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 새로운 날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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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새로운 날 (3)
2021.10.05.
“멈추지 말고 뛰어!”
음료수 가방에 미련을 보이는 삼식이에게 보안관이 빽! 소리를 질렀다. 레이저 와이어로 빈틈을 틀어막아 두기는 했지만, 여기에서 시간을 끌면 안 된다.
혹시라도 더 많은 놈들이 소리를 듣고 합류해 버리면, 그땐 돌이킬 수 없어진다. 삼식이도 다급하게 외쳤다.
“쟤들 지금은 몇 마리 안 돼!”
철컹! 철컹!
철책에 부딪친 놈들이 철망 사이로 이빨을 들이밀며 그릉거리고 있다. 여기까지 따라온 녀석은 모두 네 마리뿐이지만, 후환이 두렵다.
“이 개새끼야! 너까지 뒈지고 싶으냐고?”
보안관이 분통을 터뜨리는 동안에 낑낑거리며 음료수가 든 공구 가방을 들고 달려온 삼식이가 숨을 껄떡거리며 낮게 말했다.
“이게 없어도 우린 죽어.”
젠장! 틀린 말이 아니라서 더는 화를 낼 수도 없다. 아마 신입은 별생각 없이 남아 있던 음료수를 거의 다 먹어 치웠을 것이다. 혼자 복지 센터에서 남겨진 채 밤을 보냈으니 더 폭주했을지도 모른다.
“같이 들어!”
보안관은 삼식이에게서 가방 손잡이 한쪽을 빼앗아 쥐고서 달렸다. 오른손에는 해머, 다른 쪽에는 공구 가방. 무게가 발목을 잡는다.
먹을 것을 메고 있는 삼식이 역시 힘이 들 것이다. 현저하게 느려진 두 사람의 등 뒤에서 철망에 기댄 괴물들이 또 울부짖어 댄다.
“빨리! 빨리! 내가 들게!”
벌써 역사를 가로질러 가 두 번째 철책 건너편에서 여자애와 함께 기다리고 있던 유빈이 손짓을 한다. 뚫려 있는 철책 사이로 가방을 건네고 트랩을 피해 빠져나왔다. 네 사람은 다시 뛰기 시작했다.
산책로를 지나 세 번째 철책을 넘어서 벌판 중간까지 왔을 때, 가방을 안은 채 달리던 유빈이 앞으로 고꾸라졌다. 가방에 호되게 가슴을 찧은 유빈이 엎어져서 헛구역질을 해 댔다.
“괜찮아?”
걱정스레 묻는 삼식이도 숨이 넘어가기 직전이다.
보안관이라고 다를 것이 없었고, 미련하게 지금까지도 줄곧 마스크를 벗지 않은 여자애는 말할 것도 없다. 삼식이는 이마에 손을 짚은 채 돌아서서 경전철역 쪽을 바라보았다.
아까의 네 마리는 여전히 철책을 와득와득 깨물고 레이저 와이어 더미에 얼굴을 들이밀면서 자해를 해 대는 중이다.
그곳만 제외한다면 산책로 전체는 평온해서 마치 아주 좋은 여름날 아침 일찍부터 나들이를 온 것 같은 풍경이었다. 삼식이가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안전해.”
휘이잉∼!
시원한 한줄기 바람이 분다. 목덜미로 흐르는 땀방울이 바람에 날리자 그게 신호라도 되는 것처럼 모두 제자리에 풀썩풀썩 쓰러져 버렸다. 더 이상은 뛸 수 없다. 조금 쉬어야 할 때가 온 것이다.
“하아∼ 하아∼ 보안관, 네 말이 맞았어. 음료수 가방 들고 오느라 너무 힘이 들었네.”
큰대자로 누워 하늘을 보며 삼식이가 말했다. 땅을 짚고 주저앉은 채 번화가 방향을 보고 있던 보안관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런 것보다 먼저 해야 하는 말이 있었다.
옆자리에 쪼그리고 앉아 고개를 푹 숙인 채 숨을 할딱거리는 여자애를 보며 보안관이 무겁게 입을 뗐다.
“오빠 일은…… 미안하게 됐어.”
여자애는 무표정하게 고개를 젓는다. 그러더니 갑자기 감정이 북받치는지 무릎에 얼굴을 대고 울음을 터뜨렸다.
이런 젠장, 차라리 화를 내주면 더 속이 편할 것 같다. 여자애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보안관과 유빈은 얼굴을 감싸 쥐었다.
“아니에요……. 어쩔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
한동안 울고 난 여자애가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어 눈물을 추스르며 말했다. 이상하게 많이 들어본 친숙한 목소리다.
말은 그렇게 했어도 아직 감정이 정리되지 않은 그녀의 어깨가 바르르 떨린다. 난감한 표정으로 입가를 쓸어내린 보안관이 여자애의 어깨를 토닥이며 말했다.
“친오빠같이 해줄 수는 없겠지만, 이제 우리가 널 지켜줄게. 그러니까 너무 무서워하지 마. 너희 오빠가 걱정했던 것처럼 너한테 손대거나 그런 일은 절대로 없어, 내가 장담한다.”
보안관이 없는 말재주로 최선을 다해서 여자애를 다독이고 있을 때, 조금 떨어진 곳으로 걸어가서 어젯밤부터 참아온 소변을 보던 삼식이가 뒤돌아보며 말했다.
“보안관, 너 그런 거 쉽게 장담하지 마. 그리고 친오빠 아니야. 아, 정말 오줌통 터지는 줄 알았네.”
“뭔 소리 하는 거야, 이 새끼야! 지금 농담할 때가…….”
“친오빠 아니지? 맞지?”
삼식이가 발끈하는 보안관의 말을 끊고 약간의 오줌 줄기를 내비치며 여자애에게 물었다. 여자애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이가 없어진 건 보안관이었다.
“그, 그럼 친척이야?”
“아니에요.”
그럼 설마 그 나이 차이를 극복하고 애인? 답답해진 보안관이 숨을 고르며 물어도 되는 질문일까에 대해 잠시 고민하고 있을 때, 지퍼를 올리던 삼식이가 또 입을 열었다.
“보안관, 내가 너라면 그렇게 바짝 붙어서 말하기 전에 치약이라도 좀 먹을 것 같은데.”
“왜 내가 치약을 먹어?”
“사랑하는 사람한테 네 첫 냄새가 똥 꾸렁내 나는 구취로 기억되는 게 싫을 테니까.”
“이런 미친! 내가 얠 언제 봤다고 사랑한다는 거야! 어린애한테 못하는 소리가 없네. 조용히 오줌이나 처싸! 이 삼식이 같은 새끼야!”
미친 새끼들, 숨도 고르기 전에 지랄들도 어지간히 한다. 유빈은 골이 지끈지끈해지는 것 같았다. 허허! 어이가 없다는 듯 고개를 뒤로 젖힌 삼식이가 벌판을 쩌렁쩌렁 울릴 정도로 크게 소리쳤다.
“너, 제니 사랑한다고 천만 번도 넘게 말했었잖아! 이 밥팅아!”
제니? 저 새끼가 지금 뭔 소리야? 여기서 난데없이 웬 제니? 보안관이 눈을 껌뻑거리고 있을 때, 여자애가 일어나 모자를 벗었다.
여태껏 그 속에 감춰져 있던 탐스러운 갈색 머리가 바람에 날리며 어지러이 춤을 춘다. 그리고 그녀는 커다란 마스크를 벗어 들고 깊이 고개를 숙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핑크 펀치의 제니입니다.”
콰콰쾅!
하늘은 맑은데 보안관과 유빈의 머릿속에서는 천둥번개가 휘몰아친다. 어지럽다. 아마 피가 뇌까지 제대로 가지 않는 모양이다.
진짜 제니가 눈앞에 서 있다. 굵은 웨이브가 들어간 긴 갈색 머리, 커다란 눈, 화장기도 없는데 붉은 입술, 송골송골 땀이 맺힌 피부는 눈처럼 희었다.
그 종아리만 슬쩍 보고도 배꼽 아래가 뜨거워졌던 자신이 이제야 이해가 된다.
너무 아름다워서 두 손으로 꽉 잡아 사실인지 확인해 보고 싶다. 아니야, 사실일 리가 없지. 이건 꿈이다. 아니면 죽어서 천국에 도착한 거다.
보안관은 여유 있게 제니의 인사에 화답하려고 했다. 그래, 우리도 잘 부탁해……. 하지만 벌어진 입가에서는 생각하고 있던 말 대신에 바보처럼 침이 주르르 흘러나왔다.
“어으아∼”
츄릅, 보안관은 땟국이 흐르는 팔뚝을 들어 잽싸게 침을 닦아냈다.
인사를 마친 제니는 얌전히 서서 다소 불안해 보이는 눈동자로 가끔씩 세 친구를 살폈다. 침을 질질 흘리던 보안관이 이번엔 제대로 말을 했다.
“그럼…… 그 사람은…….”
“소속사 사장 오빠예요. 연습생 때부터 늘 대표님이나 삼촌이 아니라 오빠라 부르라고 그러셨어요. 그게 나중엔 서로 입에 붙어서…….”
“그, 피, 핑크 펀치가 왜 여기 이런 동네에…….”
“잠실 헬기장이 폐쇄됐다고 해서 계속 올라왔어요. 오빠는 구리까지만 가면 헬리콥터를 탈 수 있다고 믿었었는데, 여기 오니까 벌써 다 꽉 막혔더라고요.”
얼이 빠진 유빈의 입에서 묻지 말아야 할 말이 불쑥 튀어나왔다.
“그럼, 테라는?”
기껏 어느 정도 진정되어 있던 제니는 그 말을 듣자마자 또 눈물을 왈칵 쏟아냈다.
“테라는…… 흐윽, 테라는 그날 물렸어요. 어린애를 도우려다가 붙잡혀서…… 흑, 구하고 싶었는데, 오빠가 이제 걔는 못 살아난다고! 포기하라고! 으흑.”
기억이 되살아난 제니는 입을 가린 채 계속 오열했다.
핑크 펀치가 살던 고급 빌라의 문이 벌컥 열린 것은 사흘 전인 7월 14일, 오전 10시였다. 얼굴이 시뻘겋게 돼서 뛰어든 사장은 평소와 달리 엄청나게 초조해하며 서두르고 있었다.
“에에? 어, 오빠, 무슨 일이에요?”
아무리 비상용 키를 가지고 있다고는 해도 절대 무례를 범하지 않던 사장이 불시에 문을 열어젖히고 이름을 불러대자 곤하게 잠에 빠져 있던 테라와 제니는 깜짝 놀라 깼다.
전날 공연 준비를 위해 새벽 두 시까지 연습을 했던 터라 아직 잠이 부족했다.
“일어나! 빨리! 5분 내로 나가야 돼!”
옷 방 안에 들어가 옷걸이들을 미친 듯이 뒤지면서 사장이 말했다.
“뭐예요? 왜 그래, 무섭게?”
제니가 빨딱 일어나 짜증을 부렸다. 가만히 입을 다물곤 있지만, 테라도 기분이 좋진 않았다. 신인 때라면 몰라도 근 2년간은 이런 취급을 받아본 적이 없다. 벌어다 주는 돈이 얼만데…….
하지만 그녀의 발치에다가 두툼한 후드 티와 한물간 힙합 바지를 집어 던지는 사장의 충혈된 눈을 보니, 불평이나 어리광이 통하지 않을 상황이란 걸 직감할 수 있었다.
허세가 가득하던 말투의 거드름도 깡그리 사라진 채였다.
“시끄러, 빨리 입어! 파파라치 피할 때처럼 마스크도 하고, 모자도 쓰고! 빨리! 지금 전쟁보다 더 큰 난리야! 30분 내로 한강까지 못 가면 우리 다 죽는 거야!”
“왜 이렇게 껴입어요? 더울 텐데.”
“지금 바깥에 무법천지야. 이판사판인 새끼들한테 붙잡혀서 몹쓸 짓 당하고 싶지 않으면 꽁꽁 싸매라고! 야, 빨리 잠옷 벗고 이거 입으라고! 테라야! 아, 차에서, 차에서 갈아입어. 일단 나가야 돼!”
그렇게 성질을 내고 있던 사장의 전화벨이 울렸다.
“어, 나야. 아니, 아니, 30분이면 충분히 가. 걱정하지 마. 응? 뭔 소리야? 두 명이라니? 세 명이라니까! 야이! 핑크 펀치가 둘인데, 그럼 내가 안 탈까? 아이, 그러지 말고 좀 봐줘. 아우님까지 그러면 내가 어떻게 하라고? 나 태울 때까지 헬기 띄우면 안 돼. 알지? 뭐? 물린 사람 있으면 다 못 탄다고? 없어, 그런 사람. 그래, 알았어. 지금 곧바로 차 타고 나갈 거야.”
“내 옷들은요? 구두랑…….”
둘 중 행동이 조금 더 느린 테라가 멍해져서 묻는다. 사장은 챙이 넓은 등산 모자를 푹 씌운 뒤 테라의 손을 잡아끌며 말했다.
“다 버려! 나중에 트럭으로 사 줄게. 베라 왕으로 새로 쫙 뽑아줄 테니까 제발, 빨리! 제니야! 운동화 신어! 운동화!”
지하 주차장에 도착하자 너무 커서 불편하다며 평소엔 거의 끌고 다니지 않는 사장의 캐딜락 에스컬레이드가 눈에 띈다.
주차선도 무시한 채 아무렇게나 세워진 커다란 SUV는 엉망으로 찌그러진 채였다. 어디에서 뭘 박았는지 번쩍거리는 크롬 라디에이터 그릴엔 검붉은 얼룩이 잔뜩 묻어 있었다.
“빨리 타! 어서!”
그때, 그냥 조용히 차에 타서 문을 닫았더라면, 구석에서 울고 있는 아이의 신음 소리를 제니가 듣지 못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어?”
차에 오르려던 제니는 소리가 나는 쪽을 향해 고개를 내밀었다. 어둑한 주차장 한구석에 꼬마 하나가 엎드린 채 훌쩍였다.
“어머, 쟤, 시몬 아니야?”
같은 빌라 302호에 사는 외국인 변호사 부부의 다섯 살배기 아들이다. 파란 눈이 보석같이 예뻐서 몇 번인가 귀여워하며 함께 논 적이 있다.
“정말? 시몬?”
먼저 차에 타서 신발을 벗어놓고 무릎을 끌어안고 있던 테라가 맨발로 뛰어내려 꼬마를 향해 걸어갔다.
“야! 뭐하냐? 빨리 타라고!”
시동을 걸려던 사장이 다급하게 뛰어나와 봤지만, 테라가 더 빨랐다. 테라는 신음하고 있는 시몬을 끌어안아 일으키면서 말했다.
“오빠, 지금 난리라면서요? 얘도 데려가 줘요. 애가 아픈 것 같은데 주변에 아무도 없잖아요. 시몬, 왜 그래? 어디가 아파? 일어∼나!”
그 순간 이후, 몇 분 동안 모든 것이 2배속으로 빠르게 일어난 느낌이다. 사장이 억지로 테라를 잡아끌려고 걸어간다.
시몬이 괴성을 지르며 테라를 벌컥 민다. 넘어진 테라가 겁에 질려 일어나려 할 때, 시몬의 조그만 입이 테라의 발가락을 콱 깨문다.
그리고 피가 튀었다. 비명. 테라의 커다랗고 슬픈 눈, 도와달라고 내미는 손, 끊어진 발가락에서 흘러나오는 피.
테라를 돕기 위해 제니가 문을 열고 나가려 할 때, 사장은 악을 쓰며 억지로 그녀를 밀어 넣고 차를 출발시켰다.
“테라는 끝났어, 이제! 쟨 물렸다고! 씨발, 그러니까 말 좀 듣지!”
분을 못 이긴 사장이 대시 보드를 쾅쾅! 내려친다. 뭐지? 이게 뭐지? 끝났다고? 겁에 질린 제니가 뒤를 돌아볼 때에도 테라는 다친 발을 질질 끌며 자동차를 쫓아왔다.
왜 그때 곧바로 문을 열고 나가서 테라가 내민 손을 붙잡아주지 않았을까? 영원히 함께 살고 같이 죽자고 맹세도 여러 번 했으면서…….
무서웠다. 피가, 시몬의 눈빛이, 잘려 나간 발가락과 죽음의 어두운 그림자가……. 제니는 앞좌석 등받이에 고개를 묻고 울기 시작했다.
옆자리 바닥에는 테라가 벗어두고 간 운동화 한 켤레가 죄책감처럼 남아 있다. 제니는 너무도 비열하고 더러운 겁쟁이 배신자다. 제니는…….
“어이, 그만 생각해.”
상념에 빠져 초점 없이 먼 하늘을 보고 있던 제니의 눈에 대고 삼식이가 손가락을 탁탁, 튕긴다. 제니는 정신을 차리고 눈물을 닦았다. 그러자 삼식이가 음료수병을 내민다.
“마셔. 너 어제 보니 아무것도 안 먹더라.”
제니는 무서운 것을 대하듯 그 음료수를 조심스럽게 쥐었다. 그러고는 말했다.
“제가…… 이런 걸 먹을 자격이 있을까요? 테라도, 오빠도 다 그렇게 돼버렸는데, 저 혼자만 살아서 이런 걸 먹으면서 맛을 느끼고…… 흐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