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새로운 날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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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새로운 날 (1)
2021.10.03.
찰칵, 찰칵, 라이터를 켜는 소리가 나는가 싶더니, 삼식이가 비명을 지르며 튀어나왔다.
“으악! 아으! 으헉∼!”
문밖으로 몸을 내던진 삼식이가 신음을 토해내며 발가락만으로 양말을 벗어 안쪽으로 차 넣었다. 그러고선 곧바로 문을 쾅! 닫은 뒤, 번개처럼 몸을 일으켜 유빈이의 곁으로 뛰어왔다.
“왜에?”
아직도 팔락팔락 가슴이 뛰는 삼식이에게 유빈이 물었다. 삼식이는 생각하기도 싫다는 듯 세차게 도리질을 하며 말했다.
“아이 씨! 화장실 바닥에 전부 고구마 밭이야. 아흐! 아니, 왜 바닥에다가 저렇게 싸놓느냐고! 아우!”
삼식이는 자기 겨드랑이 냄새로 똥 냄새를 지우려는 듯 면 티 팔 부분을 잡아당겨 코를 감싸고 숨을 들이켰다. 동시에 신경질적으로 맨발을 현관 바닥에 북북 문질러 댔다.
“물이 안 나오니까 변기가 막혀서…….”
네 사람 중 하나가 힘없이 말한다. 삼식이는 울상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냥 사이좋게 욕조 안에다가만 싸도 되는데, 왜 하필 바닥에다가!”
“야, 나까지 구역질 나니까 제발 똥 이야기 그만하고 여기나 좀 보라고.”
하필 카레 빵을 먹고 있던 보안관이 짜증을 부려서 삼식이의 소동은 일단락되었다. 진땀을 닦아낸 삼식이는 창틈에 얼굴을 바짝 가져다 붙이고 거리를 가득 채운 좀비들을 눈으로 훑었다.
“저기, 그쪽 사람들 여기 계속 있으면 안 돼요. 우, 우리 음식도 많이 안 남았고, 이제는.”
네 명 중 사내 하나가 용기를 내 말했다. 보안관은 그러겠다고 했다.
“그럼 언제 나가줄 거예요?”
“우리도 빨리 가고 싶어요. 하지만 지금 문 열면 나만 죽는 게 아닐 텐데? 당신네 음식이랑 물 안 건드릴 테니, 숨만 좀 나눠 쉽시다.”
보안관의 말에 안심했는지, 사내는 그제야 주섬주섬 일어나 싱크대 문을 열고 라면 봉지 몇 개와 양초 한 자루를 꺼내 왔다.
라면은 네 개뿐이다. 한 사람이 한 봉지씩 잡더니 촛불 주변에서 소중하게 깨물어 먹는다. 제비에게도, 여자애에게도 나눠 주지 않는다.
먹을 건 챙겨 먹었던 것처럼 말하더니? 보안관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제비를 쳐다보자, 제비는 멋쩍은 듯 웃으며 말했다.
“오늘 오후부터 갑자기 안 팔겠다고 저러는구만. 그전까지는 한 개 십만 원씩에 잘 거래했었는데. 뭐, 괜찮아. 자네 덕에 음료수도 마시고 했으니.”
어이가 없어진 보안관이 쇼핑백에서 빵을 두 개 집어 제비에게 줬다. 그리고 여자애에게도 권했다.
여자애는 고맙다는 표시로 고개만 끄덕이고 도무지 먹을 생각을 않는다. 아까 쥐여 준 음료수도 그대로 들고 있다.
“먹어야 살아. 무서워서 그러는 것 같은데, 억지로라도 먹어요. 그리고 안 더워, 이 마스크? 좀 벗고 음료수라도 마셔. 공기로 감염되는 것 같진 않으니까.”
해는 졌지만 창문까지 닫아놓은 실내는 그야말로 후끈후끈했다. 살아 있는 사람이라도 썩어버릴 것 같은 더위 속에서 잔뜩 감싸고 있는 여자애가 불쌍해 보여 보안관은 손을 내밀었다.
“그 손 안 치워? 이 쌍놈의 새끼!”
빵을 먹고 있던 제비가 갑자기 눈에 심지를 켜고 주먹을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슬쩍 피해서 맞지는 않았지만, 어처구니없고 화가 난다.
“도와주려고 그러는 거잖아! 누가 아저씨 동생 뭘 어쩐대? 나도 관심 없어, 이런 어린애!”
보안관이 빽! 소리를 치자 제비도 지지 않고 맞받아쳤다.
“네 주제에 누굴 도운다고 지랄이야? 어디서 새까만 꼬붕 새끼가! 세상이 뒤집어지니까 눈에 뵈는 게 없어?”
살면서 이렇게 억울한 일 겪기도 쉽지 않다. 살려 달라고 매달려서 사람을 여기 갇히게 만들더니, 소중한 빵과 음료수까지 주니까 사람을 성추행범 취급하며 달려들다니.
아오! 보안관은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진짜, 좀비 세상만 아니면 당장에 끌고 나가서 곤죽을 만들고 싶은 스타일이다.
“오빠…….”
보다 못한 여자애가 말리려 들자 제비가 또 지랄발광을 한다.
“닥치고 가만히 있어! 너까지 오빠 말 안 들을 거야? 응? 안 들을 거냐고? 내가 너희를 위해서 어떻게 했어, 응? 오빠 속 터져서 죽는 거 보고 싶냐? 응?”
하도 난리를 치니 여자애는 다시 고개를 푹 숙이고 입을 다물었다. 아, 씨발. 역시 미친 새끼였어. 내가 괜히 오지랖을 부린 게 잘못이지. 보안관은 똥 밟았다 생각하기로 하고 더 말을 않은 채 물러섰다.
“보안관.”
뒤에서 뭔 소동이 벌어져도 가만히 창문에 코를 박고 서 있던 삼식이가 불렀다.
“응?”
“몇 마리가 또 상주하기 시작했는데, 그걸 제외하면 대체적으로 그룹은 그대로 유지되는 것 같아. 순서까지도 똑같아.”
“다행이네. 시간은 어때? 그 간격도 그대로야? 어디, 나도 좀 보자.”
그렇게 말하면서 창밖을 내다보니 이건 거의 암흑 수준이다.
시커먼 덩어리들이 무리지어 있는 것 때문에 괴물들이 있다는 걸 알 수는 있지만, 얼굴을 분간한다는 건 도저히 말도 안 된다. 보안관은 이상한 것을 보듯 삼식이를 보며 물었다.
“야, 아무것도 안 보이잖아? 뭘 보고 그룹이 그대로라는 둥 순서가 어떻다는 둥 난리야?”
“어, 저게 왜 안 보이지? 저기 오렌지 호프 누나 걸어가잖아?”
“지랄! 그냥 시커먼 덩어리지! 오렌지 호프 같은 소리 하네. 정말로 저게 보여?”
“아하∼! 시력 차이구나! 난 어렸을 때부터 책을 거의 읽지 않아서 눈이 굉장히 좋잖아. 게다가 몇 번이나 같이 잔 여자들을 왜 구분 못 하겠어?”
삼식이가 자랑스럽게 가슴을 쭉 폈다. 한꺼번에 너무 많은 또라이들을 만나는 건 힘들다.
화장실 바닥에 똥 싸놓는 놈들에, 저 제비에, 한여름에 마스크 낀 년이 있지 않나, 게다가 삼식이 이놈까지……. 보안관은 이마의 땀을 닦으며 힘없이 말했다.
“그래, 알았어. 그러면 시간 간격도 같아? 여전히 20분이야?”
“비슷한데, 좀 짧아졌어. 꼬리 쪽이 영 늦게 빠져나가. 이번 간격은 16분. 그런데 참 신기하지? 쟤네들, 왜 저렇게까지 규칙을 지키면서 몰려다니는 걸까?”
라이터를 켜서 시계를 비춰 보며 삼식이가 대답했다. 지금 그런 이유 따위에 관심을 가질 여유는 없다.
보안관에겐 빠져나갈 수 있는 구멍이 있다는 것 정도면 충분하다. 다만, 상주하는 괴물들이 아까의 일곱 마리보다 많다면 그게 좀 버거워질 것이다.
“항상 여기에서 돌아다니는 놈들은 몇 마리야?”
“많아. 하지만 거리 전체에 퍼져 있어서 이 근방부터 지하 통로까지만 따지면 네다섯 마리밖에 안 돼.”
그것도 좋은 소식이다. 보안관은 유빈을 돌아보며 말했다.
“그럼 내일 새벽에 나가면 되겠다. 해가 조금이라도 떠야 뭐가 좀 보이지. 그치, 유빈아?”
어느새 벽에 기댄 채 선잠이 들었던 유빈이 실눈을 뜨고 물었다.
“응? 뭐라고?”
“아니, 아니야. 좀 자둬.”
시계를 보니 아직 여덟 시 반밖에 안 됐다. 하아, 적어도 앞으로 여덟 시간 동안은 꼼짝없이 여기 갇혀 있는 수밖에 없다.
촛불 앞에 모여앉아 딱딱한 라면을 오독오독 씹으며 이쪽을 흘끔거리고 있는 네 사람의 눈빛이 마음에 걸린 보안관과 삼식이는 서로 불침번을 서주기로 했다. 시간은 아주 지루하게 흘러갔다.
“일어나, 보안관.”
가장 늦게까지 보초를 섰던 보안관은 어깨를 흔드는 유빈의 손길에 눈을 떴다.
눈이 뻑뻑하다. 세수를 하고 싶지만, 지금 그건 아주 사치스러운 바람이다. 창문 틈으로 비치는 바깥세상은 어느새 뿌옇게 동이 터 있었다.
“으음, 몇 시야?”
“네 시 반. 이제 슬슬 몸을 깨워놔야 움직일 수 있지.”
유빈이 사탕을 몇 개 쥐여 주었다.
“뭐야, 이게? 음료수 줘.”
“없어. 애초에 음료수는 그렇게 많이 안 담았어. 이거라도 먹으면 갈증이 훨씬 가실 거야.”
“젠장.”
바짝 말라 있는 입에 사탕을 넣어 녹이고 있으려니, 여자애가 쭈뼛거리며 다가와 음료수를 내밀었다.
“저, 이거…….”
전날 보안관이 줬던 거다. 보안관은 깜짝 놀라 손을 저었다.
“응? 아니야. 이건 내가 그쪽한테 준 거니까, 학생이 마셔.”
몇 번을 더 권하던 여자애는 결국 포기하고 돌아가 제비 옆에 앉았다. 예의 그 네 사람은 눈에 띄지 않는다.
아마 자기들끼리 방에 들어가 문을 잠근 채 잠이라도 자는 거겠지. 눈 밑에 다크 서클이 한층 더 짙어진 제비가 또 담배 한 대를 피워 물며 말을 걸었다. 남매가 모두 밤을 꼴딱 샌 모양이다.
“가다니, 저 좀비 밭을 뚫고 어디를 간다는 거야? 자네들, 무슨 비책이라도 있나? 만약 그런 거라면 나도 좀 끼워주게.”
보안관이 제비를 빤히 노려보다가 입을 열었다.
“어이, 아저씨. 한 가지만 좀 해. 도와달라고 하든가, 아니면 어제처럼 치한 취급을 하든가. 그렇게 오락가락하면 듣는 사람이 얼마나 어이없는 줄 알아? 여동생 근처에 가지 말라고 나한테 그 난리를 쳐놓고서, 지금은 또 우리랑 같이 가겠다고? 대체 나 같은 놈을 뭘 믿고 따라온다는 거야?”
머쓱해진 제비가 괜히 헛기침을 하며 일어나 다가와서 귀엣말을 했다.
“큼, 큼, 내가 왜 자네들을 못 믿겠나. 그…… 세상이 워낙에 험하다 보니까 조심하는 거지.”
그러면서 예의 그 네 명이 들어 있는 방을 턱으로 가리켰다. 하긴 라면 하나를 십만 원에 팔던 놈들이니, 여동생의 안전에 민감해졌을지도 모르겠군…….
제비의 행동이 마뜩지 않았지만, 이런 때에 치사하게 굴고 싶지는 않았다. 눈을 마주쳐 친구들의 의향을 살핀 보안관은 이내 고개를 끄덕이고 제비에게 말했다.
“근데 아저씨, 우리랑 가도 당장 먹을 건 지금 보고 있는 게 다야. 또 앞으로 어찌 될지도 모르고. 정말 그래도 괜찮겠어?”
“구박을 버티며 여기 가만히 앉아서 구조되기만 기다리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네. 자네들은 꽤 힘도 있어 보이고. 나중에 세상이 좀 바로잡히고 나면 내가 따로 인사를 좀 하지. 대흥파의 조국남이라고 했나, 자네들이 모시는 분이?”
“아저씨, 엉뚱한 오해하는가 본데, 우리는 깡패 아니야. 그런데 아저씨, 엄청 머리 좋은데? 작업반장님 이름을 한 번 딱 듣고 외웠네?”
“나도 이 자리까지 오를 때엔 다 그만한 재주가 있었기에 그런 것 아니겠나. 사람 보는 눈도 좀 있고. 자네들, 몇 시간 겪어보니 진국이더구만. 우리도 데려가 주게. 부탁하네.”
제비가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한다. 이렇게까지 진지하게 부탁을 하니 받아들여 주는 게 도리인 것 같았다.
어차피 길게 보면 세 친구 역시 서로 도울 수 있는 누군가가 필요한 상황이기도 했다.
제비가 좀 직설적이긴 해도 문을 잠갔던 네 사람보다는 훨씬 신뢰할 수 있다. 보안관은 머리를 긁적이며 계획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다섯 시 십칠 분이 되면 이 앞으로 좀비 떼가 지나갈 거야. 그리고 걔들이 한 6분에 걸쳐서 코너를 빠져나가면 그다음에 우리가 이 문을 열고 나가. 구멍으로 내다봤는데, 아까 계단에 있던 놈들은 지금은 어딘가로 가버린 것 같아. 뭐, 있어도 해치워 버리면 되는 거고. 그다음엔 거리에 상주하는 놈들인데, 이건 다 못 죽여. 시간 여유가 한 10분이나 될 테니까 앞을 막고 달려드는 놈들만 내가 처리하고, 그다음엔 그냥 너무 가깝게 쫓아오는 새끼들을 죽이면 돼. 이게 한…… 아저씨도 있고, 여동생도 있고 하니까 7분 이상 걸릴 거야. 그다음엔 무조건 지하 통로로 들어가서 뛰어. 그리고 철책이 나올 거니까 그걸 넘는 거고. 뭐, 대충 이런 겁니다, 아저씨.”
“먹을 건 어쩌지? 쇼핑백을 들고서는 못 싸워. 버리고 가는 건 절대 안 되는데…….”
제비가 여자애에게 돌아가 계획을 다시 한 번 설명해 주고 있을 때, 유빈이 두 개의 쇼핑백을 들어 보이며 물었다. 가지고 올라왔던 세 개 중 하나는 벌써 거의 다 비워졌다.
“가방을 하나 얻어서 거기에 담으면 되지 않을까? 메고 뛰어야지.”
“주려나? 이 사람들 치사하던데.”
“아, 가방 필요해? 이 가방 주면 되나?”
제비가 대화에 끼어들며 지갑이 들어 있는 일수 가방을 들어 보였다. 유빈이 보기에 라면 몇 봉지도 안 들어갈 것 같다.
“그건 너무 작아요, 아저씨. 적어도 학생 애들 배낭 정도는 되어야 하는데…….”
그때, 안방의 문이 벌컥 열리며 네 사람 중 하나가 걸어 나와 또 다른 방으로 들어갔다.
잠시 뒤적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학생용 가방 하나를 가지고 나왔다. 그는 역신에게 부적을 뿌리듯 그 가방을 바닥에 탁, 내려놓았다. 방 안에서는 남은 세 사람이 이쪽을 노려보고 있다.
“이거 줬으니까…… 이, 이제 정말 더 피해 끼치지 말고 나가줘요. 다시는 오지 말고.”
그의 태도가 기분 좋은 건 아니지만, 어쨌거나 가방은 필요했다.
보안관은 고개를 끄덕이며 쇼핑백에서 스팸 캔 두 개를 꺼내 창틀에 놓아두었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 이 정도면 저 허름한 가방 값으로 충분할 것이다. 빚을 지는 건 싫다.
“역에 두고 온 음료수 가방은 어떻게 할 거야? 이것만 가지고 가면 오늘 또 와야 해. 거기에 내 망원경도 들었는데.”
삼식이가 묻자 유빈이 곧바로 대답했다.
“만약에 쫓기는 상황이라면 그냥 내버려 두고 가고, 혹시 운이 좋아서 여유가 있으면 챙기자. 목숨이 제일 중요하니까.”
그렇게 해서 간략한 계획 회의는 모두 마무리되었다. 제비와 여동생에게는 스트레칭을 하도록 시켰다.
괜히 밖에 나가서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쥐가 나거나 하면 서로 골치 아파진다. 배낭에 음식을 옮겨 담으면서 보안관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물었다.
“난 암만해도 아저씨 동생이 맘에 걸리는데, 우리가 있는 데까지가 2킬로미터 정도야. 근데 여자애가 그만한 거리를 계속 뛸 수 있을까? 중간에 철책도 여러 개 넘어야 하는데.”
제비는 별일 아니라는 투로 대답했다.
“그 점이라면 걱정 말게. 운동은 꾸준히 해온 애니까 달리기는 또래 남자애들에게도 지지 않을 걸세.”
“그 말이 사실이면 좋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