 필요 이상으로 격렬한 반응을 보였다. 하도 소리를 질러 대서 세 친구는 귀를 막아가며 사다리를 계단 구멍에 댔다. 제니는 약간 놀란 것 같았다. 비어 있다고만 생각했던 건물에서 웬 못생긴 놈이 불쑥 얼굴을 내밀고 다짜고짜 욕부터 해 대는 꼴을 보면 누구라도 놀랄 일이긴 했다. “저기…… 저분, 괜찮아요?” 중간쯤 올라갔을 때 제니가 뒤에 남아 사다리를 잡고 있던 유빈을 돌아보며 걱정스레 물었다. 유빈은 난처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먼저 올라간 삼식이가 신입을 향해 두 팔을 벌리고 다가가며 밝게 웃었다. “하하하, 신입 엄청 무서웠나 보네? 괜찮아. 이제 엉아들이 까까 얻어 왔으니까 맛있게 먹자아?” “시끄러! 까짓 음료수 몇 병 가지러 가서 뭐한다고 지금 오느냔 말이야. 이 등신 같은…… 응? 너 지금 뭐라고 했어! 까까? 먹을 거? 먹을 걸 구해 왔다고?” 까까라는 말이 성인 남자에게도 이렇게 기쁜 단어가 될 줄이야. 퉁퉁거리던 신입은 삼식이가 먹을 게 담긴 가방을 열자 화색을 띠며 달려들었다. “이 씨발! 이런 게 있었으면서 저번엔 음료수만 처가지고 온 거야? 하여간 돌대가리 새끼들. 아, 빵이다, 빵! 어? 햄! 햄!” 신입은 아예 무릎 사이에 가방을 끼고 앉아서 빵 봉지를 찢어 정신없이 입속으로 쑤셔 넣었다. “나도 어제 저렇게 먹었냐?” 허겁지겁, 게걸스레 먹는 신입의 모습이 어지간히 보기 싫었는지, 보안관이 눈살을 찌푸리면서 삼식이에게 물었다. “아니.” 삼식이가 고개를 저었다. “네가 훨씬 더 급하게 먹었지.” 빵 두 봉지 반을 해치울 때까지 신입은 고개도 들지 않고 계속 씹어 대며 가방을 뒤져 그 속에 뭐가 들었는지를 확인했다. 그러다가 목이 메는지 고개를 들며 물었다. “야, 음료수는 왜 안 가지고 왔…… 커헉! 컥! 컥! 캑! 이거, 누구야? 제, 제니?” 신입이 깜짝 놀라 기침을 해 대는 통에 입안에 들었던 빵 부스러기가 사방으로 튀었다. 꺄∼! 제니가 가벼운 비명을 지르며 보안관의 뒤에 숨는다. 삼식이가 웃으며 소개했다. “인사해, 신입. 누군지 알지? 내 동생이야. 닮았지?” “지, 진짜?” 벌떡 일어나 있던 신입의 얼굴이 복잡해진다. 아, 하긴 삼식이 저 새끼도 어지간히 잘생긴 놈이었지, 그런 생각을 하는 모양이다. “그, 그러고 보니 삼식 씨랑 아주 붕어빵이네. 안녕하세요. 저, 삼식 씨 베프예요. 에이, 삼식 씨. 왜 여태까지 이야기를 안 해줬어?” “풋! 파하하하!” 잠시 침묵하고 있던 세 친구가 일제히 배를 쥐고 웃었다. 무슨 상황인지 이해를 못 하고 있는 신입의 표정이 하도 어리바리해서 조금은 긴장했던 제니까지도 기분 좋게 웃었다. “하하하! 야, 동생일 리가 없잖아! 넌 핑크 펀치 둘 다 외동딸인 것도 모르냐? 크크크, 이 간첩 새끼야! 그리고 넌 베프한테 ‘씨’ 자를 붙이냐? 너희 들었어? 삼식 씨래, 삼식 씨! 하하하! 신입아, 긴장하면 존댓말 쓰는 버릇, 제발 좀 고쳐. 하하.” 싱거운 삼식이는 아주 좋아서 어쩔 줄을 몰라 한다. 신입도 쑥스러운지 머리를 긁적이며 같이 따라 웃었다. 세 친구는 신입에게 제니를 구해 오게 된 사연을 간단하게 정리해서 이야기해 줬다. 그 과정 속에서 제비가 죽었다거나 하는, 제니가 불편할 만한 부분은 아예 생략해 버렸다. “그, 그럼 이제 우리랑 같이 산다고? 제니가? 쭈욱? 계속?” 신입이 콧김을 내뿜으면서 물었다. 다른 사람이 대답하기 전에 제니가 먼저 고개를 꾸벅 숙이고 밝게 대답했다. “앞으로 신세 지게 됐습니다. 잘 부탁드릴게요, 오빠.” “오빠? 어…… 으응, 그래. 나도. 저기, 그런 의미에서 악수라도…….” 신입이 내미는 손을 보안관이 탁, 내려쳤다. “악수는 안 해도 돼! 오늘은 삼식이 하나로 이미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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