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새로운 날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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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새로운 날 (2)
2021.10.04.
가방은 삼식이가 메기로 했다. 보안관은 가장 앞에서 무거운 해머를 휘두르며 길을 뚫어야 하기 때문에 몸이 가벼워야 한다.
그 뒤를 따라 삼식이가 제비와 여자애를 데리고 가고, 유빈이 가장 뒤에서 쫓아오는 놈들을 막는다는 계획이었다.
다섯 시 십칠 분이 되었다. 문에 뚫려 있는 조그만 구멍을 통해 바깥쪽을 살피던 보안관이 물었다.
“다들 준비됐어?”
“응. 근데 입구는 어때? 지금도 여전히 아무도 없어?”
“한 마리 올라온 것 같아. 이 앞에서 그렁거리며 서성대는 중이야. 나가면서 문으로 밀어 치고 갈게.”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벽 한쪽에 붙어 서서 흘겨보고 있던 네 사람 중 하나가 말했다.
“나가면 곧바로 문 잠글 거예요. 이제 문 부순다고 협박하지 말아요. 그런 식으로 하면 우리도 더 이상 당하고만 있지는 않을 테니까.”
“그럴게요.”
불필요한 시비를 없애고 싶어서 유빈이 재빨리 대답했다.
그리고 모두 긴장 속에서 몇 분간의 시간을 보냈다. 괴물들이 코너를 돌아 나갈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창문과 시계를 번갈아 살피던 삼식이가 말했다.
“지금 나가야 돼. 여유 시간은 9분 정도.”
삼식이의 이야기가 다 끝나기도 전에 보안관이 자물쇠들을 풀고 문을 확 밀어젖혔다.
그롸악!
콱!
계단참에서 얼쩡거리던 괴물이 쇠문에 맞고 뒤로 밀려난다. 호되게 벽에 부딪힌 뒤 다시 몸을 추스르려는 괴물의 머리통에 보안관이 휘두른 해머가 작렬했다.
와자작!
여러 개의 뼈가 한 번에 부러지는 소리가 계단을 타고 증폭되어, 조용하던 새벽 거리 전체를 울렸다.
“됐어, 뛰어!”
목과 허리가 뒤틀린 채 벽에 기대 쓰러진 괴물의 머리통에 한 번 더 해머를 휘두른 뒤, 보안관이 앞장서서 뛰어 내려갔다.
제비와 여자애가 그 뒤를 따랐다. 그때까지도 창문을 통해 바깥을 살피고 있던 삼식이가 외쳤다.
“왼쪽 입구에 하나 더 있어! 조심해!”
“오케이!”
보안관이 계단 끝에 도달할 때쯤, 괴물이 입구를 확 가로막고 서며 두 손을 뻗었다.
삼식이가 미리 일러준 덕에 준비를 하고 있던 보안관은 달리던 속도를 이용하여 괴물의 두 팔 사이로 해머를 창처럼 찔러 넣었다.
우둑! 해머는 부러져 나간 손가락을 뚫고 날아가 괴물의 아가리를 박살냈다. 괴물은 비명도 제대로 지르지 못한 채 몇 미터나 날아가 나동그라졌다.
“내려와, 이제!”
쓰러진 괴물을 쫓아가 머리통을 내려쳐서 끝낸 보안관이 신호를 보냈다. 계단 중간에서 머뭇거리던 제비와 여자애가 먼저 뛰었다.
헐렁한 힙합 바지 아랫단을 단단히 접어 올려 7부처럼 입고 있는 여자애가 계단 아래로 모습을 드러냈을 때, 희고 매끈한 종아리가 보안관의 눈에 콱 박힌다. 두근! 보안관의 가슴이 번개를 맞은 것처럼 한 번 크게 뛰었다.
‘뭐, 뭐야! 이 다급한 상항에! 허, 나도 참 어지간히 굶주렸나 보군. 얼굴도 아니고 그저 종아리에……. 정신 차려! 이래서야 가까이 오지 말라고 지랄하던 저 제비의 말이 틀린 것도 아니잖아!’
보안관은 어처구니없어하며 머리를 한 번 부르르 떨었다. 여자애의 뒤를 따라 삼식이와 유빈도 거리로 뛰어내렸다.
쾅! 철컥! 그들이 집을 나서자마자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이 급하게 문을 잠갔다. 유빈은 어제 삼식이가 집어 던진 삽부터 다시 주워 들었다. 날 끝에는 방울 장식이나 된 듯 눈알이 하나 눌어붙어 덜렁거린다.
그락! 그롸아아!
편의점 안에서 서성이던 괴물 두 마리가 미친 듯이 소리를 지르며 달려들었다. 한 놈은 하얀 갈비뼈 사이로 폐가 드러난 채였고, 또 다른 놈은 아래턱이 없다.
“저, 저기!”
겁에 질린 제비가 일수 가방으로 얼굴을 가리며 소리를 지른다. 삼식이가 그런 제비의 팔을 잡아끌었다.
“아저씨! 멈춰 서면 안 돼!”
“후아아아!”
숨을 한껏 들이켠 보안관이 해머를 야구 배트처럼 휘둘렀다. 빠가각! 묵직한 쇳덩이가 빠르게 돌아가며 턱 없는 놈의 갈비뼈를 으스러뜨렸다.
하지만 보안관은 여전히 스윙을 멈추지 않았다. 턱 없는 놈이 허리가 꺾인 채 붕 떠서 날아가며 폐가 드러난 놈을 덮친다.
우당탕! 두 마리의 괴물은 한데 얽혀 땅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물론 때린 보안관도 원심력이 더해진 해머의 무게를 못 이기고 넘어질 듯 휘청거렸다.
“제길, 이 공격 방법은 영 꽝인데.”
재빨리 중심을 잡은 보안관은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다시 해머를 집어 들었다. 아래턱이 없는 놈은 허리가 부러져 버려 쉽사리 일어나지 못했지만, 폐가 드러난 놈은 곧바로 달려온다.
그롸악!
보안관은 다시 해머를 들어 올려 힘차게 내려쳤다. 와자작! 옆으로 조금 빗맞은 해머가 괴물의 쇄골과 어깨를 작살냈다. 괴물은 그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앞쪽으로 무릎을 꿇으며 쓰러졌다.
부웅!
다시 한 번 보안관의 해머가 바람을 가르며 돌아간다. 해머는 괴물의 갈비뼈를 엉망으로 으스러뜨린 채 날려 버렸다.
“아이, 씨발. 왜 자꾸 빗맞고 지랄이냐!”
짜증을 부리며 괴물을 쫓아가려는 보안관의 어깨를 유빈이 잡았다.
“그냥 가자! 저건 어차피 이제 못 뛰니까!”
번화가 반대편에서 서성대던 괴물 몇 마리가 벌써 알아채고 괴성을 지르며 쫓아오고 있다.
0.5초 정도 망설이던 보안관이 고개를 끄덕인 뒤 지하 통로 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그 뒤에 바짝 붙어 제비와 여자애, 삼식이와 유빈의 순서로 뛰었다.
으라락! 그롸아악!
덜컹덜컹!
이게 뭐지? 귀를 울리는 낯선 음색에 유빈의 신경이 곤두섰다. 반쯤 차단된 둔한 소리가 번화가 여기저기에서 울려 나오고 있다. 하지만 이건 뒤쪽에서 들려오는 게 아니었다. 이 울부짖음은 위에서…….
위? 소음의 진원지를 뒤늦게 깨달은 유빈이 막 고개를 들어 올리려 할 때, 창문이 깨지는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괴물들의 고성이 몇 배나 증폭되어 울렸다.
와장창! 쨍강!
그롸아아악! 크르륵!
상가 양쪽의 2층과 3층에서 괴물들이 유리창을 깨고 몸을 날린다.
콰앙! 와직! 조금 낮은 곳에서 뛰어내린 놈들은 곧바로 다시 일어나고, 머리부터 3층에서 떨어져 내린 놈들은 그 자리에 고꾸라진 채 버둥댄다. 어제 물린 후 집 안으로 대피했던 놈들이리라.
“으와아악!”
소스라치게 놀라는 제비의 비명. 하필이면 제비의 머리 위로 괴물이 뛰어내렸다.
반사적으로 들어 올린 가방이 날아가며 충격을 반쯤 흡수해 주었지만, 괴물의 허벅지에 어깨를 맞은 제비는 아스팔트 위로 나동그라졌다.
크아악!
다리가 부러진 것도 모르고 있는 괴물은 절뚝거리며 제비를 향해 달려든다.
“히에엑!”
제비는 필사적으로 기어 유빈의 뒤로 숨었다. 유빈은 삽을 쥔 손에 힘을 꽉 주었다.
보안관과 삼식이 역시 앞을 가로막고 뛰어내린 괴물들을 상대하는 중이어서 이쪽을 도와줄 여력은 없다. 삽을 날 쪽으로 세운 뒤, 아가리를 쫙 벌린 괴물의 얼굴을 향해 힘껏 휘둘렀다.
와지끈! 괴물의 코와 이빨이 작살이 났다. 그래도 여전히 괴물은 덮쳐 오는 속도를 줄이지 않는다. 계
속 휘둘러 패는 수밖에 없다. 콰직! 콰직! 두 번을 연속으로 내려치자 괴물이 잠시 중심을 잃고 멈칫한다. 유빈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삽을 고쳐 잡은 다음, 비어 있는 목을 향해 찔러 넣었다.
푸슉!
달려 들어오던 괴물의 속도와 내지르는 속도가 더해지자 날이 서 있지 않은 삽이라도 칼처럼 박혀 들어간다.
하지만 목이 찔린 채여도 괴물의 힘은 유빈보다 더 강했다. 괴물의 몸이 유빈을 덮치며 누른다. 허리가 활처럼 휘어진 유빈은 쓰러지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버텼다.
찌지직, 안전화 바닥이 미끄러지면서 유빈은 컨베이어 벨트 위에 올라선 것처럼 뒤로 밀려났다.
“이 개자식아!”
제비가 욕설과 함께 괴물의 허리춤을 콱, 찼다. 대단한 킥은 아니지만, 그래도 괴물의 중심을 무너뜨리는 데 도움이 되었다.
그사이를 틈타 겨우 허리를 편 유빈은 왼손으로 괴물의 턱을 들어 올리며 오른손에 쥔 삽을 더 깊숙이 쑤셔 넣었다.
이익! 파고든 삽날이 목의 근육을 반 이상 끊었을 때, 유빈은 턱을 잡은 왼손에 체중을 싣고 위로 제꼈다. 와드득! 목이 꺾여 나간 괴물이 비틀대며 쓰러져 버렸다.
“주, 죽었나, 저거?”
혼신의 발차기 후 엎어져 있던 제비가 묻는다. 유빈은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잡아 일으켜 주었다.
“네, 이제 빨리 가요.”
그런데 갑자기 제비가 손을 뿌리치며 뒤쪽으로 뛰기 시작했다. 이해할 수 없어진 유빈이 소리쳤다.
“뭐하는 거야? 어딜 가요?”
“내 가방! 가방에 전화기랑 차 키!”
제비는 별거 아니라는 얼굴로 웃어 보이며 조금 전 괴물에게 부딪쳐 날아간 가방을 가리켰다.
깜짝 놀란 유빈의 머릿속에서 수많은 모범 답안이 휙휙 스쳐 지나간다. ‘아저씨, 그건 내일 다시 가지러 와도 돼요’, ‘위험합니다, 여동생을 생각해요’, ‘눈에 보이지 않게 숨은 좀비들이 더 있을지도 몰라요.
일단 이 자리를 피하는 게 우선이에요’……. 하지만 입에서는 그보다 훨씬 짧고 간명한 메시지만이 겨우 터져 나왔다.
“안 돼! 가지 마!”
얼마나 소리를 빽! 질렀는지 바짝 말라 있던 입 가장자리가 찢어지며 피가 새어 나왔다.
제비는 조금만 기다려 달라는 듯 손을 까딱거리고 허리를 숙여 가방을 집어 들었다. 그에게도 따로 생각이 있었다. 연락처들이 저장된 전화기가 있어야 나중에라도 헬리콥터를 부를 수 있다. 그리고…….
와장창!
바로 그 순간, 노래방 건물 3층에서 뛰어내린 세 마리의 괴물이 제비를 덮쳤다.
우지끈! 허리가 꺾인 제비가 피를 토하며 옆으로 쓰러진다. 괴물들은 사지가 제멋대로 부러져 나가면서도 어떻게든 아가리를 벌려 바닥에 깔린 제비의 얼굴과 팔에 이빨을 박아 넣었다.
“끄아악!”
제비의 비명 소리가 번화가를 울리자 앞서 달리던 여자애가 다급하게 돌아본다. 유빈 역시 이 갑작스럽고 믿을 수 없는 사건에 이성을 잃었다.
“아저씨!”
반사적으로 제비를 구하기 위해 뛰어나가려던 유빈을 삼식이가 꽉 붙들었다.
“안 돼, 유빈아! 이미 늦었어!”
와드드득! 제비의 목덜미가 뜯겨 나가자 허우적거리던 손도 맥없이 툭, 떨어져 내린다.
“오빠!”
오열하는 여자애의 팔목을 잡아끌며 보안관이 소리쳤다.
“가! 가야 돼! 이러면 우리까지 다 죽어! 제발!”
그 말이 통했던 것일까, 여자애는 이내 용케 정신을 추스르고 다시 보안관을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삼식이도 유빈을 끌고 뛰었다. 위층에서 떨어져 내린 괴물들은 부러진 다리를 질질 끌면서도 믿기지 않을 만큼 빠른 속도로 그들의 뒤를 쫓고 있다.
“들어가! 무조건 뛰어!”
여자애를 지하 통로 계단 안으로 밀어 넣은 보안관은 유빈과 삼식이가 도착할 때까지 그 자리에 서서 기다렸다.
가장 바짝 따라온 괴물이 팔을 휘저으며 달린다. 썩어가는 손끝이 삼식이의 찰랑거리는 머리카락을 금방이라도 움켜잡을 듯하다.
“숙여!”
삼식이와 유빈에게 신호를 보낸 보안관이 해머를 치켜든 채 달려왔다.
두 친구가 슬라이딩을 하듯 미끄러지자 원래 머리가 있던 높이로 보안관의 해머가 날아든다. 와작! 뻗쳐 있던 괴물의 팔목이 해머에 맞아 180도 돌아간다. 보안관은 백핸드로 다시 한 번 해머를 휘둘렀다.
우지끈! 이번엔 머리다. 빠르게 회전하는 3.7킬로그램짜리 쇳덩이는 괴물의 턱뼈와 목뼈를 모두 박살 내버렸다. 목이 뒤로 꺾여 버린 괴물의 몸뚱이가 지하 통로 난간에 부딪혀 맥없이 고꾸라진다.
“가자!”
세 친구는 어깨를 나란히 하며 급하게 뛰어 계단을 내려왔다.
앞쪽에서 지하 통로를 따라 달리고 있는 여자애의 모습이 보인다. 제비의 말이 맞았다. 여자애는 꽤나 정제된 폼으로 무릎을 쭉쭉 끌어 올리며 능숙하게 잘 뛰고 있었다.
“자! 짚고 올라가!”
반대편 계단을 올라오며 여자애를 따라잡은 보안관이 철책 앞에서 기마 자세를 취하고 두 손을 모아 앞으로 내밀었다.
여자애는 보안관의 손바닥과 어깨를 차례로 딛고 철책 끝부분을 손으로 잡았다. 보안관이 도와주기 위해 굽히고 있던 허리를 쭉 펴자 어깨에 올라서 있던 여자애가 휘청한다.
“아냐! 아냐! 쟤 떨어질 때 다쳐! 우리가 먼저 가서 받아줘야 해!”
삽을 던져 넣은 유빈이가 몸을 날려 철책을 타고 넘었다. 우당탕! 워낙 급하게 뛰어내리다가 땅바닥에 나뒹굴고 만 유빈의 곁으로 여자애가 사뿐히 착지를 했다.
쉬지 않고 오르막길을 뛰어오르던 여자애는 이 상황에 잠시 벙벙해 있는 유빈에게 돌아와 손까지 내밀어줬다.
쿠와아아아아!
지하 통로를 탁탁 울리는 발소리와 울부짖음이 점점 더 커지고 가까워진다. 보안관과 삼식이도 차례로 철책을 넘어 역 안으로 들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