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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9.17.
유빈이 그런 말을 하는 동안에 작업반장이 다가와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물었다.
“야! 유빈아! 황 씨랑 오 씨, 이놈들 아직 안 왔지?”
“네.”
“아니, 이 자식들. 트럭을 가져가서 돌아올 생각을 안 하면 뭘 어쩌라는 거야!”
“전화해 볼까요? 아, 맞다. 우리 전화기도 트럭에 있는데.”
“소용없어! 벌써 내가 열 번도 넘게 걸었는데 먹통이야. 아나, 이 자식들. 오늘은 그냥 넘어가면 안 되겠어. 삼식아! 너 그놈들 자주 가는 가게 알지?”
삼식이는 곤란한 표정으로 유빈의 눈치를 살폈다. 유빈은 살짝 고개를 저어서 말하지 말라는 신호를 주었다. 삼식이가 대답했다.
“무, 무슨 말씀 하시는 건지 모르겠어요. 자주 가는 가게요?”
“네놈들도 똑같아! 한통속이라니까. 야, 그놈들 가끔씩 일하던 중에 사라졌다가 샤워하고 멀끔해져서 나타나는 걸 내가 모를 것 같아?”
“더, 더워서 드, 등목하신 건가 보죠.”
작업반장의 눈을 마주 보지 못한 채 대답하는 삼식이의 눈이 흔들린다. 거짓말도 참 더럽게 못하는 놈이다.
어느 가게에 가는지, 어떤 아가씨를 주로 지명하는지, 자랑해 대는 걸 들어서 알고는 있지만, 유빈도 그저 입을 꾹 다물었다.
그 아저씨들이 그걸 좀 병적으로 좋아하는 것도 사실이고, 배가 고플 때까지 점심을 안 사 오는 건 잘못이 맞지만, 마흔이 되도록 장가도 못 가고 있는 두 노총각을 차마 팔 수가 없었다.
물론 일솜씨도 꽤나 좋아서 이렇게 가끔 일을 빼먹어도 웬만한 일꾼 서넛의 몫을 둘이 해낸다. 거짓말이라는 걸 눈치채 버린 작업반장이 삼식이를 바짝 몰아세웠다.
“야, 빨리 말해! 삼식이, 너도 황 씨가 가끔 데려가서 같이 놀았을 것 아냐! 너도 사내새낀데 그게 싫을 리가…….”
거기까지 말하다가 작업반장은 입을 다물어 버렸다. 삼식이의 얼굴 때문에 그건 논리에 안 맞는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험! 하, 하긴 삼식이 너야 굳이 돈을 내지 않아도 여자들이 줄줄이 달라붙는 놈이니까……. 뭐, 좋아! 니들이 말 안 해줘도 내가 찾으면 되지! 더러워서라도 내가 직접 찾는다!”
큰소리를 친 작업반장은 정말로 자신의 덜덜거리는 중고차를 몰고 사라져 버렸다. 그때가 낮 12시 50분. 그로부터 또 두 시간이 지났다.
어찌 된 영문인지 작업반장까지도 돌아오지 않는다.
***
“배고파∼ 배고파∼ 뒈지게 배고프네∼♪”
보안관 옆에 기대앉은 삼식이가 제멋대로 멜로디를 붙여 배고파 송을 읊조린다. 가사는…… 가사랄 것도 없지만, 그냥 배가 고프다는 게 전부다.
별로 듣고 싶지 않은 노래지만, 아무도 그만 부르라는 소리는 하지 않았다. 그런 말도 하기 귀찮을 만큼 다들 배가 고프고 힘이 없었다.
이제 곧 오겠지 하는 마음으로 조금씩, 조금씩 더 기다렸던 것이 벌써 세 시간 이상 훌쩍 넘어버렸다.
여름의 뜨거운 태양이 가장 높이 솟아 있는 동안 점심도 못 먹고 작업을 하던 네 명은 결국 완전히 탈진해서 그늘에 널브러져 있었다.
열기와 먼지가 피어오르는 비포장도로를 피해 2층으로 올라간 그들은 아이스박스에서 음료수를 꺼내 마시는 것으로 허기를 달래보려 했다. 아직 완전히 지어지지 않은 3층짜리 건물에서 그나마 그 자리가 가장 시원한 곳이다.
“도대체 뭐 좋은 게 있기에 이렇게 한번 간 사람들이 돌아올 줄을 모르냐?”
2층 난간에 턱을 괴고 보안관이 말했다. 번화가가 보이기라도 하면 좀 덜 답답할 텐데, 여기에서 눈에 들어오는 것이라곤 넓은 벌판과 작은 구릉, 공사가 중단된 경전철 역사뿐이다.
몇 달 동안 방치된 경전철 역사는 철골이 삐죽삐죽 튀어나와 있어 흉물스럽기까지 하다.
“젠장, 저거에 딱 가로막혀서 뭐가 보여야 말이지.”
보안관이 투덜대자 삼식이가 무슨 대단한 아이디어라도 떠오른 얼굴로 벌떡 일어나 3층으로 뛰어 올라갔다. 그리고 잠시 후, 그는 당당한 미소를 지으며 돌아왔다.
“짜잔! 나한테는 이게 있었지!”
그러더니 눈가에 뭔가를 가져다 대고 번화가 쪽을 향해 선다. 허접하기 짝이 없는 망원경이다.
엊그제 저녁에 뽑기 기계에서 낑낑대며 만 원을 쓰고 겨우 하나 얻어걸린 상품인데, 아마 문방구에서 사면 절대 3천 원은 넘지 않을 싸구려라고 유빈은 장담할 수 있었다.
“……뭐가 좀 보이냐?”
열심히 배율을 조정하며 고개를 조금씩 돌리고 있는 삼식이에게 보안관이 영혼 없는 말투로 물었다.
“어…… 일단 역 건물이 엄청 가깝게 보이긴 하는데……. 아, 하하, 저런 데에 스패너가 떨어져 있네. 누가 버리고 간 거지? 어우, 더러워, 개똥……. 하지만 아쉽게도 그 너머는 안 보여.”
“당연하잖아. 그건 망원경이지, X―레이 투시경이 아니니까.”
“으음, 분한데.”
눈에서 망원경을 떼며 삼식이가 말했다.
“그래도 이게 아주 쓸데없는 물건은 아니라는 건 증명된 셈이니까.”
그때, 유빈과 보안관이 동시에 아주 단호하게 대답했다.
“아니, 아주 쓸데없는 물건이야. 그냥 갖다 버려. 그딴 거, 아무짝에도 못 써먹어.”
친구들이 놀리든 말든 삼식이는 신경도 쓰지 않고 콧노래를 부르며 자기 망원경에게 ‘원경이’라는 이름까지 붙여줬다.
“무슨 사고라도 났나? 아까 작업반장님…… 너무 흥분해서 차를 몰았지. 응?”
꼬르르륵― 배에서 요란한 소리를 내며 유빈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그렇다고 해도 황 씨 아저씨는 돌아와야 할 것 아냐. 뭐야, 대체……. 어이, 신입. 아까 불러준 번호로 전화 다시 한 번 해볼래?”
보안관의 부탁을 받은 신입이 심드렁하게 전화기를 꺼내 보더니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안테나가 안 떠. 아, 씨발. 그래도 아침에는 어찌어찌 됐는데…… 이런 X같은 변두리! 너희는 용케 이런 데서도 좋다고 산다. 하긴 강남에 안 살아봤으니 촌 동네가 불편하다는 것도 모르겠지.”
신입이 또 재수 없는 소리를 한 무더기 쏟아냈지만,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런 것보다는 전화가 안 된다는 게 훨씬 신경이 쓰이는 문제였다.
“총체적 난국이네. 우리 전화기는 황 씨 아저씨 트럭에 있고, 하나 남은 전화기는 터지지도 않고……. 이 아저씨들, 대체 오늘 왜 이러는 거지? 아, 미치겠다. 배는 점점 고파오는데.”
유빈이 머리를 감싸 쥐며 괴로워하자 신입이 물었다.
“근데 도대체 이 건물 뭐야? 주변에 아무것도 없는 곳에다가 이렇게 커다란 3층 건물을 떡하니 세워서 이게 팔리기나 해?”
“노인 복지 센터라고 했지, 아마?”
확실하지 않은지 유빈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답했다. 신입이 어처구니없어하며 다시 물었다.
“아니, 주변에 사람이 살아야 노인도 있는 거지, 여기를 노인네들이 어떻게 찾아와? 노인네들 걸음으로 저 아래 동네에서 여기까지 오르막길을 올라오려면 1박 2일도 걸리겠다.”
“아, 원래 계획은 그런 게 아니었다고 들었어. 저기 저 벌판 같은 데 보이지?”
유빈은 보안관이 턱을 괸 채 바라보고 있는 방향을 가리켰다. 철책이 쳐진 너른 잔디밭이 있고, 그 너머가 경전철역이다.
“거기가 원래는 다 뉴타운 들어서서 아파트 지을 자리였거든. 총 8천 세대라던가…… 하여간 그랬어. 그러니까 거기에 맞춰서 근처에 경전철역이랑 복지 시설도 같이 만든 거지. 근데 땅을 다 갈아엎고 나니까 경기가 이 모양이라서 채산성이 없다고 다시 백지화했나 봐. 그 덕에 이 건물 하나만 덜렁 외진 곳에 세워진 꼴이 돼버린 거지.”
“백지화가 될 거면 다 백지화를 하지, 이 건물은 왜 계속 짓는데?”
“아파트는 개인 돈으로 짓는 거지만, 이건 공무 예산이거든. 한번 집행하기로 했으니 돌리기가 더 어려웠겠지. 이미 납품을 다 한 물건도 있고, 또 계약한 업체도 있고 그러니까 이번 연도 예산분까지는 일단 지어놓고 철조망으로 둘러서 보호하겠다는 거야. 웃기지?”
열심히 설명을 해주고 있는 유빈의 등을 툭툭, 두드리며 보안관이 말했다.
“쟤 실은 별로 궁금하지도 않아. 꼬치꼬치 다 이야기해 주느라 힘 빼지 말고, 우리 그냥 밥 먹으러 가자. 도저히 안 되겠어. 이러다가 더위 먹고 쓰러질라.”
“그래, 가자! 냉면 먹어야지.”
삼식이가 힘차게 손을 들며 찬성을 표시했고, 유빈도 그러자고 하며 순순히 일어났다.
“뭘 타고 가려고? 차가 없잖아?”
여전히 벽에 기대 축 늘어진 채 신입이 물었다. 유빈이 대답해 줬다.
“당연히 걸어가야지.”
“걸어? 이런 뙤약볕에? 어휴, 얼마나 가야 하는데?”
“음, 길이 두 개가 있는데, 그냥 저 도로 따라서 죽 걸어가면 한 50분? 그리고 저기 철책 넘어서 역을 가로질러 가면 10분.”
신입은 유빈이 가리킨 방향으로 시선을 돌려봤다.
2.5미터 높이의 철책을 넘고, 넓은 벌판을 걸어가서 또 철책을 넘고, 짓다 만 플랫폼 위로 기어 올라가서……. 생각만 해도 귀찮고 힘들다. 신입은 아예 벌렁 누워버리며 남의 일인 것처럼 말했다.
“아휴, 난 됐어. 그냥 여기 누워 있을게. 너희가 사다 줘. 햄버거, 햄버거면 되겠다. 콜라도 2리터짜리 하나.”
싸가지 없는 말투에 발끈한 보안관이 뭐라고 한마디 하려는 걸 유빈이 달랬다. 간이로 만들어놓은 허술한 계단을 걸어 내려갈 때, 뒤쪽에서 신입이 한마디를 더 덧붙인다.
“야, 심부름하기 싫다고 괜히 햄버거에 침 뱉어 오고 그러면 안 된다?”
“너는 그렇게 하고 사나 보지?”
보안관이 쏘아주자 신입은 못 들은 척 입을 다물었다. 삐그덕, 나무로 대충 틀을 짜고 위에 철판 하나만 얹어둔 임시 계단을 밟고 내려가다 보안관이 잊고 있었다는 듯 말했다.
“삼식아, 장갑은 벗고 가자. 노가다인 거 티 낼 필요는 없잖아.”
삼식이는 고개를 저은 뒤 마이클 잭슨처럼 장갑을 낀 손을 흔들어 보였다.
“이거 있으면 철책 넘어갈 때 편해. 그리고 이 장갑, 꽤 멋있는데?”
깨끗이 포기한 보안관은 더 이상 잔소리하지 않았다.
그들이 택한 길은 당연히 10분 코스다. 하루에 자동차 두 대도 지나지 않는 4차선 도로를 지나 철책을 넘는다.
2.5미터 높이 정도는 가볍다. 엿차∼! 도움닫기를 조금 한 뒤 뛰어올라서 위쪽을 짚고, 철망을 한 번 발로 찬 다음 옆으로 몸을 돌려 넘으면 된다.
풀썩∼! 관리를 받지 못해 봄 동안 무성하게 자란 풀들이 맞아주어서 착지할 때도 충격이 덜하다.
투투투투∼ 위이잉∼
그들이 벌판을 걸어가고 있을 때, 머리 위에서 또 헬기가 지나간다. 경로는 똑같이 남쪽이지만, 이번엔 군용이 아니다. 꼬리를 반짝이며 흰색 헬기가 사라져 가자 삼식이가 아쉬운 듯 혼잣말을 했다.
“우리도 저런 거 하나 사두면 나중에 진우 면회 갈 때 편할 텐데.”
“사두면? 어이쿠, 출세 참 빠르시네요, 당장 중고차도 없는데!”
유빈이 대꾸했다.
“자동차는커녕 오토바이도 없지.”
보안관도 한마디 보탰다.
“하지만 우리에겐 망원경이 있잖아.”
삼식이도 지지 않았다. 말도 안 되는 논리지만, 긍정적인 힘만은 세계 최고다.
8분가량 걸어가자 또 철책이 나온다. 그걸 넘어가면 강이라 부르기엔 좀 쑥스럽고, 개천보다는 넓은 물길이 흐른다. 뉴타운답게 물길 주변을 따라 산책로도 조성되어 있다.
원래 계획했을 때와 달리 지금은 그냥 동네 노인 몇몇이 대낮부터 자리를 펴고 앉아 술을 마시는 곳으로 변해 버렸지만…….
“애들아, 저거 봐. 뽕짝 아저씨 오늘 여자 꼬셨다. 오호, 그 아저씨, 여자 보는 안목은 좀 있는데?”
삼식이가 가리킨 방향에는 뽕짝 아저씨가 웬 할머니 둘을 옆에 앉히고 소주를 주거니 받거니 하고 있었다. 신나는 메들리가 여기까지 울려온다.
‘뽕짝 아저씨’는 늘 가방에 트로트 라디오인지 뭔지를 넣고 산책로 부근을 배회하는 동네 할아버지에게 삼식이가 붙여준 별명이다.
스피커로 틀어놓은 노랫소리가 얼마나 큰지 뽕짝 아저씨가 부근을 지나면 귀가 쩌렁쩌렁 울린다.
“저놈의 스피커는 성능도 좋아. 도대체 무슨 배터리를 쓰는 걸까? 아침부터 밤중까지 잠시도 쉬지 않고 종일 틀어 대고 다니던데. 어휴, 하여간 민폐야.”
눈살을 찌푸리면서도 보안관이 호기심을 보였다.
“며칠 전에 보니까 이따만 한 보조 배터리를 끼웠더라. 그래서 저걸 주머니에 못 넣고 따로 가방에 담아서 다니나 봐.”
삼식이가 자기 주먹보다 큰 사이즈를 그려 보이며 대답해 줬다. 하여튼 영 쓸데없는 일은 잘도 안다.
성적 흥분과 술기운 때문에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뽕짝 아저씨를 뒤로하고, 세 사람은 경전철 역사와 이어진 구름다리를 건넜다. 그리고 거기에서 그날의 첫 징조를 만났다.